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호

20대 리포트

문·사·철의 이중생활

전공 책 덮고… 코딩·마케팅 공부, 로스쿨 준비

  • 입력2018-06-0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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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업대란’ 문·사·철 탈출 행렬?

    • “인문학 해선 마음의 양식만 쌓일 뿐”

    [동아DB]

    [동아DB]

    서울 K대학 국문학과 4학년 최모(22) 씨는 중간고사 기간에 도서관 열람실을 찾았다. 그런데 최씨는 전공인 문학책은 옆에 쌓아둔 채 노트북을 열어 코딩 연습에 열중했다. 가방 속에도 코딩 관련 책이 가득했다. 전달부터 최씨는 매주 수요일 모이는 코딩 스터디 그룹에 참여한다. 그는 “전공 공부보다 코딩 스터디 과제를 더 열심히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모임 멤버들은 컴퓨터공학과 무관한 문과계열 학생이 대부분이다. 최씨는 “요즘 코딩이 취업에 필수라고 하니까”라고 말했다. 전공 강의 5과목을 수강하면서 스터디를 병행하는 게 버겁다는 최씨는 “이렇게라도 해야 취업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정통 문과라고 할 수 있는 문·사·철에서 취업을 위해 전공과 별개인 공부에 열중하는 학생들이 요즘 눈에 많이 띈다. 문·사·철은 문학, 역사, 철학을 뜻한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의 고등교육기관 졸업자 취업통계조사에 따르면, 공학계열 취업률은 71.6%, 사회계열은 64.7%를 기록했지만 인문계열은 57.6%로 유일하게 60%를 넘지 못했다. ‘문사철’ 전공생들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높은 취업 문턱을 의식한다. 그러다 보니 취업을 위해 전공과 무관한 공부를 하거나 스펙을 쌓는 것에 익숙해 있다. 

    서울 K대학 사학과 4학년 박모(22) 씨는 사학과 전공 강의 6과목을 수강하면서 마케팅 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금융권 취직을 계획 중인데, 관련 지식과 스펙을 쌓기 위해선 마케팅 학회 활동은 필수라고 한다. 박씨는 매주 금요일 학회 세미나를 위해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개인 시간을 온전히 투자한다. 매일 오후 7시 학회 멤버들과 모여 짧으면 11시, 길면 새벽 2~3시까지 세미나를 준비한다고 했다.

    “녹음기 틀어놓고 졸아”

    그의 책장에는 회계 원리, 마케팅 로직과 관련된 책이 빼곡했다. 사학 관련 책은 한 권도 없었다. 매일 늦은 시간까지 세미나 준비를 하느라 수면 시간이 부족해진 바람에 수업 시간에 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그는 “수업 시간에는 주로 녹음기를 켜놓는다. 학회 세미나 준비 때문에 수업을 제대로 못 들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보통 대학 내 학회들은 학교 시험 전 2주간 세미나 휴식기를 가진다. 그 2주는 박씨가 유일하게 전공 공부를 하는 때라고 한다. 하지만 밀린 수업 녹음을 정리해 익히다 보면 2주도 빠듯하다. 박씨는 “전공 공부에 딱히 의미를 두지 않는다. 취업에 불리하지 않게 학점만 잘 받으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하루 8시간 로스쿨 공부”

    문·사·철 전공생들은 순수하게 학문만을 배울 수는 없는 실정이다. S대학 철학과 4학년 고모(22) 씨는 요즘 로스쿨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고씨는 철학을 배우고 싶어서 철학과를 선택했다. 철학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지만 고씨는 2학년 때부터 로스쿨 진학을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는 “전공 강의는 졸업에 필요한 최소로만 수강하고 나머지 학점은 법 강의로 채웠다”고 했다. 

    이번 학기에 고씨는 로스쿨 진학을 준비하는 같은 과 학생 4명과 함께 스터디 그룹을 조직했다. 이들은 매일 오전 8시까지 학교 열람실에 입실해서 법학적성시험(LEET)이나 공인외국어시험 공부를 시작했음을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을 통해 인증한다. 인터넷 강의를 목표치만큼 수강하는지 서로 체크해주고 모의고사 오답 노트를 상호 점검한다. 

    고씨는 “하루에 공부하는 10시간 중 로스쿨 공부에 8시간을 쓰고 있다”고 했다. 고씨는 최근 로스쿨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했고 인터넷 브라우저의 초기 화면도 이 커뮤니티 사이트로 바꿨다. 고씨는 “졸업장에만 철학과라고 찍혀 나올 뿐, 철학과 거리가 멀어졌다”고 했다. 

    전공 공부를 애물단지로 여기는 문·사·철 전공생들도 있다. D대학 사학과 3학년 한모(22) 씨는 올해 페미니즘 관련 상품과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업을 시작한 후 전공 공부에 들일 시간이 없다고 한다. 한씨는 “이번 수강 신청 때 출석 체크가 없는지 우선 고려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 세계사에 관심이 많았던 한씨는 대학원 진학도 고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석사 학위를 취득해도 취업의 문이 좁을 것이라 판단해 사업 운영으로 진로를 돌렸다. 그는 “사업이 내 본업이라고 생각한다. 전공 공부가 본업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전공 강의를 6과목이나 수강하지만, 중간고사 기간에도 한씨의 관심은 온통 사업에 쏠렸다. 최근 웹 기획과 구축을 배우기 위해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사무실에선 취미로 읽기 시작했다는 인문학 책 한 권 외에 문·사·철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인류엔 유익한 학문이지만…”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문·사·철 학생들의 ‘갈 길 찾기’는 계속된다. S대학 영어영문학과 3학년 최모(21) 씨는 최근 부동산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진로를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특징을 갖고 싶어 이 자격증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주중 학교 수업을 마치면 열람실에서 인터넷 강의로 공부하고 주말에는 학원에서 강의를 듣는다고 한다. 그는 “영어영문학과 학생들보다 유학 다녀온 타과 학생들이 영어를 훨씬 잘하더라. 문학은 배워도 마음의 양식만 쌓일 뿐”이라고 말했다. 최씨는 학교 공부와 병행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해서, 다음 학기에는 휴학계를 내고 자격증 공부에 매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휴학계를 내고 취업에 매진하는 전공생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S대학 철학과 배모(25) 씨는 지난 학기부터 휴학하고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CPA로 마음을 굳히고 나서 전공 공부는 뒤로 미뤘다”고 말했다. 또 다른 CPA 준비생 유모(24) 씨는 한국사학과 학생이다. 유씨는 “역사학이 인류에 유익한 학문인 건 알지만 역사 공부 덕에 내 삶이 실제로 좋아지진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자기 전공과 무관한 공부를 해야 하는 문·사·철 전공생들의 자기 전공에 대한 만족도는 형편없다. ‘알바몬’ 조사에 따르면, 인문계열 학생들의 전공 만족도는 41%로, 모든 계열 중 가장 낮았다. ‘잡코리아’ 조사에서 문과 출신 직장인의 67.9%는 전공을 살리지 못하는 직무에서 일한다고 답했다. 

    문·사·철 전공생 상당수는 취업에 직결되지 않는 인문학 공부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고 이로 인해 전공과 무관한 분야를 떠돌며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 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탐사기획보도’ 수강생이 박재영 교수의 지도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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