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호

인터뷰

달마산 기슭 아름다운 절 미황사 금강스님

“땅끝에서 시작하는 조계종 개혁 운동”

  •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8-06-13 1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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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혈관에 푸른 찻물이 흐르는 승려

    • 포클레인 없이 완성한 달마고도 17.7km길

    • “진짜 수행이 필요한 건 산중 스님 아니라 현대인이다”

    • “조계종 총무원 권력 줄여야 세상이 밝아진다”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전남 해남 미황사는 달마산 기슭에 있는 한반도 최남단 절이다. 5월 초 이 절을 찾았을 때 주지 금강스님(52)은 ‘세심당’이라 이름 붙은 다실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과 차담을 나누고 있었다. 아침부터 촉촉이 내리는 봄비가 화제였다. 도시에서 온 방문객들은 대웅보전 앞뜰의 불두화, 영산홍, 수선화가 빗방울을 머금고 활짝 피어난 모습에 감탄을 쏟아냈다. 절집 곳곳에서 마주치는 동백의 붉은 꽃잎이 안개비 속에서 오히려 찬란함을 내뿜는다며 놀라워하는 이도 있었다. 스님은 미황사의 아름다움에 대해 저마다 한마디씩 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손으로는 쉼 없이 차를 준비했다. 물을 끓이고 다구(茶具)를 데우고 찻잎을 우리는 손길이 단정하면서도 날랬다.

    차 건네는 주지스님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오랫동안 지역민 외엔 찾는 이가 드물던 땅끝 산사 미황사가 대중에 널리 알려진 건, 상당 부분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덕분이다. 유 전 청장은 ‘남도답사 일번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첫 권에 이렇게 썼다. 

    ‘땅끝으로 가는 들판을 가로지르다 보면 마치 공룡의 등뼈 같은 달마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정상 가까이에는 고색창연한 미황사라는 아름다운 절이 있다. 만약 일정이 허락되어 여기에 잠시 머물며 미황사 대웅전 높은 축대 한쪽에 걸터앉아 멀리 어란포에서 불어오는 서풍을 마주하고 장엄한 낙조를 바라볼 수 있다면 여러분은 답사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이 화제를 모으며 낙조를 보고자 미황사를 찾는 이가 하나둘 생겨났다. 2000년부터 이 절 주지를 맡은 금강스님은 그들을 만나면 꼭 향긋한 차를 한 잔씩 건넸다고 한다. 서울에서 내내 차(車)를 달려도 6시간이 더 걸리는, 말 그대로 ‘땅끝’까지 찾아온 손님을 소박하게나마 대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가볍게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황사에 가면 주지스님이 차를 내주고 인생 상담도 해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언제부턴가 세심당은 차 마실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금강스님은 “때로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내내 차를 마셨다. 그런 날은 몸이 차로 가득 차 바늘로 손끝을 찌르면 푸른 찻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느껴졌다”며 웃었다. 



    그렇게 열여덟 해를 단련했으니 금강스님의 손끝에서 완성된 차가 유난히 깊고 향긋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다. 이날도 스님을 기다리는 대도시 방문객들이 세심당 마루를 차지하고 있었고, 스님은 선연히 차를 우렸다. 이내 녹차가 뿜어내는 그윽한 향이 퍼지고, 세심당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마산의 봄 냄새가 어우러졌다. 청명한 기운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이날 금강스님의 다객(茶客) 중에는 문화재 답사 단체여행팀을 태우고 온 금호고속 버스 기사도 있었다. 스님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찻잔을 내려놓더니 ‘글씨를 하나 써드리고 싶다’며 한지를 펼쳤다. 함께 차를 마신 다른 이들에게도 ‘글씨를 받아가고 싶은 분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자리에서 손을 든 이들은 저마다 ‘물 흐르고 꽃이 피네’ ‘당신의 마음은 이미 꽃밭입니다’ 같은 글귀를 적은 붓글씨 ‘작품’을 하나씩 받아 들었다. 

    그들이 다 떠나간 뒤 비로소 금강스님과 둘이 마주 앉았다. 스님은 나그네들이 비우고 간 찻잔을 깨끗이 닦은 뒤에야 자리에 앉고는, 이내 기자를 위해 또다시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제가 뭘 자꾸 준다고 해서 ‘주지스님’이에요. 주는 게 좋아서 그런 거니 부담 없이 받으세요.” 

    금강스님이 찻잔을 건네며 한 말이다.

    공동체를 살리는 사찰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오늘 그 버스 기사 분께 꼭 글씨를 하나 써드리고 싶었던 이유부터 말씀드릴까요. 우리 절에 오다 보면 바로 요 아래, 서정초등학교라는 학교가 하나 있어요.” 

    그렇게 금강스님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2003년의 일이다. 지역 주민,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이가 크게 줄어들면서 수십 년간 명맥을 이어오던 초등학교 학생 수가 5명이 됐다고 한다. 이미 ‘서정분교’로 ‘강등’돼 있던 이 학교가 곧 문을 닫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교육청이 폐교에 대한 의견을 물으러 학부모 공청회를 열 예정이라는 이야기였다. 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학교가 공동체의 중심이에요. 동네 사람 대부분이 그 학교 출신이고, 학교 운동회는 마을 잔치처럼 열리죠. 그런 학교가 사라지면 다들 얼마나 허전해질까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았어요. 학교를 살릴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학부모들을 만났습니다. 우리 같이 3년만 노력해보자고. 지금 이렇게 학교를 포기하지는 말자고 설득했어요.”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749)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천년 고찰’이다. 금강스님은 그 긴 세월 절과 더불어 살아온 마을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학교 살리기에 뛰어들었다. 한참을 궁리한 끝에 ‘멀리 사는 아이들도 서정분교를 다니고 싶어질 만큼 매력적인 방과 후 학습 과정을 만들자’는 데 뜻을 모았다. 영어 잘하는 주민이 영어를, 피아노 잘 치는 주민은 피아노를 가르치기로 했다. 스님은 전문 숲 해설사를 초빙해 학생들이 매주 달마산을 누비며 수준 높은 생태교육을 받도록 하는 데 앞장섰다. 오랫동안 익혀온 탁본과 다도(茶道), 한문 등도 직접 지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정분교가 달라졌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마을에서 이 학교로 전학 오려는 학생이 생기기 시작했다. 등하교 시간 인근 마을을 도는 스쿨버스가 생기면 좀 더 많은 아이가 서정분교를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금강스님은 버스 구매 자금 마련을 위해 미황사에서 음악회를 열기로 했다. 이 뜻에 공감한 음악인 노영심 씨가 땅끝까지 내려와 피아노를 연주했고, 공연 실황을 녹음한 음반 판매 수익을 기부하기도 했다. 서정분교 학부모 등 지역 주민들도 농산물 판매 바자회를 열어 힘을 보탰다.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했어요. 하지만 한 대에 수천만 원이 넘는 버스를 사기엔 턱없이 부족했죠. 그때 제가 금호고속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버스가 한 대 필요한데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금호고속에서 우리를 도와주더군요. 말도 안 되게 적은 금액만 받고 거의 새것 같은 버스를 한 대 내준 겁니다. 향후 정비비용 등도 회사가 부담하기로 하고요.” 

    이렇게 많은 이의 뜻이 모인 덕에 서정분교는 문을 닫지 않게 됐다. 아니, 오히려 학생 수가 계속 늘어나 ‘분교’ 딱지를 떼고 ‘서정초등학교’라는 이름을 단 어엿한 ‘본교’가 됐다. 금강스님이 이날 금호고속 버스 기사에게 글씨를 선물하고 싶었던 이유다. 금강스님은 “스쿨버스가 생긴 뒤 학생이 크게 늘었다. 처음 폐교 얘기가 나왔을 때만 해도 ‘아이들이 한 학년에 10명씩, 60명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이야기를 학부모들과 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 당시 상상도 못하던 규모가 됐다”며 웃음 지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역 주민들과 함께 겪어나가며 미황사는 저 멀리 외떨어진 산중 고찰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역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이 됐다.

    달마산 둘레길, 달마고도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미황사는 그런 절이다. 도시 나그네에게는 평소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잠시나마 쉬어가고 싶은,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땅끝 산사(山寺)다. 반면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달려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믿을 구석’이다. 어느 쪽에서든 힘든 순간 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 중심에, ‘불교가 대중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 금강스님이 있다. 

    그가 달마산 둘레길 ‘달마고도’를 만드는 데 앞장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해 11월 개통한 달마고도는 미황사에서 출발해 큰바람재~노시랑골~몰고리재 등으로 이어지는 총길이 17.7㎞의 산책로다. 포클레인 등의 중장비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조성해 더욱 화제가 됐다. 금강스님은 “달마산에는 오래전부터 이 지역 사람들이 산사에 들르고 읍내 장터를 오가던 옛길이 있었다. 한동안 방치돼 있던 이 길을 산책로로 되살리기 위해 250일간 40명이 참여해 땅을 골랐다. 중장비를 들이면 길이 망가질까봐 지게로 흙을 나르고 곡괭이로 길을 다듬으며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소개했다. 

    마침 비가 멎은 터라 찻잔을 물리고 그와 함께 길을 나섰다. 달마고도는 절 입구에서 바로 산길로 이어졌다. 금강스님에 따르면 이 길은 남해를 통해 한국에 인도불교가 전해진 ‘전례의 길’이면서, 동시에 산중 암자 12개를 연결하는 ‘수행의 길’이고, 또한 땅끝마을 사람들이 읍내를 오가는 ‘삶의 길’이기도 했다. 미황사에 승려가 최다 380명까지 머무르던 시절 이 길은 소달구지가 오갈 만큼 넓고 단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절이 조선 중기 이후 쇠락하면서 길 또한 자연스레 잊히고 말았다. 

    그것을 오늘날 복원하는 게 쉬운 일이었을 리 없다. 그것도 나무데크, 철계단 등 등산로에 으레 있는 인공물까지 철저히 배제하면서 원형 그대로 되살리는 게 말이다. 금강스님은 “공사할 때 편하자고 그런 시설물을 설치하면 결국 자연을 해치게 되는 거라고 봤다. 작업하는 분들도 처음에는 힘들어하셨지만 나중에는 내 뜻에 공감해주셨다”고 밝혔다.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며 왜 이런 역사(役事)를 벌였는지 물었다. 금강스님은 또 한 번 미황사의 두 중심인 외부 관광객과 지역 주민 이야기를 꺼냈다. 

    “미황사가 명성을 얻으면서 달마산을 찾는 이도 점점 많아졌어요. 그중 상당수가 정상을 ‘정복’하려고 무리하게 산을 타면서 종종 사고가 나고, 바위에 철심을 박는 일도 벌어졌죠. 달마산은 일찍부터 ‘남도의 금강산’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곳인데, 그 자연을 보러 오는 일이 산을 파괴하는 일로 연결되는 게 안타까웠어요. 이러다 요즘 유행하는 출렁다리나 케이블카 같은 것까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들더군요. 많은 이가 아끼고 사랑하는 달마산을 보존하려면 사람이 이 산에 깃드는 다른 방법을 마련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이 순례와 수행의 길 ‘달마고도’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이 순례와 수행의 길 ‘달마고도’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정상에 오르지 않고도 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사람에게도 자연에도 좋지 않을까, 그것이 금강스님이 달마고도 조성을 처음 생각한 출발점이라고 한다. 금강스님은 사람이 산에 ‘깃드는’ 존재가 돼야 한다고 했다.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물, 꽃과 새와 나무처럼 산을 해치지 않으면서 산과 만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달마고도를 따라 걷다 보면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금세 알아차리게 된다. 산길을 고르고 다듬어 걷기 편하게 손질하기는 했지만 원래 산의 원형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당초 흙이 많던 길은 지금도 흙길, 돌이 많던 길은 그대로 돌길이다. 미황사에서 출발해 다시 미황사로 돌아오기까지 6시간 남짓 걸리는 길을 걷는 동안 사람들은 울창한 달마산의 삼림을 지나고, 탁 트인 너덜지대(돌이 많이 흩어져 깔려 있는 비탈)를 건너며, 손에 잡힐 듯 가까이 펼쳐지는 남해·서해의 풍광도 감상하게 된다. 자연을 훼손하며 억지로 정상에 오르기보다 능선을 따라 걸으며 넉넉한 자연의 품에 안기는 것이 훨씬 근사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말 그대로 달마고도는 마음의 평화를 찾아 땅끝까지 달려오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평화로운 ‘자연 깃듦’의 장이다. 

    이 길을 걸으며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드문드문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널판을 읽는 것이다. 

    ‘내 손을 잡으세요. 함께 걸읍시다.’ 

    길을 걷다 문득 고개를 들자 이런 글귀가 적힌 나무판자가 눈에 들어왔다. 좀 전에 세심당에서 본, 동판으로 찍은 듯 단단하고 힘 있는 금강스님의 서체였다. 그는 “달마고도가 완성된 뒤 절에 있던 버려진 나뭇조각들에 생각나는 글귀를 적어 몇 개 걸었다. 산길에서 길잡이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웃음 지었다. 

    보통 산길에서 등산로를 알려주는 건 나뭇가지에 묶어두는 원색 천 조각이다. 금강스님의 널판은 그보다 잔잔하게, 그러면서 좀 더 친근한 길잡이가 되어주는 느낌이었다. 같은 글이 적힌 널판이 하나도 없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당신은 이미 놀라운 생명의 기적’ ‘천천히 기쁘게 편안하게 걷는 발걸음’ ‘우리가 내고 있는 걸음 아래로 꽃들이 피어납니다’…. 나무판에 적힌 글을 읽고 나면 다음 이정표를 발견하기까지 속으로 그 내용을 곱씹게 된다. 달마고도를 걷는 숨은 재미다.

    “함께 걸읍시다”

    금강스님은 “얼마 전 72세 되신 이 동네 할아버지가 ‘달마고도를 그새 7번 걸었다. 계단이 없고 걷기 편한 길이 생겨 참 좋다’고 하시더라”며 “지역사회 고령화로 노인 인구가 늘고 있는데, 그분들이 이 길을 걸으며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게 되면 좋겠다. 그것도 많은 사람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 달마고도를 복원한 이유”라고 말했다. 

    금강스님은 미황사에서 멀지 않은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출신으로 고등학생 때 산문(山門)에 들었다. 그래서일까. 절이 사람들의 일상 매우 가까운 곳에 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사월 초파일이면 늘 연등을 달았고, 어머니 손잡고 대흥사에 갔다. 그는 승려로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 가까이에 있던 그 시절, 우리 불교와 절의 모습을 되살리고 싶다고 했다. 

    “봄철 그 무렵이면 농촌이 한창 바쁠 때지만 부처님 오신 날에는 아무도 일을 안 했어요. 하나같이 좋은 옷을 차려입고 떡이며 멥쌀, 향, 초 등을 챙겨 절에 갔지요. 사람이 가득한 절 마당에서 연등이 바람에 너울대던 것, 절에서 차려주는 나물 비빔밥을 맛있게 먹은 사람들이 절 어귀에서 장구 치고 노래 부르며 신나게 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말하자면 그때 사월 초파일은 마을 잔칫날이었던 거죠.” 

    고교 시절 우연히 접한 불교경전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그가 아예 대흥사에 들어가 살기로 결심한 건 이런 환경의 영향이었는지 모른다. 금강스님은 당시 혜능선사의 ‘육조단경’ 중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즉 ‘만겁의 시간이 지나도 만나기 어렵다’는 부분을 읽고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사는 건 어렵고도 귀한 일이다. 이 기회를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출가를 결심했다고 한다.

    미황사 지게스님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고1 겨울방학 때 어머니께 ‘이제 대흥사에서 살겠다’고 선언하며 짐을 꾸렸다. 그러나 당시 그를 받아준 은사 지운스님은 ‘출가하려면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금강스님은 이때부터 암자에서 찬물로 빨래하고 석유 곤로에 밥을 지어 먹으며 학교에 다녔다. 매일 아침 스님 조반을 차려드린 뒤 등교하고, 하교해서는 또 절을 돌봤다. 고교 졸업장을 받은 뒤엔 곧바로 경남 해인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본격적인 승려의 길을 걸었다. 

    금강스님은 자신이 해인사에서 보낸 20대 초반의 나날을 ‘아름다웠다’고 회고했다. 1000년을 이어온 수행 전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오전 3시부터 저녁 9시까지 엄격한 법도에 따라 수행을 했는데, 그는 어느 글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학인들의 글 읽는 낭랑한 소리가 천지간으로 퍼졌고, 그 조화로움은 어떤 음악보다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그때부터 그는 ‘승려로서 어디에 가든 아름다운 수행 공동체를 만들리라’는 꿈을 마음에 품게 됐다. 

    그러나 젊은 금강스님 앞에 펼쳐진 세상은 그를 다른 길에 들어서게 했다. 1987년 광주 송광사에 갔다가 거리를 뒤덮은 민주화 열기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것이다. 금남로에서 멀지 않은 송광사 앞길은 곧잘 최루탄에 뒤덮였고, 그는 부처님 가르침보다 한국 사회의 아픔에 먼저 마음이 쏠리곤 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광주전남본부 집행위원을 맡는 등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수도자로서 자세를 다잡고자 1989년 대흥사로 돌아왔고, 100일 기도를 마친 뒤 첫 은사스님인 지운스님을 모시고 수행에 정진하기로 결심한다. 이때 만나게 된 절이 미황사다. 

    “대흥사에서 멀지 않은 미황사는 당시 원래 주지스님이 병을 얻어 다른 곳으로 떠나신 뒤 방치된 상태였어요. 그 스님께서 대흥사에서 수행 중인 저를 찾아와 지운스님과 미황사에서 생활하면 어떠냐고 제안하신 거죠. 절에 가보니 아름드리 고목이 마당을 온통 뒤덮고, 대웅보전과 응진당 두 채를 제외한 건물은 거의 다 허물어져 꼭 버려진 곳처럼 보였어요. 한때 열두 암자를 거느린 천년고찰이었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였죠.” 

    금강스님의 회고다. 그는 이때부터 절집을 침범하는 나무를 베고 축대를 쌓고 전각을 고쳐 지으며 꼬박 2년을 보냈다. 비어 있던 절에 어느 날 갑자기 젊은 스님이 나타나 돌과 목재를 지게로 져 나르며 일에 몰두하자 동네 주민들이 ‘지게스님’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절이 어느 정도 제 모양을 갖췄을 때 그는 공부를 위해 서울 중앙승가대에 입학했다. 1991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또 한 번 세상 변화의 한가운데 서게 된다. 승가대신문 편집장, 승가대 총학생회장 등을 역임하며 당시 거세게 일었던 조계종 개혁 운동의 중심이 된 것이다. 그는 1994년 종단개혁 때 전국불교운동연합 부의장, 범종단개혁추진위 공동대표 등으로 일했고 오늘날 이 사회에서 불교가, 절이 어떤 구실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렇게 또 한 번 오랜 꿈인 수행의 길에서 벗어나 지칠 대로 지친 그가 다시 몸을 의탁한 곳은 미황사였다. 

    금강스님은 1996년 미황사에 돌아와 다시 한번 절을 가꾸며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 그러던 중 지운스님의 스승이던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선승 백양사 서옹스님(1912~2003)의 부름을 받는다. 

    “이후 3년간 큰스님을 가까이에서 모신 경험은 제 인생의 전기가 됐어요. 서옹스님은 이미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셨지만 늘 세상을 걱정하고 이 세상에서 불교가 담당할 구실에 대해 고민하셨습니다.” 

    금강스님이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건 1998년 초 어느 날의 일이다. IMF 외환위기로 나라가 들썩이던 무렵, 아침공양 후 서옹스님이 찾으신다는 전갈이 왔다. 찾아뵈니 “신문을 보니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수행자로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 했다. 처음엔 가벼이 여겼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그리고 또 다음 날 연거푸 그를 찾아 ‘지금 종교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물으시는 걸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문을 샅샅이 뒤져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지인들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마침내 생각해낸 게 ‘실직자를 위한 단기 출가 프로그램’이었어요. 갑자기 직장을 잃고 좌절과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일정 기간 산문을 열어줘, 그들이 참선과 기도 울력을 통해 자기 삶을 돌아보며 재기의 의지를 다지게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리니 서옹스님이 고개를 끄덕이셨죠.” 

    이후 백양사에서는 5개월간 실직자 단기출가 수련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수많은 이가 이때 절을 찾았고, 짧게나마 수행을 경험하며 죽음을 생각할 만큼 극심하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이를 통해 ‘스님이 아닌 세상 사람에게도 수행이 필요하구나. 아니 어쩌면 수행은 산속 스님보다 지금 세상 속에서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불교가, 수행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가슴이 뛰었다. ‘지금 가장 아파하는 사람들, 하지만 조금만 도와주면 다시 열심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의 수행을 돕는 일에 평생을 바쳐야겠다’는 뜻도 품게 됐다. 

    “당시 가장 안타까웠던 건 다른 절에도 이 프로그램을 같이 운영하자고 제안했지만 ‘절이 어수선해진다’며 반대해 성사되지 않은 겁니다.” 

    이 또한 금강스님에게는 소중한 가르침이 됐다. 불교가 현대인에게 도움을 줄 방법이 적지 않은데, 우리 불교계 상당수가 과거의 틀에 갇혀 제 구실을 못하고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그는 2000년 미황사에 돌아와 주지가 된 뒤 바로 이 문제를 푸는 데 매진하기로 마음먹었다. 현대사회에서 절이 해야 할 역할 모델을, 땅끝 마을 작은 절에서 만들어보기로 했다.

    “불교가 바뀌어야 한다”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마침 1989년부터 그와 지운스님, 그리고 금강스님의 사형인 현공스님 등이 함께 절을 가꿔온 덕에 미황사는 과거의 아름다움을 상당 부분 되찾은 상태였다. 금강스님은 그 안에 사람들이 절을 친근하게 느끼고 기꺼이 찾아오게 만들 소프트웨어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미황사 홈페이지를 만들고 어린이를 위한 7박8일 한문교실을 열었다. 매년 가을에는 보물 제1342호 괘불을 중심으로 한 산사 축제를 열고, 2002년 한일월드컵에 발맞춰 외국인을 위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을 위한 단기 수행 프로그램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참사람의 향기’라는 이름이 붙은 이 프로그램은 2017년 2월 100회를 돌파했고 지금도 계속 중이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 들어온 이들과 늘 찻잔을 앞에 두고 1대 1 대화를 나눈다. 그들의 ‘마음 수행’을 돕는 것이 우리 시대 불교, 절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사시던 때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돌아보면, 단 한 번도 현재 한국 불교 조계종 같은 집단은 없었어요. 이렇게 많은 토지와 막대한 기본 재산을 소유하고, 수행과 포교보다 종단 운영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단체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종교는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돼야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그럼 수행과 정법, 교육을 위주로 조직을 재편하고 총무원은 가장 말단에 둬야죠. 종단 중심에서부터 그런 변화를 시작하지 않으면, 불교는 우리 사회에서 제 구실을 하기 어려울 겁니다.” 

    현재 조계종에서 아사리, 즉 전문연구인력 직을 맡고 있는 스님다운 고언이다. 미황사는 대웅보전(보물 제947호), 응진당(보물 제1183호) 등 여러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지만 문화재관람료는커녕 주차료조차 받지 않는다. 절의 문턱도 더욱 낮췄다. 절에 있는 한 세심당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차를 건네고, 지역 주민들의 어려움을 어루만진다. 그는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수행을 돕고, 그들이 불교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하면서, 승려로서 수행을 계속해나갈 생각이다. 

    금강스님은 자신이 처음 ‘외국인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열었을 때 어느 마을의 한 신도가 했다는 말을 전하며 인터뷰의 끝을 맺었다. 

    “‘아이고 시님, 누가 이 먼 땅끝까지 온다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멀어서 못 온디∼’ 그렇게 걱정을 하셨어요.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찾아왔고, 지금도 오고 있죠. 그리고 오히려 그 수고로움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얻어 가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쩌면 미황사가 ‘위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혹은 잠시 힘든 마음을 쉬어가기 위해서라도 이 멀리까지 공들여 찾아오는 것 자체가 수행입니다. 세상살이가 힘들 때는 그렇게 이리로 오십시오. 차 한 잔 드시고 달마고도를 걸으며 세상에서의 어려움을 조금은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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