2015년 4월호

해외 비자금 신고 ‘불처벌’이 ‘증세 없는 복지’ 묘책?

국세청 vs 검찰청 조세전쟁

  • 이정훈 편집위원 | hoon@donga.com

    입력2015-03-23 15: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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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금·과태료만 추징하자”(국세청)
    • “소득원 추적, 형사처벌해야”(검찰청)
    • ‘택스 헤이븐’ 무력화하려는 CIA 비밀공작
    • 유럽 15개국에서 실시하는 ‘앰네스티 조치’
    • 해외 은닉 880조 유입 시 단숨에 세수적자 해소
    올해 초 연말정산 때 적잖은 봉급생활자들은 속이 쓰렸다. 과거엔 돌려받았는데, 올해는 토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증세 없이 복지를 강화하겠다던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 이것이었느냐”는 지적이 쏟아졌다. “유리지갑을 가진 월급쟁이를 지하경제의 구성원으로 보겠다는 것이냐”란 비난도 터져 나왔다.

    여론이 나빠지자 정부와 국회는 연말정산 추가 납부금을 분납할 수 있도록 소득세법을 개정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가. 세금이 기대한 만큼 걷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금 탈루자가 많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다. 이제는 한국도 상당히 투명해졌기에, 재주껏 절세(節稅)는 해도 탈세(脫稅)하기는 어렵다. 탈세자가 적은데도 세수(稅收)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는 것은 경제가 나빠졌다는 뜻이다.

    봉급생활자나 영세한 자영업자가 내는 세금은 국가 차원에서 보면 비중이 크지 않다. 큰 세금은 대기업이 법인세 등으로 내줘야 한다. 경기가 좋으면 대기업은 이익을 많이 내고 세금도 많이 납부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기업이 내는 세금이 줄어든다. 그러면 정부는 경기 침체로 고용까지 불안해진 봉급생활자로부터 더 많은 소득세를 뽑아내려 그들의 유리지갑을 뒤지는 ‘치사한’ 조치를 하게 된다.

    2월 3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이에 대해 “증세 없는 복지는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고 토로하고 협조를 구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바로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증세 없는 복지를 실현하겠다”며 김 대표의 의견을 ‘콱’ 막아버렸다. 박 대통령은 어떤 묘안이 있기에 급제동을 건 것일까.

    증세와 복지 문제는 우리만 당면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같은 문제에 직면했지만 잘 돌파한 나라들이 있다. 그 나라들이 ‘증세 없는 복지 강화’와 ‘증세 없는 경제 부흥’을 이룩한 비결을 알아보자.



    해외 비자금 신고 ‘불처벌’이 ‘증세 없는 복지’ 묘책?

    2월 9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증세 없는 복지 공약 이행을 거듭 강조한 박근혜 대통령. 앰네스티 조치의 시행 여부가 그의 공약 이행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택스 헤이븐(Tax Haven)

    국세청은 강력히 부인하겠지만 한국은 세율이 매우 높은 나라에 속한다. 그런데도 무역고 1조 달러를 돌파해 세계 14위의 경제규모를 갖춘 것은 막대한 세금을 부담해온 기업들의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이다. 제조업이나 금융업, 관광업, 농업 등을 발전시켜 부를 일군 나라는 대부분 고율의 세금을 부과해 복지 정책과 부흥 정책을 펼친다.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한국 등이 여기에 속한다.

    쿠웨이트나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자원이 많아 초저율의 세금을 부과하고도 국민에게 많은 혜택을 준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렇다 할 산업과 자원이 없는데도 잘사는 나라가 있다. 스위스가 대표적이다. 지금의 스위스는 알프스라는 관광자원이 있어 잘살지만, 관광이 보편화하지 못한 옛날에는 산맥에 둘러싸인 벽지(僻地)국가에 불과했다.

    유럽 대륙의 양대 강국은 독일과 프랑스인데, 1870년 두 나라가 전쟁에 들어갔다(보불전쟁). 전쟁의 뒤끝은 약탈로 이어지고, 가진 자들은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고 첫 번째 약탈 대상이 된다. 그러나 더 당하는 것은 ‘지키는 힘’이 약한 서민이다. 그래서 빈부를 막론하고 재산을 숨기게 된다. 스위스는 그 점에 주목해 ‘박해받는 이들의 재산을 지켜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만들어낸 것이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 제도다. 이를 위해서 무기명(無記名) 방식을 도입했다. 계좌 개설자가 신분을 밝히지 않고 은행과 자신만 아는 암호로 계좌를 만들 수 있게 한 것이다. 대신 이자는 거의 지급하지 않는다. 스위스는 이렇게 모은 돈으로 ‘돈놀이’를 해, 먹고살아보려고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평생 모은 돈을 전쟁이나 정쟁(政爭)으로 하루아침에 잃는 것을 본 이들이 앞다퉈 스위스 은행에 돈을 맡긴 것이다. 덕분에 경제가 좋아지자 스위스는 1815년부터 주장해온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강화했다. 싸우는 양쪽으로부터 모두 돈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등 이렇다 할 산업과 자원이 없는 소국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와 비슷한 제도를 만든 나라가 ‘자본주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세계 도처에 식민지와 보호령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그마한 식민지와 보호령은 본토인 영국이나 큰 식민지와 달리 먹고살 것이 적었다. 그래서 스위스를 따라 돈을 유치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우리말로는 조세피난처, 영어로는 ‘택스 헤이븐(Tax Haven·조세피난처)’제도를 만든 것. 그곳에서는 형식적으로 회사를 세울 수 있다. 내야 하는 세금(법인세)도 아주 적다. 그러니 사무실도 없는 ‘서류상의 회사(paper company)’가 많이 생겨났다. 물론 무기명 통장 제도도 도입했다.

    스위스 모델, 싱가포르 모델

    택스 헤이븐으로 큰 성공을 거둔 곳으로는 싱가포르와 홍콩이 꼽힌다. 말레이시아는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그때 말레이시아의 중심이 싱가포르였다. 당시 장사를 잘하는 중국인들이 싱가포르로 몰려왔기에, 싱가포르는 ‘화교(華僑)의 천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은 대부분의 식민지에서 철수했다.

    1957년 말레이시아도 독립했다. 그리고 2년 뒤 ‘말레이시아의 눈’인 싱가포르가 자치를 주장했다. 화교들은 ‘못사는’ 말레이인(人)들이 권력을 잡으면, 부(富)를 가진 그들을 탄압할 것으로 보고 ‘갈라서기’를 결심한 것.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를 주저앉히려 했다. 그러자 인구와 무력이 절대적으로 약한 화교들이 영국의 보호령으로 되돌아간다는 결정을 했다.

    당시 화교 세력의 중심 인물이 리콴유(李光耀) 총리다. 리 총리는 싱가포르에서는 누구든 회사(법인)를 세울 수 있게 하고, 그 회사에 초저율의 세금을 부과했다. 일종의 박리다매(薄利多賣) 전술을 구사한 것인데, 이것이 대성공을 거둬 싱가포르를 발전시킬 재원을 확보하게 된다. 그리하여 말레이시아의 공격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기자 1965년 영국보호령에서 벗어나 다시 독립했다.

    싱가포르는 천혜의 항구를 갖고 있어 무역거래 자금이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차츰 싱가포르는 금융의 중심지가 돼갔다. 물류와 자금이 늘어나면 유동인구도 많아진다. 싱가포르의 창이 공항은 곧 동남아의 허브 공항이 됐다. 그러한 물류가 서비스업을 발전시켜 또 다른 부를 창출했다.

    리콴유 정부는 그 자금으로 복지정책을 펼쳤다. 어느 나라든 서민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살 만한 집’ 마련이다. 돈 많은 싱가포르 정부는 82~99㎡(25~30평)대 아파트(HDB)를 많이 지어, 거의 모든 서민에게 영구 임대하는 형식으로 제공했다. 학교 시설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무상에 가깝게 교육받을 수 있게 했다. 교육의 질도 높였다.

    그리고 강력한 치안제도를 구축해 범죄를 막았다. 그러하니 싱가포르에서는 소요가 일어날 일이 없다. 사회가 안정되고 세율이 낮으면 외국 기업이 많이 들어오게 마련이다. 자연히 싱가포르는 번영을 이어갔다. 싱가포르는 영국이 만들어준 택스 헤이븐 체제 덕분에 독립을 유지하고 발전했으니 이 체제의 신봉자를 자처한다.

    9·11테러와 反 택스 헤이븐

    이러한 싱가포르를 미국이 못마땅해 했다. 국제범죄와 관련된 돈이 ‘자유로운’ 싱가포르에 들어가 세탁 과정을 거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은 가장 지독한 국제범죄인 테러를 당했다. 미국 정부는 바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테러와 관련된 자금 유통을 막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택스 헤이븐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들을 쪼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어난 것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방코델타아시아(BDA)’ 사건이다(2005). 마카오도 택스 헤이븐 중 하나인데, 그곳의 은행인 BDA가 북한이 만든 위조달러를 유통해주다가 미국 재무부에 발각됐다. 마카오는 힘이 약한 데다 BDA의 불법 행위가 명백하게 드러났으니 미국의 압력에 금방 손을 들어버렸다. BDA는 폐쇄되고 이 은행이 갖고 있던 북한 자금에 관한 자료는 모두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은 원조 택스 헤이븐인 스위스도 압박했다. 스위스는 저항했지만, 소련 붕괴 후 절대 강자가 된 미국을 당해낼 수 없었다. 택스 헤이븐에 들어간 돈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 미국은 스위스의 최대 은행인 UBS를 상대로 ‘탈세를 방조한다’는 혐의로 형사소송을 걸었다.

    패소 가능성이 높아지자 UBS는 이 소송 철회를 조건으로 자기 은행에 계좌를 만든 미국인 명단을 미국 국세청에 넘겼다(2009). 이후 스위스는 스위스 은행에 계좌를 만들려는 모든 이의 신분을 확인해 미국인이 있으면, 미 국세청에 그 이름을 통보하기로 미국과 약속했다. 이어 다른 나라와도 유사한 협정을 맺었다. 스위스 비밀계좌제도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스위스와 미국이 맺은 이 협정이 바로‘조세정보교환협정’이다. 미국은 많은 나라들이 서로 협정을 맺게 했다. 이 협정을 맺은 나라들은, 상대국 국민이 자국 은행에 계좌를 만들면 바로 그 사실을 상대국에 통보한다. 한국도 많은 나라와 이 협정을 맺었다. 그러자 택스 헤이븐에 국가 경제를 다 걸어놓은 소국들이 위기를 맞게 되었다.

    싱가포르와 홍콩 스위스는 치안이 좋고 미국에 협조하기에, 괜찮은 택스 헤이븐에 속한다. 그러나 영국령 소국에 만들어진 택스 헤이븐들은 부실했다. 더 못한 곳도 있다. 앵귈라 앤티가 바부다 아루바 등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제3세계 소국과 다른 식민지에 뒤늦게 만들어진 택스 헤이븐이 그것들이다.

    조세피난처 와해 공작

    지금 중동에서는 테러 세력인 IS(이슬람국가)가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이들의 위협 앞에 놓인 중동국가들과 미국이 품은 의문은 ‘IS가 어떤 자금으로무기를 마련했을까’이다. 이는 아직도 검은 돈이 유통되는 경로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 경로는 택스 헤이븐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CIA 등 정보기관을 동원해 그곳에 어떤 자금이 들어오는지 추적했다. 이를 위해 CIA는 그곳에 서류상 회사와 비밀계좌를 만들었다. 그리고 파악한 사실을 교묘한 방법으로 밝혔다. 2013년 4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CIA도 조세피난처를 이용한다’고 폭로하며, 조세피난처에 비밀계좌를 개설한 세계 각국 사람의 명단을 공개했다.

    그 명단에 중국 시진핑 주석의 일가가 들어 있었다. 한국의 유력 인사들도 있었다. 그러자 각 나라에서는 그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일었다. 정보의 세계를 아는 이들은 “그러한 정보는 CIA가 간접적으로 ICIJ에 제공했다고 보아야 한다. CIA도 비밀계좌를 개설했다고 해야, 정보를 입수한 ICIJ가 흥분해서 크게 보도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폭로돼야 CIA가 블랙 머니를 추적한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조세피난처 국가들도 다른 나라들과 조세정보교환협정을 맺게 했다. 2, 3년이 지나면 거의 모든 조세피난처가 세계 여러 나라와 이 협정을 맺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 미국에 맞설 수 있는 나라의 보호를 받는 택스 헤이븐이 아니면 더 이상 검은 돈을 숨겨주기 어려워진 것이다.

    신고하면 형사처벌 안 해

    미국은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기에 이런 식으로 조세피난처를 뒤엎어왔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은 그런 힘은 없기에 교묘한 수를 찾아냈다. 검은 돈에 대한 추적은 미국에 맡기고, 이익을 챙기기로 한 것.

    지금 한국이 그러하듯 과거 유럽 국가들도 불황으로 세금이 계획대로 걷히지 않아 고민했다. 그러다가 자국인들이 스위스 은행에 넣어 두었을 돈에 주목했다. 그 돈은 커미션 리베이트 킥백(kick back) 뇌물 등으로 번 것일 테니 신고하지 않은 소득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금주만 찾아내면 형사처벌함과 동시에 탈루 금액에 따른 과태료나 벌금, 누진으로 가산될 소득세를 징수해 부족한 세수를 채울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돈은 ‘스위스 것’에서 ‘그 나라의 것’으로 전환되니, 그 나라는 외환보유고가 늘게 된다. 보유한 외화가 많아지면 신용등급이 올라가니 그 나라의 경제는 좋아진다. 이런 까닭에 불처벌을 조건으로 자진신고를 유도해 세수를 채워보려고 했는데, 이것이 9·11 이후 택스 헤이븐을 압박하는 미국의 조치 덕에 큰 성과를 보게 됐다.

    미국의 압박을 받은 택스 헤이븐들이 자국과 조세정보교환협정을 맺어 자국에 ‘계좌 개설자 명단’을 통보하면, 예금주는 명예를 지켜야 하는 인생 말년에 세금을 추징당하고 ‘콩밥’을 먹을 수 있다. 유럽 15개국은 택스 헤이븐에 돈을 넣어둔 예금주들의 이러한 두려움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기간을 정해놓고 그 기간 안에 해외에 있는 계좌를 신고하면, 세금은 추징하지만 형사처벌은 면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불(不)처벌을 전제로 세금 환수 방안을 시도한 것인데, 이를 ‘앰네스티 조치(Amnesty Scheme)’라고 한다. 스위스와 국경을 맞댄 이탈리아는 2001년 이 제도를 처음 시행했다. 그리고 2009년 세 번째로 단행해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 이탈리아는 2010년의 세수 적자가 37억 유로(약 5.5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를 추진했는데, 자진 신고한 금액이 무려 1000억 유로(약 150조 원)에 달했다.

    그 덕분에 이탈리아 국세청은 과태료와 벌금 세금으로 50억 유로(약 7.5조 원)를 확보해 단숨에 재정적자를 해소했다. 이탈리아의 전체 외환보유액도 1000억 유로 증가하는 성과를 올렸다.

    한발 늦게 이를 따라 한 나라가 김대중 정부 때부터 저성장을 반복하며 ‘일본식 장기 불황’에 접어든 한국이다. 지난해 한국의 세수 적자는 11조 원인데, 3년 연속 세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해외에 있는 한국 자산에 대한 과세를 규정한 ‘국제 조세 조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그러나 조세정보교환협정을 맺은 나라가 없었기에 이 법은 유명무실했다.

    한국 기업들은 상당한 돈을 조세피난처에 넣어두고 있었다. 그에 대한 통계는 누구도 잡지 못하는데, 2012년 영국의 ‘조세정의네트워크’라는 단체가 “한국 기업이 조세피난처에 넣어둔 돈은 7790억 달러(당시 환율로는 약 880조 원)로,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라고 밝혀 이목을 끌었다(이 단체도 CIA로부터 정보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880조 원은 대한민국 국가 예산의 2.5배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이 돈이 들어온다면 한국은 단숨에 불황을 극복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니 국세청은 불처벌을 전제로 한 앰네스티 조치를 시행하자고 했으나, 검찰청에서 반대 의견이 나왔다. 검찰은 “무조건 사면은 안 된다. 불법으로 외화를 도피시킨 것은 횡령이나 배임을 한 것이니, 그에 대해서는 징벌을 가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해외에 숨은 880조

    합의에 실패한 국세청은 그러나 미국의 압박으로 조세피난처가 불안해지는 상태를 활용해 ‘불처벌’을 명문화하지 않은 앰네스티 조치를 적용해보기로 했다. 2010년 ‘국제 조세 조정에 관한 법률’에 ‘해외에 있는 금융계좌는 신고해야 한다. 신고하지 않고 갖고 있다가 적발되면 처벌한다’는 조항을 삽입한 것이다. 이 조항은 2011년 발효됐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2011년 11조, 2012년 19조, 2013년 23조, 2014년 24조, 도합 77조 원이 신고된 것이다. 이 신고분에 대해 국세청은 세금과 과태료만 추징하고 그 소득원이 어디인지는 추적하지 않았다. 그러니 위법을 해서 그 돈을 벌었다는 시비가 나올 수 없어 검찰도 수사하지 않았다. 지난 4년간 한국은 조용히 앰네스티 조치를 시행한 셈이다.

    그런데 지난해 말 참여연대 출신인 박원석 정의당 의원이 이 법에 ‘자진신고에 대한 특례’ 조항(38조)을 넣는 개정을 시도해 통과시켰다. 이 조항은 올해부터 2년간(2016년 연말까지) 국외에 있는 재산과 소득을 자진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016년 말은 박 대통령의 임기말에 해당한다. 그러나 ‘불처벌’에 대한 내용은 없는데, 한다면 대통령령 등에 넣으면 된다. 정부는 그러한 시행령은 만들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과거 4년간 자진 신고한 계좌를 추적해 처벌하지 않았으니 앞으로 2년간 자진신고한 계좌에 대해서도 처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야 형평에 맞기 때문이다. 소식통들은 이렇게 말한다.

    “국제정세의 변화로 택스 헤이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하니, 이 법이 규정한 2년 사이에 880조 원으로 추정되는 해외 자산의 상당 부분이 자진 신고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십조에서 수백조 원의 세금이 더 걷혀, 지난 3년간 누적된 세수 적자는 단숨에 해소된다. 박 대통령이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증세 없이 복지를 강화하고 경제를 부흥시키겠다고 한 근거는 여기에 있다. 뜻밖에도 좌파인 정의당 의원이 박대통령을 크게 도와주게 되었다.”

    그런데 이 기대감에 ‘빨간불’이 켜졌다.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비리 수사에 착수한 검찰이 원전 비리, 방산 비리에 이어 대기업 비자금 쪽으로 수사를 확대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수사를 받게 된 기업의 모든 계좌를 뒤지는데 자진신고해 세금을 납부한 해외 계좌도 그 대상이 된다. 이 조사에서 그것이 리베이트나 커미션, 뇌물 등으로 확보한 것이 확인되면 바로 처벌할 수 있다.

    대통령은 공약을 이행할 것인가

    이렇게 되면 해당 기업은 “우리만 처벌하는 것은 불공정하다. 이미 신고된 77조 원과 앞으로 신고될 모든 돈을 조사해야 한다”고 반발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검찰이 처벌을 강행하면 자진신고를 하려던 기업들은 방향을 바꿔 돈을 더 깊이 숨길 수 있다.

    IS가 무기를 마련해 전쟁을 하는 것은, 미국도 추적하지 못하는 검은 돈의 유통 공간이 있다는 뜻이다. 은닉 자금이 이런 유통 공간으로 숨어들면 기대했던 세수 확보는 어려워지고 증세 없는 복지 증진과 경제 부흥도 힘들어질 수 있다.

    여기에서 많은 기업인과 조세 관련인들은 “박 대통령의 조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박 대통령은 검찰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국세청의 팔을 올려줄 것인가. 이 질문은 박 대통령은 공약을 이행할 것인가, 공약은 수행하지 못해도 사회를 정화한 깨끗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인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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