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국민성, ‘금수저 계급’ 다 혐오스러워”
- “하라는 대로 했는데 돌아온 건 좌절뿐”
- “세상은 하층민만 두들겨 팬다”
- “아직 열정, 에너지 남아 있다는 뜻”
헬조선은 말 그대로 ‘지옥(hell) 같은 한국(조선)’이라는 의미다. 헬조선 관련 내용은 여러 사이트의 게시판에 활발하게 올라온다. 그러다 최근 ‘한국 비하의 허브’를 자임하는 인터넷 사이트 ‘헬조선’이 개설되면서 열기가 더 뜨거워졌다.
초기에 누리꾼들은 헬조선이 ‘일본풍’ 같다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지금은 별다른 저항 없이 수용한다. 한 네티즌은 커뮤니티 ‘MLB파크’에서 “무슨 일만 나면 네이버에서 헬조선 운운하는 것들이 있어 보기 싫었다. 그러나 최근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하층민 두들겨 패면서 가는 거니까 최악인 듯. 진짜 헬조선 아닌가”라고 했다.
헬조선의 유사어로 ‘불지옥반도(혹은 ‘지옥불반도’)’도 자주 사용된다. 불지옥반도는 ‘디아블로’라는 온라인 게임에 등장하는 ‘불지옥’과 한반도의 ‘반도’를 합친 말이다. 디아블로 게임의 난이도는 일반, 악몽, 지옥, 불지옥의 4단계로 나뉘는데 불지옥은 거의 게임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이 밖에도 대한민국의 ‘대’를 ‘개’로 바꾼 ‘개한민국’, 김치와 나라를 뜻하는 ‘스탄’을 합성한 ‘김치스탄’, 한국 탈출을 뜻하는 ‘탈조선’, 메르스 사태를 비꼰 ‘동방역병지국’ 등이 자주 쓰인다.
헬조선 담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로 젊은 층으로, 이들은 우리 사회를 다섯 계급으로 나눈다.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똥수저다. 한 네티즌은 최상류층 계급인 금수저와 저소득 서민계급인 똥수저의 일생을 이렇게 비교한다.
금수저 vs 똥수저
“유치원 시절 금수저는 영어유치원을 다니지만, 똥수저는 어린이집에서 교사에게 폭행당한다. 초 · 중 · 고교 시절 금수저는 어학연수를 떠나지만, 똥수저는 PC방에서 게임을 한다. 대학 시절 금수저는 화려한 파티를 즐기지만, 똥수저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대학 졸업 후 금수저는 낙하산으로 좋은 직장에 취업하지만, 똥수저는 면접관에게 ‘90도 폴더 인사’만 한다. 은퇴 후 금수저는 해외여행하면서 노후를 즐기지만, 똥수저는 판잣집에서 쓸쓸히 늙는다.”
또 다른 네티즌은 ‘디스위키’에서 탈조선을 언급하면서 “금수저는 비행기로 탈출하지만, 흙수저는 한강으로 탈출한다”고 냉소했다. 헬조선을 지지하는 청년들은 “우리는 똥수저다. 똥수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국가와 기성세대가 하라는 대로 다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이 나라는 똥수저에게 지옥이다”라고 말한다.
금수저와 똥수저의 양극화를 비교하는 내용엔 어김없이 ‘죽창을 달라’는 댓글이 달린다. 죽창은 동학혁명 때 사용된 빈자(貧者)의 무기인데, 이를 국가와 금수저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형상화하는 것. 그런데 ‘죽창운동’은 자학적으로 흐른다. 청년들은 “죽창으로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서로 찌르자”고 한다. 다 같이 ‘평등하게’ 죽자는 것이다. 이들은 “기성세대에 복수하기 위해 애를 낳지 않겠다” “자살해야 우리의 아픔을 알아줄 것”이라는 자학성 발언을 자주 한다. 이 역시 죽창운동의 연장선으로 비친다.
“지독한 자기파괴적 포기”
최근 생겨난 인터넷 커뮤니티 ‘헬조선’은 우리나라를 비하하는 게시물만 전문적으로 다룬다. 필자는 헬조선 운영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얼마 뒤 응하겠다는 답신이 왔다. 운영자 김모(30) 씨는 “광고회사에 다니면서 이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 헬조선 커뮤니티를 만든 계기는.
“이미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말해왔다. 그런데 이들 커뮤니티의 회원들은 정치적 기준으로 한국을 평가한 측면이 있다. 정치적 측면을 배제하고 한국의 현실을 바라보자는 목적으로 헬조선을 열었다. 5월 27일 공식 오픈 했는데 매주 10~20%씩 방문자가 늘고 있다. 현실의 부조리를 느낄 수 있는 게시물을 주로 업로드한다.”
▼ 헬조선 같은 자학적 표현이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다른 나라에도 어느 정도 있는 문제를 너무 과장하는 건 아닌가.
“지금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날 노력을 안 한 죄 말고 다른 죄가 있나. 이런 상황에서 냉소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면 폐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사실 헬조선에 대한 비판은 기득권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것밖엔 안 된다. 기득권자들은 원정출산, 이중국적 취득, 국적 포기를 선도하며 국부 유출에 힘쓰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에겐 ‘너희는 열심히 굴러라’라고 말한다.”
▼ 죽창운동은 어떤 취지에서 벌이는 건가.
“‘죽창을 달라’는 불평등을 토로하는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청년들은 불평등에 대한 제도적 해결책을 요구하지 않고 그저 죽창을 달라고 한다. 이는 지독할 정도로 자기파괴적인 포기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구성원들에 의한 사회의 공멸, 그 모든 상징이 ‘죽창을 달라’는 메타포(metaphor, 비유)에 녹아 있다고 보면 된다.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포기하게 만들었는지는, 지금까지의 한국 사회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국인은 늘 호갱”
헬조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문화와 국민성도 비난한다. 다음은 관련 게시물 중 일부다.
“시급 5600원 알바에 만족하고, 정시퇴근 못하는 회사에 만족하고, OECD 자살률 1위에 법은 죽어도 안 지키는 미개한 문화에 죽어라고 공부만 하고, 인서울 4년제 대학 못 가면 쓰레기 되는 그런 사회에 순응하면서 헤헤거리세요.”
“술도 와인 같은 고급 술 아니라 알코올에 물 탄 저급 술(※소주)이 국민 술”
“황금만능주의에 외모지상주의에 밤늦게까지 술 처먹고 성매매나 해대는 천박하고 값싼 문화”
“눈물콧물 흘려가며 매운 음식 먹는다. 미각이 마비돼 음식마다 고춧가루를 뿌려대고 새빨갛게 먹는다.”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지만 한국은 중국의 꼬붕국이어서 중국이 하지 말라는 거 그대로 따른다. 이런 한심한 나라가 또 있을까.”
“충돌 테스트 통해 신차의 안전성을 보여준다면서 내수용이 아닌 수출용으로 테스트를 진행했다. 이 나라에서 내국인은 늘 호갱(※어수룩해서 이용하기 좋은 손님) 취급받는다.”
“소치 올림픽 때 김연아 금메달 돌려달라고 몇 시간 만에 125만 명이 청원했다. 이런 건 한국인만의 특이 현상이다. 2002년 동계올림픽 안톤 오노 반칙 때도 미국대사관에 경찰병력이 배치됐다. 한국은 과거부터 강대국들에 치여 살았다. 이로 인해 폐쇄적 피해의식과 민족주의가 결합해 스포츠를 통한 대리만족 전체주의로 연결된다.”
헬조선 신드롬의 큰 줄기 중 하나는 탈조선, 즉 이민이다. 온라인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비슷한 경향성이 나타난다. 2014년 6월 취업 포털 인크루트의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3명 중 1명은 이민을 준비한 적이 있거나 준비 중이라고 했다. 직장인 97%는 이민을 생각해봤다고 했다.
미국 시민권 문제를 다루는 공개 포럼 사이트 ‘아이삭브록소사이어티’에 따르면 한국인의 국적 포기 비율은 아시아 선진국과 유럽 국가를 포함한 17개국 중 가장 높다(2014년 4월). 인구 10만 명당 스웨덴은 1.66명, 뉴질랜드는 4.5명, 미국은 28명, 일본은 89명이 국적을 포기하지만 한국은 1680명이 국적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탈한국’이 압도적 수준이다. 왜 한국을 떠나려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민을 준비 중인 4인을 인터뷰했다.
“여기선 노답”
서울 모 대학 무역학과에 재학 중인 박모(21) 씨는 “한국에선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씨는 북유럽 국가로 이민 갈 계획이다. 그는 “국내 제조업은 한계에 이른 것 같다. 나는 ‘스펙’도 좋지 않아 한국에서 일자리를 못 구할 것 같다”고 했다.
전남 지역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는 김모(31) 씨는 미국 의사면허를 취득해 이민 갈 계획을 세웠다. 김씨는 “직업 전망이 불투명하다. 개업해도 대형 병원에 밀릴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사회안전망이 너무 허술하다. 조금만 삐끗해도 나락으로 떨어진다”고도 했다.
미국의 주립대학에서 컴퓨터공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박모(30) 씨도 미국에 정착할 생각이다. 그는 “이 분야 박사학위가 있으면 영주권이 나온다. 한국에선 IT 인력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하루 12시간 넘게 일을 시킨다”고 했다. 미국과학재단(NSF)의 ‘2014 이공계 지표’에 따르면, 미국에서 이공계 박사학위를 취득한 한국인 4868명 중 44.6%는 귀국할 계획이 없다고 했다.
직장인 김모(35) 씨는 한국 문화가 싫어 이민을 준비 중이다. 김씨는 “나이대별로 취업, 결혼 등 해야 할 일이 딱딱 정해져 있다.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호주 같은 나라는 최저시급(1만1935원)이 높아 파트타이머로 살아도 생계를 꾸릴 수 있다”고 말했다.
12년 넘게 이민 정보 카페를 운영하는 새미 리 SYL글로벌컨설팅 이사는 “이민을 준비하는 청년이 증가하고 있는데, 요즘은 복지제도가 잘된 나라가 인기를 끈다. 직종별로 이민 스터디 모임을 갖기도 한다”고 전했다.
이런 풍조는 책 출간으로도 이어졌다.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가 그것. 장 작가는 “인터넷 뉴스의 댓글에서 ‘한국이 싫다, 이민 가고 싶다’는 이야기들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다.
“요즘 한국에선 개인적 성공이든 사회적 변혁이든 너무 멀게 느껴진다. 많은 청년이 ‘여기선 노답(답이 없다)’이라는 생각에 빠지는 것 같다.”
韓 헬조선 vs 日 달관세대
헬조선으로 대변되는 한국 비하와 탈한국 현상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은 “자국을 집단적으로 비방하는 건 외국에선 드문 일이다. 부풀리기 좋아하는 네티즌 성향 탓이 크다”고 분석한다. 황장수 미래경영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나라를 균형감 있는 시각으로 볼 필요는 있다. 하지만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같은 선진국 클럽에도 가입했고 아시아에선 톱클래스 수준의 민주화도 이뤘다. 청년들의 좌절감은 이해하지만 그렇게까지 비하할 만한 나라는 아니지 않나. 요즘 북유럽에선 반(反)이민을 기치로 하는 극우 정당이 득세하고 있다. 그런 나라로 이민 간들 주변인으로 머물 확률이 높다.”
인터넷에서 반국가 · 반사회 풍조가 확산되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헬조선 신드롬엔 이해할 만한 여지가 있다고 보는 이도 있다. 다음은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교수의 분석.
“과거엔 저항 수단으로 분신을 택했다. ‘헬조선’이나 ‘죽창을 달라’는 분신의 순화된, 전자화한 형태처럼 비친다. 절망적 사회에 대한 청년들의 마지막 몸부림 같다. 헬조선이 불거진 것은 계층 이동의 역동성이 사라진 데다 취업이나 복지 같은 사회안전망도 기대할 수 없고, 청년들이 국가에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된 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젊은 층 사이의 이민 열기에 대해 이택광 문화평론가는 “이광수의 ‘무정’엔 선진국에 대한 동경이 잘 드러난다. 서구적 가치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에선 모든 세속적 욕망과 꿈의 성취를 포기한 채 작은 만족에 안주하고 사는 이른바 ‘달관세대’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한 문화평론가는 “달관세대에 비하면 그나마 헬조선이 나은지도 모른다. 열정이나 에너지가 아직 남아 있기에 불만을 표출하는 것 아니겠나”고 애써 자위했다. 그러나 한 일본 전문가는 “일본에선 비정규직 급여가 높아 비정규직으로도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 달관하는 것이다. 한국 청년들의 상황이 훨씬 엄혹하다”고 말한다.
헬조선은 ‘반국가적 행위’일까, 아니면 ‘숨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구조요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