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호

영원한 이별 앞 ‘공감일기’

  • 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입력2015-03-20 09: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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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이별 앞 ‘공감일기’

    상실 그리고 치유<br>M.W. 히크먼 지음, 문예출판사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을 영원히 떠나보낸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위로’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무력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이 슬픔에 빠졌을 때도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특히 우리 문화권에서는 ‘슬픔에 빠져 있는 상황’ 자체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다. 슬픔에 빠진 모습은 나약한 것이고, 나약한 모습은 수치스럽다는 잘못된 사회인식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는 참혹한 슬픔 앞에서 우리는 가장 먼저 스스로를 고립시키려 한다. 일단은 혼자 있고 싶다. 누구의 위로도 들리지 않고 그 모든 위로의 말이 심지어 내 슬픔을 향한 공격처럼 느껴지기에, 우리는 슬픔에 빠진 스스로를 내면의 독방 안에 철저히 감금시킨다. ‘슬픔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언제나 어렵고 아프기만 하다.

    저자는 스스로가 뼈아픈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딸이 열여섯 살 때 말에서 떨어져 죽은 후, 그녀는 딸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만 바라봐도 가슴이 철렁하는 상태를 경험한다. 딸의 방문을 얼마나 열어둘 수 있는지에 따라 자신의 정신적 건강도를 체크할 정도로, 그녀는 딸을 잃어버린 슬픔 앞에서 오래오래 앓아야 했다.

    방문을 완전히 닫아놓은 날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날’이다. 딸의 방문을 반쯤이라도 열어둘 수 있는 날은 ‘그나마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는 날’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딸의 방문을 활짝 열어두고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치유되기 시작했음을 느낀다.

    그녀는 그토록 사랑했던 딸의 죽음 이후, 자신이 오랫동안 그 상실의 아픔을 어떻게 치유했는지를 365일 동안의 일기 형식으로 표현한다. 물론 이런 ‘애도일기’를 쓸 수 있게 된 것은 딸이 죽고 나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작가이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매일매일 글을 쓴다는 일 자체가 그 슬픔을 극복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됐음을 깨닫는다.



    치킨 수프

    저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타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예컨대 장례식날 한꺼번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일제히 황급하게 애도를 표현하는 것은, 슬픔을 오랫동안 앓은 이 작가가 보기에는 ‘바보 같은 문화’라는 것이다. 장례식 당일에 가지 못했더라도, 혹은 장례식에 갔었더라도, 살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 아픔을 표현하는 것이 슬픔을 당한 당사자 처지에서는 훨씬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녀는 딸이 죽으면서 인간관계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이야기한다. 예전에 친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멀어지기도 했고, 예전에는 거의 친밀감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위로해준 일 때문에 가까워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함께 울어줄 사람, 자신이 울 수 있게 편안한 상태로 만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그 슬픔의 시간을 ‘상실’이라는 책으로 써낸 작가 조앤 디디온은 고백한다. 자신이 그야말로 아무것도 제대로 씹어 넘길 수가 없었던 몇 달 동안, 매일 치킨 수프를 사다주던 친구의 도움을 잊을 수가 없다고.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는데, 그 수프만은 조금씩 넘길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그 친구의 치킨 수프가 자신을 살려낸 구원의 생명수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저자 히크먼은 이제 겉으로는 그녀가 ‘괜찮은 듯’ 보였을 때, 자신에게 딸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표현해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시간이 지난 후, 이제 그녀가 슬픔을 추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녀에게 죽은 딸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는 것은 그녀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모두가 이제 죽은 사람을 잊고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죽은 이가 좋아하던 노래, 음식, 장소를 하나하나 함께 이야기하며 그 추억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장례식의 의례적 애도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치유의 오케스트라’

    딸을 잃은 저자는 자신은 몰랐던 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 자신도 자식을 잃은 슬픔을 가슴에 묻었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람들, 그녀의 슬픔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공감하려고 하는 ‘타인들의 관심’으로 아픔이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음을 고백한다. 슬픔에 빠진 사람을 그저 내면의 독방에 가둬두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언젠가는 그가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단지 겉으로만 일상사를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으로 진심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타인의 관심이야말로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힘이다.

    이제는 조금 괜찮아졌다 싶으면 또다시 슬픔의 해일이 밀려오고, 이제는 다 포기했다 싶으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희망의 싹이 보이는 그 지난한 과정들.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 상실과 치유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단지 떠나간 사람을 잊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남긴 삶의 흔적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뼈아픈 상실을 겪고 나면 우리들 자신이 어떤 거대한 ‘슬픔의 공동체’ 안에 편입됐음을 깨닫는다. 나와 비슷한 고통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책은 남편을 잃은 아내, 아들딸을 잃은 부모들, 부모님을 일찍 여읜 사람들,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코 ‘어둡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의 상실과 그리움, 고통과 자기 극복의 이야기들은 신묘한 ‘치유의 오케스트라’가 되어 우리 가슴속에서 치유의 교향악으로 울려 퍼진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치유가 어떤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 뜻밖의 기적 같은 체험들, 남에게는 결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내면의 변화를 통해 간신히, 그러나 분명히, 고통의 시간으로부터 조금씩 놓여난다. 뛰어난 가구 디자이너이던 남편이 죽고 나서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신께서 최고의 가구를 만드는 장인(匠人)이 필요하셔서 그를 데려가셨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나서야 슬픔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아내의 이야기는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줬다.

    남이 보기에는 황당한 논리적 비약일 수 있다. 하지만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남편을 어느 날 갑자기 잃어버린 아내의 처지에서는 그런 ‘비논리적 믿음’이야말로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작은 통로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자기 정당화가 ‘비논리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점이다. 믿음은 믿는 자를 지켜주는 존재의 뿌리다. 믿지 않는 자에게 믿음은 비논리적이고 하찮아 보이지만, 믿는 자에게 믿음은 때로는 자신의 존재보다도 더 커다란 무게로 삶을 압도한다.

    슬픔의 품앗이

    돌이켜보면 나도 그런 방식으로 내 아픔과 상실을 정당화한 적이 많았다. 원하던 일자리를 얻지 못했을 때는 ‘내게 어울리는 더 나은 일자리가 있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했고, 시험에 떨어졌을 때는 ‘내가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야’라는 객관적인 분석보다는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환상적 위로로 나를 다독이곤 했다.

    그런데 취직이나 시험에서 느끼는 상실감보다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실감은 몇 배로 더 컸다. 어떤 환상적 자기 위안으로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친구나 후배를 잃은 슬픔, 피붙이를 잃은 슬픔은 극복되지 않았다. 그 슬픔을 견디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바로 ‘나와 함께 내 아픔을 슬퍼해주는 타인’의 존재다.

    우리는 자칫하면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아예 ‘당신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표현 자체를 삼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슬픔의 당사자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자신의 슬픔을 함께해주는 타인들’이야말로 치유의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한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마라!’는 제스처를 보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슬픔을 위로하는 타인의 개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슬픔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내가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린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 아픔을 함께해준 또 다른 타인의 모습들’이 보였다. 내가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 친구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나 여기 인사동 모 카페인데, 너 아무것도 묻지 말고 지금 바로 와줄 수 있어?” 그런 무리한 부탁을 남에게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정말 힘든 부탁이었다. 그런데 그 힘겨웠던 순간, 친구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해줬다. “어, 갈게.” 그 목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그 순간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그렇게 함께 무너져주고 함께 절뚝거려준 타인의 존재 덕분에 우리는 스스로를 추스르게 된다. 나 또한 그 친구에게 항상 그렇게 ‘언제든지 달려갈게’라는 무언의 사인을 보냄으로써 우리는 지금까지도 때로는 오순도순, 때로는 티격태격하며 잘 지내고 있다. 이런 ‘슬픔의 품앗이’는 인간이 슬픔을 견딜 수 있는 최고의 지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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