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과거시험을 공정하게 치르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많았다. 부자, 형제나 가까운 친척이 한곳에서 시험을 치르지 못하도록 시험장을 나누어 운영했고, 가까운 친척이 응시했을 경우에는 시관(試官)에 임명하지 않는 규정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시험장에서 벌어지는 각종 부정행위에 대해서도 치밀한 대책을 마련하고,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응시 자격을 박탈하거나 유배를 보내는 방법 등으로 엄하게 처벌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정행위는 끊임없이 일어났고 점점 그 수법이 교묘해지거나 대담해졌다. 과거시험의 부정행위 중 가장 공정성을 해치는 것은 출제자와 응시자가 서로 짜고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였다. 명종 13년(1558)에 있었던 사건을 보자.
정사룡은 과거시험의 문제로 낼 만한 것을 미리 발설하여 유생들에게 퍼뜨리고는 자신이 시관이 되자 실제로 그것을 문제로 냈으니, 그의 심보가 참으로 고약합니다. 그를 파직하소서. <명종실록 13년 8월 24일>
요즘도 국가에서 치르는 시험에서는 출제자가 누구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출제자가 누구인지 알면 시험 문제의 경향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정사룡은 홍문관 대제학으로 있었다. 홍문관 대제학은 국가의 문필(文筆)을 주관하는 자리이니 그가 시관이 될 것이 뻔한데 그런 사람이 제자들에게 예상 문제를 미리 얘기해주었다니, 이는 사전에 문제를 유출한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헌부에서는 계사를 올려 정사룡을 탄핵했으며 그 결과 출제자인 정사룡은 파직되고, 시험 문제를 미리 알아 2등으로 급제한 신사헌(愼思獻)은 급제가 취소됐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나 이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신사헌의 아들 신희(愼喜)가 임금에게 글을 올려 자기 아버지의 급제 취소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시험 부정이 드러나 급제를 취소한 것만으로도 이미 시험의 공정성이 크게 손상됐는데, 그것을 다시 뒤집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명종의 하교는 뜻밖이었다.
지금 신희의 상언을 보니, 신사헌의 급제를 취소한 일은 정황이 모호한 데가 있다. 원통함을 풀어주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기에 의금부에서 조사하여 사실을 알아내게 하였다. 경들은 그리 알고 있으라. <명종실록 13년 12월 6일>
도대체 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을까? 이 사건의 배후에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외숙인 이량(李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명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신사헌은 바로 이량의 심복이었다. 심복의 과거 급제가 취소되자 이량은 임금의 총애를 믿고 이를 번복하도록 일을 꾸민 것이다. 예상대로 명종은 의금부의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뒤 신사헌과 정사룡이 서로 내통한 단서가 없다고 단정하면서 신하들에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정 신하들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신사헌과 정사룡이 서로 내통한 정황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형장을 치며 신문한다면, 성상의 밝은 세상에 깊은 원망을 품게 될 것입니다. 정사룡이 당초에 신중하고 면밀하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이미 처벌을 받았으니, 이것만으로도 훗날 있을 수 있는 과거시험의 폐단을 없애기에 충분합니다. 그들의 진술을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은 성상의 결단에 달렸습니다. <명종실록 13년 12월 8일>
명종의 심중을 헤아렸는지 영의정 상진 등은 급제 취소를 번복해도 된다는 어조로 결정권을 다시 명종에게 넘겼다. 다시 조정 대신들에게 의견을 묻자 우의정 이준경(李浚慶)만 급제 취소를 번복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뿐, 나머지 신하들은 모두 눈치만 살폈다. 결국 명종은 석 달이나 시간을 끌며 여론의 추이를 살피다가 신사헌의 급제 취소를 번복해주었다. 이런 웃지 못할 상황을 두고 사관은 어떻게 평하였을까?
신사헌의 과거 급제를 취소한 것은 당시 조정의 여론으로 결정한 것이니, 자식이 원통함을 호소한다고 하여 고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대신은 자기가 한 말을 바꾸었고 대간은 그 일을 덮어 두고 있다가 다시 논의하여 결정한 뒤에야 나와서 간쟁하였다. 이런 식으로 나랏일을 처리하면 어떻게 국정의 올바른 방침을 정할 수 있겠는가? 구신(具臣)이라고 할 만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공정한 도리는 오로지 과거시험 하나에 달려 있다. 그런데 전시의 책문 시험에서 간사한 술책을 부렸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처음에는 정사룡이 재물을 탐내 부정을 저질렀고, 나중에는 심통원(沈通源), 이량 등의 무리가 신사헌의 자제를 꼬드겨 급제 취소를 번복해달라고 상소하게 하였다. 그런데 언관으로 있는 자들이 끝내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과연 나라에 제대로 된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명종실록 15년 4월 20일>
‘구신’,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자리나 채우는 신하라는 뜻이다.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다가 나랏일을 그르친 신하들을 비난하는 말인데, 특히 상진은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으면서 신사헌의 급제를 취소할 때나 취소를 다시 번복할 때 두 번 다 임금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관이 이렇게 비판한 것이다. 나라를 유지하는 기본은 ‘믿음’이다. 위정자가 공정함을 지키지 않고 편법과 사심으로 나라를 이끈다면 그 나라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를 막아낼 방법은 어디에 있는가? ‘자리를 제대로 지키는 신하’와 ‘자리나 채우는 신하’를 잘 분별해내는 데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