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공정거래 등 사회적 책임 비즈니스 활동으로
남북경협으로 5년간 GDP 89조 증가 전망
경협 초기 인프라·건설·에너지 산업에 기회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 간 철도 연결이나 공동어로 등 경제협력 사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사진은 관광열차인 ‘평화열차 DMZ 트레인’. [파주=뉴스1]
하지만 양국 정상이 인정했듯 이제 시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1년을 맞이해 SNS에 올린 글에서 “핵과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지속 가능한 평화를 만들고자 한 1년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국민의 삶으로 보면 여전히 그 세상이 그 세상 아닐까 싶다”고 했다. 국민의 삶 가운데 가장 주요한 이슈 중 하나가 경제인데, 흥미롭게도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경제협력(경협)이 국민의 삶을 바꿀 새로운 모멘텀으로 떠오르고 있다.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고 핵 문제 해결과 평화에 한발 다가선다면 더욱 큰 진전이 있을 듯하다. 그런데 과거에 하던 대로 하면 될까. 놀라운 소설적 상상력이 다시 한번 필요한 때다.
“기업이 나서는 경협 돼야”
이미 이와 관련해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5월 8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세미나에서 최남석 전북대 교수는 남북 경제통합이 시장통합, 자원이용 확대, 사회적 갈등 경감 등으로 이어져 남한 국내총생산(GDP)이 0.81%포인트 추가 성장할 것으로 추정했다. 2020년부터 5년간 GDP 증가액은 약 89조4600억 원에 이르고, 일자리는 12만8000개가 생겨날 것으로 전망했다. 삼정KPMG는 경협의 초기 단계에서 인프라·건설·에너지 산업에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석기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부가 주도하는 경협보다 한국 기업의 진출 관점에서 기업이 나서는 경협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북경협에 대한 협의는 남북한 당국이 주도하겠지만 실제로 그것을 이행하는 주체는 민간기업이라는 것이다.과거 금강산 관광을 이끌었던 현대아산, 포스코 같은 제철기업, 고속철도 관련 기업인 현대로템, 발전사와 건설사들은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다. 주식시장에서도 이들 관련 기업의 주식이 관심을 크게 받고 있다. 현대아산은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 직후 북측으로부터 7개 SOC(사회간접자본) 사업권을 얻었다. 전력·통신·철도 사업, 통천비행장, 임진강댐, 금강산 수자원, 백두산·묘향산·칠보산 등 명승지 관광사업 등이다. 현대아산은 최근 현정은 회장을 위원장으로 한 남북경협사업 TFT를 가동했다.
평범한 사람들도 기대에 부풀어 있다. 심지어 철로로 서울에서 베를린까지 갈 수 있다는 가상 기차표(73만8000원)를 만들어 SNS상에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의 명산을 관광할 수 있을지 관심을 보이는 등산객도 많아졌다. 남북 정상회담에 비판적인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폭행한 김모 씨도 남북이 통일되면 북으로 넘어가 봉사활동도 하고 포클레인 자격증으로 돈도 벌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남북경협에 대한 기대감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10·4선언에서 합의된 사업 추진,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와 도로 현대화에 합의했다. 10·4선언은 자원 개발과 경제특구, 개성공단 2단계 개발, 농업과 보건의료, 환경보호 등의 협력사업 추진을 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이 담긴 USB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경제지도 구상은 남북 경제협력의 물리적·산업적 기반을 구축하는 사업으로 환동해 경제벨트, 접경지역 평화벨트, 환서해 경제벨트를 공동으로 개발하자는 내용이다.
김정은에 전달한 신경제지도 구상
5월 11일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동아일보 학술회의 기조연설에서 “한반도신경제지도 구상의 취지는 반도와 대륙을 연결, 한반도의 지정학적 이점을 살려 저성장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겠다는 것”이라고 밝혔다.물론 이 과정으로 진입하려면 비핵화가 진전되고 북한에 대한 유엔 제재가 완화돼야 가능하다. 또 이념·제도·인프라 등에서 매우 다른 구조를 갖고 있는 남북 경제가 과연 어느 지점에서 공통의 가치를 찾을 것이냐는 문제도 생각해봐야 한다. 한홍열 한양대 교수는 ‘한겨레’ 기고에서 ‘경협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아래 남한의 숱한 사회적 모순을 북한에 수출하는 꼴이 될까’ 걱정부터 앞선다고 했다. 그는 또 ‘남북경협은 개별 사업의 집합이 아니라 한반도 경제 전체를 발전시키기 위한 공동 전략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인트는 여기에 있다. 남북이 저마다 사회적·경제적·환경적 가치를 제고하는 방향으로 경제협력이 이뤄지면 이런 걱정을 덜 수 있지 않을까. 기왕에 문재인 정부는 사회적 가치(인권, 안전, 환경, 사회적 약자 배려, 양질의 일자리 창출, 상생·협력 등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가치)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이미 공공 영역에서 시작했으니 남북경협에도 적용해보는 것이다. 민간기업도 이윤 추구만으로 남북경협을 볼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제고를 동시에 염두에 두는 것이다. 그러면 북한 사회가 자본주의를 탐욕스럽다고만 여기지 않고 착하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북한은 지금 개방과 시장경제 요소 일부 도입 같은 변화를 내비치고 있는데, 양극화와 빈부격차로 인한 분열을 겪고 있는 남한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공동체에 대한 기여보다는 이윤 추구에 몰입해 있는 기업들의 민낯을 날마다 접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몇몇 재벌 기업만의 특성은 아니다. 김계환 산업연구원 국제산업통상본부장은 “대한민국 국민은 돈의 폭력에 시달렸고, 북한 주민은 국가의 폭력에 시달렸다. 양 체제가 동의할 수 있는 접점이 필요하다. 프랑스에선 기업의 근본 개념과 목적을 다시 법으로 정립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기업의 주인이 주주만이 아니라 노동자, 고객사, 지역사회, 지자체 등 이해관계자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하는 작업이다. 차제에 남북한도 기업의 목적을 다시 생각할 때다”라고 말했다.
평화를 위한 기업활동(B4P)
유엔글로벌콤팩트의 ‘평화를 위한 비즈니스’ 소개 자료. 인터넷 캡처
한반도와 같은 분쟁 지역에서 평화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비즈니스를 하자는 취지의 이니셔티브가 유엔에서 나오기도 했다. ‘평화를 위한 기업활동(B4P·Business for Peace) 개념이다. 이는 기업이 분쟁 지역이나 고위험 지역에서 유엔글로벌콤팩트(UNGC)의 10대 원칙에 따라 기업의 책임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10대 원칙은 기업 활동에서 인권 보호,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인정, 강제노동 배제, 아동노동 철폐, 환경책임, 부패 방지 등을 담고 있다.
B4P의 구체적 행동분야는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 △물, 주거지, 식량 등 기본 생활 여건 제공 △인적자원 개발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공정한 토지권 및 취득권 촉진 △수자원 및 천연자원 관리 △창업 및 일자리 창출 장려 △종교 및 문화 간의 이해 도모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미 글로벌 콤팩트 네트워크 코리아에 250여 개 기업 및 단체가 가입해 있는 만큼 향후 남북경협에 참가하는 기업들도 B4P 개념을 되새겨도 좋을 듯하다. 2014년 개성공단 입주 기업 3곳(삼덕통상, 나인JIT, 제이씨콤)도 B4P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UNGC에 가입했다.
유엔 지속가능개발목표 활용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남북경협에 유엔 지속가능개발목표(SDGs)를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개발도상국의 경제·사회 발전을 지원해 우호협력관계와 상호교류를 증진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개발협력 플랫폼으로 2016년 유엔에서 채택됐다. 17개 주요 목표는 기아 해결, 건강과 복지 증진, 양질의 교육, 양성평등, 깨끗한 물과 위생, 지속 가능한 청정 에너지, 좋은 일자리와 경제성장, 사회기반시설 구축 및 지속 가능한 산업화 증진, 책임 있는 소비와 생산, 기후변화 대응 등이다.“북한은 저개발국이다. 앞으로 국내 기업이 북한과 경협에 나설 때 유엔의 SDG 관점에서 기업 활동을 해나간다면 갈등을 최소화하고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는 차원이나 무조건적인 이익만을 생각하고 북한에 접근한다면 문제가 생길 소지가 많다. 인권이나 공정거래 등 사회적 책임에 입각한 비즈니스 활동이 전제돼야 남한 사회의 잘못된 기업 관행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혹여나 갑질 등 남한 기업의 잘못된 기업 행태로 남북관계가 경색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자원 개발, 철도 등 인프라 건설, 에너지·식량·의료 비즈니스도 SDG 시각에서 접근한다면 남한의 이익뿐 아니라 북한 사회의 역량을 제대로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최동주 숙명여대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장은 “SDG에 대해서는 각국 정부가 이행보고서를 2년마다 발표한다”면서 “남북경협에서도 SDG와 연계된 내용을 반영해 구체적인 이행 계획과 목표를 제시하면 북한도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이 혜택 80% 이상 받도록”
큰 틀만 갖춰진 정부의 신경제지도 구상에 대해선 각 연구기관에서 구체적인 방안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미 정상회담 이후 좀 더 구체적인 안이 나올 수 있고, 혹은 가을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 의제가 경협에 초점을 맞출 경우 그 후에나 세부안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문재인 정부의 남북경협은 특정 기업만 혜택을 보는 방식은 아닐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중소기업이 남북 경제협력 사업을 80% 이상 수행하고 그 혜택을 80% 이상 받도록 정부에 요청하고 있다”며 남북 경협에서 중소기업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사회적가치기본법을 발의한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남북경협을 사회적 가치 틀에서 봐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남북경협이 확대될수록 통일비용은 감소한다. 만연한 양극화가 아니라 공정하고 건강한 시장경제가 북한에 ‘수출’돼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반도 경제는 사회적 가치에 의한 공공성의 바탕 위에서 성장해야 한다. 그것이 성장의 열매를 한반도가 공유하는 것이며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것이다.”
고승철 작가의 소설적 상상력이 현실이 됐듯이 남북경협도 ‘사회적 가치’라는 새로운 접근법으로 현실화한다면 그 이익을 극대화해서 사회 전체가 고루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