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3일까지 ‘메이드 인 노스코리아’ 전시가 열린 영국 런던 하우스 오브 일러스트레이션의 입구. [이무경 제공]
미술관은 다행히 크게 붐비지 않았다. 주말에는 많은 관람객으로 인해 혼잡하다는 인터넷 홈페이지 공고를 보고 평일 오전에 찾아간 덕분이다. 2월 23일부터 5월 13일까지 하우스 오브 일러스트레이션에서 열린 ‘메이드 인 노스 코리아(Made in North Korea : Graphics from Everyday Life in the DPRK)’전(展).
지난 몇 년간 전 세계를 핵 공포로 몰아넣은 ‘악의 축’이자 ‘은둔의 나라’, 북한의 일상 이미지 전시라니. 북한의 이미지라고 하면 프로파간다 정치 선전화만 떠오른다. ‘북한’과 ‘일상’은 도무지 맞지 않는 짝이 아닌가. 외국 언론도 같은 맥락에서 이 전시에 대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었다. 아마도 이 전시는 북한 일상생활의 시각문화 콘텐츠에 관한 첫 번째 전시회일 것이다.
‘경제’에 집중된 북한 이미지展
북한 경제선전화 포스터. 이번 전시 도록에는 경제선전화가 실리지 않아, 다른 출처의 경제선전화를 소개한다. 왼쪽은 카탈리나 젤위거 수집품, 오른쪽은 ‘North Korean Posters-The David Heather Collection’(2008)에서 발췌.
갈색 벽돌이 고풍스러운 전시장 입구에 이 전시의 메인 포스터가 걸려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부인 이설주 여사와 인상이 매우 비슷한 여인의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인민들에게 더 많은 소비품을!’이라는 글자가 위에 있고, 그 아래에는 ‘1차 소비품’ ‘기초식품’이라는 설명과 함께 이 포스터의 진짜 주인공인 상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알록달록 고운 꽃무늬 옷감, 구두, 화장품, 보온병, 냄비, 그릇, 치약과 칫솔, 각종 장류…. 아마도 북한 주부가 바라는 위시리스트이자 꿈같은 선물들일 테지. 전시장에서 확인해보니 2005년(주체 92년) 북한의 연하장이다.
이 전시는 김정은 정권의 ‘경제 우선’ 선언처럼 보인다. 북한 정권 허락 없이는 포스터 한 장도 갖고 나오는 것이 어려운 현실에서 서구 언론에 노출되는 대규모 전시를 앞두고 주최 측이 북한 당국과 세밀한 사전 조율을 거쳤을 것이란 짐작은 어렵지 않다. 또한 보노는 25년간 북한 전문 여행사를 운영하며 북한과 크고 작은 문화 이벤트를 함께 운영한 경험이 있는 친북 인사다.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 ‘경제’에 집중된 북한 이미지전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이 전시가 북핵 위기가 한창 고조됐던 지난해에 기획됐다 하더라도 북한 당국은 이미 ‘경제 집중’으로 정책 선회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정문을 열고 아트숍을 거쳐 오른쪽 문을 통과하면 전시장. 한 직원이 관람객에게 사진 찍지 말라는 주의를 주고 있었다. 경제선전화, 상품포장지, 상표, 지도, 우표, 연하장, 만화책 등과 함께 평양 시내를 저속 촬영한 동영상도 상영되고 있었다.
이 전시에서 다루는 비주얼 이미지가 주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후반의 것들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 집권기(2011~)를 제외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대는 보통 네 시기로 나뉜다. 제1기(1945~1966)는 사회주의 건설기로 해방과 6·25전쟁, 그리고 이후의 복구 기간이다. 천리마운동이 이때 진행됐다. 제2기(1967~1979)는 김일성 유일체제 확립기이며,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1980년부터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까지가 제3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후 이어진 고난의 행군부터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까지가 제4기다. 북한 당국은 제4기 때 인민의 생필품 확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인민의 먹거리가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정치선전화보다 경제선전화 관련 이미지가 더 많이 제작됐다.
포스터는 가장 효과적인 정책 홍보 수단
북한의 생수, 맥주, 탄산음료수 상표와 낙지 통조림 상표. 북한에선 오징어를 낙지라고 한다. [‘Made in North Korea’전 도록 발췌]
모든 선전화가 손으로 그려진 것이 특이했다. 북한에서는 해마다 포스터 공모전이 열리고, 여기서 뽑힌 작품은 전국에 인쇄돼 나간다. 인터넷은 물론 TV방송 채널과 방송시간까지 제한된 북한에서는 포스터가 가장 효과적인 정부 정책 홍보 수단이다. 2006년부터 5년간 스위스 정부기구 직원 자격으로 평양에서 거주했던 카탈리나 젤위거(Katharina Zellweger)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2008년 국가 센서스를 홍보하는 포스터가 붙은 이후 모든 주민이 집에서 센서스 요원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며 북한에서 포스터의 중요성을 증언한 바 있다. 경제 구호가 적힌 선전화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결의와 희망에 찬 얼굴을 하고 당의 방침에 맞춰 각자의 노동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었다.
상품 포장지, 식료품, 맥주, 생수 등의 상표 디자인은 남한 기준에서 보자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지만, 마치 1970~80년대로 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정겨운 느낌도 들었다.
오방색 위주의, 약간 촌스러운 듯 보이는 이러한 상표 디자인은 구매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상품의 내용물을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처럼 보인다. 통조림의 경우 ‘닭고기’ ‘완두’ 식으로 크게 명칭을 쓰고 닭과 완두 그림을 그려 넣는 식이다. 북한에서는 오징어를 낙지라고 부른다는 것 또한 통조림 상표를 보고 알 수 있었다.
북한 상품 디자인은 포스터와 마찬가지로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그린 것이 대부분이며, 북한 전통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영감을 얻은 미학을 바탕으로 북한 정체성의 상징과 관련된 것이 많다. 백두산, 천리마, 락원, 평양, 천지 같은 명칭과 디자인은 품목을 막론하고 단골로 쓰인다.
무엇보다 관심을 끈 것은 맥주와 생수, 담배의 상표다. 특히 맥주는 남한에서도 유명한 ‘대동강맥주’를 비롯해 ‘룡성맥주’ ‘평양맥주’ ‘연한맥주’(라거) ‘봉학맥주’ 등 다양하다. ‘묘향산샘물’ ‘박연샘물’ ‘강서약수’ ‘백두산샘물’ 등의 생수, ‘룡성 배사이다’ ‘백두산 들쭉사이다’와 같은 탄산음료도 있다. ‘백두산샘물’ 라벨에는 ‘백두산샘물에는 사람의 몸에 필요한 여러 가지 미량원소가 포함되어 있어 물맛이 아주 좋고 건강을 증진시킵니다. 이 물을 마시면 소화가 잘되고 고혈압도 막으며 살결도 부드러워집니다’라고 국문과 영문으로 씌어있다. 아마도 외국인에게 인기 있는 품목인 듯싶다.
담배 브랜드로는 ‘천지’ ‘건설’ ‘평양’ ‘천리마’ ‘하나’ ‘백두산’ ‘락원’ ‘영광’ ‘붉은별’ 등이 전시됐다. ‘평양’과 ‘백두산’ 담배는 고급스러운 금빛 포장이 돼 있는 것으로 보아 고가인 것 같았다. ‘붉은별’ 담배의 주 소비층은 군인이고, ‘하나’는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해 출시돼 인기를 끌다가 지금은 판매되지 않는다고 한다.
애연가로 알려진 김정일은 금연 정책을 펼치기 위해 “담배를 못 끊는 사람은 3대 바보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이후 엘리트층에서 담배를 끊는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나머지 두 바보? 컴퓨터와 음악에 관심 없는 사람이다.
우표는 주로 선전화를 작게 만들거나, 랜드마크 건물들을 넣은 것들이다. 흥미롭게도 고(故) 다이애나비와 찰스 황태자가 등장하는 윌리엄 왕자 출산기념 우표 시리즈화가 있다. 북한이 외화 획득을 목표로 우표를 많이 발행하는 소위 ‘우표 남발(stamp pandering)’ 국가임을 확인하게 하는 전시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우표는 수집가들에게 꽤 인기 있는 품목이다.
연하장은 보통 당이나 군을 주제로 한 정치적 이미지, 그리고 경제·문화·과학과 같은 소프트한 것으로 나뉘는데, 연령과 성별에 따라 고를 수 있게 한 것 같다. 각종 행사의 입장권으로는 북한의 5대 혁명가극, 스포츠경기,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아리랑축전 등의 입장권이 보였다. 서커스, 혁명가극, 스포츠와 같은 이벤트는 사회주의 체제가 인민에게 제공하는 대표적인 오락거리다. 북한에서 서커스단원이나 각종 가극단원들, 유명 운동선수 등의 위상이 매우 높다.
외국인 관광객 타깃 디자인은 세련돼
영상물 ‘ENTER PYONGYANG’에 등장하는 평양 시내 고층 빌딩 숲과 그 거리를 달리는 DHL 배송 차량. [이무경 제공]
특권층을 제외한 다수 인민의 공식 일상은 방송음악과 함께 아침 6시에 일어나, 오전 8시까지 일터에 출근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노동, 정치학습, 수면이라는 반복된 틀로 하루를 보낸다. 휴식은 오후 1~4시이고, 오후 8시부터는 저녁 학습과 비판 시간이 이어진다. 여성들은 낮에는 노동 현장, 퇴근 후 저녁에는 가사노동의 이중고를 겪는다. 아이들은 탁아소에 맡겨진다.
그러나 북한인민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떠받치는 것은 당의 배급이 아니라 ‘장마당’이란 건, 누구나 인정하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며 국가 배급 체제는 무너지고 장마당을 통해 모든 생필품이 조달되고 있다. 뇌물을 주고 출근 대신 장마당에서 장사하는 것도 주로 여성의 몫이다. 북한 물건 말고도, 중국제와 상표를 가린 남한 물건, 심지어 서구와 미제 물품까지 거래된다. 장마당이 통제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자 북한 당국은 2009년 말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이후 북한 돈은 기피의 대상이 되어 집집마다 주로 중국인민폐, 달러와 같은 외화로 현금 재산을 보유한다. 북한원화의 공식 환율은 2017년 12월 1달러당 105원 안팎이지만, 실제 시장거래 환율은 2018년 1월 공식 환율의 80배에 육박하는 1달러당 8000원가량이라고 한다.
북한 상품은 장마당에서 거래되는 남한이나 중국을 비롯한 외국 제품에 비해 디자인, 품질 등 모든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 그래픽디자이너들은 모두 미술대학 졸업 후 국가 소속인 전국의 사업장에서 일한다. 따라서 그래픽의 창의성이나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다만 외국 관광객을 상대로 한 호텔, 공항, 백화점 등에서 만날 수 있는 디자인은 내수용보다는 세련됐다. 북한이 처음으로 서구 여행객을 받기 시작한 1987년에는 평양 이외의 지역으로는 거의 나갈 수 없었지만, 1993년부터는 평양 이외 지역을 선택적으로 관광할 수 있게 됐으며, 심지어 함경북도 명천 칠보산에서는 홈스테이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서구 기업에 보내는 초대장’
2003년 북한 건국 55주년 기념식 초대장(왼쪽)과 북한의 기념품 편지봉투. [‘Made in North Korea’전 도록 발췌]
기념 엽서의 단골 이미지로 등장하는 평양 지하철역은 깨끗하고 호화롭기로 유명하다. 거대한 벽화가 곳곳에 장식돼 있고, 심지어 찬란한 샹들리에가 달려있다. 평양 지하철 속도는 시속 40km로 느린 편이지만, 지하철 요금은 5원. 전 세계 지하철 요금 중 가장 저렴하다.
마지막 전시실에서 상영된 ‘ENTER PYONGYANG’은 5분가량의 저속 촬영 영상으로 평양의 현재 모습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대동강을 배경으로 해 뜨는 평양 전경에서부터 출근하는 지하철역의 인파, 지하철 객차 내부, 한복 입은 행인들, 롤러스케이트장의 어린이들, 개선문 앞 차량 행렬과 전차 내부가 손에 잡힐 듯 촬영됐다. 화면 중에 보이는 디에이치엘(DHL) 배송차량은 북한이 서구 기업에 보내는 초대장 같은 느낌을 준다. 반면 대형 군사 퍼레이드나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이 영상에는 전혀 없었다.
전시장을 나와 킹스크로스 역을 지나치며 문득 이 전시가 ‘개혁과 개방’이라는 열차를 타러 가는 북한의 9와 3/4 승강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북한은 이미 그 마법 같은 승강장을 통과해 열차에 탑승한 것일지도 모른다. 바라건대 그 종착역이 부디 남북한 모두에 크나큰 ‘축복’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