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호

15년 기다려 ‘곗돈’(2인자 자리) 받은 ‘은둔의 킹메이커’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

  • 허만섭 기자│mshue@donga.com

    입력2015-03-17 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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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병세가 외교장관 되는 데 일조”
    • “YS 위해 김기춘 남겨둬”
    • “87년 대선 YS·DJ 단일화 막으려 노력”
    • 6·29선언, 천막당사 이벤트 기획자
    • 朴대통령이 미리 끌어 쓴 ‘임기말 카드’
    15년 기다려 ‘곗돈’(2인자 자리) 받은 ‘은둔의 킹메이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청와대를 떠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병기 국가정보원장을 그 자리에 꽂았다. 김무성 대표 말마따나 ‘장고(長考) 끝에 홈런’일까. 이 실장은 ‘나름 마당발’이라고 하지만, 많은 사람은 그를 모른다. 그는 ‘흔한’ 국회의원 한번 안 했다. 구석진 자리로, 언론의 눈에 안 띄는 자리로 돌았다. 새로운 ‘권력 2인자’ 이병기 실장이 어떤 인물인지, 그를 중심으로 정권 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봤다.

    “현명관이란다, 젠장”

    2월 26일 밤 청와대 관계자가 술자리에서 말했다.

    “내일 오전 발표한대.”

    설 연휴 이전부터 끌어온 김기춘 실장 후임자 발표에 대한 이야기였다. 일행 중 한 명이 “내일 한대? 누구?”라고 묻자 이 관계자는 불만 섞인 투로 말했다.



    “현명관이란다, 젠장. 난 내일 출근 안 하려고….”

    이 관계자는 말을 이었다.

    “내일 오전에 회의 먼저 하고, 회의 후에 발표한대. 현명관에게 충성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

    그는 같은 자리에 있던 한 기자에게 “기사 쓰지 마”라고 했다.

    다음 날 오전 한 언론매체에 ‘새 비서실장 현명관’제하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떴다. 한 통신사가 검증해 후속 보도했다. 기정사실이 되는 듯했다. 그런데 이후 몇 시간 동안 반전이 일어났다. 여권 내에서 ‘현명관 불가론’이 거세게 불거졌다. 부정선거 논란으로 공천권을 박탈당한 문제, 삼성 출신이 인사혁신처장에다 대통령비서실장까지 꿰차는 문제, 정윤회 의혹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한국마사회의 회장이 하필 비서실장이 되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에 또 두들겨 맞겠네”라는 전망도 나왔다.

    오후로 발표가 늦춰졌다. 인사권자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예상을 깨고 이병기 국정원장의 비서실장 임명이 발표됐다.

    여권 관계자 A씨는 “급하게 찾다보니 ‘플랜B’ 이병기 원장이 낙점된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잘되려고 그리 됐다. 그간 청와대에 ‘마(魔)’가 끼었는데 여기서 벗어나려는 모양”이라고 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일각에선 ‘돌려막기’라는 비난이 나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잘 선택된 인사”라는 박지원 새정연 의원의 말로 일축되는 듯하다.

    “그간 ‘마(魔)’가 끼었는데…”

    이 실장은 1974년 외무고시로 공직에 들어와 1998년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을 끝으로 공무원 생활을 잠시 접었다. 2001년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안보특보로 정계에 입문했으나 2012년까지 당 여의도연구소 고문 같은 한직(閑職)에 주로 머물렀다. 그러나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 후엔 주일대사(13개월), 국가정보원장(7개월)을 거쳐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승승장구한다. 박 대통령의 신임이 각별한 것으로 짐작된다.

    여권 인사들에 따르면 이 실장은 인간관계가 원만해 평판이 좋은 편이라고 한다. 다음은 이 실장의 지인 B씨와의 대화다.

    ▼ 이 실장의 성격적 특성은 어떤가요.

    “임태희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홍사덕 전 국회 부의장을 합쳐놓은 케이스랄까…. 임 실장은 해 떨어지면 일과시간에 못 받은 전화에 다 반응해줘요. 이 실장도 그런 편이었죠. 엄청 부지런히 사람 관리해요. 홍 부의장은 영국 신사처럼 어떤 일을 당해도 거친 표현을 안 쓰는데, 이 실장도 그만큼 우아해요. 그래서 인심을 안 잃었다고 할까….”

    ▼ 이 실장은 정계 입문 후 비례대표가 된 적도, 공천을 받은 적도 없네요.

    “정치하는 사람은 국회의원이 꿈이죠. 이 실장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이 양반은 ‘저 사람 대신 나 시켜달라’ 이렇게 요구하는 스타일이 못 돼요. 15년을 기다렸다가 이번에 ‘곗돈’, 그러니까 ‘2인자 자리’를 한번에 받은 거죠.”

    여권 인사들에 따르면 ‘사람과 척지지 않으려는’ 이러한 성격은 야당 인사 등 ‘반대편’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다고 한다. 다음은 이 실장이 언젠가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놨다는, 야당 인사 등과 관련된 일화들이다.

    “김근태, 조영래와는 고등학교 때부터 베스트 프렌드였다. 영어공부 서클에서 만났다. 내가 청와대에 있을 때 김근태가 인천 사태를 주도했다. 노태우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 ‘부탁이 있습니다. 김근태라고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입니다. 풀어주십시오. 빨갱이도 아닙니다’라고 했다. 노 대통령이 민정수석에게 바로 지시를 내려 풀어줬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내가 일본으로 (객원교수로) 떠날 때 근태가 나를 부르더니 봉투를 주더라. ‘이거 가지고 책 사봐’ 하면서. 300달러를 꼬깃꼬깃 넣었더라. 내가 그걸 보고 울었다.”

    “(1997년) 안기부 2차장 시절 권영해 당시 부장이 대통령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DJ에 대한 북풍사건 얘기를 처음 꺼내더라. 나는 반대했다. 대만 출장 끝나고 돌아오니 난리가 났더라. 황모 검사가 ‘저희 목표는 차장님이 아니고 부장을 모시는 건데 중간에 차장님을 빼먹으면 마치 저희한테 밀고해서 살아남은 것처럼 오해받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절차를 밟는 것이니 이해해주십시오’라고 하더라. 한 시간 만에 조사가 끝났다. 내 위아래로 한 6명 잡혀갔는데 나만 살았다. 그때 나를 도와준 사람이 민주당의 정동영, 설훈인 것으로 안다.”

    “고3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집안도 어려워졌다. 학교 주변에서 소설전집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해 30만 원을 모았다. 그 돈으로 집을 구해 살았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도 젊었을 때 카레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하더라. 젊었을 때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와 더욱 친해졌다.”

    “이병기가 코치할 때 가장 화려”

    15년 기다려 ‘곗돈’(2인자 자리) 받은 ‘은둔의 킹메이커’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이 3월 1일 중동 순방차 출국하는 박근혜 대통령을 환송하러 온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유승민 원내대표와 이야기하고 있다.

    박 대통령과 이 실장의 인연은 6공화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을 청와대로 초대할 때 이병기 의전수석이 박 이사장을 안내했다. 이후 이 수석이 노 대통령 대신 박 이사장에게 가끔씩 안부를 전하면서 두 사람이 가까워졌다고 한다. 여권 인사 B씨에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 박근혜 의원은 한나라당 대표가 되고 나서 이병기 실장을 챙기기 시작했죠. 2005년 5월 그를 당 여의도연구소 고문으로 임명했고요.

    “재미있는 게, 당 대표에서 물러난 뒤에도 한 사람을 꼭 챙겼는데, 그게 이병기 씨였죠. 그가 월 300만~400만 원 받는 연구소 고문으로 계속 일하게 했죠. 생활비로 쓰라는 배려였죠. 2007년 박근혜 후보가 경선 캠프 차릴 때 홍사덕 부의장이 캠프 좌장이었고 이병기 고문과 김무성·유승민 의원은 넘버2로 통했어요.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그보다 한참 밑에 있었고.”

    ▼ 박 대통령이 오랫동안 이 실장을 챙겼군요.

    “당시 내가 박근혜 경선 캠프의 이병기 씨 방에서 잡담한 적이 있어요. 이씨가 서랍에서 캠프 월 운영예산 3000여만 원의 내역이 담긴 서류를 꺼내 보이며 ‘뭔 돈이 이리 드는지…’ 하더라고요. ‘아, 돈줄을 쥐고 있는 이 양반이 박근혜의 핵심 측근이구나’ 생각했죠.”

    새누리당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실장은 ‘불리한 판을 뒤엎는 은둔의 킹메이커’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1987년 노태우 당선, ‘6공 황태자’ 박철언에서 김영삼으로의 권력 이동, 2004년 총선 때 ‘노무현 탄핵 역풍’을 잠재운 천막당사 이벤트,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의 인혁당 수렁 탈출 같은 정치사의 전환점마다 이 실장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는 것. 여의도연구소 출신 당 관계자 C씨는 “이병기가 가까이에서 코치할 때 박근혜의 플레이가 가장 화려했다고 보면 된다. 천막당사 기획도 내부에선 ‘코미디’라고 생각했는데 대박이 났고…”라고 말했다.

    이 실장은 1987년 노태우 민정당 총재의 6·29선언 때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태우 총재 보좌역인 그가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노태우 총재가 6·29선언을 발표하기 하루 전 내가 동아·조선·중앙·한국 4군데 기자들을 불렀다. ‘내일 발표하니 호외 내달라’고. 내가 친필로 (선언문을) 직접 썼다. 노 총재가 잘 알아볼 수 있게 정리했다.

    내가 연희동 노 총재 자택에 도착한 후 안현태 대통령경호실장이 전화로 노 총재를 찾았다. 발표하기 전에 청와대에 들어오라는 거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노 총재를 만났다는 증거를 만들어 자신이 6·29선언을 주도한 것처럼 모양새를 갖추려는 의도 같았다. 노 총재는 ‘지금 밖에 기자들이 쫙 깔렸어. 집에서 못 나가’ 하면서 전화를 딱 끊더라. 노 총재는 정치감각이 있었다.

    노 총재가 DJ의 사면복권을 포함시킬지 고민하더라. 나는 그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게 빠지면 아무것도 안 된다. 대선 전략으로 DJ와 YS가 같이 나와야 한다. 단일화만 안 되면 총재님한테 승산이 있다. 일단 던지고 운명에 맡기자’고 건의했다. 채택됐다. 다음 날 노 총재는 6·29선언을 발표한 뒤 현충원에 갔다. 이어 전경들을 위문했다. 나는 이한열한테도 가봐야 한다고 했다. 노 총재는 세브란스병원으로 갔다. 이한열은 중환자실에 있어 만나지 못했다. 그의 부친이 내려오더니 인사를 하더라. ‘오늘 좋은 일 하셨습니다’라고.”

    취임 후 잇달아 ‘공격 포인트’

    이 실장은 1987년 대선에서 DJ-YS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게 노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여권 관계자는 “단일화 여부가 노태우 후보 당락을 결정하는 중대 변수이니 노 후보 참모로서 그렇게 노력한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이병기 의전수석을 꽤 신임한 듯싶다. 이 무렵 이 수석은 ‘실세 박철언’을 견제하면서 ‘YS 대안론’을 폈다. ‘문민(文民)’으로 가야 3당 합당 보수체제가 유지된다고 봤다. YS가 대통령이 된 뒤 노태우 전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지만 ‘노태우 사람’ 이병기를 안기부 2차장으로 중용한 이유다. 당시 이병기 수석이 차기 권력의 향배를 바꿔놓은 점은 박철언 전 장관의 ‘이병기 혹평’을 통해 역설적으로 확인된다.

    “내가 김영삼 민자당 대표와 내각제를 둘러싼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이병기는) 김 대표를 편들어 YS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이병기에게 몇 차례 주의를 줬다. 그러나 이병기는 어느 새 머리가 굵어져 내 얘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박철언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국정원장과 대통령비서실장으로서 이병기에 대한 정치권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인 편이라고 한다. 그는 국정원장 후보 청문회에서 “제 머릿속에 ‘정치관여’라는 말은 지워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 대선 때 이인제 의원에게 불법자금을 전달한 것에 대해선 “가슴 깊이 후회하고 있으며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그가 사석에서 국정원에 대해 했다는 얘기가 재미있다. 그는 “(국정원을) 좀 바꿔보려고 한다. 국정원 직원들이 제임스 본드를 닮았으면 좋겠다. 당당하고 멋있게 정보활동 할 수 있다. 본드처럼 연애도 하면서. 007 영화 보면 마지막 장면에 배에서 멋지게 포옹하지 않나. 그런 정보원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회 정보위 의원들은 그가 원장 재임 중 국정원에 대한 야당의 불신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렸다고 본다.

    비서실장이 된 뒤 그는 두 측면에서 ‘공격 포인트’를 올렸다. 첫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유승민 원내대표 등과 첫 고위 당·정·청 회의를 열었다. 2007년 박근혜 경선 캠프를 옮겨놓은 듯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김기춘 실장이 김무성 대표 전화 씹던 때가 엊그제인데 격세지감’ ‘청와대가 소통한다’는 말이 나왔다.

    둘째, 박 대통령이 중동 순방차 국내에 없던 사이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가 피습됐다. 가뜩이나 한미관계가 삐걱거린다는 말이 나오던 차였다. 이병기 비서실의 위기관리 능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비서실과 순방팀은 대응을 조율했다. 박 대통령의 첫 일성(一聲)에 국내외 이목이 쏠렸는데, 박 대통령은 “한미동맹에 대한 공격”이라고 말했다. “됐네, 잘했네” 하는 평가가 나왔다.

    한 새누리당 의원은 “이병기식 대응은 간결·명료하다. 후져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박근혜 후보가 2012년 대선 때 ‘인혁당 2개의 판결’ 발언으로 지지율이 떨어질 때에도 그는 “깔끔하게 인정하고 사과하고 가자”고 박 후보를 이끈 것으로 알려진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여권 내부에선 ‘박 대통령의 최근 지지율 상승은 이병기 효과인가’라는 얘기가 나온다. 청와대 사정을 잘 아는 여권 인사 D씨는 “이병기 실장 기용은 ‘임기 말 친정체제 구축 카드’를 미리 당겨 쓴 것인데, 현재까진 나쁘지 않은 선택 같다”고 했다. D씨는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다’는 믿음을 준다면 청와대와 내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춘, 윤병세의 경우

    이 실장은 박근혜 정부의 실력자인 김기춘 전 실장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인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그가 김영삼·박근혜 정권에서 막후 실력자로 활동해온 점을 보여준다. 김기춘 전 실장과 관련해 이 실장은 과거에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6공 때 김기춘 실장은 ‘마지막 안기부장’으로 내정돼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YS가 나를 부르더니 ‘내가 (대통령이 된 뒤) 김기춘을 좀 쓰면 안 되겠나’라고 묻더라. 나는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 노태우 대통령에게 전했다. 그래서 김 실장을 (안기부장에 임명하지 않고) YS를 위해 남겨뒀다. 마지막 안기부장은 이현우 대통령경호실장에게 돌아갔다. 이 실장은 원래 총무처 장관으로 가게 돼 있었다. 그러나 김기춘 실장에겐 이게 오히려 독이 됐다. (1992년 대선 때) YS를 돕겠다고 돌아다니다가 ‘초원복집 사건’이 터진 거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2012년 대선 때 새누리당 외교통일추진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수석을 지낸 이력 탓에 박근혜 캠프 내에선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도 있었다. 윤 장관은 이명박 정부 땐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대선 승리 후 외교안보 분야 좌장 노릇을 한 이 실장은 윤병세 전 수석이 외교부 장관이 되는 데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실장 본인도 이런 점을 부인하진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장관도 당시 이 실장에게 “평생 잊지 않겠다”라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권의 몇몇 사람은 여권이 ‘이병기, 이완구(총리), 최경환(경제부총리), 김무성, 유승민 다자 구도’가 됐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몇몇은 “대통령과의 거리라는 어드밴티지를 적용하면 아무래도 이 실장이 국정(國政)의 키맨 같다”고 말한다.

    “왠지 많이 알고 있을 것 같고…”

    정치적으로, 이 실장 앞엔 K-Y(김무성-유승민) 라인을 상대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적어도 휘둘리진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이와 관련해 박 대통령이 이병호 국정원장 후보를 인선한 점이 눈에 띈다. 이 후보는 박 대통령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누군가 이 후보를 천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권 내부에선 이런 말이 나온다. “김영삼 정부 땐 이병호가 이병기에게 안기부 2차장 직을 물려줬고, 박근혜 정부 땐 이병기가 이병호에게 국정원장 직을 물려주는 모양새네.” 이 후보를 추천한 사람이 이 실장 아니겠느냐는 뉘앙스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은 앞으로도 없겠지만, K-Y 라인에 대응하는 L-L(이병호-이병기) 라인이 대두할지도 모를 양상이다. 새누리당 관계자 E씨는 “이병기 실장은 국정원장에서 비서실장으로 바로 옮긴 것이라 의원들이 함부로 엉기기 어려울 것 같다. 왠지 많이 알고 있을 것 같고…그는 없던 카리스마까지 생겼다”고 말했다.

    정책적으로, 박 대통령과 이 실장 앞에 놓인 경제·사회·외교·안보 현안은 수두룩하다. 그러나 ‘만기친람’은 지난 2년의 실패를 불렀다. 어느 것 하나 도드라져 보이지 않게 했다. 이형선 여의도연구원 연구위원은 박 대통령 같은 임기 3년차 대통령에게 △새로운 대표 어젠더를 내놓을 것 △국민의 핵심 기대에 집중할 것 △절차적 투명성을 확보할 것을 제안한다.

    많은 사람은 변화를 주문하고 박 대통령은 이병기로 화답했다. 정권이 바닥을 치고 반등할지 지하로 더 추락할지 알 수 없다. ‘박근혜 정권의 구원투수’ 이병기 실장에 이목이 쏠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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