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현재의 한일 경색은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일본 국민 사이에 확산되는 혐한(嫌韓)·반한(反韓)의식이 양국 정부의 노력으로 해소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일부 일본 언론과 출판계의 의도적인 혐한 기사 양산 탓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상대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몰이해와 오해의 확산이다.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지난해 6월호 ‘신동아’에 소개한 일본 만화가 야스히코 요시카즈 씨가 주최한 ‘혐한과 반일’ 제하의 강연회(6월 13일)를 준비하면서 필자는 어이없는 ‘일본 민심’ 현상을 발견했다. 그것은 한국인의 역사적 ‘한(恨)’에 대한 무지와 오해였다. 일본인들은 경제적·군사적으로 ‘대국(大國)화’하는 한국이 그 ‘한’을 풀기 위해 일본에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평소 한국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약간의 호의를 갖던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혐오감과 불안감을 갖게 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직후 한 3 · 1절 연설 내용이 일본 언론에 보도되면서부터였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와 동반자가 되어 21세기 동아시아 시대를 함께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역사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한국인에게는 부자연스럽지 않은 내용이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설문에는 한일관계사에 대한 치명적인 오류가 담겼다. 일본의 혐한 언론은 이를 절호의 소재로 이용했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는 구절을 문제 삼았다.
이 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논리적·사실적인 전제가 있어야 한다. 한반도는 한 번도 일본에 해를 끼친 적이 없는 ‘순결한 피해자’여야 하는 것이다. 유사 이래 대외전쟁을 반복해온 것이 인류 역사인지라 그러한 전제는 성립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본 식민사학의 주요 논리인 ‘한국인은 주변에 휩쓸리며 당하고만 살아왔다’는 한국사의 ‘타율성’을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이 강조의 의미로 사용한 ‘천년’은, 일본 혐한 언론을 통해 ‘천년이 지나도 일본에 대한 한(恨)은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로 확대됐다. 그 때문에 연설의 다음 문구인 “양국의 미래 세대까지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세대 정치지도자들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는 완전히 묻혀버렸다. 박 대통령 연설은 일본에서 ‘천년의 원한(千年の恨み)’으로 통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은 ‘그런 식의 논리라면 우리도 ‘원구(元寇)’에게 당한 지 천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것부터 사죄하라’ 식의 분노를 내뱉는다.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한을 풀기 위해 한국은 일본에 무력적으로 복수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왜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일까. 그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일본의 ‘대륙으로부터의 침략 위협’에 대한 공포의 역사, 그리고 한(恨)에 대한 양국의 언어적·문화적 개념 차이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