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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별 앞 ‘공감일기’

  • 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영원한 이별 앞 ‘공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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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오케스트라’

딸을 잃은 저자는 자신은 몰랐던 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 자신도 자식을 잃은 슬픔을 가슴에 묻었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람들, 그녀의 슬픔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공감하려고 하는 ‘타인들의 관심’으로 아픔이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음을 고백한다. 슬픔에 빠진 사람을 그저 내면의 독방에 가둬두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언젠가는 그가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단지 겉으로만 일상사를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으로 진심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타인의 관심이야말로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힘이다.

이제는 조금 괜찮아졌다 싶으면 또다시 슬픔의 해일이 밀려오고, 이제는 다 포기했다 싶으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희망의 싹이 보이는 그 지난한 과정들.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 상실과 치유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단지 떠나간 사람을 잊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남긴 삶의 흔적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뼈아픈 상실을 겪고 나면 우리들 자신이 어떤 거대한 ‘슬픔의 공동체’ 안에 편입됐음을 깨닫는다. 나와 비슷한 고통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책은 남편을 잃은 아내, 아들딸을 잃은 부모들, 부모님을 일찍 여읜 사람들, 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코 ‘어둡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의 상실과 그리움, 고통과 자기 극복의 이야기들은 신묘한 ‘치유의 오케스트라’가 되어 우리 가슴속에서 치유의 교향악으로 울려 퍼진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치유가 어떤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 뜻밖의 기적 같은 체험들, 남에게는 결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내면의 변화를 통해 간신히, 그러나 분명히, 고통의 시간으로부터 조금씩 놓여난다. 뛰어난 가구 디자이너이던 남편이 죽고 나서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신께서 최고의 가구를 만드는 장인(匠人)이 필요하셔서 그를 데려가셨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나서야 슬픔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아내의 이야기는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줬다.



남이 보기에는 황당한 논리적 비약일 수 있다. 하지만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남편을 어느 날 갑자기 잃어버린 아내의 처지에서는 그런 ‘비논리적 믿음’이야말로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작은 통로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자기 정당화가 ‘비논리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점이다. 믿음은 믿는 자를 지켜주는 존재의 뿌리다. 믿지 않는 자에게 믿음은 비논리적이고 하찮아 보이지만, 믿는 자에게 믿음은 때로는 자신의 존재보다도 더 커다란 무게로 삶을 압도한다.

슬픔의 품앗이

돌이켜보면 나도 그런 방식으로 내 아픔과 상실을 정당화한 적이 많았다. 원하던 일자리를 얻지 못했을 때는 ‘내게 어울리는 더 나은 일자리가 있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했고, 시험에 떨어졌을 때는 ‘내가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야’라는 객관적인 분석보다는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환상적 위로로 나를 다독이곤 했다.

그런데 취직이나 시험에서 느끼는 상실감보다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실감은 몇 배로 더 컸다. 어떤 환상적 자기 위안으로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친구나 후배를 잃은 슬픔, 피붙이를 잃은 슬픔은 극복되지 않았다. 그 슬픔을 견디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바로 ‘나와 함께 내 아픔을 슬퍼해주는 타인’의 존재다.

우리는 자칫하면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아예 ‘당신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표현 자체를 삼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슬픔의 당사자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자신의 슬픔을 함께해주는 타인들’이야말로 치유의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한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마라!’는 제스처를 보이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슬픔을 위로하는 타인의 개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슬픔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내가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린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 아픔을 함께해준 또 다른 타인의 모습들’이 보였다. 내가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 친구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나 여기 인사동 모 카페인데, 너 아무것도 묻지 말고 지금 바로 와줄 수 있어?” 그런 무리한 부탁을 남에게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정말 힘든 부탁이었다. 그런데 그 힘겨웠던 순간, 친구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해줬다. “어, 갈게.” 그 목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그 순간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그렇게 함께 무너져주고 함께 절뚝거려준 타인의 존재 덕분에 우리는 스스로를 추스르게 된다. 나 또한 그 친구에게 항상 그렇게 ‘언제든지 달려갈게’라는 무언의 사인을 보냄으로써 우리는 지금까지도 때로는 오순도순, 때로는 티격태격하며 잘 지내고 있다. 이런 ‘슬픔의 품앗이’는 인간이 슬픔을 견딜 수 있는 최고의 지혜가 아닐까.

신동아 201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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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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