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에 1만 장 보관…인생샷 마니아 증가
인물, 배경, 구도, 보정의 완벽한 조화 추구
“일상 인정받으려 몰두”
서울 봉천동 ‘샤로수길’에 위치한 카페에는 손님이 많았다. 가운데에 자리가 비었지만 홍씨는 앉기를 주저했다. 더 기다리기로 했다. 카페에서 홍씨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사진 촬영이다. 그녀가 포기한 자리는 사진을 돋보이게 할 아기자기한 장식이 부족했고 뒤쪽 창에서 비치는 햇빛이 사진을 어둡게 할 수 있었다. 홍씨는 “휴대전화 밝기 조절로 조금 해결할 수 있지만 일단 자리가 중요하다”고 했다.
디즈니랜드 세 번 방문
한번은 친구와 홍콩을 여행했다. 출국 전 홍씨는 상가에서 어깨가 드러나는 상의와 흰색 원피스를 구매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서였다. 홍콩 디즈니랜드에 간 첫날 비가 왔다. 두 번째 방문 땐 바람이 너무 강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행 일정을 조정한 후 세 번째 시도 끝에 사진 찍기 적당한 날씨에 그곳을 방문할 수 있었다. 홍씨는 “한이 서려서 디즈니랜드에서만 사진 몇 백 장은 찍은 것 같다”라고 했다.홍씨는 주위 사람들도 인정하는 ‘인생샷 마니아’다. 그녀에게 인생샷이란 인물, 분위기, 색감, 구도, 자연스러움, 적당한 보정의 완벽한 조화다. “몇 백 장에 하나 탄생할까 말까 한 사진”이라고 했다. 특히 사진을 찍을 때는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고속연사 기능을 자주 사용한다. 잘하면 오십 장에 한 장 정도 인생샷을 건질 수 있다.
그 결과, 그녀의 휴대전화 갤러리에는 9282장의 사진이 있다. 이마저 1만 장에서 몇 백 장을 지운 것이다. 아이클라우드(icloud)와 네이버 클라우드는 이미 사진으로 포화상태가 된 지 오래다. 휴대전화 갤러리를 넘기다 보면 똑같은 사진이 빼곡하다. 자세히 보면 표정과 자세, 구도가 조금씩 다르다. 인생샷을 건지기 위한 고속연사의 산물이다.
20대 중 상당수는 홍씨처럼 인생샷에 집착한다. ‘ㅇㅈ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자신의 일상을 사진으로 찍어 ‘인증’하고 이를 SNS에 올려 ‘인정’받으려 한다. 요즘에는 홍씨처럼 ‘인증샷’을 넘어 ‘인생샷’ 건지기에 몰두한다. ‘인생샷’이란 인생을 통틀어 최고로 잘 나온 사진을 말한다. ‘인증샷’이 단순히 자신이 경험한 것을 인증하는 사진이라면, ‘인생샷’은 만족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인생샷을 위한 노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카페나 공원에는 카메라를 든 채 다양한 각도로 자신의 모습을 촬영하는 사람이 많다. ‘셀프카메라(셀카)’를 찍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촬영을 부탁하기도 한다. 정모(25) 씨는 “평범한 식당에서 인생샷을 건지려는 여학생을 봤다”고 했다. 과제 때문에 함께 만났는데, 초면임에도 그녀는 정씨에게 자신의 모습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정씨가 촬영하는 동안 그녀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했다고 한다. 어두운 곳에서 일행의 인생샷을 건져주기 위해 양손에 프레시가 켜진 휴대전화기를 조명처럼 들고 있던 사람도 있다.
제대로 된 인생샷을 건지기 위해서는 공부도 해야 한다. 최근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엔 ‘인생샷 잘 찍는 법’에 관한 콘텐츠가 부쩍 많아졌다. ‘전신 사진을 찍을 때는 다리를 한 쪽 방향으로 뻗기”, “피사체는 하단에 위치시키기’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콘텐츠는 인생샷을 건지려는 20대에게 교과서 구실을 한다. 최근에는 인생샷 촬영을 위한 애플리케이션도 등장했다. 유료 앱 중 1위에 오른 한 앱은 실루엣을 이용한 비율 설정을 통해 원하는 구도와 비율로 촬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른 사람에게 촬영을 부탁할 때도 원하는 구도의 사진을 건질 수 있다고 한다.
“찍고 지우고” 반복
몇몇은 인생샷 건지기에 지나치게 몰두한다. 이모(22) 씨는 대학 입학 후 셀카 재미에 푹 빠졌다. 친구들과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서서 셀카를 찍는가 하면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말고 무음 카메라로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 경기도 광명동굴에 갔을 때도 인생샷을 건지느라 가족들과 대화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동생과 나눈 몇 마디가 다였다고 한다.대학생 김모(23) 씨는 얼마 전 친구와 광화문에서 열린 한 미술 전시회에 다녀왔지만 작품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거기서 자신의 새로운 프로필용 사진을 찍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인생샷 건지기’는 어느새 20대 일상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청년들은 인증샷을 찍을 때보다 인생샷을 찍을 때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피사체가 본인이고, 사진 속 본인의 모습이 만족스러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샷 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씨는 “마음에 드는 컷이 나올 때까지 찍고 지우고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 장을 건지려고 30분을 흘려보낸 적도 있다.
김씨는 상대방이 찍어준 사진이 마음에 안 들 때를 가장 힘든 순간으로 꼽는다. 이럴 때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대방을 먼저 찍어준다고 한다. 자신이 찍은 사진을 참고해 똑같이 찍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함이다.
인생샷을 건지기 위해 무리한 부탁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일을 방해하기도 한다. 서울 한 카페에서 일하는 최현수(22) 씨는 한 손님으로부터 사진 촬영을 위해 테이블을 옮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임병준(24) 씨는 “한 전시회에서 몇몇 사람이 수십 번씩 셔터를 누르는 바람에 작품을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상업적으로도 활용
박수현(여·25) 씨는 친구와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친구는 장소를 옮길 때마다 사진 촬영을 부탁했는데, 사진이 마음에 들 때까지 부탁은 계속됐다. 박씨는 “여행의 본말이 전도되어 사진 찍어주는 것이 주된 일이 됐다”고 말했다.인생샷은 상업적으로도 활용된다. 일부러 포토존을 마련한 카페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서울의 한 영화관은 계단을 조화로 장식해 포토존으로 만든 뒤 “인생샷을 건져요”라는 홍보 문구를 넣었다. 서울 안암동의 한 식당은 입구에 ‘Instagram’이라는 문구를 내걸었고 내부를 대리석 식탁과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장식했다. 배서현(22) 씨는 “이제 카페를 검색하면 ‘커피 맛이 깊어요’보다 ‘인생샷 건지는 예쁜 카페’라는 글이 훨씬 많다”고 말했다.
외모지상주의 시대를 사는 20대의 상당수는 자신의 잘 나온 모습을 널리 알리는 데에서 큰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다. 외모상의 콤플렉스를 가려야 하고 장점을 극대화해야 하니 인생샷에 열중할 수밖에 없다.
※ 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탐사기획보도’ 수강생이 박재영 교수의 지도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