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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맛 이야기’

술잔은 무겁게, 마음은 가볍게 즐기는 우리 술

  •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술잔은 무겁게, 마음은 가볍게 즐기는 우리 술

조선시대 술집 풍경을 담은 신윤복 풍속화 ‘주사거배(酒肆擧杯)’. [동아DB]

조선시대 술집 풍경을 담은 신윤복 풍속화 ‘주사거배(酒肆擧杯)’. [동아DB]

‘비는 내리고/하늘에 뜨지 못한 달이/작은 그릇 속에 떴다 (중략) 얼마나 온 걸까/찌그러진 주전자 끝에/눈물 맛이 나는 하루’(막걸리, 임권). 

술을 담그고 나니 시 한 수가 떠오른다. 행여 엉엉 울고 싶은 일이 생기더라도 막걸리 한잔에 근심을 풀고 지나가면 좋겠다. 소주는 쓸쓸한 마음에 붓자니 너무 따갑고 쓰다. 맥주는 지나치게 쾌활해 근심 위에 이 술을 부으면 더 외로워지는 것 같다. 이럴 때는 탁주가 제격이다. 구겨진 내 얼굴도 비치지 않고, 밥처럼 구수하니 맛도 좋다. 분명 차가운 술을 먹는데 마음은 뜨끈해지는 정이 있다. 그래서 나는 가양주를 빚었나 보다. 

가양주를 빚고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먹을지 고민해 볼 일이다. 나처럼 술빚기 초보자들은 맛보고 싶은 마음이 급한데다 솜씨도 어설프니 막걸리로 내려 먹는 게 수월하다. 게다가 빚은 술 양이 워낙 적으니 청주를 걸러내야 하나 마나 고민도 된다.


천태만상 가양주의 세계

술지게미에 물, 흑설탕 등을 넣어 만드는 모주. [전주주조 공식홈페이지]

술지게미에 물, 흑설탕 등을 넣어 만드는 모주. [전주주조 공식홈페이지]

우리가 마실 수 있는 가양주, 즉 전통주 유형은 탁주, 청주, 증류주로 크게 나뉜다. 과실주도 있지만 곡물이 원료가 아니니 잠시 빼두자. 

막걸리는 탁주에 속한다. 술이 발효하면 독 바닥에 곡물 건더기가 가라앉고, 위에는 맑은 술이 뜬다. 막걸리는 위에 뜬 술을 따로 떠내지 않고, 건더기와 술을 한꺼번에 주물러 거른 술이다. 모두 알다시피 뽀얗고 불투명한 상아색을 띠며 알코올 도수가 낮은 편이다. 탁주, 탁배기, 막 거른 술, (집에서 만들었으니) 가주, (농사일 하며 먹기 좋으니) 농주 등으로 불렸다. 



청주는 가라앉은 건더기를 가만히 두고 웃물만 떠내 거른 맑은 술이다. 전통 방식은 가라앉은 건더기에 ‘용수’를 박아 그 안으로 맑은 술이 고이게 했다. 용수는 싸리나무, 대나무, 버드나무 같은 것을 가늘게 쪼개 촘촘하게 엮어 만든 둥글고 길쭉한 바구니다. 요즘엔 구하기 힘들뿐더러 고운 체가 다양하게 나오니 이것을 이용해 맑은 술을 거를 수 있다. 

그럼 동동주는 뭘까. 발효를 거치는 중 떠오르는 밥알을 굳이 거르지 않고 위에 뜬 술과 함께 퍼낸 것이다. 동동주를 맑게 거르면 청주라고 볼 수 있다. 

곁가지가 하나 더 있다. 청주를 거르고 남은 술지게미에 물을 섞어 거른 것도 탁주라고 부르며 예전엔 꽤 많이 소비됐다고 한다. 물을 섞은 술과 그러지 않은 술을 구분하려고 탁주와 막걸리로 각각 부르기 시작했다는 말도 있다. 쌀과 술이 흔한 요즘에는 굳이 술지게미에 물을 탄 탁주까지 만드는 양조장은 잘 없다. 그렇지만 집에서 내손으로 술을 담그고 보니 술지게미에 물을 타서라도 술을 오래오래 맛보고 싶기도 하다. 

증류주는 청주를 증류해 받은 술이다. 향과 맛이 응축되면서 알코올 도수가 40% 내외로 높아진다. 증류주를 이야기할 때는 과하주(過夏酒)를 빼놓을 수 없다. 과하주는 이름 그대로 여름을 나는 술이다. 청주와 청주를 증류한 술을 섞어 숙성해 만든다. 알코올 도수를 높여 더운 여름에도 발효가 더는 일어나지 않게 하면서 맛은 부드럽게 즐길 수 있다. 집에서 간단하게 과하주를 만들고 싶다면 술지게미에 시판 소주를 부어 숙성시키는 방법도 있다. 맛은 다소 떨어지겠지만 여름 내내 손수 담근 술을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술을 거르고 나면 술지게미가 꽤 남는다. 이것 역시 쓸모가 만만치 않다. 술을 좋아한다면 마땅히 모주를 만들어야 한다. 술지게미에 물과 흑설탕 그리고 생강, 대추, 감초, 계피, 갈근 같은 약재를 넣어 만든다. 계피를 제외한 약재를 먼저 물에 푹 끓여 우린다. 그 물에 계피와 술지게미를 넣고 보글보글 끓으면 입맛에 맞게 흑설탕을 넣는다. 은근한 불에서 계속 저으며 막걸리 같은 농도가 되게끔 끓여 체에 거른다. 이렇게 하고도 남은 술지게미는 목욕 시 피부에 바르듯 살살 문질러 각질 제거나 보습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모주를 만드는 대신 오이, 무, 가지 등을 큼직큼직하게 썰어 소금에 버무린 다음 술지게미에 박아 장아찌를 만드는 방법이 있다. 흔히 들어본 주박장아찌가 바로 그것이다. 술지게미는 주박, 주정박, 주자, 주재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술지게미를 효모 대신 사용해 빵을 빚는 이들도 있고, 가볍게 말려 알코올 성분을 날린 뒤 텃밭에 거름으로 줘도 아주 좋다. 정성껏 빚은 술이 건더기 한 톨까지 이토록 쓸모가 있다니 아직 맛도 보지 못한 술을 거나하게 마신 듯 웃음이 난다.


개성 넘치는 ‘신식’ 전통주

울산 ‘복순도가’ 양조장 풍경. [홍중식 기자]

울산 ‘복순도가’ 양조장 풍경. [홍중식 기자]

전통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곳이 꽤 있다. 막걸리학교를 비롯해 수수보리아카데미, 한국가양주연구소, 한국전통발효아카데미센터, 한국전통주연구소, 북촌전통주문화연구원, 한국전통음식연구소, 전통주연구개발원, 배다리전통주학교, 연효재, 전라슬로푸드문화원 등으로 다양하다. 백화점 문화센터 등에서도 종종 전통주에 대한 강의가 개설되기도 한다. 술 빚기를 배우지 않고 집에서 막걸리를 뚝딱 만들 수 있는 키트도 있다. 막걸리 분말과 효소제 등이 들어 있어 재료를 넣고 미지근한 물을 부어 하룻밤 두면 영락없는 막걸리가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막걸리는 그대로 마시기도 하지만 과일 주스나 휘핑크림, 커피, 설탕 등을 넣어 색다른 칵테일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막걸리를 살짝 얼린 다음 과일 또는 과일즙, 요구르트와 함께 곱게 갈면 개운한 맛의 스무디 칵테일이 된다. 

저마다의 개성 넘치는 전통주가 봇물처럼 쏟아지는 요즘이다. 하나같이 빼어난 패키지와 기발한 이름만큼 내공이 가득한 품질을 갖고 있다. 울산에 위치한 복순도가의 ‘손 막걸리’는 자글자글 강렬한 탄산이 남달라서 막걸리계의 샴페인으로 불린다. 석류즙처럼 빨간 ‘붉은 원숭이’는 오로지 붉은 쌀(홍국)로만 술을 빚는다. 삼해주처럼 세 번 빚는 경기 남양주의 ‘봇뜰막걸리’는 ‘오미(五味)’를 모두 담은 맛 좋은 술로 통한다. 충북 청주에서 만들어지는 ‘풍정사계’는 하나의 이름 아래 청주, 과하주, 탁주, 소주가 모두 생산돼 하나하나 다른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최근 만난 가장 특이한 전통주를 꼽자면 술샘의 ‘이화주’다. 예부터 있던 술 종류인데 만드는 이가 그간 없었나 보다. 이 술은 요거트 혹은 푸딩과 비슷하다. 색은 탁주에 가까운데 액체가 아니라 찰랑찰랑하는 덩어리다. 이화주는 물 없이 쌀과 누룩만으로 빚는다. 누룩도 밀 아닌 쌀누룩인 ‘이화곡’을 사용한다. 쌀가루로 구멍떡을 빚고 삶아 익힌 다음 식힌다. 구멍떡을 으깰 때 이화곡을 넣고 한참을 주물러 섞이게 한 다음 항아리에 넣는다. 물기가 없으니 주물러 섞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고 한다. 2~3일 동안 발효하고 한 달 이상 숙성하면 요거트 같은 이화주가 만들어진다. 물이 안 들어가니 신 맛이 적고, 쌀이 많이 들어가니 당연히 달고, 발효 기간이 짧으니 알코올 도수도 높지 않다. 누구라도 신기하고 좋아할 만한 전통주다. 배꽃 필 때 빚는 술이라 이화주(梨花酒)라 이름 붙었다. 

이와 비슷한 재미를 주는 것이 느린마을 양조장에서 맛보는 사계 막걸리다. 술 빚은 지 1~2일 된 것을 봄, 3~5일 차는 여름, 6~7일 차가 가을, 8~10일 차는 겨울 막걸리라 칭한다. 살아 숨 쉬는 막걸리가 익어감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한자리에서 맛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전통주를 한자리에서 맛보고 싶다면 백곰 막걸리&양조장, 안씨막걸리, 산울림1992, 윤서울, 작(酌) 같은 곳을 방문해 본다. 전통주에 일가견이 있는 직원 혹은 전통주 소믈리에의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술과 어울리는 음식까지 함께 즐길 수 있다. 요즘은 대형 마트나 동네 슈퍼마켓에서 구하기 힘든 전통주를 온라인으로 쉽게 구해 마실 수도 있다. 

술은 하늘이 내린 아름다운 녹(祿)이라는 말이 있다. 술 빚은 사람의 정성, 나의 노고를 다해 구한 것이다. 귀하게 여기며 잔을 들고, 기분 좋게 마셔 정신을 맑게 하되 과음하다 명을 재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에게 보내는 다짐이다.




신동아 2020년 5월호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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