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선된 후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국민께서 심판해주셔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을 국회로 돌려보낸 6월 25일, 국무회의 자리에서 터져 나온 박 대통령의 발언은 팽팽한 파워게임 양상을 만들었다. 정부 시행령에 대해 국회가 수정·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게 골자인 국회법 개정안이 발단이었다.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대통령 발언 다음 날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90도 인사를 했지만 분위기는 반전되지 않았다. 명멸해가는 듯하던 친박(親박근혜)계 의원들은 ‘유승민 저격수’를 자처했고, 비박(非박근혜)계 의원들은 ‘유승민 구하기’에 나섰다.
13일짜리 드라마
“정치적 철학과 소신을 밝히는 데 원내대표직을 이용했다”(김태흠 의원)는 의견과 “우리 손으로 뽑은 대표를 나가라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정두언 의원)라는 의견이 대립했다. 이재오 의원은 “물러나야 하는 사람은 유승민이 아니라 최고위원들”이라고 쏘아붙였고, 급기야 지도부 동반 퇴진론도 터져 나왔다. 유 원내대표는 “사퇴할 이유를 못 찾겠다”며 버텼다. 유 원내대표와 공고한 ‘K-Y(김무성-유승민) 라인’을 구축했던 김무성 대표가 자진사퇴를 권해도 “의원총회(의총)에서 내 목을 쳐달라”는 뒷말을 남긴 채 ‘옥쇄(玉碎) 항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결국 7월 8일 의총장에선 30여 명이 토론한 끝에 ‘사퇴권고’가 의결됐고, 유 원내대표는 사퇴의 변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는 말을 남겼다. ‘박 대통령과 친박계 의원들의 사퇴압박은 비민주적’이라는 말로 들렸다.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 발언 13일 뒤에 드러낸 그의 속내였다.
유 원내대표가 내놓은 사퇴의 변은 사실상 출사표였다. 그는 단숨에 여당 차기 대선후보 지지도 1위에 올랐고, 박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는 하락했다.
현직 대통령과 집권 여당 원내대표가 연출한 13일간의 반전 드라마. ‘신동아’는 ‘유승민 사태’의 근원적 이유와 당청(黨靑)관계 해법을 찾기 위해 ‘친박’으로 분류되는 김태흠 의원과 ‘비박’으로 꼽히는 박민식 의원의 대담을 마련했다. 김 의원은 ‘유승민 저격수’를 자처하며 의총 소집요구서 서명을 받았고, 박 의원은 ‘유승민 구하기’에 나서며 재선의원 20명의 공동성명을 주도했다. 김 의원은 김용환 전 의원 보좌관, 국무총리실 정책담당관, 충남도 정무부지사를 지낸 초선(충남 보령·서천)이고, 박 의원은 외무고시와 사법시험에 합격한 검사 출신 재선(부산 북·강서갑)이다.
“劉, 협상의 기본 원리 몰라”
기자 ‘유승민 사태’가 일단락됐다. 친박·비박계를 대표하는 의원들이라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박민식 18대, 19대 국회의원을 하면서 가장 힘들고 고민이 많은 시기였다. 언론은 친박과 비박의 계파 싸움으로 보지만, (재선의원 성명을 낸) 20명의 면면을 보면 그 본질은 계파 싸움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싶다.
김태흠 국정 운영을 책임진 집권당 처지에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발생했다. 당내 갈등이 야기되고, 내부 분열상을 보인 것은 안타깝다. 나는 (6월 25일) 박근혜 대통령 발언이 있기 전부터 협상 능력이 부족한 데다 당청 갈등을 유발한 유 전 원내대표의 사퇴를 주장한 사람이다.
박민식 ‘비박 의원’이라고 했는데, 정치에서 계파는 필요하다. 보통 우리가 계파라고 하면 동교동계, 상도동계, 가깝게는 친이(친이명박)계, 친박계를 떠올린다. 정치 영역에 들어올 때 출발점이고, 풍찬노숙(風餐露宿)한 역사성이나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그런데 친박, 비박은 이번의 돌발적 사건 탓에 만들어졌다. 나는 유 전 대표와 8년간 의정생활을 같이했지만 술 한잔 같이 한 적 없고, 유 전 대표도 스킨십이 뛰어난 스타일이 아니다. 우리(재선의원 20명)를 ‘유승민 계파’라고 하면 자존심 상한다.
기자 친박, 비박은 유승민 사태 이전부터 언론에서 써온 용어다. 비전과 가치를 공유하는 정파를 뜻하기보다는,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 여부를 잣대로 평가한 결사체 성격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유 전 대표는 정말 사퇴했어야 했나.
김태흠 원내대표는 당청 간 긴밀한 협조 속에 대통령 국정운영을 뒷받침하는 자리다. 의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입법화하고, 야당과의 협상에서 당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게 본분이다. 그런데 유 전 대표는 (지난 4월 새누리당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주장해 갈등을 유발했다. 야당이 요구한 ‘아문법’(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 이게 광주에 필요한 예산인데 사업비가 5조3000억 원쯤 된다. 이걸 받아들였다.
어떻게 보면 순진했고, 협상의 기본 원리를 몰랐다. 연금개혁안도 여론을 감안하면 우리가 이니셔티브(주도권)를 쥐었는데 뜬금없이 국회법 개정안을 연계했다. 협상은 ‘물타기’도 하면서, 안 되면 깨는 것도 방법이다. 문제가 있었다.
김 의원이 말한 아문법은 9월 광주에서 설립되는 아시아문화전당에 대한 국고 지원 등을 규정한 법으로 야당의 최우선 추진 법안이었다. 유 전 대표는 2월 국회에서 아문법을 통과시키되, 4월 임시국회에서 경제활성화법을 패키지 처리키로 협상했다며 양해를 구했다. 연금개혁안 처리에 야당 협조를 끌어내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야당은 연금개혁안을 통과시킬 때는 국회법 개정안을 연계했고, 경제활성화법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해 유 전 대표는 ‘전략 부재’ 비판을 받았다. 김 의원은 이 얘기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