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호

상속의 역사

남편 여럿을 거느리는 고단함

  •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입력2018-06-1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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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 사회의 곳곳을 들여다보면 일부다처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일처다부제 또한 상당하다. 남편을 여럿 뒀다고 하면, 여성의 권력이 강할 것으로 짐작하기 쉬운데, 이는 착각이다. 형제들은 가난 때문에 한 명의 여성을 공유했다. 여성은 집안의 ‘공유재산’이었다.
    인도 북부 데란둔의 라조 베르마(가운데 여성)와 그녀의 남편들. 라조 베르마는 5명의 친형제와 결혼했다. [Cover Asia Press/Shariq Allaqaband]

    인도 북부 데란둔의 라조 베르마(가운데 여성)와 그녀의 남편들. 라조 베르마는 5명의 친형제와 결혼했다. [Cover Asia Press/Shariq Allaqaband]

    러시아의 예카테리나(1729~1796), 당나라의 측천무후(624~705). 미목(眉目)이 수려한 남성들을 휘하에 두고 성생활을 즐겼다고 알려진 인물들이다. 물론 이들은 보통 여성이 아니었다.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쥔 특권적 존재였다. 그렇기에 법과 관습을 초월해 멋대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인류 사회에는 여성이 다수의 남편을 합법적으로 둔 경우도 있었다. 이름하여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다. 

    인도 북부 고산지대의 토다족과 티베트의 하층민이 그렇게 살았다. 중국 서쪽 끝에 있는 리장과 네팔에도 이런 관습이 있었다. 주로 토질이 매우 척박하거나 정착 생활이 아예 불가능한 지역에서 이 제도가 성행했다.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형제들이 나눈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라 형제들은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공유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형제들은 한 명의 아내를 ‘공유’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형제가 순서를 정해 돌아가며 일정 기간 아내와 함께 지냈다.

    누가 生父인지 몰라도 된다

    인도의 토다족은 유난히 남아를 선호했다. 여성은 결혼할 때 막대한 지참금을 가져가야만 했다. 그 사회에서는 여아를 유기하거나 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녀 비율이 극단적으로 비대칭적이었다. 토다족은 남편이 사망할 경우 외부인이 그 재산과 아내를 차지하는 것을 금지했다. 결과적으로 일처다부제가 사회적 관습으로 자리 잡았다. 아내를 공유한 형제들은 분가할 수 없었다. 가문의 재산도 외부로 유출되지 못했다. 

    ‘일처다부’라고 하면 마치 여성에게 상당한 권리가 있을 것으로 지레짐작하기 쉽다. 그것은 착각이다. 토다족에서 보듯 여성은 한 집안의 ‘공유재산’으로 간주됐다. 

    티베트의 결혼 풍습에는 흥미로운 점이 더욱 많다. 그곳은 신분제 유습이 뿌리 깊어 귀족과 평민이 혼인할 수 없었다. 종족적 편견도 강해 피부색이 다른 민족과의 결혼도 금지됐다. 이런 관습을 어긴 자는 마을 사람들이 ‘처치’해도 무방했다. 



    티베트 평민 계층에선 ‘형제일처혼’이 대세였다. 집안의 큰아들이 어느 여성과 결혼하면 나머지 형제도 동시에 그 여성과 결혼한 것으로 간주됐다.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면 누가 아버지로 인정될까. 무조건 맏형이 아이의 아버지로 여겨졌다. 아이는 아버지의 형제들을 ‘리로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티베트에서는 여성이 결혼지참금을 가져가지 않았다. 대신 결혼을 원하는 남성의 집안이 ‘배상금’을 물었다. 일종의 매매혼이다. 와족은 신부의 집안에 소를 주고 신부를 데려왔다. 와족 사회에서는 소를 세 마리 이상 소유하면 상당한 부잣집으로 대접받았다. 

    결혼 후에도 형제들은 한집에서 살았다.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눠 먹었다. 형제의 분가는 얼마 안 되는 재산과 노동의 분할을 의미했다. 이는 곧 모두의 파멸을 뜻한다. 극도의 가난이 ‘형제일처혼’의 근본 원인이었다. 티베트의 척박한 자연환경은 급속한 인구 증가를 허용하지 않았다. 거기서는 장성한 남성들이 힘을 모아야 겨우 생존이 가능했다. 티베트 사람들은 생존 자체를 위해 형제일처혼의 관습을 만들었다고 봐야겠다. 

    인도 북부의 라다크족은 티베트의 와족과는 전혀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1928년 곰페르츠 소령이 저술한 ‘신비의 라다크’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라다크의 여성은 그 집안에서 진정한 우두머리이다. 남성들은 그녀의 유능한 엄지손가락 밑에 있다. 여성은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거래를 한다. 그녀의 말은 법이나 다름없다.”

    라다크의 가정에서는 여성이 명실상부한 가장이었다.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여사가 쓴 ‘오래된 미래’에서도 그런 사실이 확인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돌마’라는 여성이 자기보다 두 살이 적은 ‘앙축’이란 남성과 결혼했다. 그때 신부 나이는 25세. 시집 통데 마을은 평야지대요, 친정은 산마을 샤디에 있었다. 두 마을은 교류도 활발하고, 서로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다. 

    돌마는 앙축과 결혼함으로써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앙두스와도 결혼했다. 앙축의 둘째 동생은 마을에 있는 티베트 불교사찰의 승려였다. 그는 독신으로 남았다. 앙축과 앙두스 형제는 돌마의 남편이 되었으나, 그들의 아우인 승려는 남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라다크에서는 세 형제가 한 여성의 배우자가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호지 여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앙축이 맏형이라고 해서 가내에서 특별한 권위를 갖지는 못했다. 돌마는 두 사람의 남편을 동등하게 대접했다. 동생 앙두스는 상인이었다. 그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래서 돌마는 형인 앙축과 더 빈번하게 동침했다. 그러나 앙두스가 집에 있을 때는 형제와 번갈아 잤다. 때로는 아내인 돌마를 가운데 두고 세 사람이 함께 잤다. 

    라다크에서도 혼외정사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생아를 출산한 여성도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았다. 멋대로 화를 내는 사람이 라다크에서는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다. 

    라다크의 경제 여건은 조금 나은 편이었다. 인도의 토다족이나 티베트의 와족이 살던 곳에 비하면 토지의 생산성이 비교적 높았다. 그래서였을까. 여아의 사망률이 남아보다 특별히 높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남녀의 성비는 거의 같았다. 

    그런데도 형제일처혼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 여성은 결혼 상대를 구할 수 없었다. 비혼(非婚)의 여성은 비구니가 되었다. 남성 가운데서도 차남, 삼남의 경우에는 비구가 되어 평생 결혼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라다크의 인구증가율이 이래저래 관습의 힘으로 강하게 통제됐던 셈이다. 

    1942년부터는 법이 바뀌어 라다크에서도 일처다부가 금지됐다. 점차 일부일처제가 수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호지 여사가 자세히 관찰한 바에 따르면, 라다크에는 다양한 결혼 제도가 공존한다. 모든 것은 경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바뀐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로 이어질 때마다, 그들은 보유한 토지의 면적, 자녀 및 잠재적 배우자의 수를 고려해 처지에 가장 적합한 결혼 형태를 선택했다.

    여성이 상속자라면

    유난히 남아를 선호해 성비 불균형이 심했던 인도 토다족. 결과적으로 ‘일처다부’가 관습이 됐다
. [wikimedia commons]

    유난히 남아를 선호해 성비 불균형이 심했던 인도 토다족. 결과적으로 ‘일처다부’가 관습이 됐다 . [wikimedia commons]

    예외적이었으나 일부다처제도 존재했다.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아내의 여동생이 두 번째 부인으로 시집왔다. 물론 다른 이유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남편이 혼외의 여성을 둘째 부인으로 맞이하기도 했다. 다만 이 때에는 아내의 동의가 필요했다. 

    집안에 아들이 없거나, 있더라도 재산을 물려주기에 부적합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양자를 두지 않고 큰딸이 모든 재산을 상속했다. 큰딸은 ‘재산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남편을 맞아들였다. 말하자면 데릴사위를 구한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있더라도 재산을 완전히 다 물려주지 않고, 가족이 임시로 살림을 나누어 별도로 독립채산제를 선택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앙축의 집안이 그러했다. 공식적으로는 결혼과 동시에 큰아들 앙축이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의 부모는 라다크의 관습대로 큰 집을 앙축에게 주고, 집 근처에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옮겼다. 그때부터 집안의 공식적인 대표는 앙축이었다. 앙축은 아직 생존한 할머니와 아저씨 한 분을 모시고 살았다. 

    오두막으로 옮겨간 그의 부모는 앙축의 할아버지, 그리고 티베트 불교의 비구니가 된 앙축의 누이 두 명과 함께 살았다. 사실상 앙축의 누이들이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었다. 그들의 오두막에는 별도의 밭이 딸려 있었다. 비혼의 두 여성은 그 밭을 함께 경작했다. 거기서 얻은 소출로 독립적으로 생활했다. 

    앙축과 누이들은 서로 협력했고, 온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사이는 평화롭고 우애가 넘쳤다. 그럼에도 그들은 독립성을 유지하며 살았다. 

    라다크에서는 주로 겨울철에 결혼식을 올렸다. 잔치를 벌일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혼기가 되면 부모와 친구, 친척들이 결혼 상대를 찾기에 바빴다. 혼담이 오가면 점성술사가 두 사람의 운을 점친다. 점괘가 좋게 나오면 신랑 측이 신부 측에 선물과 술항아리를 보낸다. 친구나 친척, 특히 신랑의 외할아버지가 신부 집안을 방문해 의사를 타진했다. 

    결혼이 확정되면 신부를 데려올 사람들이 신랑의 집에 모였다. 특히 노래를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사람들로 뽑았다. 그들은 화살, 양 또는 염소의 발목뼈를 가지고 신부 집으로 갔다. 화살은 신부가 앞으로 지내게 될 집의 신(神)을 상징했다. 뼈는 번영을 의미했다. 신부는 눈물을 뿌리며 시집으로 떠났다. 

    신부의 머리는 터키석이 박힌 긴 끈으로 장식했다. 친정어머니는 자신이 시집올 때 가져온 페라크를 큰딸에게 물려주었다. 결혼 잔치는 일주간 계속될 정도로 성대했다. 

    라다크에서는 보통 여름철에 아기를 출산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아버지는 일주일 동안 밭일을 중단했다. 작은 곤충이라도 해친다면 아기의 영혼이 어지러워질 것을 염려해서였다. 산모에게는 최상의 우유와 야크버터를 선물했다. 천장에는 행운의 화살을 걸어두었다. 

    라다크에서는 아버지를 ‘압바’라고 했다. 돌마의 자녀들은 어머니의 두 남편, 즉 앙축과 앙두스 형제를 모두 ‘압바’라고 불렀다. 라다크에서는 ‘압바’가 특별한 용어도 아니었다. 이것은 성인 남성의 범칭(汎稱)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아저씨’와 같은 것이었다.

    ‘형제일처’, 다 사라진 건 아냐

    헬레나 노르베르-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 표지. 인도 북부 라다크에서도 형제일처가 보편적이었다. 다만 여성의 권한이 남성보다 더 컸다.

    헬레나 노르베르-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 표지. 인도 북부 라다크에서도 형제일처가 보편적이었다. 다만 여성의 권한이 남성보다 더 컸다.

    형제일처제 아래서 아기의 아버지를 정확히 알 수 있었을까. 돌마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자.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아버지를 정확히 안다고 믿었다. 가령 큰애는 앙축의 아들이고, 막내는 앙두스의 아들이라고 확신했다. 어찌 되었든 아버지들은 어느 아이가 자신의 생물학적 후손인지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공동의 자손이요, 공동의 아버지였다. 

    아기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되면 축하 잔치가 열렸다. 온 마을 사람들이 축하했다. 두세 달 뒤에는 아기를 절간에 데리고 가 복을 빌고 기도문을 받아왔다. 이때 고위 성직자가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물론 불교의 법명이었다. 라다크 사람들은 성(姓)이 없다. 이름에 집과 소유한 땅의 이름을 붙여 신분을 명시했다. 

    인도 북부에서는 형제일처혼의 관습이 지금도 여전하다. 데란둔이 그러하다. 2013년 해외 대중매체를 통해 보도된 바에 따르면 당시 21세이던 라조 베르마는 5명의 친형제와 결혼했다. 형제들의 나이는 19세부터 32세까지 다양했다. 

    라조는 고향의 전통에 따랐다. 첫날밤은 신랑들 중에서 동갑내기이자 넷째인 구듀(21)와 함께 보냈다. 그 다음에는 장남부터 막내까지 순차대로 동침했다. 보도 당시 라조에게는 생후 18개월 된 아들이 있었다.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누구도 궁금하게 여기지 않았다. 

    법률상 라조의 남편은 구듀였다. 다섯 형제가 모두 라조와 잠자리를 하지만 질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구듀는 말했다. 라조의 진술 역시 그와 같았다. 그녀의 어머니도 3명의 형제와 결혼해 살고 있다며, 자신은 남편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행복한 아내라고 주장했다. 

    데란둔의 형제일처 제도는 토다족이나 와족 또는 라다크족과는 차이가 있다. 남성 배우자의 숫자가 매우 많은 편인 데다, 남성과 여성 가운데 어느 한 편이 일방적으로 배우자를 소유 또는 지배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또 형제들 가운데서도 장남이 아니라, 여성과 동년배인 형제가 정식 남편의 역할을 하는 것도 특이하다. 형제일처라는 제도는 동일하지만, 그 실태는 부족에 따라 차이가 있다. 

    현대에 이르러 형제일처의 풍습이 사라지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히말라야의 부탄 왕국이 그러한 경우다.
    트라시강 유역의 메락 마을을 예로 들어보자. 수년 전 어느 여행자의 보고서가 참고가 된다. 그때 부탄의 경제학 박사 니둡 도르지는 이렇게 진술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네 명의 남편과 결혼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한 명인 여성은 극히 드물었지요.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이렇게 된 이유는 생계 때문이었습니다. 가축을 길러야 했고, 그러자면 좀 더 많은 인력이 필요했지요.” 여기서도 경제 조건이 형제일처 제도의 배경이었다. 

    형제를 남편으로 섬기는 데첸 왕모라는 젊은 여성도 비슷한 진술을 했다. “중요한 이유는, 산악 지방에서 가축을 기르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지요. 처음에 나는 형제 중에서 형과 결혼해서 연로한 시부모님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가축을 돌보기 위해서는 시동생의 힘도 필요했어요. 그래서 그와도 결혼했습니다.” 

    부탄의 형제일처 제도는 위에서 살펴본 지역들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여성 스스로 배우자의 수를 늘려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부탄의 젊은이들은 전통에 안주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설사 부모 세대가 전통적 결혼 제도를 선호하더라도 그런 결혼에 별로 뜻이 없다. 형제일처를 선택한 사람들 중에도 이혼한 경우가 상당히 많다. 젊은이들은 일부일처제를 선호한다.


    백승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조선의 아버지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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