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호

美, ‘광란’과 전란 거쳐 최강 경제대국 우뚝

‘파운드→달러’ 세계 경제패권의 이동

  • 조인직 | 대우증권 동경지점장 injik.cho@dwsec.com

    입력2015-03-20 11: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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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1차대전 위해 불환지폐 남발
    • 독일에 GDP 20배 배상액 부과
    • 1달러=4조2000억 마르크!
    • 日·獨·伊, ‘블록 경제’ 위기감에 2차대전 도발
    • 전쟁에 대한 반성…IMF, GATT 등 안전판 구축
    美, ‘광란’과 전란 거쳐 최강 경제대국 우뚝
    최근 일본과 유로 전 지역에 이어 중국, 호주, 캐나다 등 11개국은 금리를 낮춰 돈을 풀고 이를 통해 자국 통화가치를 낮추는 ‘양적 완화’에 열심이다. 선진 경제권 중에선 미국만 금리 인상을 검토 중이다. 이르면 오는 6, 7월경 금리 인상을 통해 시중의 유동자금을 흡수하고 다시금 ‘강한 달러’의 위상을 과시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은 지난해 4분기 성장률 5%를 찍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올해도 주요 선진국 중 유일하게 3%를 넘는 성장이 확실시된다.

    이른바 ‘셰일가스 혁명’을 통해 석유자원 활용에서도 유리한 고지에 선 데다, 산업설비투자의 자국 회귀(Back to America), 환태평양무역협정(TPP) 체결을 통한 무역 주도권 강화, 여기에 높은 출산율과 개방적 이민정책을 가미한 역동성 등에 힘입어 미국은 리먼 쇼크 이후 느슨해 보이던 경제 패권의 고삐를 다시 한 번 조이는 모양새다. 양적 완화를 통해 자국 통화의 가치를 한층 낮춘 주변국들은 구매력이 높아진 달러가 자국 제품을 왕성히 구입해주는 것을 시작으로 다시금 세계경제의 견인차 노릇을 해주길 기대하는 눈치다.

    淸 배상금 ‘금 2억냥’

    ‘슈퍼 달러의 시대’는 몇 번의 사이클 부침이 있었지만 처음 도래한 시기는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는 전 세계 무역거래 통화의 80%가 달러지만, 19세기만 해도 영국의 파운드가 국제통화였고, 미국이 이를 이어받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다. 산업혁명 이후 국제경제 질서를 이끌던 영국 중심의 ‘팍스 브리태니카(Pax Britannica·‘영국에 의한 평화’라는 의미)’ 시대와 교대하던 시점이다.

    달러가 파운드로부터 패권을 이어받긴 했지만, 미국은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에 뒤이어 대공황(1929)까지 롤러코스터 경기가 이어졌고, 유럽 주요국들도 대공황의 여파로 경기침체를 겪게 된다. 선진 각국이 자국 환율의 인위적 절하를 통해 무역 주도권을 노리면서도 자국 경제권에 대한 보호무역정책을 펴면서 세계적 무역 축소는 불가피했다. 결국 위기를 느낀 국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일으켰고, 전란에서 큰 상처 없이 살아남은 미국은 이후 보다 견고한 달러 중심의 국제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유럽 각국은 당시까지 국제통화이던 금의 유출을 막기 위해 금과 자국 통화의 교환을 정지하고 불환(不換)지폐를 남발해 군사비를 충당했다. 당시까지의 ‘마켓 컨센서스(Market Consensus·시장의 공감대)’랄 수 있는 금본위제(gold standard)로부터의 이탈을 진행한 것이다. 지금이야 각국(특히 선진국) 중앙은행의 신용이 보장돼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시 이 같은 방식의 양적 완화는 일견 위험한 조치였다. 유럽 각국은 이를 알면서도 ‘전쟁에서 이기면 패전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 메우겠다’는 심산이었다.

    달러 시대에 앞서 전개된 금본위제는 통화의 표시 가치만큼 금과 교환할 수 있게 보장해주는 제도다. 200여 년 전인 1817년 영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으면서 ‘소버린(Sovereign) 금화’를 발행한 것이 그 시작이다. 당시 1온스의 금에 3파운드 17실링 10.5펜스의 가격을 연동시켰다. 은행에 금을 맡기면 그만큼의 돈으로 교환해줬고, 이렇게 교환이 가능한 통화라는 의미로 ‘태환(兌換)지폐’라는 말이 쓰였다.

    금본위제는 영국 주변 무역 상대국을 대상으로 확대됐다. 쉽게 말해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화폐 하나하나에 대해 금에 연동되는 비율을 정하고, 제반 당사국 간의 합의로 이에 대한 국제적 신용을 부여한 것이다. 1870년대에 독일과 프랑스가, 1890년에는 미국이 금본위제를 실시했고, 일본도 1897년부터 0.75g의 금을 1엔에 연동시켰다.

    화폐의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면 그 나라는 필수적으로 일정량의 금을 보유해야 했다. 보유한 금의 양만큼 화폐를 발행할 수 있으므로 최소한의 초기 자본, 혹은 최소한의 규모의 경제가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선진 무역국인 유럽과 미국에 이어 일본이 발빠르게 금본위제를 도입할 수 있던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한국이 기여한 바 크다.

    당시 조선 조정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의 개입을 요청했고, 이게 빌미가 돼 청일전쟁(1894~1895)이 일어났다. 승리한 일본이 전쟁 배상금으로 당시 청나라로부터 ‘금 2억 냥’을 받았는데, 이것이 일본은행의 초기 자본금이 된 셈이다.

    美, 빚 받으려 참전

    미국은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밝힌 먼로주의, 즉 ‘미국과 유럽은 상호 간섭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상호불간섭주의를 1차대전 당시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유럽이 전장(戰場)의 화염으로 뒤덮이건 말건 미국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는 경향이 강했다. 오늘날의 스위스처럼 중립을 표방했기에 막대한 군수물자를 제조, 유럽의 여러 참전국에 팔아 돈을 벌 뿐이었다.

    당시 무역대금 결제를 위해 유럽은행에서 미국에 있는 은행으로 달러가 줄기차게 송금됐다. 자연히 금융의 중심도 런던에서 뉴욕의 월스트리트로 옮겨갔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은 달러화로 표시된 전시국채(戰時國債)를 발행했는데 미국의 JP모건 등이 대표로 이를 인수(Underwrite)해 월스트리트 금융시장에 내다 팔았다. 전쟁 후 전시국채를 상환하기 위해 승전국은 패전국인 독일에 막대한 양의 배상금을 부과했고, 이를 통해 미국은 달러를 세계 제1의 국제통화로 자리매김한 데 이어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 부상했다.

    1차대전 말 미국이 그동안의 먼로주의를 깨고 참전한 표면적인 이유로는 미국 민간 수출 선박에 대한 독일의 잠수함 공격이 거론된다. 영국이 압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독일에 물자가 못 가도록 해상봉쇄에 나서자, 독일은 비대칭전력인 잠수함 부대를 동원해 해상 선박을 무차별 공격했다. 미국은 유럽으로 물자를 실어 나르던 자국 민간 선박에 피해가 갔기 때문에 참전했고, 이를 계기로 ‘세계 경찰’의 위용을 처음으로 과시했다는 논리다.

    하지만 미국 참전의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영국과 프랑스에 투자한 막대한 전시채권과 무관치 않다. 독일이 승전국이 되면 패전국 영국과 프랑스로부터의 투자금 회수가 요원해지기 때문이다. 당시 연합국의 일원이던 러시아가 1917년 공산혁명 발발로 독일과 휴전하게 되자 여력이 생긴 독일은 프랑스에 공세를 퍼부으며 막판 전세를 유리한 쪽으로 이끌고 있었다. 결국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월스트리트 금융자본의 채권 회수를 위해서 참전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美, ‘광란’과 전란 거쳐 최강 경제대국 우뚝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국가들과 패전국인 독일은 1919년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에 1320억 마르크의 전후배상액을 부과하는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다.

    히틀러 자극한 獨 인플레

    1차대전은 미국의 가세로 결국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에 부과된 전후배상액은 1320억 마르크. 당시 독일 국내총생산(GDP)의 20배나 되는 엄청난 액수였다. 요즘처럼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공적 부조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독일 정부는 금본위제에서 이탈, 마르크화를 불환상태로 계속 발행해 돈가치를 떨어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돈가치 하락이 정부의 통제 속도를 넘어서 이른바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이 발생하고 말았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처음에 본 가격의 두 배 가격이 매겨진 가격표가 준비될 정도였다. 당시 환율은 1달러에 4조2000억 마르크라는 터무니없는 수준까지 치솟았다. 고액 화폐로 1조 마르크 은화, 100조 마르크 지폐까지 발행됐다. 요즘 그리스를 위시한 ‘빚더미 유로존’ 중에서 그나마 독일이 재정건전성을 과시하면서 유럽 경제의 우등생다운 몸가짐을 보일 수 있는 것은 이런 ‘100년 전의 악몽’이 너무 강렬해 재정을 철저히 관리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프랑스혁명 때부터 채권 발행 주선과 중개, 인수로 돈맛을 본 유대계 금융자본은 무대를 런던에서 뉴욕으로 옮겨가 1차대전 때 본격적인 이득을 보게 된다. 전쟁 중 영국이 패전할 것이라는 정보를 흘려 채권을 헐값으로 떨어뜨린 다음 투자한 덕분에 투자 대비 성과도 매우 컸다. 오늘날 자본시장의 ‘작전’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독일 패전의 배상금이 결국은 유대계 자본의 대표주자 로스차일드 가문의 주머니로 들어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히틀러의 등장과 맞물려 반(反)유대주의는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독일 민중의 박탈감을 자극했다. ‘베르사유 체제의 해방’을 기치로 내건 히틀러는 결국 자신이 이끄는 나치당을 1933년 제1당으로 만들고, 같은 해 국제연맹도 탈퇴하며 재군비에 나서게 된다.

    국가 간 무역역조와 이를 막기 위한 자국 통화의 절하, 그리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상품의 ‘덤핑 판매’를 노리는 수법은 2015년 현재 일본과 유로존 국가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수법이 등장한 것은 1차대전 이후부터다. 1차대전 중에는 ‘안전 자산으로의 회귀 현상(Flight To Quality)’이 일어났다. 1파운드, 1마르크 지폐보다 금을 선호하는 심리다. 요즘에도 시리아나 우크라이나 사태, 이슬람국가(IS) 테러 소식이 들리면 금이나 엔이 상승하는 것과 비슷하다.

    대공황에 금본위제 와르르

    영국 중심으로 뭉쳤던 금본위제는 1차대전을 거치며 파생된 이 같은 각국 통화의 리더십 및 신뢰도 약화, 정세 불안으로 와해됐다. 본토에는 아무런 전란 피해가 없었던 미국만이 1919년 전후 1년여 만에 금본위제 복귀를 선언했으나 유럽 여타국들은 전후국채의 처리, 인플레이션 수습, 금 보유량의 더딘 회복 등으로 복귀 일정이 늦춰졌다. 독일은 1924년, 영국은 1925년, 프랑스는 1928년에야 겨우 금본위제로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또다시 선진 각국의 금본위제는 와해됐다. 당시 후버 미국 대통령이 자국 산업 보호를 목적으로 수입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한 것이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미국의 교역국들은 금본위제를 버리고 자국의 통화를 절하해 물건을 싸게 공급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31년 영국이 파운드화 절하를 계기로 금본위제 이탈을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1938년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주요 유럽국가들이 금과 교환되는 태환화폐의 성격을 버렸다.

    금이라는 신용물이 사라지자 높은 패권국 지위를 유지하던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타국 화폐를 신뢰할 수 없게 됐고, 이에 따라 점차 고율의 관세를 통해 보호무역을 강화하고 외환 반출입을 제한하는 조치를 시작했다. 자국과 식민지 국가들 사이에만 자유롭게 무역 및 금전거래가 가능케 하는 이른바 ‘블록 경제(Block Economy)’가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당시 영국 내각은 식민지 통치 중이던 영연방 내 국가에 대해서는 낮은 세율의 세금을 매겼지만, 역외 상품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200%라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해 진입장벽을 높였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식민지가 부족하다고 느낀 일본, 그리고 1차대전으로 식민지를 뺏긴 독일, 영국과 프랑스에 피해의식을 갖고 있던 이탈리아 등은 다시금 전쟁을 수단으로 한 패권 확보를 겨냥하게 됐다. 결국 일본은 동남아로, 독일은 폴란드로,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로 각기 무력 침공에 나선다.

    경제적 측면에서만 보면 금이라고 하는 신용물이 붕괴된 뒤 나타난 통화가치의 혼란, 이로 인한 세계 무역의 축소 및 비(非)패권국들의 경기 하락 등이 1939년부터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2차대전을 거치면서 각국이 통화가치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고정환율제로 전환한다.

    대공황 이후 경제가 급속히 침체한 일본은 때마침 군부세력의 실권 강화 추세에 맞춰 ‘식민지 확대’라는 방법을 통해 패권국에 보다 근접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옹립하고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일으켰다. 미국은 이를 ‘부당한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나섰고, 1933년에는 국제연맹이 일본에 탈퇴를 통고하도록 유도했다.

    무역 통화는 ‘달러’로만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 데 이어 1941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점령하고 나서자 미국도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미국 내 일본인의 자산을 동결하고 일본에 대해 석유 쌀 등 전략물자의 수출을 금지하는 내용의 금수조치를 발표했다. 그러자 일본은 그해 12월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에 미국은 본격적으로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2차대전 후 ‘브레턴우즈 체제’로 대표되는 전후 세계의 경제 질서는 요약하면 ‘금-달러 본위제’다. 풀어서 설명하면 미국 1개국 통화(달러)에 의존하는 형태의 금본위제다. 각국의 환율을 미국 달러에 고정해서 연동시키고, 모든 통화 중 오직 달러만이 금에 대한 고정가치(1온스=35달러)를 가진다는 의미다.

    달러가 각국의 무역중심통화를 일컫는 ‘기축통화’로 본격적으로 인정받은 덕분에 2차대전 이후 세계 무역의 결제 통화는 달러로 일원화했다. 이와 같은 브레턴우즈 체제는 달러와 금의 태환 정지 조치가 담긴 1971년의 이른바 ‘닉슨 선언’ 때까지 27년간 유지됐다.

    미국 달러가 전 세계 무역거래의 결제통화로 인정받으려면 충분한 유동성이 있어야 했고, 이에 연동되는 금이 충분한지 여부도 중요했다. 미국은 다행히 1, 2차대전 당시 본토에 피해가 전무하다시피 해 전 세계에 물자를 공급하는 창구 기능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2차대전 직후 유럽 각국의 ‘전후부흥대금’을 금으로 결제받다보니 이 시기에 미국의 금 보유량은 전 세계의 75%에 달했다.

    전후 주요 국가들 사이에선 전쟁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이 일었다. 금본위제의 부작용으로 인한 각국 통화의 절하 경쟁과 무역거래 축소에 따른 보호무역주의 강화, 이에 따른 주요 국가 간 신뢰 상실이 전쟁 발발의 주된 이유였다. 미국 주도의 전후 질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한 ‘안전판’을 구축했다. 대표적인 것이 국제통화기금(IMF)과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다.

    IMF는 1998년 외환위기를 맞은 한국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익히 알려진 기구다. 요즘도 남유럽 재정위기를 앞두고 언제든 등판할 준비를 갖췄을 정도로 존재감은 식지 않았다. GATT는 일반 상품무역만을 다뤘는데, 1995년 지식과 서비스를 추가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확장, 계승될 때까지 존속했다. 요즘의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2국 간, 혹은 다국 간 보다 세밀한 협상을 진전시키자는 취지로, 150개 가맹국의 이해관계가 분산돼 있는 WTO 체제의 이념을 계승하면서도 약점을 보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쟁 안전판 IMF, GATT

    1947년 출범한 IMF는 외환 유통의 불안이 결국 2차대전을 일으켜 전 세계에서 5000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는 반성에서 출범했다. 대외적으로 내건 목적도 ‘외환의 안정’ ‘외환의 자유화’ ‘국제수지의 안정’ 3가지다. 외환은 곧 달러와 상대국 통화의 관계를 뜻한다. IMF는 자본금 100억 달러로 출범했다. 현재 자본금 7200억 달러로 70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주요 국가의 출자 비율은 큰 차이가 없다. 최대 주주인 미국의 출자 비율은 16.8%다. IMF의 정책결정이 85% 이상 주주의 찬성으로 이뤄지는 만큼, 미국은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다.

    ‘단기융자’를 표방하는 IMF는 출범부터 ‘미국식 경제질서’로의 창구규제(중앙은행이 금융기관의 대출 및 투자정책과 예금유인정책 등을 중앙은행의 정책의도에 맞도록 지도하는 것)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단기간에 재정 상황을 흑자화해 융자를 변제할 수 있는 청사진을 IMF에 제출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해당 국가에 대출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결국 IMF의 내정간섭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한국도 정보통신(IT) 인프라 촉진, 재벌 해체, 200개 이상의 경제 관련법 개정 등을 통해 IMF의 눈높이를 충족시켜 구제금융을 무사히 변제한 역사가 있다.

    1948년 발족한 GATT는 국가 간의 완전한 자유무역, 즉 ‘무차별 평등주의’를 구현해야 할 이념으로 삼았다. 2차대전 당시를 교훈으로 삼아, 전쟁의 경제적 요인을 무역의 측면으로부터 제거한다는 취지에서 비롯됐다. GATT는 무역거래를 할 때 상대하는 국가 간 차별이 없는 ‘최혜국(最惠國) 대우’를 의무화하며, ‘내국민 대우’를 통해 외국 기업에 대해서도 자국 기업 수준의 특권을 보호해줄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가맹국 간 양자 교섭을 용인하면 개별국 간 역학관계가 교섭 내용에 반영되면서 전체 균형이 허물어질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다자 간 협상을 원칙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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