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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맛 이야기’

장아찌에 저장해야 할 봄 맛, 봄 향기

  •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장아찌에 저장해야 할 봄 맛, 봄 향기

봄은 각양각색 장아찌를 만들어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기 좋은 계절이다. [gettyimage]

봄은 각양각색 장아찌를 만들어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기 좋은 계절이다. [gettyimage]

절친하던 친구가 15년 전 미국 LA로 이주했다. 그때만 해도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를 주고받고, 서로 깨어 있는 시간을 맞춰 소곤소곤 전화로 떠드는 게 안부를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친구는 중고등학교를 합쳐 6년 동안 영어를 배웠는데도 수개월 동안 벙어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 생각해보면 자기 존재감을 확인받는 시간은 나와의 소통이 유일했던 것 같다. 1년쯤 지났을까. 언제인가부터 내가 뭘 먹고 다니는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그에게나 나에게나 특별할 것 없는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통장 잔고 부족한 사회 초년생의 술상은 거기서 거기였는데도 자꾸만 물었다. 나는 캘리포니아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그곳에는 한국 사람이 많이 살아서 없는 게 없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왜 먹는 타령이냐 짜증을 내보기도 했다. 어느 날 그가 울먹울먹 답했다. 

“여기는 모든 게 다 있는데 계절이 없어. 여름뿐이야. 사막 한 가운데서 어묵꼬치 먹으면 맛있겠냐, 유리창에 서리가 하얗게 낀 주점에 앉아서 이가 시리게 차가운 소주에 매운 닭발 먹고 싶다고. 한겨울에 흘리는 땀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 너는 몰라.”


하마터면 당연하게 여겼을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에게 사계절은 당연하다. 봄, 가을이 종이인형처럼 얄팍하게 지나가는 것 같지만 어쨌든 존재하는데다가, 짧게라도 제몫을 다하고 팔랑팔랑 사라진다. 봄에는 온 땅이며 나뭇가지 끄트머리에 갖은 향을 진하게 내 뿜는 초록 잎과 새순이 가득하다. 어린 순부터 이파리며 줄기가 다소 뻣뻣해지는 때까지 부지런히 먹는다. 생으로 먹고, 데쳐서 나물로 먹고, 전으로 부쳐 먹고, 튀겨도 먹으며 밥도 짓고 국도 끓인다. 때로는 차도 만들고, 술도 담근다. 

끝물의 잎과 순은 대체로 장아찌로 담가 그 향과 쌉싸래한 맛을 오래 즐기고자 한다. 냉이, 달래, 씀바귀, 민들레, 원추리, 돌나물, 보리싹, 쑥, 머위, 미나리, 당귀, 두릅과 엄나무 순, 가죽, 여러 가지 취나물, 부추, 쑥갓, 풍성한 상추 등 다 쓰기 숨찰 만큼 봄에는 초록색 먹을 것이 넘쳐난다. 

장아찌를 담글 때는 이파리 하나하나 깨끗이 씻어야 맛과 향이 잘 보존되고, 무르지도 않는다. 간장 절임물은 만드는 사람 마음이다. 간장, 식초, 설탕, 물을 같은 비율로 넣고 끓이라는 지침이 제일 많은데 내 입에는 너무 달고 시다. 단단하고 두께 있는 뿌리채소나 오이, 파프리카 같은 것은 달고 신 장아찌로 나쁘지 않지만 봄채소는 그저 짭짤하고 씁쓸한 맛이 나며 향이 진한 게 좋다. 간장 양의 1/3 정도로 설탕과 식초를 넣고, 물이나 채소국물은 간장의 1.5~2배 정도 부어 간을 본다. 설탕 대신 매실청을 쓰면 식초 양을 줄여야 한다. 



절임물을 한소끔 끓여 식힌 다음 차곡차곡 담아놓은 봄채소 위에 살살 부어 맛을 들인다. 처음에는 채소 부피가 많아 보여도 금세 납작해지니 맛이 들면 작은 통으로 옮긴다. 중간에 절임물만 받아 한 번 더 끓여 식힌 다음 다시 부어주면 오래 두고 먹는 마음에 안심이 된다. 나물을 건져 먹고 남은 절임물은 마른 반찬 볶을 때나 조림 요리 만들 때 맛간장처럼 쓰기에 좋다. 청양고추를 잔뜩 다져 절임 간장을 자작하게 부어 달달 볶아 두면 이 또한 훌륭한 양념이 된다. 비빔밥, 비빔국수 양념을 만들 때, 멸치나 어묵 볶을 때, 햄을 잔뜩 썰어 놓고 볶음밥을 할 때도 조금씩 넣으면 맛있다.


집에서 만드는 제철 장아찌

된장이나 고추장에 채소를 절일 때는 소금물에 먼저 담가 삭힌 다음 물기를 싹 빼고 절여야 무르지 않는다. 물기를 빼려고 잎채소를 한 장씩 널어 말리기도 한다. 다소 번거로워 된장이나 고추장에 담그는 장아찌는 주로 더덕, 도라지, 순무처럼 덩어리 채소를 활용하는 편이다. 

봄채소 갈무리가 끝나면 참외와 토마토 순서다. 참외는 단단하고 작은 것을 사서 껍질을 깨끗이 씻고 속은 파낸다. 소금에 말랑하게 절였다가 하루 정도 말려 간장 절임물을 부으면 된다. 잘만 익으면 오이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여름 반찬이 된다. 

토마토는 장아찌로 담그려면 풋토마토를 골라야 하는데, 그래도 오래 두고 먹지는 못한다. 제철 토마토를 오래오래 즐기고 싶다면 완숙 토마토를 골라야 한다. 깨끗이 씻은 완숙토마토의 꼭지를 파내고 커다란 냄비에 넣는다. 이때 손으로 마구 주물러 터뜨려야 한다. 그리고 푹 끓인다. 절반 정도로 양이 줄때까지 뭉근하게 끓여 뜨거울 때 소독한 병에 담아 둔다. 껍질을 건져내기도 하는데, 나는 그냥 모두 먹는다. 초간단 토마토 병조림인데, 주스나 수프로 먹어도 되고, 마늘을 기름에 볶아 토마토 병조림을 넣고 소스를 만들어도 된다. 여기에 베이컨, 간 고기, 해산물 등을 넣고, 허브라도 한줌 더하면 풍미 좋은 소스를 쉽게 만들 수 있다. 매콤한 국물 요리를 할 때 토마토 병조림을 두어 스푼 넣으면 감칠맛이 살아나고, 서양식 갈비찜처럼 푹 끓이는 요리를 만들 때도 넉넉히 부어 뭉근히 끓이면 구수한 맛이 차오른다. 남은 소스에 밥을 비벼 먹어도 맛있고, 면을 삶아 한소끔 볶아도 된다. 

방울토마토는 꼭지를 떼고 반으로 갈라 올리브 오일을 넉넉히, 소금과 후추는 조금만 뿌려 섭씨 100~110도 오븐에서 4~5시간 구워 말린다. 소독한 병에 넣고 올리브 오일을 채워 보관한다. 샐러드와 오픈 샌드위치, 술안주로 몇 알씩 꺼내 먹기 딱 좋은 봄날 만들어 두는 비상식품이다. 

토마토에 이어 오이, 통마늘, 양파도 장아찌 차례를 기다린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재료이니 오늘은 잠깐 접어두자. 다만 한 가지! 통마늘은 쪽 사이가 벌어지면 마늘이 너무 매울 수 있다. 쪽마늘이 틈 없이 꽉 붙어 있는, 작고 단단하고 껍질이 바싹 마른 것을 골라 장아찌로 만들자. 

5월 20일 절기 소만이 막 지났다. 입하에 여름의 문이 열렸고, 이제 여름 안으로 한 발 내딛은 셈이다. 여름만 살고 있는 친구는 아직도 그곳에 있다. 사계절 내내 같은 기분으로 찬밥에 오이지만 먹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편지의 시대가 저물면서 우리의 연락은 오히려 소원해졌다. 절임물 끓여 식히는 사이에 ‘톡’이나 보내봐야겠다.




신동아 2020년 6월호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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