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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외로운 섬, 울창한 솔숲 바람결에 실려온 피냄새

‘관상’ 심적(心的) 촬영지, 강원도 영월

  • 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외로운 섬, 울창한 솔숲 바람결에 실려온 피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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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작은 섬, 청령포

포토그래퍼 김성룡과 운전대를 주고받으며 나눈 얘기도 그런 것이었다. 김성룡이 말했다. 그렇게 싫었을까요? 내가 받았다. 그보다는…역모 세력이 더 두려웠겠지. 여기다 애를 데려다 놓으면 반란도 그만큼 멀어진다고 봤겠지. 김성룡이 다시 말을 받았다. 왕릉이 이렇게 먼 것도 참 특이해요. 그게 아니야, 라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릉이 수도권 밖으로 이렇게 멀리 있는 건 이거 하나밖에 없어. 27대를 이어온 왕의 능 가운데 단종이 묻힌 장릉 하나만 강원도 영월에 떨어져 있어.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헌릉, 선릉, 홍릉, 정릉 등등은 어릴 때 우리가 다 소풍으로 갈 만한 거리에 있잖아. 장릉은 그래서 늘 외로워 보여. 이상하게 여기에 자꾸 오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아.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그때는 정말 심산유곡이었을 텐데.

김성룡이 짧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 27개 왕릉을 한 번 순회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내가 말했다. 그거 참 괜찮아. 왕의 순서대로 능을 가는 거야. 근데 왕릉들이 더러 모여 있거든. 몇 대 임금과 몇 대 임금이 한군데에 있어. 동구릉, 서오릉이 그런 거잖아. 그걸 무시하고 같은 델 또 가더라도 왕의 순서대로 가면 좋아. 그렇게 언제 한번 가봐. 포토그래퍼의 눈이 살짝 감기는 것 같더니 갑자기 소리친다. 여주에서 빠져서 막국수 먹고 갑시다!

우리 둘은 여주대학교 앞, 이른바 명물이라 불리는 ‘천서리 막국수’ 집에서 비빔 막국수를 훌훌 말아 먹었다. 여기 오면 꼭 먹어야 한다는 돼지보쌈도 곁들였는데 배가 고팠다면 대단한 맛이었을 것이다. 육질이 남달랐다. 백김치에 싸서 찍어 먹는 장맛이 특별했다. 차만 없었으면 퍼질러 앉아 소주 서너 병은 거뜬히 해치웠을 것이다. 그러니 맛있는 것도 적당한 선에서 그쳐야 술 생각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강원도 영월행은 그렇게 ‘놀멘놀멘’ 하면서 오갈 수 있는 곳이다. 비운의 역사가 서려 있지만 연인들이 다녀오기 딱 좋은 곳이다. 가기 전에 이렇게 들러서 먹을 곳(고속도로 휴게소가 아닌)도 있다. 길도 잘 나 있다. 무엇보다 시간을 잘 쪼개면 볼 곳이 참 많은 동네다. 그리고 여차하면 하루를 묵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강원도라지만 교통 요충지인 충청북도 제천에 딱 붙어 있어 옛날처럼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영월에 가면 장릉보다 청령포에 먼저 가는 게 좋다. 물길이 10m도 안 되지만 어쨌든 뭍과 떨어져 고립된 작은 섬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뭍과 섬 사이에 동강의 한 줄기가 흐른다. 수심이 3m쯤 된다니 조심해야 된다. 예전에 무턱대고 장릉부터 갔다가, 그 단아함에 끌려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어둠을 맞고 청령포를 포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순서’도 여기가 먼저다.

삼촌에게 왕좌를 뺏긴 단종은 이곳 청령포로 내려보내졌다. 사육신은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히려고 했다. 세조는 그들을 죽이고 단종을 여기로 보냈다. 사육신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생육신은 김시습·원호·이맹전·조여·성담수·남효온을 일컫는다.

어릴 적 국사 시간에 은근히 사육신을 더 존경할 만한 인물로 배운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런 구분 자체가 우습다. 다들 정쟁의 주도자였을 것이다. 모두들 권력이 먼저였을 것이다. 다만 누구는 이기고, 또 누구는 졌을 뿐이었다.

외로운 섬, 울창한 솔숲 바람결에 실려온 피냄새

단종의 무덤 장릉.

바람결에 듣는 역사

청령포에 오면 울창한 소나무숲과 그 한가운데쯤 위치한 단종의 처소가 꽤나 고요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 우리처럼 일종의 여행 중이라면 그렇다는 얘기다. 이것이 유배나 귀양의 와중이라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작은 강 건너편엔 늘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폭이 좁아도 소리 없이 강을 건널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집 뒤쪽으로는 지금 봐도 깎아지른 절벽이다. 이쪽으로는 탈출이 절대 불가한 노릇이다.

숨어 지내는 처지라면 그보다 더 좋은 조건도 없을 것이다. 뒤쪽 절벽으로는 자객이 절대 못 들어올 테니 앞쪽만 검객들이 잘 지키면 될 것이다. 정말 기막힌 입지가 아닐 수 없다. 청령포에서 그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해 있다가도 소나무숲 바람결에 역사 속 풍랑 같은 얘기들을 듣고 있다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세조에게 이곳을 알려준 인물이 과연 누구였을까. 누가 한양에서 이토록 멀리 떨어진 이 구석을 그렇게 잘 알고 추천했을까. 역사는 그를 찾아내 기록했어야 한다.

기록에는 왕방연이라는 인물이 있다고 했다. 단종을 이곳 유배지로 압송할 때 금부도사였던 모양이다. 금부도사라면 오늘날 대검찰청이나 경찰청의 내사(內査) 책임자쯤 된다. 왕방연이 시조를 남긴 모양이다. 이런 시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진심이었을까. 이게 알려졌다면 그 역시 살아남지 못하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이기(利己)의 기록일 뿐이니까.

2013년 추석 시즌에 개봉된 한재림 감독의 ‘관상’은 912만 명이라는 놀라운 흥행몰이를 했다. 왜 대중은 역도의 얘기에 환호했을까. 생각해보면 조선조의 숱한 궁중 쿠데타와 역(逆)쿠데타 이야기는 현대사회의 그 어떤 사건보다도 역동적이다. 피와 살이 튄다. 막장 드라마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없다. 친족과 친족 간에 도륙을 낸다.

‘관상’에서도 수양대군은 여자 점쟁이의 목에 장검을 겨누며 피를 토하듯 소리친다. “언제부터 이 조선 땅이 이씨의 것이 아니라 김씨의 것이 되었단 말이냐?” 이때 이정재의 연기는 정말 실감 난다. 그는 수양대군으로 완전히 빙의(憑依)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김씨’는 물론 김종서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관상’에 열광한 것은 600년 전의 이야기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어서였을까.

외로운 섬, 울창한 솔숲 바람결에 실려온 피냄새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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