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靑 18년, 은둔 18년…36년간 ‘닫힌’ 리더십
- ‘디바이드 앤드 룰(Divid & Rule)’, 2인자는 없다
- ‘침묵’의 정치, 늑장대응·인사 난맥상으로 나타나
- 계보·사심 없는 조자룡 스타일 참모 선호
6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정치권을 향해 질풍노도와 같은 발언을 쏟아냈다. 국무총리와 각부 장관, 그리고 청와대 참모들이 전원 참석하고, 국민이 지켜보는 공개된 자리였다. 박 대통령의 말투와 표정은 오뉴월의 서릿발처럼 차갑고 싸늘했다. 발언 내용이 얼마나 셌던지, 한 야당 의원은 6·25전쟁을 빗대 ‘대통령이 국회를 침공한 날’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이날 박 대통령의 메시지는 3가지였다. ‘정치권은 집단 이기주의에 빠졌다’ ‘여당은 자기 정치 하지 마라’ ‘유승민 원내사령탑은 책임지고 물러나라’. 박 대통령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김무성 대표의 표현대로 ‘전쟁’이 일어났다. 청와대와 유승민, 친박과 비박 간에 육박전에 가까운 전투가 연일 벌어졌다. 결국 유승민 원내대표가 13일 만에 사퇴함으로써 전쟁은 끝난 듯 보이지만 지금도 ‘총성 없는 전쟁’은 계속된다.
13일 동안 보여준 ‘박근혜 리더십’은 한마디로 위력적이었다. 대한민국을 한동안 공포에 몰아넣은 메르스 정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한없이 쪼그라들었던 친박계 의원들이 다시 득세했으며, 박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은 온 국민의 시선을 빨아들였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으며, 어떤 결말로 이어질까?
“현대판 왕정이 부활했다”
박 대통령의 롤 모델로 흔히 대처 전 영국 총리와 메르켈 독일 총리 등이 꼽힌다. 이공계 출신에 아버지의 가르침, 우파 정치인이라는 점이 닮았다는 이유다. 또 다른 롤 모델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다. 근대 영국을 40여 년간(1558~1603) 통치하면서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나는 조국과 결혼했다”고 공언한 점, 유난히 애국주의를 강조하고, 왕족이면서도 빈민 복지정책에 애쓴 점, 해양강국을 강조한 점 등이 박 대통령과 닮았다.
박 대통령의 리더십을 보면, 총리 스타일보다는 여왕 스타일에 가깝다. 총리의 경우 수평적 리더십에 익숙한 반면 여왕은 수직적 리더십에 익숙하다는 점에서 총리와 여왕의 리더십은 크게 다르다. 그만큼 두 스타일은 충돌할 소지가 다분하다. 박 대통령과 유 전 원내대표의 충돌도 수직적 리더십과 수평적 리더십의 충돌로 보는 시각이 있다.
수직적인 상명하복이 체화된 박 대통령의 시각에서 볼 때, 유 전 원내대표와 비박계 의원들의 태도는 불경스럽기 짝이 없었을지 모른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은 그런 박 대통령을 향해 “용상에 앉아 대감들을 호통치는 제왕을 연상케 한다. 현대판 왕정이 부활했다”고 비판했다.
친박계의 한 핵심 인사는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 박 대통령과 정면으로 맞서서 정치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서 이회창 전 총재, 박희태 전 국회의장, 강재섭 전 대표, 박세일 전 의원, 김종인 전 경제수석, 이상돈 전 중앙대 교수, 전여옥 전 의원에 이어 유 전 원내대표의 이름을 거론했다.
절대 권력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배신’이다. 로마의 영웅 시저가 최측근이자 양아들인 브루투스의 칼에 찔려 죽은 것을 흔히 배신정치의 원조로 꼽는다. 시저는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탄식하며 배신의 정치에 치를 떨며 쓰러졌다. 그런데 ‘죽은 시저’와 ‘죽인 브루투스’는 서로를 배신자라고 비판했다. 시저는 자신이 아들처럼 대하며 믿었던 브루투스를 배신자라고 생각했지만, 브루투스는 시저가 독재정치를 펴며 조국 로마를 배신했기 때문에 그를 죽였다고 항변했다. ‘독재자 시저’ vs ‘공화주의자 브루투스’의 프레임을 만든 것이다.
유 전 원내대표도 사퇴의 변을 통해 “내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1항의 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는 ‘박 대통령이 민주공화국에 반하는 정치를 했기 때문에 유승민이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마치 ‘독재자 박근혜’ vs ‘의회주의자 유승민’의 프레임을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유 전 대표가 의회 권력이 마침내 왕의 권력을 이긴 17세기 영국의 명예혁명을 내심 염두에 뒀던 건 아닐까?
대통령 ‘느림’ vs 서울시장 ‘빠름’
박근혜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 흔히 언급되는 것이 ‘청와대 18년’이다. 구중궁궐 속에서 무려 18년간이나 공주로 지냈으니 오죽 폐쇄적이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간과한 부분이 있다. 바로 청와대 18년에 이은 ‘은둔 18년’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980년부터 1998년 대구 보궐선거를 통해 정계에 입문할 때까지 무려 18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보냈는지는 인간 박근혜의 삶과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대목이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독신 박근혜는 세상 사람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매일 밤 장문의 일기를 써내려갔다. 아버지를 배신한 자들에게 치를 떨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 이때 중국의 ‘손자병법’이나 ‘육도삼략’ 같은 병서(兵書)를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때로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간편복 차림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가 있는 전남 강진과 같은 유서 깊은 지역이나 명승 고찰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18년과 은둔생활 18년을 합해 장장 36년 동안이나 ‘닫힌 생활’을 해온 셈이다. 닫힌 삶, 닫힌 생활, 닫힌 인간관계가 몸에 뱄기 때문에 오히려 열린 삶, 열린 생활, 열린 인간관계는 불편하고 어색할 법하다. 박근혜 리더십을 이해하는 데 이 36년 세월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특히 은둔생활 18년 동안 박 대통령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내공을 강화했으리라.
어떤 위험 상황이 닥쳐도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고, 어떤 돌발 상황이 생겨도 눈도 깜짝 않는 안정성은 박근혜 리더십의 최대 장점으로 꼽힌다. 여성답지 않은, 아니 남성을 훨씬 능가하는 그의 내공은 2012년 12월 대통령으로 등극하는 힘이 됐다. 박 대통령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참모들, 박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친박계 의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유 전 원내대표를 끌어내리게 만든 힘의 원천도 내공에서 비롯된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5년 내내 설화에 시달리며 좌충우돌하던 것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노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 이리저리 너울거리는 ‘버드나무’였다면, 박 대통령의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는 ‘바윗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장점인 리더십의 안정성은 집권 3년차인 요즘 가장 큰 단점으로 비판받는다. 흔히 소통 부족, 불통 논란을 빚는 박근혜 리더십의 폐쇄성은 당·정·청 간의 대화 부족, 여야 간 대립으로 이어졌다.
폐쇄적인 리더십은 흔히 느림의 정치, 침묵의 정치로 연결된다. 폐쇄성과 느림과 침묵은 이웃사촌과도 같다. 굳게 닫혀 있으니 느릴 수밖에 없고,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이 2014년 세월호 사건과 성완종 사건, 메르스 사태에 이어 유승민 파동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또한 비판받은 것은 느림과 침묵이었다. 세월호 사건 당일 7시간 공백 논란과 메르스 사태 때 드러난 정부의 늑장 대응, 그리고 총리와 정무수석 인사의 난맥상과 오랜 공백이 단적인 사례다.
메르스 사태 때 박원순 서울시장의 오후 10시 30분 심야 기습 기자회견은 정부의 느린 대응과 대비되면서 많은 사람의 호응을 받았다. 대통령의 ‘느림’ vs 서울시장의 ‘빠름’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박 시장의 지지도는 순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침묵의 정치는 한때 권위의 정치로도 통했다. 태양왕으로 불린 루이 14세는 워낙 말이 적어서 한번 입을 열었다 하면 그 자체가 명령이요 권위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박 대통령은 좀 더 빠르고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오늘날 21세기 감성 시대에는 닫힘보다는 열림, 느림보다는 빠름, 침묵보다는 설득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박 대통령의 심리적 롤 모델이 엘리자베스 1세라면, 인간적 롤 모델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일 것이다. 1960~70년대 18년 동안 통치한 박정희 대통령은 왕이나 다름없는 절대 권력자였다. 딸은 왕이나 다름없는 아버지를 보고 자랐고,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 차 안에서 딸에게 제왕학을 전수했다.
하극상 콤플렉스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22세의 어린 나이에 영부인 역할까지 해야 했다. 공주에 이어 왕후 역할까지 체험한 것이다. 그 후 35년의 세월이 흘렀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관저에 돌아가면, 어두운 밤, 전깃불을 모두 끄고 촛불을 켜놓고 홀로 책이나 자료를 보거나 사색에 젖는다고 한다.
과거 대통령들은 관저에서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 사담을 나누거나 술자리를 갖기도 했지만, 박 대통령은 홀로 지낸다. 특히 여성 대통령이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청와대 관저는 금남(禁男)의 집이 되고, 외부인 출입은 완벽하게 차단된다. 그야말로 구중궁궐이다.
박근혜 리더십을 유심히 살펴보면, 아버지의 리더십과 유사한 부분이 의외로 많다.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이 2인자를 두지 않는 ‘디바이드 앤드 룰(Divid · Rule)’ 통치 방식, 이른바 분할통치 방식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정일권 국무총리, 김종필 국무총리, 차지철 경호실장과 같은 막강한 실세들이 있었지만, 2인자로 불릴 만하면 도중하차하거나 한직으로 밀려났다.
김종필 총리의 경우, 자의반타의반 후계자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기춘 대군’으로 불리며 왕실장으로 통했지만, 실제로는 청와대의 3인방에게 견제를 당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김기춘’ vs ‘청와대 3인방’의 견제구도는 40여 년 전 아버지 시절 ‘김종필’ vs ‘공화당 4인방’의 견제 구도를 연상시킨다.
김무성 대표의 경우, 과거 박 대통령의 당 대표 시절 2인자로 떠올랐지만, ‘친박계에 좌장은 없다’는 당시 박 대표의 말 한마디에 힘이 빠져버렸고 이후 멀어졌다. 최근 유 전 원내대표에 대한 찍어 내리기도 2인자 차단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 전 대표는 ‘박근혜 없는 대구·경북’에서 빠른 속도로 자파 세력을 구축하면서 자기 정치를 해왔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김 대표와 투톱을 이루며 당내 비박 세력을 규합하면서 차기 대권을 향한 행보를 해왔고, 이것이 박 대통령을 분노케 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하극상 콤플렉스라고 할까?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은 5·16군사정변이라는 하극상을 통해 권력을 잡았고, 10·26사태라는 하극상을 통해 세상을 떠났다. 그 때문에 박 대통령이 하극상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배신은 단순히 배신 자체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하극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조기에 그런 조짐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친위 쿠데타설
최근 유승민 파동을 보면, 1971년 집권 여당이던 공화당의 항명파동이 떠오른다. 당시 김성곤, 길재호 의원 등 공화당 실세 4인방은 박정희의 지시를 무시하고 국회에서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켜버렸다. 여당 실세 국회의원들이 천하의 박정희에게 항명한 것이다. 노발대발한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4인방을 박살 내고 일부는 아예 정계를 떠나게 했다. 급기야 다음해인 1972년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청와대가 국회를 완벽하게 장악한 것이 바로 유신체제였다. 대통령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금배지를 달아주는 유정회 국회의원이 생겨난 것도 이때였다.
혹시 박 대통령도 과거 아버지 시절의 4인방처럼 유 전 원내대표를 그대로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강하게 밀어붙였으며, 이후 유신체제 못지않은 파격적인 정치격변을 도모하려는 건 아닐까? 대통령의 탈당이나 친박계 신당처럼 말이다.
실제로 최근 정가에는 ‘박근혜 친위 쿠데타설’이 나돈다. ‘김무성 포위론’과 ‘여당발 신당론’ 등도 등장했다. 이 같은 설(說)은 내년 4월 총선 ‘4당 구도론(친박계 새누리당과 비박계 신당, 친노계 새정치연합과 비노계 신당의 4분파 대결구도)’으로 이어진다. 소문의 진원지로 지목되는 곳은 청와대와 친박계다.
절대 권력자가 종종 구사하는 통치전략 가운데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민심정치가 있다. 박 대통령은 과거 야당 대표 시절, 천막당사 생활을 하며 붕괴 위기에 직면한 한나라당을 구했다. 선거의 여왕은 손에 붕대를 친친 감고 시장통을 돌아다녔으며, 2006년 지방선거의 신촌 유세 때는 테러를 당해서 얼굴을 60바늘이나 꿰맸다. 높은 곳에 있는 여왕이 낮은 땅에 내려와 직접 사람들을 만날 때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것을 민심정치라고 한다.
박 대통령은 민심정치에 아주 능하다. 유 전 원내대표를 공격할 때도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정무수석을 통한 간접정치 대신 국무회의라는 공개적인 자리를 통해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국익을 외면하고 자기 정치에 몰두하는 정치인을 선거에서 심판해달라고 호소했다.
민심정치는 포퓰리즘 성격을 띤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민심정치의 원조는 1940년대 남미 아르헨티나를 통치한 후안 페론 대통령의 부인 에바 페론이다. 그는 서민 대중을 위한 복지정책을 펴고, 위기가 닥치면 그들에게 직접 호소했다. 태국의 탁신 전 총리도 서민 대중을 위한 복지정책에 주력하고, 그들에게 직접 호소해 지지를 받았다. 과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도 어찌 보면 독재 정권의 부당함을 국민에게 직접 호소해 힘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은 직접 민주주의 시대가 아니라 간접 민주주의시대이며, 절차적 민주주의가 중요한 시대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허구한 날 정쟁만…’ 반감
박 대통령은 왜 여야를 싸잡아 비판했을까. 박 대통령의 6월 25일 발언을 보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권 전반에 대해 강한 불만과 불신을 드러냈다. 정치심리학자 라스웰은 지도자의 리더십을 크게 선동가형과 행정가형으로 분류했다. 선동가형은 문자 그대로 말 잘하고 변화무쌍한 정치인 스타일인 반면, 행정가형은 묵묵히 꼼꼼히 일하는 공무원 스타일이다.
박 대통령은 두말할 나위 없이 행정가형, 즉 공무원 스타일의 리더십에 해당한다. 이런 유형은 기본적으로 정치인을 좋아하지 않고, 행정부 우월주의를 지향한다. 박 대통령이 행정부를 견제하는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극도로 반감을 표시하며 거부권까지 행사한 이면에는 ‘말 많은 정치보다 일하는 행정이 더 중요하다’는 행정부 우월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도 막상 청와대에 입성하면 국회에 대해 ‘허구한 날 정쟁만 일삼는 집단’이라는 거부감을 드러냈는데, 박 대통령은 유달리 심한 것 같다. 박 대통령이 국회보다 행정부를 더 중시하는 경향은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은 면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 시절에도 정치싸움만 일삼고 부패한 정치권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졌고, 그런 감정이 5·16 군사정변으로 분출됐다. 그리고 집권 18년 동안 국회보다 정부를 중시했으며, 정치인보다 관료를 더 신뢰했다.
박정희-박근혜로 이어지는 부녀 대통령의 행정부 우위 모델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서 찾을 수 있다. 루스벨트는 1930년대 경제대공황과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의회 중심주의 시대에서 벗어나 백악관과 행정부 중심 시대를 활짝 열었다. 백악관의 조직과 규모를 확대 강화했고, 행정부 공무원들을 백악관에 파견 근무토록 했으며, 막강한 예산권을 백악관 휘하에 두었다. 다시 말해 대통령과 백악관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것이다.
루스벨트 정부가 사회복지 정책에 각별히 심혈을 기울인 점도 박근혜 정부와 비슷하다. 아쉬운 대목은 박 대통령은 불통의 정치인, 루스벨트는 소통의 정치인으로 대비된다는 점이다. 사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고집스럽고 고압적인 성격이었지만, 대통령이 된 뒤에는 다정다감한 노변정담과 빈번한 백악관 기자회견, 국민에게 편지 쓰기와 같은 이미지 연출을 통해 편안하고 민주적인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갖게 됐다. 박 대통령도 원래 성격이야 어찌됐든, 루스벨트처럼 이미지 연출을 통해서라도 자애롭고 통 큰 면모를 보여줄 수는 없을까.
최악의 인사 난맥상
그렇다면 박 대통령이 좋아하는 참모는 어떤 스타일일까. 박 대통령이 자서전을 통해 유일하게 짝사랑했다고 밝힌 남자가 있다. 바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상산 조자룡이다. 조자룡은 다른 장수들과는 다른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계보가 없다. 관우나 장비처럼 의형제도 없고, 휘하 장수도 없다. 항상 홀로 다니고 홀로 싸운다. 유비의 아들 유선을 구출할 때도 혼자 창을 휘둘렀다. 둘째, 말이 없다. 공석이든 사석이든 군말이 없고 오로지 결정된 사안을 따를 뿐이다. 유비를 보좌할 때도 장막 뒤에 숨어서 자신을 감추며 그림자 보좌를 한다. 셋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장수 대부분이 그렇지만 조자룡은 유난히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진에 뛰어든다. 그럼에도 조자룡은 전장에서 죽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박 대통령이 좋아하는 참모가 딱 조자룡 스타일이다. 계보 없고, 사심 없고, 목숨 걸고 충성하는 참모가 바로 박 대통령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나 황교안 국무총리 같은 검사 출신과 군인, 관료 출신이 해당될 것이다. 반면 박 대통령의 눈에 김 대표나 유 전 원내대표는 조자룡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박 대통령도 두려워해야 할 게 있다. 자칫 잘못하면 역대 대통령 중에서 최악의 인사 실패 대통령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점이다. 총리 잔혹사만 보더라도 그렇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총리 지명자인 김용준-정홍원-안대희-문창극-이완구-황교안 가운데 4명이 낙마하거나 불명예 퇴진했다는 것은 역대 최악이다.
정무수석도 그렇다. 청와대에서 잠깐이라도 근무해본 사람이라면 정무수석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를 잘 안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 때만 해도 정치적으로 가장 탁월하고 비중 있는 참모가 정무수석에 기용됐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서는 정반대다. 초대 정무수석이던 이정현 의원은 임명 3개월 만에 홍보수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60여 일간이나 정무수석은 공석이었다. 두 번째 정무수석은 정치 경험이 전무한 직업외교관 출신이 임명됐다가, 정무수석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 지속되다가 1년을 못 채우고 물러났다.
여왕보다 총리가 낫다
그다음으로 헌정 사상 최초로 여성 정무수석이 등장했다. 여야 의원들과 때로는 폭탄주를 마시고 밤샘 협상을 벌여야 할 정무수석에 젊은 여성 정치인을 배치한 것이다. 그마저 공무원연금 문제로 도중하차한 후 후임 현기환 수석이 임명될 때까지 두 달 가까이 공석이었다. 청와대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가 집권 후 4개월 가까이 공석이었다는 사실은 인사의 난맥상은 물론 소통시스템의 오작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당·청 간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박 대통령의 롤 모델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좋아하는 참모는 조자룡 스타일,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인사 실패다. 그렇다면 앞으로 박 대통령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해답이 나온다. 현실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보다 대처 전 총리나 메르겔 총리가 더 낫다는 조언은 ‘대통령이 수평적 리더십을 갖고 실용적인 행보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또 조자룡 스타일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친박계와 비박계를 가리지 말고 탕평인사, 통합인사를 단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두 가지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인사정책이다. 조만간 단행될 장관 인사와 내년 4월 총선 공천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공평하고도 열린 인사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박 대통령이 임기 5년의 반환점에서 심기일전해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줌으로써 성공한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