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출 부진, 내수 침체, 메르스 3중고
- 관광객 82% 급감…내수업종 전반에 충격파
- 정부, 경기 낙관했지만 빗나가…불신 고조
- 중기 15%는 이자 감당 못해…한계기업 급증
지하철 안내방송에 눈을 떴다.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낸다. ‘7월 8일 오전 6시 10분.’ 직장인들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아직 출근하기엔 일러 서울지하철 2호선은 한산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삼성역 5번 출구로 나오니 간밤에 내린 비 덕분인지 아침 공기가 신선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 잠기운은 곧 사라졌다.
중소기업 전문경영인(CEO) 조찬회 ‘굿모닝 CEO 학습’이 열리는 그랜드 인터컨티넨탈호텔 정문 앞으로 검은색 중 · 대형 승용차들이 줄지어 도착했다. ‘굿모닝 CEO 학습’은 중소기업 CEO들이 다양한 분야의 강사를 초빙해 강연을 듣는 조찬 세미나. 중소기업청의 경영혁신 인증기관 (사)한국경영혁신중소기업협회가 주최하는 행사다. 차에서 내린 이들은 행사장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기준 국내 중소기업 수는 341만8933개. 전체 기업의 99.9%를 차지한다. 중소기업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2002년 285만6913개에서 6년 만인 2008년(304만3169개) 300만 개를 넘어섰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던 2009년에도 306만6484개로 늘었다.
중소기업이 늘면서 종사자도 증가했다. 2002년 1015만4095명이던 중소기업 근로자는 2013년 1342만1594명으로 불어났다. 11년 만에 33%나 증가한 것. 반면 3130개로 전체 사업장의 0.1%를 차지한 대기업은 종사자도 전체 근로자의 12.5%(192만3266명)에 불과하다. 중소기업이 한국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정부 전망 못 믿겠다”
이날 행사장에는 중소기업 CEO 1000여 명이 모였다. 주최측이 준비한 자료집은 일찌감치 동나 중기(中企) CEO들의 열정을 체감케 했다. 최명동 한국경영혁신중소기업협회 전무는 “2011년 1월 첫 조찬회에는 73명이 참여했는데 4년 만에 전국에서 10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중소기업 CEO 조찬 세미나로 성장했다”며 “누군가 잠들어 있을 때도 중소기업 CEO들은 이처럼 경영혁신을 위해 자신을 연마한다”고 말했다.
행사장에선 CEO들이 업종별, 기업 유형별, 지역별로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눴다. 한 50대 CEO는 “중기들은 요즘 고사(枯死) 직전이다. 경기가 금융위기 때보다 더 나쁘다. 정부는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데, 나아지는 게 없다”며 고단한 표정이었다.
그의 말처럼, 경기를 바라보는 정부의 시각은 ‘낙관적’이다. 올 상반기 내내 그랬다. 기획재정부가 발간하는 ‘최근 경제동향’(그린북)은 1~3월 ‘전반적인 내수 회복세가 미약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4월 8일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우리 경제가 산업생산 등 주요 지표가 반등하며 경기회복 흐름이 재개되고 있다”고 밝혔다.
최 부총리의 경제 낙관론은 5월에도 이어졌다. 5월 11일 기자간담회에서 “경제회복 강도에 대한 이견은 있지만 경기가 나아지고 있다”며 “경제성장률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인 3.3%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전망했다. 올 2분기 경제성장률에 대해서도 “1% 성장률 달성이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정부의 시각과 기업 체감경기는 다르다. 6월 30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5년 6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 및 경제심리지수(ESI)’에 따르면 제조업의 6월 업황 BSI는 66으로 5월(73)보다 7p 하락했다. 2009년 3월 56을 기록한 이후 6년 3개월 만에 최저치다. 이는 세월호 참사 여파가 반영된 지난해 5월(79)과 6월(77)보다도 낮다. BSI는 기업이 체감하는 경기 상황을 지수화한 것으로 수치가 100 이상이면 경기를 낙관적으로 보는 기업이 많다는 뜻이다.
기업이 이처럼 ‘곡소리’를 내는 이유는 다양했다. 합성섬유업체를 운영하는 여성 CEO L씨는 이렇게 경영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환율보다 무서운 복병 ‘중국’
“우리 회사는 전체 매출의 반 이상이 해외영업에서 나오는데, 계속되는 수출 부진 탓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엔저와 유로화 약세 영향으로 원화 강세가 이어지면서 2012년 80억 원이던 영업이익이 지난해엔 48억 원으로 뚝 떨어졌다. 한시도 예측할 수 없는 환율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엔저 현상은 2013년 이후 계속되고 있다. 2013년 11월 달러당 80엔대이던 엔화 가치는 현재 124엔으로 50% 이상 떨어졌다. 유로화 약세는 유럽중앙은행(ECB)의 양적완화와 초저금리 때문인데, 올 3월 유로존 기준금리는 역대 최저치인 0.05%를 기록했다. L씨는 “환율보다 무서운 복병은 중국”이라고 덧붙였다.
“환율은 정부가 적극 개입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중국 업체의 시장 잠식은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 업체들은 막강한 자금력과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연구개발(R·D)에 매진해 기술력과 산업경쟁력을 높였다. 요즘 중국 업체들을 보면 무섭다.”
7월 1일 산업통상자원부의 ‘6월 및 상반기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수출은 6개월째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6월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1.8% 감소한 469억 달러, 상반기 전체 수출은 5% 줄어든 2690억 달러에 머물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출 감소 폭이 줄고 있다는 점. 5월 -10.9%를 기록한 수출 감소폭이 6월 -1.8%로 호전된 것.
전체 산업생산 증감률도 4월보다 0.6% 줄었다. 올 2월 이후 3개월 연속 감소세다. 6월 30일 통계청이 발표한 ‘5월 산업활동동향’에 따르면 수출 주력품목인 반도체(-7.9%), 자동차(-3.5%), 화학제품(-4.3%)의 하락폭이 컸다. 특히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4월보다 0.7%포인트 하락한 73.4%를 기록했고, 재고율은 6년 5개월 만에 최고치(127.3%)를 나타냈다.
통계청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첫 확진 환자가 5월 20일 발생했지만, 메르스가 경제에 미치는 여파가 6월에 본격화하면서 5월 지표에는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메르스 이전부터 수출과 생산지표가 하락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경기가 회복하고 있다”던 정부의 진단은 ‘눈 가리고 아옹’이었을까.
정부가 호언장담하던 올해 경제성장률 3.3% 달성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7월 9일 한국은행은 2.8%로 하향 조정했다. 한은의 1월, 4월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각각 3.4%, 3.1%였다. 6개월 만에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0.6%포인트 추락했다. “정부의 경제 전망이 산업 현장과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한 CEO는 “기업이 시장을 분석하고 산업 동향을 파악할 때 기초 자료로 삼는 것이 정부의 경기 진단”이라며 “정부가 산업 현장과 괴리된 분석을 내놓으면 기업의 연간 생산계획도 어그러지고, 정부 신뢰도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속이 타들어간다”
오전 6시 40분. 조식이 나올 무렵 마주 앉은 50대 CEO가 불쑥 말을 꺼냈다. 여행사를 운영한다는 그는 “속이 타들어간다”며 답답해했다.
“방한 일정을 잡아둔 중국, 필리핀 관광객들이 대부분 여행을 취소했다. 엔저 현상에 메르스까지 겹치면서 외국인 관광객 발걸음이 일본으로 향하고 있다. 여행사의 연간 매출 규모는 7~8월에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정말 난감하다.”
그의 여행사를 통해 지난 6월 한국여행 상품을 예약한 외국인 관광객은 158명. 대부분 중국인인데, 이들 중 156명이 메르스 때문에 여행을 취소했다. 제주도 여행 상품을 예약한 2명은 9월로 여행 일정을 늦췄다. 예약 취소율은 98%.
하지만 그가 우려하는 건 메르스가 아니다. 일시적으로 고객이 줄고 장사가 안 돼 매출이 떨어지는 건 참고 버텨내면 되지만, 더 큰 문제는 메르스 여파로 발길을 끊은 외국인 관광객을 향후 다시 한국으로 유도할 방안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자금이 넉넉한 대규모 여행사는 반값 이벤트를 실시하거나 다른 산업과 연계한 패키지 상품으로 분위기 반전을 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소규모 여행사는 그럴 형편이 안 된다. 7~8월 성수기를 놓친 상황에서 무리하게 저가 상품을 마련할 경우 장기적으로 내상(內傷)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정부의 긴급자금 지원 방안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특히 관광산업 진흥을 위해 정부가 외국인 관광객 여행자보험을 들어주는 정책은 ‘무용지물’이라고 했다. 당장 외국인 관광객 신규 예약이 없는데, 여행자보험 혜택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겠지만, 이런 방안이 외국인 관광객을 다시 모으는 데 효과를 발휘할지는 의문”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한국여행업협회에 따르면, 7~8월 여행을 목적으로 한국 패키지 관광상품을 예약한 외국인 관광객은 20만2541명. 전년 동기 대비 82% 감소했다. 국가별로는 중국인이 가장 많이 줄었다. 지난해보다 84%(81만628명→13만2132명) 감소했다. 이래저래 타격을 입은 국내 여행업계가 내수경기 침체를 부를 가능성도 크다. 한국여행업협회가 추정하는 여행업계의 손실액은 1085억 원. 외국인 관광객이 국내에서 하는 쇼핑, 먹을거리와 엔터테인먼트에 지불하는 비용까지 고려하면 충격이 여행업계를 넘어 내수업종 전반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다.
15%가 ‘한계기업’
강연은 오전 7시가 넘어서 시작했다. 김한얼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강연 주제는 ‘지속 가능한 성장, 파괴적 혁신이 해답’. 김 교수는 “과거엔 큰 기업이 작은 기업을 시장에서 쫓아낸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아니다”며 “파괴적인 혁신으로 백화점을 대체한 월마트의 사례처럼 작은 기업이 큰 기업을 넘어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백화점이 시내 A급 상권에 매장을 낸 데 비해 월마트는 땅값이 저렴한 변두리에 창고형 매장을 지었다. 그 결과 백화점에서 파는 것과 동일한 제품을 더 저렴한 가격에 팔 수 있게 돼 약진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CEO들은 김 교수의 강연을 경청했지만 표정은 썩 밝아 보이지 않았다. 서울 구로구에 소프트웨어회사를 차린 청년 CEO는 “주로 애플리케이션(앱)을 제작하는데, 요즘 앱 시장 상황이 좋지 않다. 앱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데다, 소수의 앱이 시장을 지배하는 ‘승자독식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앱은 대기업 인수합병(M·A) 대상으로 거론된다”고 전했다.
3년차 CEO라는 그는 ‘현실의 벽’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가 올리는 한 달 매출은 회사를 빠듯하게 운영해갈 수준이라고 한다. 사무실 임차료 내고, 직원 급여 주고, 영업비를 지출하고, 각종 유지비와 공과금을 내면 남는 게 없다. 그나마 사업 초창기니까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직원 급여일이 돌아오는 게 무섭다.
한국은행이 6월 30일 내놓은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기업 수익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지난해 기업 매출액은 전년 대비 1.5% 하락했다. 매출액 영업이익률도 2013년보다 0.4%포인트 떨어진 4.3%에 불과했다. 1000만 원어치를 팔면 수익은 43만 원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수익으로 이자 비용을 부담하지 못하는 한계기업도 증가하고 있다. 외부감사 대상 기업 중 3년 연속 영업이익이 이자 비용에 못 미친 한계기업 비중은 지난해 기준 15.2%(3295개)였다. 2009년에는 2698개(12.8%)였다. 지난해 중소기업의 한계기업 비중은 15.3%로 대기업(14.8%)보다 높았다. 중소기업의 15%가 이자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한 도서관 시스템 개발업체 CEO는 “지난해 말 중소기업중앙회가 2015년 경영환경을 대변하는 사자성어로 ‘필사즉생(必死則生)’을 선정했다”며 “이순신 장군은 아니지만 ‘필사즉생’ 자세로 살아남아야 한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산다.’ 중소기업 CEO들의 절박한 심정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