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호

인터뷰

경계의 지식인 김시덕

“변방에 있었기에 이만큼 왔다”

  • 입력2018-06-13 1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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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日이 주목하는 연구자이자 대학이 내치려는 ‘이단아’

    • 논문보다는 대중 저술…“시민사회로 들어가고자”

    • “이영훈은 계몽주의자, 박유하는 신중함 부족했다”

    • 동아시아국가 평화 공존? “이웃나라에 대한 무지부터 극복해야”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최인훈의 1960년 소설 ‘광장’에서 밀실과 광장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주인공 이명준은 결국 제3국으로 떠난다. 그는 ‘경계인’이었다. 경계인이란 표현에 대해 처음 정의한 이는 나치즘을 피해 미국으로 향한 쿠르트 레빈(Kurt Lewin)이다. 그는 ‘다수자 집단과 소수자 집단의 경계에 있는 사람’을 경계인이라 불렀다. 

    김시덕(43)은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주목받는 연구자 겸 저술가다. 고려대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일본 국립문헌학연구소인 국문학연구자료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0년 일본어로 ‘이국정벌전기의 세계((異國征伐戰記の世界)’를 펴내 이듬해 일본고전문학학술상을 받았다. 40세 이하 고문헌 연구자에게 수여하는 권위 있는 학술상으로 외국인으로서는 최초 수상이다. 2015년에는 한국 동방문학비교연구회의 ‘석헌(石軒)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5년 펴낸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는 동아시아사 연구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이 책에 대해 “한반도의 사활을 건 미래 전략을 짜는 데 필독서가 될 것”이라고 격찬한 바 있다.

    서울대 출신이 아니어서

    그러나 김시덕은 경계인이다. 대학 연구소(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라는 ‘울타리’ 안에 적(籍)을 두고 있지만, 끊임없이 월경(越境)을 시도한다. 시민사회 속으로, 대중매체 속으로 뛰어들고자 한다. 저술·강연 활동 외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도 활발하다. 

    종횡무진하는 그에게 보수적인 학계가 보내는 시선은 곱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터부시되는 일본학을 전공한다는 ‘멍에’도 썼다. 지난해에는 교수로 재직 중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바탕 전쟁도 치렀다. ‘친일파’ 낙인도 찍혔다. 

    서울대와의 ‘전쟁’은 휴전 중인가요? 

    “1라운드는 끝났습니다. 2라운드가 진행되고 있죠. 지난해 12월 제게 재임용 탈락 처분을 내린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재임용 심사 절차 전반의 문제에 대해 감사원에 행정감사를 청구했습니다. 현재 감사가 진행 중입니다. 상식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라 예상합니다.” 



    김시덕은 2013년 4년 임기의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임용됐다. 2017년 서울대 인문대학 인사위원회는 그에게 ‘재임용 불가’를 통보했다. ‘연구 실적 기준 미달’이 이유였다. 연구 평가 대상 논문 한 편을 두고서는 공정성 논란도 일었다. 같은 논문을 두고 ‘수’에서 ‘가’까지 평가가 갈렸다. 서울대 본부는 “인문대학의 평가를 신뢰하기 어렵다”며 재심사를 지시했다. 김시덕은 2017년 8월 재임용됐다. 

    이것으로 전쟁이 끝나진 않았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인사위원 중 한 명인 오수창 국사학과 교수는 9월 실명 대자보를 통해 성낙인 총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인문대에서 결격으로 판정한 김시덕 교수의 ‘재임용 불가’ 의견을 성 총장이 뒤집었다는 것이다. 서울대 인터넷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 ‘오수창 교수의 대자보와 국사학과 패권주의’라는 익명의 글이 게시됐다. 김시덕 박사 등은 비(非)서울대 출신이어서 차별을 받고 재임용에서 탈락했다”는 것이 글의 요지였다. 이후 계약직 교수의 재임용 심사를 둘러싼 논란은 서울대 본부와 인문대학 간 갈등, 서울대 순혈주의 논란으로 옮겨붙었다. 

    전쟁을 치른 소감은 어떻습니까. 

    “씁쓸합니다. 당혹스럽기도 하고요. 결과적으로 재임용이 결정돼 4년간 조교수로 서울대에 더 머무를 수 있게 됐습니다. 감사원 감사 결과가 나오면 부교수 승급 심사를 신청할 생각이에요.” 

    정나미가 떨어져서 떠나고 싶을 법한데요. 

    “솔직히 정나미가 떨어졌죠. 그래도 끝까지 남아서 괴롭혀야죠(웃음).” 

    그는 지난해 3월 재임용을 둘러싼 갈등을 겪으면서 재임용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갈 생각을 했더랬다. 대중과 소통하는 교양서 집필에 집중하자는 생각에서다. 

    “직업인으로서 현명한 일은 대학에서 교수로서 정년을 맞는 것입니다. 월급과 연구비가 안정적으로 나오고, 퇴직 후엔 연금도 보장되죠. 다만 교수 자리를 유지하려면 매년 논문 편수를 채워야 하고, 연구 프로젝트도 해야 합니다. 지난해 일을 겪으면서 ‘본질적으로 내가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해답도 찾았어요. 책을 쓰는 것입니다. 학계 사람들만 보는 논문보다는 대중에게, 시민사회에 다가갈 수 있는 단행본을 쓰는 거요. 1930년대 동아일보가 후원한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처럼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의 본질은 연구 결과를 책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서울을 답사합니다. 

    “본래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요. 돌아다니는 것도 좋아하고요. 사실 서울 답사는 작년에 화를 삭이려고 걸어 다닌 것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러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서울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됐어요.” 

    그의 서울 답사 결과물은 6월 ‘서울 선언 : 문헌학자 김시덕의 서울 걷기’로 출간될 예정이다. 그는 이 책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를 몰아내려 한 직장 내의 일부 세력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은 2017년 3월이었습니다. 저의 삶의 지반이 참으로 쉽게 흔들리는 현실을 경험하면서, 제가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휙 하니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몇 달간이었습니다. 서울이라는 공간을 언제든 쉽게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지난 몇 십 년 동안 제가 서울을 걸으며 생각하고 느껴온 점을 더 늦기 전에 정리하자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쓴 책

    한국을 떠나기 전에 화를 풀어내려 시작한 일이 새로운 연구의 지평이 된 셈이다. 그는 “문헌학자인 내게 서울이란 도시는 거대한 필드워크”라고 했다.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란 책으로 널리 알려진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는 ‘도시는 이용되기만 할 뿐 아무도 도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서울이란 도시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기록하기로 했어요.” 

    문재인 정부의 중요 정책 중 하나인 도시재생사업에 대해서도 부정적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서울’을 바라봐야 해요. 예쁘든 그렇지 않든 살아있는 공간을 주목해야 합니다. 저는 민족의 상징 등을 찾을 생각이 없어요. 근·현대 서울이 버림받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도시재생을 명목으로 이를 파괴하거나 ‘화석화’하는 것에도 저는 부정적입니다. 우리가 늘 보는 낡은 건물, 길모퉁이의 돌 하나에도 지난날의 자취가 스며 있는데 말이죠. 도서관의 고문서가 그러하듯 서울이라는 세계의 벽돌 하나하나가 제겐 연구 대상입니다.” 

    그는 ‘서울 선언’에 실린 글과 사진을 스마트폰만을 이용해 쓰고 찍었다고 한다. 그는 저술가에게 스마트폰이 ‘무사의 칼’과 같다고 했다. 

    “나는 언제든지, 어디서나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켜고 쓰는’ 사람이죠. 정신이 바뀌면 도구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도구가 바뀌면 정신이 바뀐다는 것을 체감했습니다.”

    “史實과 事實은 다를 수 있다”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고교 시절 그의 꿈은 성서고고학자가 돼 이라크나 이집트로 가서 ‘땅을 파는’ 것이었다. 기독교인으로 교회에도 성실하게 나갔다. 그는 “강남 고속터미널 부근 기독교 서점에서 성서고고학 책들을 탐독하며 오늘날 학문의 기본을 닦았다”고 했다. 

    그런데 문헌학 전공으로 꿈이 바뀌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다 보니 과학적·논리적 관점에서 이상한 부분이 보였습니다. 교회 담임목사께 전화해 물어보니 돌아온 답이 이랬습니다. ‘사탄의 시험에 들었다’.” 

    기독교, 특히 한국 개신교회의 도그마 때문인가요? 

    “그런 셈입니다. 종교적 도그마가 지배하던 시절이었죠. 의심을 품지 말라, 기록된 것이니 사실이라 믿으라, 네가 감히 ‘성경’ 말씀을 의심하느냐? 이런 태도인 거죠. 그때 실망과 충격으로 성서고고학자가 되는 꿈을 접었습니다. 신앙심도 잃었고요.” 

    김시덕은 이런 관점에서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 왜곡을 말할 처지가 못 된다고 했다. ‘기록된 것(史實)’이니 의심 없는 ‘사실(事實)’로 믿어버린다는 이유에서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소설이나 드라마 ‘동의보감’을 보고서 작중(作中) 허준의 스승으로 등장하는 유의태를 실존 인물로 간주하고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테마파크를 만드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일부 종문(宗門)에서는 족보나 가문의 기록을 근거로 조선왕조실록 수정을 요구하기도 해요. 웃지 못할 현실이죠.” 

    한국의 종가(宗家)나 종교는 일종의 ‘성역’입니다. 잘못 건드리면 반발이 엄청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손댔음에도 풍산 류씨 집안과 잘 지내고 있습니다(웃음).” 

    김시덕은 서애 류성룡이 쓴 ‘징비록’의 다양한 판본, 류성룡이 다른 문헌에 남긴 증언, 17세기 후반 일본에서 간행된 ‘조선징비록’ 등을 검토·교감(校勘)해 2013년 ‘교감 해설 징비록 : 한국의 고전에서 동아시아의 고전으로’를 출간했다. 그는 류성룡을 깐깐하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문헌학자의 본업은 사실(事實)을 밝히는 것입니다. 역사학의 사실(史實)과는 다른 맥락이에요. 저는 문헌학이라는 ‘방법론’을 활용해 일반 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려 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인문학은 문헌학에서 시작됐습니다. 문명이 성립하려면 문헌학이 있어야 합니다. 유럽은 문헌학이 제대로 연구된 400~500년간의 경험이 있습니다. 한국은 이런 경험이 없어요. 저는 문헌학을 한국에 정착시키려 한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제게 문헌학은 일종의 운동이에요.” 

    한국 대학의 문제점을 꼽자면. 

    “기본적으로 폐쇄적인 집단이란 점을 꼽겠습니다. 더하여 종전의 ‘유니버시티’는 형해(形骸)화했다고 봅니다. 학문 재생산을 못하고 있습니다. 학부는 물론 대학원도 교양 과정화 됐어요. 대학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고, 구조도 재편해야 해요. 저는 학부 과정에는 전공이 필요치 않다고 봅니다. 학부는 교양 과정인 거죠. 전문적인 것은 대학원에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원도 학과가 아닌 ‘랩(lab)’ 개념으로, 세부 전공교수와 학생으로 나누어 도제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한국에서 일본학을 연구하는 어려움이 있을 텐데요. 

    “한국에서 일본학 연구는 북한학보다 위험합니다. 사회의 편견 탓이에요. 자칫 잘못하면 ‘친일파’로 낙인찍힙니다.” 

    이유가 뭘까요. 

    “일부 국수주의자들의 편견이죠. 그저 일본 문헌을 연구한다고 친일파로 여깁니다. 학계 통설과 다른 주장을 한다는 것도 이유고요.” 

    그는 한국에서 일본은 “보수와 진보,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모두에게 공공의 적 같은 존재”라고 했다. 이념, 계층, 세대를 넘어 반일 혹은 혐일 정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는 일본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않았나요. 

    “저는 새로운 형태의 반일 정서가 생겼다고 봅니다. 젊은 세대에게 경멸의 대상이 북한이라면 증오의 대상은 일본, ‘Japs(왜놈)’라 할 수 있어요. 국내 정치 및 경제의 침체와 관련 있는 현상입니다. 내적 스트레스를 발산할 외부 창구가 필요한데, 그것이 일본인 거죠. 반일 정서는 앞으로도 50년 이상 갈 듯 합니다.” 

    그는 반일 감정의 또 다른 원인으로 한국 사회의 ‘성장의 불일치’를 꼽았다. 몸은 커졌으나 정신은 성숙하지 못한 것에서 발생한 ‘치기(稚氣)’의 성격도 있다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이영훈 교수, ‘제국의 위안부’ 논란을 일으킨 박유하 교수는 어떻게 보십니까.
     

    “이영훈 교수는 계몽주의자라 봅니다. ‘국민들이 좌파의 이념 공세에 놀아나서 안타깝다, 내가 나서서 구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봅니다. 박유하 교수는 한일 관계 개선을 바라는 선의(善意)는 이해하지만, 신중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한일 관계는 극히 예민한 주제이기에 신중하게 대중의 감정을 읽어가며 접근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죠. 게다가 가장 예민한 주제인 위안부를 다뤘고요.” 

    한·중·일·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우선 한국은 이웃 나라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지를 극복해야 합니다. ‘지구촌’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지 오래됐음에도 하지 않고 있는 부분입니다. 실용주의로 생각해도 한국은 통상국가이니 상대방을 파악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상대를 모르면 손해 아닙니까. 20세기 후기 개발도상국 중 고도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함께 이룬 나라로는 한국이 유일한 것으로 착각하는데, 대만도 유사한 성취를 이뤘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경계 허물어진 극동공화국 연구할 것

    앞으로 계획은 어떻습니까. 

    “근·현대 러시아와 일본 관계, 그중에서도 극동공화국을 연구하고자 합니다. 1920~1922년 구 러시아제국 시베리아에 일본군과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의 완충국으로서 존속했던 공화국입니다. 이 극동공화국에서는 모든 것의 경계가 허물어졌습니다. 국가, 인종, 이념, 종교 등 인간의 거의 모든 정체성과 열망이 충돌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광수가 1933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유정’의 무대이기도 하고요.” 

    그는 “경계인 혹은 아웃사이더라는, 김시덕에 대한 정의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예나 지금이나 몰려다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며 “아웃사이더라는 표현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장점으로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는 연구 및 저술 활동에 도움이 된다. 

    “도쿄·교토대나 와세다·게이오대 같은 이른바 일본 명문대학 교수들은 정말 연구에 매진할 제자는 모교로 불러들이지 않습니다. 다른 대학에 이방인으로, 마이너로 남아 있으면서 연구하도록 하죠. 저도 변방에서 이를 악물고 연구하고 글을 썼기에 이만큼이라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알려드립니다

    신동아 2018년 6월호에 실린 인터뷰 ‘경계의 지식인 김시덕’에 실린 김시덕 교수의 발언 “작년에 서울대 모 교수가 대자보에 ‘김시덕은 친일파’라고 쓰기도 했고요”(본문에서는 삭제)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를 독자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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