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사무총장의 지적 이력, 정치 행로에는 한국 현대사의 맥락이 담겨 있다. 그는 지난해 12월 출간한 507쪽 분량의 ‘한국사회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 공진국가 구상’ 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내 지적 편력과 정치적·사회적 행동의 변화는 개인의 궤적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지식인들의 의식 흐름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되돌아보려 한다. 좌와 우를 넘어 새로운 중도의 기획을 꿈꾸는 이들에게 역사적 기억을 불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머리와 몸으로 좌·우파 진영을 각각 경험했고 청와대에서 권력 운용의 실체와 작용을 들여다본 이론가형 정치가가 꿈꾸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3월 9일 서울 여의도에서 그를 만났다.
한미동맹의 ‘현상’과 ‘실질’
▼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1월 출간한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 대한 논란이 거셉니다. 박 사무총장께선 MB 정부에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을 지내는 등 중요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회고록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회고록은 회고록일 뿐입니다. 전직 대통령의 행위에 과도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은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문화가 아닐까 합니다. 회고록 문화가 발달한 미국에서는 대통령직을 마친 후 2, 3년 안에 회고록을 출간하는 예가 적지 않습니다. 기억의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왜곡을 막으려면 이른 시간에 집권 때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MB 회고록도 그러한 맥락에서 준비한 것입니다. 책 전체를 읽지 않고 단편적으로 표출된 내용만으로 비판하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회고록 집필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감수 때는 참여했습니다. 담담하게 서술한 회고록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듯합니다. 객관적 사실을 가능한 한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 것으로 압니다.
MB 회고록은 국정 운영 주체의 시각에서 재임 때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역사학자나 평론가의 시각이 아니에요. MB가 ‘내가 이런 취지에서 이렇게 행동했고, 결과를 이렇게 해석한다’고 밝힌 겁니다. 회고록의 특성상 국정 운영 주체의 주관적 해석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시각에서 보면 다르게 해석할 것이고요.”
▼ 어느 정부나 공적과 허물이 있게 마련입니다. MB 정부의 공적 중 하나는 노무현 정부가 균열을 일으킨 한미동맹을 복원, 강화한 점입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 한미동맹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지적이 보수진영에서 나옵니다. 2월 27일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이 중국과 과도하게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한 언급인데요. 한미동맹을 다루는 데 MB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차이를 보이는 듯합니다.
“한미동맹에는 언제나 드러난 현상과 드러나지 않은 실질이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한미관계는 실질적 측면에서 다양한 균열이 있었습니다. 양국 정상 간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적지 않았어요. 정상들의 불편한 관계가 다른 사안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MB와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는 인간적으로 친밀했습니다. 정상 간 대화의 질적 수준도 높았고요.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한국 내 정치적 갈등이 양국관계를 위협하기도 했으나 슬기롭게 대처했습니다. 국내의 정치적 압력 탓에 재협상에 나서면 한미동맹이 불편한 상황으로 되돌아간다는 MB의 확신이 재협상이 아닌 추가 협상의 길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부시가 MB를 굉장히 신뢰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신뢰가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할 때 큰 도움이 됐습니다. 군사·안보 분야뿐 아니라 한미 통화스와프 협정 체결, G20 가입 등 경제적으로도 미국이 상당한 도움을 줬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한미동맹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야 할 숙제를 안았습니다. 미국과 가치, 비전을 공유하면서 한국이 가진 콘텐츠를 내놓아야 합니다. 한미관계가 핵심 축이고, 그 안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돌아간다고 미국에 설명해야 합니다. 박근혜 정부는 뭐랄까, 한미관계가 후퇴했다거나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미국 조야(朝野)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실질을 공고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는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