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호

‘딜레마’ 아닌 ‘기회’ 한국이 만능열쇠 쥐고 있다

‘미국이냐, 러시아냐’ 朴정부 선택은?

  • 윤성학 | 고려대 러시아CIS연구소 교수 dima7@naver.com

    입력2015-03-23 16: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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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이 기로에 섰다. 러시아는 러시아 전승 70주년 기념일(5월 9일)에 박근혜 대통령을 초청했다.
    •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최룡해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김정은의 행사 참석을 확인했다. 미국은 박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박근혜 정부는 모스크바 방문과 관련해 ‘참석하느냐 마느냐’, 나아가 ‘미국이냐 러시아냐’라는 선택의 문제에 직면했다. “중국에 지나치게 다가선다”면서 한미동맹의 균열을 우려하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러시아행을 반대한다. 모스크바 방문을 거절하면 핵심 외교·안보 정책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통일대박’은 물 건너갈 공산이 크다. 갈지 말지 선택해야 할 시점은 얼마 남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가 초청을 받은 지 두 달을 훌쩍 넘기고도 참석 여부를 결정하지 않으면서 국내외적 갈등은 더욱 커졌다. 진보 진영은 답보에 빠진 남북 문제를 해결하려면 모스크바에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수 진영은 한미동맹을 걱정하며 참석을 반대한다.

    기로에 선 朴대통령

    대외 여건도 상황을 악화시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인 보리스 넴초프가 암살당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이미지가 나빠졌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대(對)러시아 제재를 1년 더 연장해 박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을 부담스럽게 한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피습도 악재라고 하겠다.

    이렇듯 부정적인 분위기가 확산되는 터라 참석 불가로 결론 날 공산이 커 보인다. 청와대가 ‘참석 불가’를 결정해놓고 러시아를 달랠 명분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이 방문하지 않더라도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파국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총리를 대신 보내고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해 사전에 양해를 구한다면 유럽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러시아도 한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빚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갈 것이다.



    문제는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리는 중국의 항일전 승리 70주년 기념행사다. 김정은이 5월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9월 베이징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 박 대통령이 러시아 행사는 외면하고 베이징만 방문한다면 남은 임기 동안 러시아와 불편한 관계가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이 중국에 가지 않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런 복잡한 변수가 박 대통령을 괴롭힌다.

    1904~1905년 러일전쟁 당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이 시시시각 다가오는데도 대한제국 정부는 쇄신 노력은 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러시아와 일본을 오락가락 추종하다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 박 대통령은 모스크바를 가든 안 가든 남북관계 개선과 유라시아 협력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정부는 미국도, 러시아도 자극하지 않으면서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박 대통령의 러시아 전승기념일 행사 참석을 반대하는 미국의 의지는 분명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대외 정책 및 안보에 대한 비정상적 위협의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한다. 오바마 정부는 미국의 대(對)러시아 제재에 동맹국이 합류할 것을 요구한다. 유럽과 일본은 이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전승기념일 행사에도 동맹국이 미국과 함께 불참할 것을 호소했다.

    ‘딜레마’ 아닌 ‘기회’ 한국이 만능열쇠 쥐고 있다

    지난해 11월 15일 박근혜 대통령이 호주 브리즈번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석해 의장 발언을 듣고 있다. 박 대통령 오른쪽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

    美 “모스크바 가지 말라”

    한국 정부는 유럽, 일본과 달리 아직 제재에 가담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아베 정부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 노력을 팽개치고 미국에 적극 동조한 것과 비교된다. 한국이 미국을 의식하면서 러시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터라 2013년 11월 한·러 정상회담에서 구상한 외교·안보 협력에 속도가 붙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한·러 양국은 정상회담을 하지 않았고 외교·안보 인사의 교류도 축소됐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호전되는 양상인데도 미국이 제재를 연장한 것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러시아의 힘을 약화시켜 유라시아에서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완화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지금 러시아를 견제하지 못하면 향후 중국의 부상 등과 관련해 통제하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질 것을 우려한다. 동북아에서 미국이 원하는 것은 러시아를 완전히 제압하는 냉전적 해결 방식이 아니라 긴장을 완화해 평화를 정착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적 아니면 우리 편’이라는 진영 논리로는 제3의 길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이념적 갈등에 기인한 신(新)냉전 국면이 아니다. 많은 이가 ‘미국이냐, 러시아냐’의 패러다임에 현혹되는 것은 신냉전의 시각으로 우크라이나 사태를 들여다봐서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본질은 미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의 지정학적 갈등일 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가치를 둘러싼 서로 다른 이념의 대결이 아니다. 유럽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중재하는 제3의 길에 들어선 만큼 한국도 이런 흐름에 얼마든지 동참할 수 있다. 독일과 프랑스, 심지어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이스라엘조차 때때로 미국과 외교 갈등을 겪었으나 미국이 보복한 경우는 없다.

    러시아의 동진(東進) 전략이 서방의 제재와 압박 속에서 고립을 탈피하려는 전술적 차원의 움직임만인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전에도 러시아는 유럽 시장의 발전 가능성에 회의를 느끼며 성장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아시아를 주목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러시아의 대(對)EU 에너지 자원 수출은 정체하거나 줄었지만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와의 교역은 크게 증가했다. 한국, 중국, 일본, 인도, 베트남 등은 발전 가능성이 높은 에너지 자원 수출 시장이다.

    푸틴의 노림수

    러시아의 아시아 선회는 2014년 3월 푸틴이 발표한 외교 독트린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독트린의 핵심은 러시아는 더 이상 스스로를 유럽의 일부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것. 유럽 국가로 자리매김하려 한 노선을 폐기하고 아시아와 유럽을 아우르는 유라시아주의로 되돌아가겠다는 구상을 분명히 했다.

    러시아는 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을 대(對)한반도 관계 정상화를 통해 찾으려 한다. 북한의 핵 개발과 남북 대치는 러시아 극동정책의 장애물이다. 숙원인 가스관 연결 사업은 물론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은 극동 개발도 북한 리스크 탓에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러시아는 제재 위주의 대북정책이 실패했다고 보고 유화정책으로 돌아섰다. 경제 원조를 통해 북한에 관여해 극동에서 경제협력을 추진하고 남북 긴장을 완화하는 평화 중재자로서의 국가 이미지를 고양할 수도 있다.

    푸틴은 북한을 화해와 협력으로 유인하고자 그간 치밀한 작업을 수행했다. 부채를 탕감해줬고, 나진-하산 철도를 연결하면서 북한 철도 현대화 프로젝트를 제시했다. 원조의 정확한 규모와 성격은 알 수 없지만 지난해부터는 북한에 식량과 원유를 지원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들여온 식량이 시중에 풀리면서 북한의 식량 가격도 안정되고 있다. 러시아는 또 올해 북한에 전기를 공급하기로 약속했다. 북한 경제가 호전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러시아가 경제 상황이 어려운데도 대북 지원에 나선 까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북한을 설득해 극동의 긴장 완화를 추진하려는 것이다. 푸틴은 김정은을 모스크바로 초청하는 데 성공했다. 김정은 또한 푸틴의 호의에 부응해 핵 실험 등 국제사회를 자극하는 행동을 자제했다. 푸틴은 남북한 중재를 통해 강대국 러시아의 국가 위신을 세울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북한과의 협력을 매개로 한국과의 경제협력을 전면화하려는 것이다. 극동에서 러시아의 숙원은 북한을 통과하는 가스관 연결 사업이다. 가스관이 연결되면 한국이라는 큰 에너지 시장을 확보할 수 있으며, 이를 발판으로 극동 개발에 속도를 낼 수도 있다.

    푸틴이 5월 전승기념일 행사 때 박 대통령을 초청하려는 속내에 경제적 이익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한국 정부는 외교적 딜레마에 빠질 필요가 없다. 러시아가 한국을 냉전 구도로 끌어들이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하는 것이 미국과의 동맹관계에 어긋나는 게 아니라는 점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냐, 러시아냐’라는 구도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면 한반도의 평화와 경제협력을 촉진할 것이냐’는 시각에서 사안을 봐야 한다.

    러시아의 한계, 북한의 고민

    러시아의 관계 개선 노력에 북한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것은 핵 개발에 따른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고 중국에 편중된 대외 경제관계를 다변화하기 위해서다.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북한은 경제 발전을 위해 외국인 투자를 적극 유치하려 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북한은 2013년 13개 경제개발구를 지정하고 세금, 토지 등과 관련한 혜택을 제시했지만 투자 유치에 실패했다. 궁박한 처지의 북한으로서는 러시아와의 협력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듯하다.

    북한은 러시아와의 협력을 더 진전시키고자 2월 25일 모스크바에서 1차 ‘북·러 비즈니스 협의회’를 개최했다. 문제는 북한이 러시아에 수출할 상품이 없다는 것이다. 북한의 지하자원은 대부분 개발되지 않은 상황이며, 자원 부국인 러시아가 북한으로부터 자원을 수입할 이유도 없다. 북한이 당장 활용할 수단은 인적 자원과 관광 자원뿐.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에 인력을 파견해 외화를 벌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약 5만 명의 북한 노동자가 해외에서 북한으로 보내는 돈이 1억 달러 규모로 추정된다. 러시아의 경제위기로 루블화 환율이 반 토막 난 데다 일자리도 줄어 러시아의 북한 노동자들이 송금하는 돈은 예전만 못할 것이다. 러시아가 북한 경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딜레마’ 아닌 ‘기회’ 한국이 만능열쇠 쥐고 있다

    북한 김정은 특사로 러시아를 방문한 최룡해(오른쪽)가 지난해 11월 18일 크렘린 궁에서 푸틴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북한이 당장 현금을 만질 카드는 금강산 관광 재개 말고는 없다.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은 2009년 중단돼 지금껏 닫혀 있다. 북한은 없는 살림에도 마식령 스키장을 개장했다. 지난해 중국과 유럽에서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북한이 떠안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만능열쇠’는 한국이 갖고 있다. 한국은 금강산 관광 재개를 대북관계 개선의 지렛대로 잘 활용해야 한다. 비무장지대(DMZ) 세계평화공원 조성 계획,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 금강산 관광 재개를 연결하면 명분도 살릴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선택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미국과 러시아가 강요하는 논리에 구애되지 말고 한국 정상이 모스크바에 가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하는 게 좋다. 러시아 전승기념일의 가장 큰 의미는 끔찍한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시작됐다는 점이다. 지구상에서 손꼽히는 평화 위협 중 하나가 북한 핵 문제다. 핵무기로 무장한 북한을 평화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미국도 한국 정상의 러시아 방문을 막을 명분이 없다. 한반도 평화와 유라시아 경제협력을 위해 모스크바에 간다는데 누가 반대할 수 있을까.

    만만치 않은 티켓값

    물론 단순한 선언만으로는 한국이나 미국의 보수 세력을 만족시킬 수 없다. 박 대통령이 이러한 명분을 내걸었을 때 미국, 러시아, 북한의 호응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한층 강화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면 그것은 전략적 선택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동북아의 긴장 완화, 평화 증진을 위한 것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미국이 요구하는 사항에 협의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에는 한국이 남·북·러 삼각협력에 적극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골칫덩어리인 북한과도 대화의 문을 열어야 한다. 북한과 사전 조율 없이 모스크바에서 박 대통령과 김정은이 만나 사진만 찍고 온다면 안 가는 편이 낫다. 박 대통령이 모스크바에 가면서 지불한 티켓 값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5·24조치 해제를 검토할 때가 됐다. 최근 수년 동안의 대북 정책은 북한의 변화를 전제로 했지만 평양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북한의 요구 중 일부를 먼저 들어주고 그 바탕 위에서 핵 문제를 비롯한 복잡한 사안을 풀어나가는 게 현실적 전략이다.

    중국의 부상은 변화하는 국제관계의 큰 변수다. 중국은 동북아에서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한다. 미국은 한·미·일 삼각동맹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면서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 체계의 한국 배치 등 군사력을 동원한 경성 균형(hard balancing)을 도모하는 양상이다. 북한은 핵 무력으로 이에 대응하면서 한반도를 군사적 긴장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박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역내 국가들의 경제협력을 강화해 장기적으로 공동 시장으로 나아가면 지역의 평화가 이뤄진다는 구상에서 비롯됐다. 경제, 외교, 문화, 가치, 지식 등의 수단을 이용해 연성 균형(soft balancing)을 달성하는 게 한국의 국가 이익과 일치한다. 박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 여부는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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