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기관투자자 대표해 이재용 부회장 만나
- ‘지배구조 취약=오너 지분 부족’으로 이해하면 안 돼
- 이해상충에 둔감한 기업 경영에 큰 우려
- 국민연금,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위한 역할 해야
‘신동아’는 한국 기업들의 이러한 고민을 주제로 박유경(46) 네덜란드연기금자산운용(APG) 아시아지배구조 담당이사를 인터뷰했다. 그는 6월 초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의 공격이 개시되자마자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에는 찬성하지만 합병 비율에는 반대한다. 그러나 엘리엇과의 연대는 없다”고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 바 있으며, 7월 8일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만나 삼성 지배구조 개선 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엘리엇 공격 이후 이 부회장이 외국인 투자자를 직접 만난 것은 박 이사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 전 현대차그룹은 이사회 내에 독립적인 투명경영위원회(Governance Committee)를 설치하기로 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인물이 바로 박 이사이기도 하다. 홍콩에 상주하는 그와의 인터뷰는 7월 10일과 13일, 이틀에 걸쳐 전화로 이뤄졌다.
“지금이 지배구조 개선 適期”
▼ 홍콩에 있는 외국인 투자자 30~40곳의 대화 창구 역할을 맡아 그 일환으로 이 부회장을 만났다고 들었다. 홍콩의 외국인 투자자는 어떤 곳들인가.
“APG와 같이 장기투자를 하는 기관투자자들은 투자 대상 기업의 지배구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ACGA(Asia Corporate Governance Association)는 그러한 투자자들의 모임이다. 세계 주요 연기금뿐만 아니라 블랙록, 스테이트 스트리트 등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들도 ACGA의 회원이다. 회원사 100여 곳 중 30~40곳이 특히 지배구조 관련 투자 철학이 강한데, 내가 한국인이니까 삼성과의 대화 창구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일본 기업 창구는 일본인이 맡는 식으로 서로 십시일반한다.”
▼ 그들이 삼성에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지배구조를 개선하라는 것인데, 비단 한 기업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주주 관여 활동을 개시하면 프로토콜상 그 내용을 공개할 순 없다. 양해해달라.”
이들 외국인 투자자의 요구 내용은 삼성물산이 이 부회장과 박 이사의 회동 이틀 후 발표한 ‘주주친화 추진방향 구체화 방안’에서 읽힌다. ‘합병 삼성물산’은 주주 권익 보호를 위한 사외이사 3명과 외부 전문가 3명으로 거버넌스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거버넌스위원회 소속 사외이사 1명과 외부 전문가 1명이 주주 권익 보호 담당위원으로도 활동한다. 사외이사 4명으로 투명경영위원회를 구성한 현대차보다 한발 더 나간 셈이다.
▼ 삼성과 엘리엇 간의 이번 분쟁을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 기업 스스로 자신이 주주를 위한 경영을 하고 있나, 기업의 지배구조가 글로벌 위상에 맞는가 등을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고 본다. 현재 한국의 대표적 기업들은 3세 경영체제로 전환하는 시점에 있다. 이들이 앞으로 짧게는 30년, 길게는 50년 기업을 책임질 텐데, 이번 일이 자신의 경영 철학을 길고 넓은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 지금이 한국 기업이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좋은 시점이라는 뜻인가.
“그렇다. 이 부분과 관련해 외국인 투자자들의 기대가 크다. 왜냐하면 할아버지, 아버지와 달리 3세들은 해외유학 등 글로벌 경험이 많다. 따라서 이들이 앞으로 경영 전면에 등장하면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기대가 굉장히 크다.”
▼ 지배구조, 즉 ‘거버넌스 전도사’ 같다.
“기관투자자에게 지배구조는 매우 중요하다. 기관투자자들은 좋은 지배구조를 가진 회사에 투자하고, 지배구조가 미흡한 기업에는 좋은 사례를 제공하며 함께 개선해나가려고 노력한다. 이런 흐름이 세계, 그리고 아시아 자본시장에 있는 거다.”
“한국 株總 권한 너무 작다”
국내에선 ‘지배구조가 취약하다’는 것이 곧 ‘지배주주의 지분이 적다’는 것과 동의어가 되곤 한다. 박 이사는 “그렇게만 여기면 발전의 여지가 없다”며 “지배구조란 시장 참여자가 각자 제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측정하는 척도”라고 강조했다. 시장 참여자란 기업 경영진과 이사회, 주주, 그리고 각종 법률과 규제 등 사회적 시스템까지 포괄한다.
▼ 지배구조 측면에서 한국의 법체계를 평가한다면.
“어떤 것은 선진국 수준으로 좋고, 어떤 것은 많이 뒤처져 있다. 예를 들어 기업 자산이 2조 원 이상이면 이사회 멤버를 구성할 때 50% 이상을 사외이사로 해야 하는 것이나 감사위원을 주총을 통해 따로 뽑도록 한 것 등은 오히려 선진국보다 더 센 규정이다. 반면 주총의 권한은 너무 작다. 이사회가 대부분의 안건을 처리하는데, 그런 이사회조차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곳이 많다. 이 때문에 주주로서 속수무책일 때가 자주 있다.”
▼ 주주의 역할도 지배구조 구성에 중요하다?
“주주는 주총에 반드시 참여해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 필요하면 회사에 따끔하게 충고해야 한다. 한국의 기관투자자들은 이런 역할에 소홀하다. 나라마다, 기관투자자마다 행동강령, 즉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가 있어 거기에 따라 활동한다. 기관투자자는 수익률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본시장 전체의 건강성에도 기여해야 한다. 국민연금을 비롯해 한국의 기관투자자들이 이런 면에서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박 이사에 따르면 APG의 스튜어드십 코드에는 ‘투자 기업의 주총에 참여해 충분한 정보에 근거해 주권을 행사’하고 ‘최소 분기에 한 번씩 주권 행사 내역을 공개’하도록 돼 있다. 주주 권리를 행사할 때는 ‘환경, 사회, 지배구조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그는 “네덜란드 공무원연금과 사학연금이 합쳐진 것이 APG인데, 연금 가입자들이 원하는 것은 좋은 주주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며 “APG 스튜어드십 코드에 따르면 주총에서 기권할 때 그것이 의사결정 회피 수단이면 안 된다. 이해상충을 피하는 것 등 구체적 목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상자기사 참조).
▼ 한국에선 지배주주의 입김이 막강하다.
“한국 지배구조 문제를 거론할 때 가장 심각하고 걱정되는 것이 바로 이해상충의 문제다. A라는 자산운용사와 B라는 대기업이 있다고 하자. A가 B의 주주라면 기관투자자로서 건강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B가 워낙 큰 기업이다보니 ‘이러면 B가 싫어할 거야’라고 지레짐작하며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의사결정을 할 때 이해관계자를 배제하지도 않는다. 선진국은 물론 홍콩, 싱가포르에선 내부거래를 승인할 때 지배주주나 계열사 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독립적 주주들로만 의결한다.”
▼ 한국에서 내부거래 승인을 이사회에서 처리한다.
“홍콩이나 싱가포르에선 주총 안건이다. 심지어 한 계열사가 다른 계열사 소유 건물에 입주한다거나 모(母)회사로부터 업무용 컴퓨터를 구입한다거나, 건물 보안 서비스를 계열사에 맡길 때에도 주총 안건으로 올려 지배주주 지분을 제외하고 의결한다.”
▼ 그렇게 되면 주총 안건이 너무 많아지는 것 아닌가.
“물론 이러한 정기적 안건은 1년에 한 번, 한꺼번에 주총에 올린다. 먼저 이사회가 안건이 합당한지 여부를 판단하고, 다시 주주의 승인을 받는 거다. 계열사끼리 합작회사를 세운다든지 공동 투자한다든지 하는 중요 사안은 두세 군데 외부기관에 조사를 의뢰해 그 보고서를 주주들에게 제공한다. 이왕이면 같은 계열사 건물에 입주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임차료를 말도 안 되게 비싸게 낼 가능성도 있지 않나. 주주들의 이러한 불안, 의심을 해소하는 뜻에서 주총에 올리는 것이기도 하다.”
지주회사 전환 이후 ‘리스크’
삼성을 비롯한 대규모 기업집단들의 당면 과제는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는 것이다.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역시 순환출자를 해소하고 종국에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려는 작업의 일환이다. 박 이사는 “순환출자 구조에서 지주회사 체제로 이동하는 것은 지배구조를 안정화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면서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그 과정을 밟아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번 엘리엇 사태도 결국 합병 과정의 합리성, 투명성 문제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경영진, 주주, 상대 회사의 주주 등 여러 주체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절해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각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이사회 멤버들은 주주 이익을 대변하라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다. 그런데 한국 기업 이사회들은 실질적으로 권한을 이양 받은 적이 없다. 이사회 문제는 앞으로 매우 중요해질 거라고 본다. 이슈가 불거지면 이사회가 경영진과 함께 배임 혐의로 고발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지주회사 체제에서 이사회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는 얘기로 들린다.
“지주회사로 전환했다고 지배구조가 완성된 게 아니다. 지주회사가 지배주주로서 자회사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자회사가 지주회사에 로열티를 과도하게 지급한다거나, 손자회사를 많이 만들어 레버리지를 너무 올린다거나 하는 문제들이 이미 한국 지주회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게 차후 큰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특히 한국 지주회사들이 챙겨가는 막대한 로열티를 걱정하는 분위기다.”
▼ 합병 비율을 결정할 때 주가만 고려하도록 한 현행 자본시장법을 어떻게 보나.
“취지는 이해한다. 주가란 객관적 지표이고, 양쪽 회사의 부당한 협상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병비율까지 정해서 합병을 선언하는 것은 아쉽다. 홍콩에선 양쪽 이사회가 합병 계획을 발표한 다음에 어느 정도 시간을 갖고 시장이 이 새로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두고 본다. 그 이후에 합병 비율을 정한다.”
7월 10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관련 내부 투자위원회를 열었다. 언론은 국민연금이 이 사안을 외부 자문기구인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에 상정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합병에 찬성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한 국민연금의 공식 입장은 “투자위원회를 열어 의결권위에 상정할지 여부를 결정했지만, 7월 17일 삼성 주총 전에 그 내용을 공개하지는 않는다”는 것. 이미 6월 초에 ‘반대’ 의견을 분명하게 피력한 APG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경영권 지키려면 ‘순리경영’을”
운용 자산규모를 보면 APG는 520조 원, 국민연금은 470조 원으로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삼성물산 지분은 국민연금 11%, APG 0.3%로 크게 차이가 난다. 박 이사는 6월 초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내가 전권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APG의 스튜어드십 코드에 따라 의사 결정을 하는데, 그에 따르면 주주가치를 훼손하는 딜(deal)에는 찬성하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 국민연금은 투자위원회를 열기 전 여러 외부기관에 이번 합병 성패에 따른 주가 흐름 예상을 의뢰했다.
“국민이 낸 연금을 운용하는 투자자로서 당장의 주가 흐름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참고로 APG의 투자 철학을 소개하고 싶다. APG도, 기업도 사회 시스템의 일부다. 사회가 건강해야 기업이 건강하고 연금 시스템 또한 건강할 수 있다. 그래야만 APG가 지속적으로 수익을 얻어 연금을 지급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 시장도 건강해야 한다. 한국 기업들의 후진적인 지배구조로 인한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기업 주가 저평가)’가 최소 20%가 된다는 게 내 판단이다. 이를 해소하는 데 국민연금이 연금 기관투자자로서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 엘리엇을 계기로 ‘헤지펀드 공격에 취약한 한국 기업들의 경영권 방어 수단 도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헤지펀드의 공격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런데 경영권 방어 수단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나머지 주주들이 방어에 힘을 보태는 것이다. 승부는 결국 주총에서 난다. 아무리 실력 좋은 헤지펀드라도 다른 주주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 APG를 비롯한 기관투자자들은 헤지펀드보다 훨씬 더 장기적인 투자자다. 성격상 헤지펀드를 좋아할 수 없다. 우리에겐 기업이 장기적으로 지속 성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경영권을 방어하려면 기업 경영을 순리적으로 하면 된다. 이사회가 제 역할을 잘하고 주주 권리가 보장되고 기업이 성장하면 장기투자자들은 행복하다. 헤지펀드 편을 들 이유가 없다. 헤지펀드의 주장이 맞는 방향이면 받아들이면 된다. 무리한 공격이면 다른 주주들이 나서서 반대할 것이다.”
▼ 외국인 투자자에게 한국 기업은 매력적인 투자 대상인가.
“불행히도 그렇지 못해 걱정이다.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고 경제적으로 활력이 떨어져 있다. 경제 펀더멘털을 지탱하는 요소들, 즉 인구구조, 빈부격차, 중소기업 경쟁력, 그리고 외부 경쟁 국가 등을 모두 합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존재한다.”
“상법이 좌파인가”
박 이사는 영국 베어링증권 등 외국계 투자은행의 서울사무소에서 애널리스트로 10여 년간 일하다가 홍콩으로 옮겨가 2009년 APG에 합류했다. 그는 “금융시장 경력을 살리면서도 사회에 이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그의 행보는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좌파적’이다.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 해결, 현대중공업 노동자 사망 문제 해결을 촉구했고, 올해 초 KB금융지주가 이사회를 새로 구성할 때 경제개혁연대(소장·김상조 한성대 교수)에 주주 추천권을 위임해 이병남 LG인화원 원장을 사외이사로 임명하는 데 ‘공’을 세웠다.
▼ 노동운동가와 일부 ‘활동 영역’이 겹치는 듯하다.
“나는 투사가 아니다(웃음). 연간 수익률 8%를 목표로 어떻게든 돈을 잘 불려야 하는 기관투자자의 일원이다. 인권을 중시하고 환경을 해치지 않으며 지배구조를 중시하는 투자. 이것이 글로벌 장기투자자들의 메인스트림이다.
연금이 뭔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자금이다. 미래 세대가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당연히 환경을 해치는 투자를 해선 안 된다. 근로자들로부터 연금을 받는 우리는 사망자가 많이 나오는 기업에 투자할 수 없다.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는 영업할 수 없어 기업 펀더멘털에 문제가 생긴다. 지금 문제를 해결하면 리스크를 없애는 거다. 이게 좌파나 우파와 상관 있는 이야기인가. 주주추천권 위임도 상법에 나와 있다. 상법이 좌파인가(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