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실 그리고 치유<br>M.W. 히크먼 지음, 문예출판사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는 참혹한 슬픔 앞에서 우리는 가장 먼저 스스로를 고립시키려 한다. 일단은 혼자 있고 싶다. 누구의 위로도 들리지 않고 그 모든 위로의 말이 심지어 내 슬픔을 향한 공격처럼 느껴지기에, 우리는 슬픔에 빠진 스스로를 내면의 독방 안에 철저히 감금시킨다. ‘슬픔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언제나 어렵고 아프기만 하다.
저자는 스스로가 뼈아픈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딸이 열여섯 살 때 말에서 떨어져 죽은 후, 그녀는 딸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만 바라봐도 가슴이 철렁하는 상태를 경험한다. 딸의 방문을 얼마나 열어둘 수 있는지에 따라 자신의 정신적 건강도를 체크할 정도로, 그녀는 딸을 잃어버린 슬픔 앞에서 오래오래 앓아야 했다.
방문을 완전히 닫아놓은 날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날’이다. 딸의 방문을 반쯤이라도 열어둘 수 있는 날은 ‘그나마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는 날’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딸의 방문을 활짝 열어두고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치유되기 시작했음을 느낀다.
그녀는 그토록 사랑했던 딸의 죽음 이후, 자신이 오랫동안 그 상실의 아픔을 어떻게 치유했는지를 365일 동안의 일기 형식으로 표현한다. 물론 이런 ‘애도일기’를 쓸 수 있게 된 것은 딸이 죽고 나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작가이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매일매일 글을 쓴다는 일 자체가 그 슬픔을 극복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됐음을 깨닫는다.
치킨 수프
저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타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예컨대 장례식날 한꺼번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일제히 황급하게 애도를 표현하는 것은, 슬픔을 오랫동안 앓은 이 작가가 보기에는 ‘바보 같은 문화’라는 것이다. 장례식 당일에 가지 못했더라도, 혹은 장례식에 갔었더라도, 살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 아픔을 표현하는 것이 슬픔을 당한 당사자 처지에서는 훨씬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녀는 딸이 죽으면서 인간관계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이야기한다. 예전에 친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멀어지기도 했고, 예전에는 거의 친밀감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위로해준 일 때문에 가까워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함께 울어줄 사람, 자신이 울 수 있게 편안한 상태로 만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그 슬픔의 시간을 ‘상실’이라는 책으로 써낸 작가 조앤 디디온은 고백한다. 자신이 그야말로 아무것도 제대로 씹어 넘길 수가 없었던 몇 달 동안, 매일 치킨 수프를 사다주던 친구의 도움을 잊을 수가 없다고.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는데, 그 수프만은 조금씩 넘길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 친구의 치킨 수프가 자신을 살려낸 구원의 생명수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저자 히크먼은 이제 겉으로는 그녀가 ‘괜찮은 듯’ 보였을 때, 자신에게 딸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표현해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시간이 지난 후, 이제 그녀가 슬픔을 추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녀에게 죽은 딸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는 것은 그녀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모두가 이제 죽은 사람을 잊고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죽은 이가 좋아하던 노래, 음식, 장소를 하나하나 함께 이야기하며 그 추억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장례식의 의례적 애도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