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호

글로벌이슈 | 프랑스 68혁명 50년 |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

‘표면적 실패’ 뒤에도 혁명은 계속됐다

  • 입력2018-06-13 1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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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낭테르대 여학생 기숙사 방문 제한이 촉발한 거대한 물결

    • 프랑스 정권 뒤흔든 학생과 노동자의 힘

    •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혁명하고 싶어진다’

    • ‘강남역 살인 사건’과 ‘미투운동’이 보여주는 한국의 오늘

    68혁명 슬로건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wikimedia commons]

    68혁명 슬로건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wikimedia commons]

    1968년 5월 초 프랑스 낭테르대가 학생들과의 대립으로 학교를 폐쇄하자 이에 반발한 소르본대 학생들이 봉기했다. 이 봉기는 일파만파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했고, 대학생과 1000만 노동자의 싸움으로 이어지며 수많은 프랑스인을 혁명의 직접 행동 속으로 뛰어들게 만들었다. 초기에 행해진 정부의 진압 시도는 수백 명의 체포로 이어졌지만 이는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효과만 가져왔다. 수천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가 바리케이드를 쌓고 경찰에 맞서 싸우자 결국 정부는 진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100만에 육박하는 노동자와 학생이 거리 시위에 나섰고 학생들은 소르본대를 점거하고 학생소비에트를 선언했으며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면서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너무 많은 시민의 참여로 군부대 투입이 불가능해지자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샤를 드골은 파리를 떠나 독일군 주둔 기지로 피신하기까지 했다(여기서 그는 독일군의 병력 지원을 약속받고 이후 파리로 복귀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대중이 지배권력뿐 아니라 자기들의 존재까지 위협한다고 느낀 프랑스공산당과 노동총동맹이 다양한 이간책을 동원해 학생과 노동자를 분열하면서 마침내 노동자들이 일터로 복귀하자 사태는 진정됐다. 같은 해 6월 드골은 총선을 실시했고 이 선거에서 드골 정부는 압승을 거뒀다. 이렇게 두 달 좀 못 되는 기간에 진행된 일련의 혁명운동을 ‘68혁명’이라고 한다.

    포드주의에 대한 반역

    68혁명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 후로도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이어지면서(1968년 세계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급진적인 투쟁과 함께)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및 세계 전체의 양상을 전면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68혁명의 독특함을 놀라운 방식으로 드러내주는 일화가 있다. 정부의 시위 진압 실패 후 파업 중인 노동자들을 매수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조르주 퐁피두 총리는 파리 그르넬가에서 노동총동맹을 비롯한 주요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일주일에 걸쳐 협상안을 마련했다. 이 협상안은 최저임금 35% 인상, 주당 노동시간 단축, 각종 수당 상향 조정, 노동조합의 권리 신장 등을 담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파업 중인 노동자들은 이 협약을 거부하고 타협한 자신의 지도자들을 비난하며 혁명이라는 지상명령을 실행하는 쪽을 택했다. 이런 협상안 거부는 당시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또한 단순히 경제적 지위 향상만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것이 1968년 당시 프랑스 노동계급은 급속한 경제 팽창과 소비사회의 등장 속에서 생활수준의 극적인 향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68혁명은 무엇에 대한 반역이었을까? 단적으로 68혁명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유럽에 광범위하게 수립되어 있던 포드주의 체제에 대한 반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세계는 68혁명을 계기로 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 이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68혁명이 사실상 우리가 오늘날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현상을 출현시켰다고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선이 나오기도 하며 이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프랑스공산당, 노동총동맹 같은 구(舊)좌파와 각을 세우며 68혁명에서 등장한 신(新)좌파는 과연 진정한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이루었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68혁명을 근대 정치를 넘어서는 (부정적이지 않은 의미에서) 포스트-근대 정치의 출현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더 올바르다고 본다. 신자유주의는 68혁명 정신의 일정한 수용이나 실현이었다기보다는 신좌파를 전략적으로 포위해 다시 포섭하기 위한 자본의 반격이 그 시작이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므로 포드주의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포드주의는 그 이름이 시사하는 것처럼 미국의 포드 자동차 회사가 도입한 생산 체계를 지칭한다. 그 핵심은 대량생산-대량소비와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일괄 생산 라인의 확립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도시 주변 서벌브(교외)에 광범위한 주택단지를 조성해 노동자가 거주하도록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아침이면 도시 내에 위치한 공장으로 출근해 자동차를 조립해야 했다. 

    눈여겨볼 점은 이들이 생산자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이 생산한 자동차의 소비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공장에 출근하려면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구매해 몰고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똑같은 시간에 똑같이 생긴 집에서 나와 똑같이 생긴 차를 타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장면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反집단 反관료 反권위

    찰리 채플린이 연출, 주연을 맡은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 [wikimedia commons]

    찰리 채플린이 연출, 주연을 맡은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 [wikimedia commons]

    사실 이러한 생활양식은 체계적으로 강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대중교통수단을 의도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이 자동차를 구입하도록(심지어 가족 수만큼의 자동차를 구입하도록) 강제했다. 지금도 이 때문에 미국 대도시 내에는 그나마 대중교통수단이 다소 형성돼 있지만, 서벌브에는 대중교통수단이 턱도 없이 부족하다. 포드주의는 노동자의 상품 구매력을 보장하는 고임금을 지급하면서 그것을 다시 대량소비로 연결함으로써 소비자 구매력의 극단적 저하를 통해 시장이 붕괴되는 공황 위험과 대결하는 일종의 변형된 케인스주의를 수립했다. 

    이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대량생산이 필수적이었으므로 일괄 생산 라인, 즉 작업 과정을 수없이 작은 단위로 쪼개 노동자들이 아주 단순한 작업을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반복적으로 수행하도록 만드는 분업 방식이 고안됐다. 이는 노동자의 생활수준 향상은 보장했을지언정 노동자들을 극단적으로 소외시키는 결과를 불러왔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찰리 채플린이 컨베이어벨트에서 계속 나사를 조이는 동작을 반복하다가 나사처럼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쫓아다니면서 강박적으로 조이고 급기야 기계 속으로 들어가 톱니바퀴 사이를 인형처럼 돌아다니는 장면은 이런 일괄 생산 라인 작업이 노동자들을 얼마나 소외시키는지 잘 보여준다. 포드주의는 획일화, 규격화, 개인적인 것의 억압, 그리고 사회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진 기술관료주의적·권위주의적 문화를 양산해냈다. 

    유럽에서는 물론 미국에서와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이른바 ‘복지국가’ 건설을 동반하는 방식으로) 포드주의가 실현됐다. 그러나 포드주의에 기인한 대중 소외 현상은 미국과 마찬가지였고, 68혁명은 바로 이런 포드주의에 맞서 일어난 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68혁명이 과거 혁명과 달리 집단주의에 명확히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며, 관료주의와 권위주의에 저항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특히 68혁명에서 가장 중심적인 세력으로 떠오른 것은 전통적인 노동계급이라기보다는 기술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관리자 집단이 (지시하는) 기술 관료들과 (지시받는) 일반 기술 노동자로 분할된 결과 등장한 새로운 노동계급이었다. 이들은 68혁명에서 더 많은 돈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더는 순종적인 도구가 되지 않겠다는 욕망을 드러냈다. 학생들의 봉기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학이 산업에 연결된 과학 연구를 수행하는 체제가 되어감에 따라 자본에 의한 통제가 점점 더 심해졌고, 이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68혁명이 적어도 주요한 한 측면에서 위계화된 지적 차이를 해체하기 위해 일어난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68혁명은 단지 지적 차이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만은 아니다. 이와 더불어 그것은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성차별주의와 성 억압을 해체하기 위한 싸움, 다시 말해서 성적 차이를 쟁점으로 조직된 운동이기도 했다. 5월 봉기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은 앞서 언급했듯 낭테르대에서 일어난 학교와 학생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때 이슈는 남학생이 여학생 기숙사에 들어가 각자의 여자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학교 측이 과도하게 통제하는 문제였다. 남학생들은 학교 측에 불만을 품고 여학생 기숙사에 몰래 숨어들어갔다가 발각됐고, 학교는 경찰을 불러 이들을 진압한 후 학교를 폐쇄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학생 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

    1970년 8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성 평등 요구 행진. 68혁명은 세계적으로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해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wikimedia commons]

    1970년 8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성 평등 요구 행진. 68혁명은 세계적으로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해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wikimedia commons]

    앞서 말한 포디즘적 체계는 사실 ‘빵을 벌어오는 자(bread-earners)’로서의 남성 노동자와 가정을 지키는 여성 주부, 그리고 이들의 아이로 이뤄진 핵가족 모델을 발명하고 사회적으로 확립한 것이기도 했다. 이 가족 모델의 성차별주의적 성격은 사회 전체의 남녀관계를 규정했고, 특히 여성에게 억압적으로 작용했다(물론 남성도 그 속에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성차별주의 및 성 억압에 대한 반역이기도 했던 68혁명의 가장 유명한 구호 가운데 하나가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혁명을 하고 싶어진다’였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실제로 1968년 5~6월의 봉기 이후 이어진 사회운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페미니즘 운동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평등과 자유의 동일성의 원칙, 다시 말해서 평등 없이 자유 없고 자유 없이 평등 없다는 ‘평등과 자유라는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원칙을 천명함으로써 비가역적으로 근대적 정치의 변증법을 출발시켰지만, 그것은 적어도 근대성을 초과하는 두 가지 쟁점을 제대로 다룰 수 없었으며 따라서 이후 그 쟁점들을 고유한 대상으로 하는 포스트-근대적인 정치를 요청하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이 바로 지적 차이와 성적 차이라는 쟁점이다. 

    지적 차이와 성적 차이는 이 차이들을 부인하는 평등자유(equaliberty, egaliberte)의 논리를 통해 접근할 수 없으며 차이들을 생산적인 방식으로 끊임없이 작동시키는 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지적 차이는 ‘독자성의 빼기’, 그리고 성적 차이는 ‘독자성의 더하기’라는 방향에서 사유되고 실천되어야 한다고 발리바르는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68혁명은 바로 이런 차이들을 대상으로 한 포스트-근대적인 혁명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치권력을 장악해 평등자유를 선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보다는 비정치적으로 간주되곤 했던 일상적인 차원의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새롭게 폭로하고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1970년대에 미국 쪽에서 형성된 페미니즘의 유명한 구호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the personal is political)’였다. 일상의 정치화를 주장한 이 구호는 프랑스의 페미니즘, 더 나아가 68혁명 자체가 공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드골의 복귀로 종결된 ‘표면적 실패’ 뒤에도 68혁명이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사회 전체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내게 된 것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포스트-포드주의가 만든 세상

    68혁명 주인공들은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일괄생산라인 확립 등을 의미하는 포드주의에 반대했다. [wikimedia commons]

    68혁명 주인공들은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일괄생산라인 확립 등을 의미하는 포드주의에 반대했다. [wikimedia commons]

    68혁명이 포드주의에 맞선 혁명이자, 이후 자본주의가 포스트-포드주의로 이행하도록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타당하다. 포스트-포드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똑같은 상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대량생산 체계를 포기하고 소비자의 다양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생산 다변화(소량생산-소량소비 체계의 도입), 한 기계로 다양한 종류의 상품을 제조할 수 있도록 고안한 유연한 기계설비의 발전 등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 포스트-포드주의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소비자 하나하나의 성향을 데이터화하고 개별 소비자에게 적합한 상품을 개발해 개별적으로 홍보하는 빅데이터 기술은 포스트-포드주의의 절정을 이룬다. 이 모든 포스트-포드주의적 생산 및 소비 체계가 컴퓨터의 발전을 핵심적인 수단으로 삼아 발전했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포스트-포드주의를 특징짓는 것 가운데 하나는 대규모로 이루어진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성이 대체로 자본주의의 주변화된 노동을 수행하는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자로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여전히 성차별주의적인 노동조건을 감내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성이 어느 정도 경제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남성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현대 유럽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지역에서 근대적 가족 모델이 해체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가족(1인 가족을 포함한)이 만들어진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 생산된 효과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포스트-포드주의가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와 등치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신자유주의는 무엇보다 금융화를 핵심으로 하며, 더 나아가 새로운 통치성(governmentality) 발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68혁명에서 시작된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사회 재구조화가 그 자체로 금융화를 가져왔다고 보긴 힘들다. 그것은 오히려 자본의 축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자본의 전략(미래에서 가상적으로 돈을 빌려오는 부채경제의 일반화를 통한 이윤율의 극단적 제고 및 전 인구의 부채인간화)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올바를지 모른다. 

    또한 미셸 푸코가 ‘안전, 영토, 인구’ 및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라는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서 잘 보여줬듯, 신자유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패전국 독일에서 형성된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 학파에 의해 발명됐다. 이후 1960~70년대 미국의 시카고학파에 의해 확장 적용된 새로운 통치성의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핵심은 전통적으로 시장 논리에 의해 지배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육아, 교육, 의료, 환경, 안전 등의 모든 영역 안으로 경쟁 논리를 도입함으로써 전 사회를 시장화하는 것이다.

    파리 시내에 각종 정치적 의견이 담긴 포스터가 붙어 있는 모습. 1968년 7월에 촬영된 것이다. [wikimedia commons]

    파리 시내에 각종 정치적 의견이 담긴 포스터가 붙어 있는 모습. 1968년 7월에 촬영된 것이다. [wikimedia commons]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순수 자본주의’라고 할 만한 것(즉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요소를 전혀 갖지 않는 자본주의)을 실현하는데, 그것은 전(前)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동체적 유대를 통해, 그리고 자본주의적 사회에서는 사회적 시민권의 제도화(이른바 ‘복지국가’)를 통해 주어져온 개인성 실현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극단적으로 파괴한다. 이로써 부정적 개인들(negative individuals)을 양산하고(이런 부정적 개인들의 극단적 형상은 모든 공동체적 유대로부터 자유로워진 ‘거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1대 99’ 또는 ‘20대 80’ 등의 별명을 갖는 극도로 불평등한 사회를 세계적으로 일반화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는 신자유주의란 68혁명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68혁명이 가져온 해방 효과를 자본이 다시 포위한 반격의 전략이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문제를 잠시 살펴보자. 사실 다른 혁명과 달리 68혁명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낯선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아직 68혁명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68혁명의 의미

    우리는 68혁명이 추구했던 일상적인 것의 혁명, 특히 지적 위계와 성차별주의에 대한 투쟁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채(1998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외부로부터 도입된)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구조화를 먼저 경험했다. 아마도 이제야 우리는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시작해 최근의 미투운동으로 이어지는 여성들의 투쟁을 통해 뒤늦게 도착한 68혁명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하기에 더욱 이 연착된 68혁명을 이미 오래전에 당도한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의 포위 전략으로부터 어떻게 구분하고 구출해 그 혁명성을 복원해내고 우리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느냐 하는 질문에 답하는 일이 긴급해진다. 

    경쟁의 시장 논리를 통해 자신들이 꿈꾸었던 자유를 일정하게 실현할 수 있다는 소비주의 사회의 미망 속에서 혁명의 성과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그냥 방치했던 50년 전의 68세대와 달리 우리는 어떻게 그 경쟁의 논리를 극복하고 자본주의, 가부장주의, 엘리트주의에 맞선 투쟁을 다르게 반복할 것인가? 아마도 관건은 68혁명의 포스트-근대적 투쟁을 근대적 투쟁으로서의 평등자유의 ‘해방의 정치’ 및 경제적 조건들의 ‘변혁의 정치’와 어떻게 접합할 지를 사유하는 문제가 아닐까 한다. 

    프랑스 68봉기의 막바지에 학생과 노동자가 분열했던 결정적인 실패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이제 우리가 여성운동, 성소수자 운동, 노동자 운동, 장애인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운동들의 연대 전선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부분 운동이 다른 운동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하고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가 더욱 더 민주적인 방식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다. 68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우리에겐 적어도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마르퀴스 드 사드가 “프랑스인들이여, 공화주의자가 되기 위해 한 번 더 노력을!”이라고 말했듯이,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인들이여, 68혁명을 계승하기 위해 한 번 더 노력을!”


    최원
    ● 1968년 출생
    ● 미국 시카고 로욜라대 철학박사
    ● 단국대 강사
    ● 저서: ‘라캉 또는 알튀세르’(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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