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호

캠페인 | 멸종위기종 ‘우리가 지켜줄게’

태안 천리포수목원

눈부시게 아름다운, 눈물 나게 고마운…

  •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18-05-30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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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잎의 안팎이 온통 붉어서 ‘불칸’(불의 신 불카누스에서 따왔다)이라 불리는 목련이 그리스 신화 속 사이렌처럼 관람객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수목원 탐방길 초입인데 사람들은 벌써 불칸의 요염한 자태에 반해 그 주위를 맴맴 돈다. 

    • 어디선가 들려오는 파도 소리, 갈매기 울음에 싱그러운 곰솔 향과 산새의 지저귐이 더해지니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다. 두 팔을 활짝 편 불칸 목련이 이렇게 속삭인다. 

    • “여러분 ‘목련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밀러가든 내에 있는 고 민병갈 원장의 흉상. 바로 앞에 그가 생전에 좋아했던 개구리 조각이 놓여 있다. 사진 왼쪽 목련은 레오나르드 메셀. [김형우 기자]

    밀러가든 내에 있는 고 민병갈 원장의 흉상. 바로 앞에 그가 생전에 좋아했던 개구리 조각이 놓여 있다. 사진 왼쪽 목련은 레오나르드 메셀. [김형우 기자]

      충남 태안 천리포수목원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설립자 고(故) 민병갈 선생이다. 그의 삶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192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웨스트피츠턴에서 태어난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는 1945년 미군장교로 처음 한국을 방문한 뒤 1953년 한국은행에 취직하면서 이 땅에 눌러앉았다. 여름휴가 때마다 만리포해수욕장을 즐겨 찾던 그는 1962년 인근 천리포 해변을 산책하다가 딸의 혼수 비용이 필요하니 야산 6000평을 사달라는 노인의 부탁을 들어준 것을 계기로 수도는 물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태안의 황폐한 모래땅을 조금씩 사들여 오늘날의 수목원을 조성하게 됐다. 1979년 한국인으로 귀화해 이름을 민병갈로 바꾸고 2002년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민 원장은 생전에 “내가 죽거든 묘 쓰지 마라, 묘 쓸 자리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어라”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차마 그를 떠나보낼 수 없었던 직원들은 수목원 내 비공개 지역에 그를 묻었고 10년 뒤 시신을 수습해 뼛가루를 ‘민병갈 목련’이라 부르는 태산목 리틀잼 아래 다시 묻었다.  

      한국 최초, 아시아 최초, 세계 열두 번째  

    천리포수목원의 다양한 목련 꽃 사진을 전시한 밀러가든갤러리(왼쪽)와묘목원. [김형우 기자]

    천리포수목원의 다양한 목련 꽃 사진을 전시한 밀러가든갤러리(왼쪽)와묘목원. [김형우 기자]

    서식지외보전기관으로 지정된 천리포수목원의 멸종위기식물 지정종.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가시연꽃, 노랑붓꽃, 미선나무, 매화마름. 미선나무는 개체 수 증가로 2018년 멸종위기종에서 해제됐다. [사진제공·천리포수목원]

    서식지외보전기관으로 지정된 천리포수목원의 멸종위기식물 지정종.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가시연꽃, 노랑붓꽃, 미선나무, 매화마름. 미선나무는 개체 수 증가로 2018년 멸종위기종에서 해제됐다. [사진제공·천리포수목원]

      1970년 한국 최초의 사립 수목원으로 등록된 천리포수목원은 2000년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에서 열두 번째, 아시아에서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받았다. 김용식 천리포수목원장은 “조성된 지 30년 만에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이 된 사례는 전무후무하다. 다른 식물원들은 적어도 1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천리포수목원은 2017년 말 기준 약 1만5900여 종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목련 750여 종, 동백 680여 종, 호랑가시나무 500여 종, 무궁화 300여 종, 단풍 250여 종 등 주요 5속을 집중적으로 수집 관리하고 있다. 천리포수목원의 전체 규모는 61만8000㎡(18만7000여 평)로 밀러가든, 무궁화원(에코힐링센터), 침엽수원, 목련원, 종합원, 낭새섬, 큰골 등 7개 지역으로 나뉜다. 수목원 조성 시 한꺼번에 부지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상황에 따라 매입하다 보니 7개 지역이 하나로 연결되지 못한 것이 아쉬운 대목이다. 

    천리포수목원은 설립 후 40여 년간 연구자나 후원 회원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의 정원’이었으나 2009년부터 밀러가든 6만8000㎡를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7개 지역 중 한 곳이라고 하지만 둘러보는 데 2시간은 족히 걸릴 만큼 넓디넓다. 설립자의 이름을 딴 밀러가든에는 남이수재원, 암석원, 동백나무원, 수국원, 습지원, 왜성침엽수원, 모란원, 겨울정원, 호랑가시나무원, 우드랜드, 억새원, 작약원, 마취목원, 노루오줌원 등 25개 주제정원이 있다. 탐방객들은 이 정원을 권역별로 묶은 솔바람길, 오릿길, 민병갈의 길, 꽃샘길, 수풀길, 소릿길을 취사선택할 수 있다. 



    봄에는 목련, 수선화, 동백, 삼지닥나무, 만병초, 마취목이 일제히 꽃잔치를 하고 여름에는 수국, 수련, 가시연꽃, 태산목, 상사화가 싱그러운 꽃향기를 몰고 온다. 가을에는 울긋불긋 옷을 갈아입은 닛사나무와 가을에 꽃을 피우는 가을벚나무, 매혹적인 향기의 목서가 수목원의 대표선수가 되고, 겨울에는 뾰족한 잎새 사이로 붉게 물든 호랑가시나무 열매가 탐방객을 반긴다.  

      살아 있는 화석 ‘공룡소나무’의 존재감  

    김용식 천리포수목원 제7대 원장. [김형우 기자]

    김용식 천리포수목원 제7대 원장. [김형우 기자]

      천리포수목원은 2006년 환경부의 서식지외보전기관으로 지정받아 매화마름, 가시연꽃, 노랑붓꽃, 미선나무(2017년 멸종위기종에서는 해제됐으나 산림청 지정 희귀 및 특산식물임)의 보전과 증식, 자생지 복원과 대체자생지 조성 사업을 펼치고 있다. 또 이들을 온실에서 보호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희귀·멸종위기식물 전시원을 따로 마련해 탐방객들이 직접 관찰하며 멸종위기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발적으로 보전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수목원 희귀·멸종위기식물 전시원에 가면 동백나무, 양치식물, 수련 등 이곳에서 자라는 식물의 현황을 한눈에 보여주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올레미소나무. 해외 희귀식물인 올레미소나무는 2억 년 전 중생대 쥐라기 때부터 생존해온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침엽수로 알려져 있으며 공룡의 먹이로 이용돼 ‘공룡소나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오랫동안 화석으로만 확인된 ‘절멸(개체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 상태였으나 1994년 호주 블루마운틴 올레미국립공원 관리자인 데이비드 노블 씨가 자생지를 발견한 뒤 세상에 알려져 2006년 이곳에 묘목 두 그루가 식재됐다. 또 일명 ‘노란 무궁화’ 황근은 무궁화 중 유일한 우리나라 토종식물이나 현재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2급, 적색목록 취약종으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1997년 이곳에서 국제목련학회 총회가 열린 데 이어 2020년에도 국제목련학회가 예정돼 있을 만큼 천리포수목원은 전 세계에서 목련 종이 가장 많은 ‘목련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목련천국’에서도 모든 목련이 안심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멸종 위험이 높은 생물의 분포와 서식 현황을 분류한 적색목록에 따르면, 실린드리카 목련은 야생에서 절멸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은 취약 단계, 로스트라타 목련은 취약보다 한 단계 높은 위기 단계, 제니 목련은 절멸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위급 단계로 분류돼 있다. 

    간혹 새로운 군락지가 발견되거나 개체 수 증식에 성공할 경우 등급이 달라지기도 한다. 미선나무가 대표적이다. 꽃 모양이 개나리와 비슷해 ‘하얀 개나리’로 불리는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고유식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했으나 적극적인 보호와 증식으로 개체 수가 늘면서 2018년 1월 멸종위기 생물 종에서 해제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멸종위기종은 자생지를 잃어버려 인간의 보호 없이는 ‘절멸’이 시간문제인 경우가 많다.  

      44년 전 인연, 41년 전 다짐  

      올해 2월 김용식 전 영남대 교수가 천리포수목원 제7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전북대 임학과를 나와 서울대 대학원에서 농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영국 왕립 큐가든에서 박사후 과정을 마친 김 원장이 천리포수목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4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그는 민병갈 원장과 서신 교환을 하다 1974년 7월 첫 휴가 때 천리포수목원을 방문했다. 제대 후 복학 때까지 10개월간 수목원에 머물며 집중적으로 식물을 공부했다. 

    김 원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영국에서 온 힐리어 씨 부부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민 원장과 함께 하루 종일 걸어다니며 이름표가 사라져 식별이 어려운 식물에 일일이 이름표를 새로 달아주는 모습을 보며 분류와 기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며 당시 힐리어 씨에게서 받은 낡은 식물도감을 꺼내 보여주었다. 책 하단 여백에 ‘1977년 3월 18일 작년 12월에 보내주셨던 걸 잃어버리고, 다시 Harold G. Hillier 씨로부터 받다. 그분의 뜻을 받들어 더욱 소중히 간직하고, 더욱 열심히 공부하기로 하자! 전북 농대 임학과 3학년 김용식’이라는 만년필로 쓴 메모가 적혀 있었다. 

    김 원장은 “수목원은 식물을 많이 모으는 일도 중요하지만 천리포수목원처럼 목련, 호랑가시나무, 무궁화, 동백, 단풍 등 대표 수종을 정해 집중적으로 수집할 필요가 있다. 특히 재배품종을 수집한 것은 식물의 부가가치를 내다본 민병갈 원장의 탁월한 안목”이라고 했다. 천리포수목원 7대 원장으로서 그의 첫 목표는 미국 코넬대, 국제식물원보전연맹(BGCI)과 손잡고 수목원을 관리하는 전문 석사과정을 개설하는 것이다. 

    목련은 봄꽃을 대표하는 꽃이지만 민병갈 원장이 잠들어 있는 태산목 리틀잼은 한여름에 꽃을 피우는 희귀한 목련이다. 피서철에 탐스러운 꽃송이를 피우는 목련을 보며 사람들은 아무 연고 없이 이 땅에 57년간 머물다 천리포수목원이라는 큰 선물을 남기고 떠난 민병갈 이름 석 자를 가슴에 새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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