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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패러다임 수명 다했다

[신기욱의 밖에서 본 한반도]

  •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아시아 태평양 연구소장 gwshin@stanford.edu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패러다임 수명 다했다

  • ● 우크라이나 침공, 남의 얘기 아니다
    ● 긴박한 정세에도 한가로운 한국
    ● 韓, 러시아 전쟁범죄 비판해야
    ● NYT 칼럼 “세계화는 끝났다”
    ● 푸틴-시진핑 손잡는다면…
    ● 경제 이해 넘어 가치연대 고민해야
4월 3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 소도시 부차의 흙구덩이에 검은 포대에 싸인 시신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러시아군이 부차를 점령했을 동안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후 집단 암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옆에서 한 기자가 스마트폰으로 현장을 촬영하고 있다. [AP 뉴시스]

4월 3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 소도시 부차의 흙구덩이에 검은 포대에 싸인 시신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러시아군이 부차를 점령했을 동안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후 집단 암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옆에서 한 기자가 스마트폰으로 현장을 촬영하고 있다. [AP 뉴시스]

국제사회에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이 바람은 국제질서의 급격한 변화 조짐을 알리고 있다. 1941년 나치 독일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비견되는 이번 사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최대·최악의 전쟁이 되고 있다. 신냉전의 도래, 심지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에 대한 경고까지 나오는 이유다. 우크라이나의 결사 항전과 미국·유럽의 지원으로 러시아가 원했던 압승은 좌절됐다. 이후 전개될 국제질서의 변화는 예단하기가 쉽지 않다. 1945년 이후 수립된 미·소 냉전시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이어진 세계화 시대처럼 대전환의 변곡점이 될 가능성이 큰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우크라이나 출신 학자와의 대화

국제사회의 긴박함과는 달리 한국에선 무관심을 넘어 한가로움까지 느껴진다. 3·9 대선 당시 여당 후보는 “초보 정치인이 대통령이 돼 나토 가입을 공언하고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결국 충돌했다”고 제1야당 후보를 빗대어 저격했다. 제1야당에선 우크라이나가 핵무기가 없어 러시아에 당했다며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4월 11일 서울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화상 연설을 했을 때 의원 300명 중 겨우 20% 정도만 참석했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찼을 뿐 아니라 연설 후 의원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던 미국·일본·유럽연합(EU)·영국·독일·프랑스 등과 대조된다. 한국 밖 언론은 6·25를 겪은 한국인들이 전쟁의 참혹상보다는 러시아산 킹크랩의 가격이 떨어진 데 더욱 관심이 크다고 비꼬았다.

이런 가운데 스탠퍼드대에 연수차 와 있는 우크라이나 출신 방문학자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물리학 박사로 정부 고위직에 있다가 1년간 연수를 온 그는 “러시아의 침공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고 우크라이나인들은 수백 년간 있어온 일이라는 역사적 인식을 갖고 있다”고 했다.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러시아가 강제로 합병한 바 있다. 마치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한국이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략을 받은 것과 유사하다.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와의 전쟁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 물었더니 그는 “결국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라고 힘주어 답했다. 그러면서 한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러시아 침공의 잔혹상에 대해 단호한 목소리를 내야 하며 국제규범과 질서를 수호하는 데 힘을 합쳐야 한다고 호소했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당장 안보·경제 위협을 느끼지 않는 한국으로선 러시아의 침공이 갖는 심각성을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나토의 동진(東進)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라는 러시아의 입장에 동조하거나, 심지어 미국이 유럽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술책이라는 식의 음모론마저 존재한다.



이번 침공을 계기로 현존하는 국제규범과 질서가 흔들리고 새로운 판이 짜이면 한국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음을 직시해야 한다. 이번 침공을 보면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한반도 분단, 그리고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혼란과 지각변동을 맞았던 상황과 오버랩된다. 다행히도 한국은 그간 지정학적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선진국으로 발돋움했지만 다가오는 도전이 결코 만만치 않다.

새 정부는 요동치는 지정학적 변화의 방향을 잘 읽어 한국호(號)가 순항할 수 있도록 대외정책을 펴야 한다. 국제질서가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로 급격히 재편된다면 전략적 모호성이나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대북 중재자/운전자와 같은 패러다임이나 환상이 더는 통할 수 없다. 경제적 이해가 중요하고 남북관계라는 특수성을 고려한다 해도 인권·민주주의·주권 등 국제규범과 가치에 기반을 둔 외교안보정책을 펴야 한다.

5월 7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도심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신의 입에 총구를 밀어넣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등장했다. [키이우=AP 뉴시스]

5월 7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도심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신의 입에 총구를 밀어넣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등장했다. [키이우=AP 뉴시스]

러시아의 전쟁범죄

한국은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 러시아가 벌이는 제국주의적 행태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한 국가의 자결권을 강대국이 무력으로 짓밟는 행위는 한국도 역사적으로 처절하게 경험한 바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전쟁범죄(war crime)에 대해 분명한 입장과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전쟁범죄는 전쟁 중 일어나는 각종 범죄행위 즉 민간인이나 군사 목표물이 아닌 거주지나 병원 등 민간 시설에 대한 고의적 공격, 독성 무기 사용, 강간, 강제 성매매 등 인간 존엄성에 대한 유린 행위 등을 말한다.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벌인 잔인무도한 행위는 차마 눈뜨고는 보지 못할 지경이다. 부차, 보로단카, 모티진 등에서 자행된 민간인 집단학살과 피란민 이동 경로 폭격, 산부인과와 학교 공습 등으로 인한 아동들의 사망 등 21세기 국제사회에서 상상조차 힘든 행위가 자행됐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은 “러시아군에 의한 고문, 강간, 살인에 대한 더 많은 믿을 만한 보고들이 있다”고 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지금껏 드러난 것보다 더 많은 잔혹 행위를 저지르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전쟁범죄는 세계사에서 새로운 일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만 해도 베트남, 캄보디아, 옛 유고슬라비아, 시리아, 미얀마 등 세계 각국에서 전쟁범죄가 발생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이고 있는 잔혹한 범죄행위와는 수위와 강도 면에서 비교할 바가 아니다. 내전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범죄와 달리 러시아는 엄연한 주권국가인 타국 국민을 상대로 범죄행위를 자행했다. 피오나 힐 전 미국 백악관 고문은 영국 ‘더타임스’ 인터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목표는 우크라이나 ‘장악’이 아니라 ‘절멸’”이라며 그가 우크라이나인 말살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고 단언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 역시 러시아군의 범죄행위를 ‘제노사이드(인종 학살)’로 규정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인종을 말살하는 제노사이드를 목표로 하고 있는지 여부는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국제사회는 푸틴을 전범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푸틴을 단죄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세우는 것이다. ICC는 지난 3월부터 러시아군의 전쟁범죄 위반 수사에 착수했다고 발표했지만 러시아는 2016년에 ICC에서 탈퇴했고, ICC가 공권력을 동원할 수 없어 전범 용의자를 체포하려면 해당국의 협조가 필요해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ICC는 궐석 재판을 열지 않기 때문에 푸틴이 자국에서 체포되지 않는 한 재판을 진행할 수도 없다. 옛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 인종학살을 자행한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가 전범(war criminal)으로 법정에 섰다. 이와 달리 푸틴을 처벌할 방법은 마땅치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국제사회의 제재에 적극 동조하고 참여해야 한다.

샤프 파워의 위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글로벌 민주주의 침체기에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1980년 이후 매년 각국의 ‘자유 지수(freedom index)’를 발표하는 프리덤 하우스의 2021년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5년 동안 매년 자유 지수가 후퇴한 나라의 숫자가 진전된 나라의 숫자보다 많았다. 1970년대 이후 진행된 민주주의 제3의 물결(3rd wave of democratization)이 제3의 후퇴(3rd reversal)기를 맞고 있다.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기간 방역을 핑계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선거를 연기하는 등 권위주의의 경향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났다. 대표적 사례인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는 4월 3일 선거에서 압승하며 5선 총리가 돼 위세를 과시했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 등 샤프 파워(sharp power)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샤프 파워는 군사력, 경제력 같은 ‘하드 파워’나 문화적 힘인 ‘소프트 파워’와 달리 비밀스럽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뜻한다. 음성 자금이나 경제적 영향력 혹은 스파이 등을 동원해 비밀스럽게 상대국을 압박해 자국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권위주의 정부가 은밀하게 펼치는 정보전이나 이데올로기 전쟁 등이 대표적 예다.

민주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스탠퍼드대의 래리 다이아몬드 교수는 그의 저서 ‘불길한 영향(Ill Winds)’에서 미국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중·러의 샤프 파워를 막지 못하면 민주주의의 미래는 어둡다고 경고하고 있다. 러시아는 2016년 미국 대선에 개입하면서 샤프 파워를 과시했다. 과거 독일의 파시즘(우)과 소련의 볼셰비즘(좌)이 자유민주주의와 국제질서를 파괴했다면 지금은 중·러가 행사하는 샤프 파워가 글로벌 민주주의에 위협으로 작동한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이뤄졌다.

세계화 시대의 종언

이번 침공이 세계화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사건이라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4월 8일자 칼럼에서 “세계화는 끝났다(globalization is over)”고 선언했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1990년대 미국 주도의 글로벌리제이션으로 세계는 마치 하나의 지구촌이 되는 듯싶었다. 한국도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으로 글로벌 흐름에 동참했다. 신자유주의적 글로벌화가 한창이던 2001년 발생한 9·11테러는 매우 충격적이었고, 이라크전쟁으로 이어졌지만 국제질서를 바꿀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지금은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민주주의의 후퇴와 함께 세계 곳곳에서 무역장벽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에서도 반(反)이민 정서가 광범위하게 퍼졌다. 미국의 트럼피즘이나 영국의 브렉시트는 이러한 글로벌 흐름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팬데믹으로 공급망이 원활하지 못한 가운데 국가 간 무역장벽이 높아져 거래가 막히고 물가가 출렁이면서 많은 국가가 인플레이션에 신음하고 있다.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주는 충격은 더욱 크다. 타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고 하면 세계화와 반대 현상이 벌어진다.

이에 편승해 국수주의를 내세운 포퓰리스트 리더들이 득세하고 있다. 21세기 포퓰리스트의 특징은 반(反)기득권, 반(反)다원주의다. 중·러는 글로벌 차원에서 포퓰리스트(반기득권-반서구, 반다원주의) 리더가 되고 있다. 한반도가 냉전의 첫 시험대였듯이 우크라이나가 새로운 대결 구도(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첫 시험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음이 나온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강력한 대러 제재는 이러한 절박함을 반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힘을 못 쓰자 미국은 유럽연합과 공조해 대러 제재를 단행했다. 침공 이틀 만에 러시아 은행을 국제은행간결제시스템(SWIFT)에서 배제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역사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고 강력한 제재”라고 했을 정도로 위력이 큰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식 제재가 군사작전처럼 신속하게 이뤄졌다. 1조 달러 이상의 러시아 자산이 동결됐고 루블화는 폭락했다. 세계 11위 경제국이 파산 위기에 내몰릴 정도로 파급력이 크다. 애플, 구글, 액손모빌, 맥도널드 등 300여 개의 글로벌 기업이 러시아에서 철수했다. 얼마 전 만난 구글의 한 고위 관리는 필자에게 “전쟁이 끝나도 구글이 다시 러시아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국제사회의 초강력 대러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은 젤렌스키를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인들의 반러 항전을 북돋는 역할을 했다. 독재자 푸틴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돕자는 국제 여론도 거세지고 있다.

중화주의의 부활?

우크라이나 침공은 미국의 대외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 기조인 인도·태평양 전략은 일본·호주·인도를 축으로 한 쿼드(QUAD)를 통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는 데 있다. 올 초까지만 해도 미국 조야에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보다 중국의 대만 침공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바이든 행정부가 국내외 여론의 질타에도 신속히 아프간 철수를 감행한 이면에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집중하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 미국으로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다소 소원했던 유럽과의 연대가 두터워진 것은 소득일지 몰라도, 이젠 중국과 러시아를 함께 상대해야 해 부담이 더 커졌다. 쿼드의 핵심인 인도가 대러 제재에 적극 동참하지 않는 점도 미국으로선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푸틴이 소련 제국의 재건을 꿈꾼다면 중국의 시진핑은 중화주의의 부활을 꿈꾼다. 홍콩을 ‘중국화’한 데 이어 대만마저 무력으로 흡수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중국이 야심만만하게 주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에는 단순한 경제협력을 넘어 경제 지원을 고리로 새로운 국제 블록을 형성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미·중 간에는 무역 갈등을 넘어 하이테크 분야를 중심으로 디커플링이 가속화하고 있으며, 미국은 이에 맞서 경제안보화를 추진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IPEF)’는 이러한 미국의 전략을 반영한 것이다.

중국이 아직은 러시아와 느슨한 협력을 하고 있지만, 글로벌 포퓰리스트의 리더인 푸틴과 시진핑이 손을 잡고 국제질서의 재편을 노릴 수도 있다. 여기에 또 다른 포퓰리스트인 인도의 모디 총리도 미국과 유럽연합의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거리두기를 하면서 가격이 하락한 러시아산 원유를 적극 수입하는 등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러시아 침공 이후 유럽에서는 러시아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에너지에 대한 위기감뿐 아니라 ‘중국발(發) 안보 위기론’도 고조되고 있다. 유럽과 중국은 그동안 신장·위구르 인권탄압과 중국 기술에 대한 금수 조치 등으로 여러 차례 갈등을 빚으면서도 기본적으로 경제적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중국을 바라보는 유럽의 시선도 크게 달라졌다. 러시아에 우호적인 중국에 대한 높은 경제 의존도가 지속되는 한 러시아뿐 아니라 중국도 유럽에 치명적인 비수(匕首)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커지고 있다.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바 있는 동료 교수 마이클 맥폴(Michael McFaul)은 이번 전쟁에서 누가 이기는가 하는 것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미래에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만일 러시아가 승리하면 중국의 대만 침공에 대한 유혹은 더욱 커질 테고 현 국제질서는 커다란 변곡점을 맞을 것이란 주장이다.

한국도 우크라이나 침공을 먼발치 남의 집 불구경하듯 해선 안 된다. 이번 전쟁의 결과가 한국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생각보다 빠르고 크게 나타날 수 있다. 국제질서가 급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략적 모호성이나 무관심은 매우 위험하다. 최근 5년간 문재인 정부에서 나타났던 전략적 모호성과 대북 일변도의 외교안보정책은 한국을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더구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제정치에서 가치와 규범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한 국가의 국민이 자신들의 삶과 미래를 결정하는 자결권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근본 가치이자 규범이다. 이를 강대국이 무력으로 짓밟는 제국주의적 행태는 절대 묵인하거나 용납해서는 안 된다.

‘핵심 이익’에 대한 합의 필요하다

안보와 경제를 분리했던 ‘안미경중’의 패러다임은 수명을 다했다. 가치 연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할 때가 됐다. 경제적 이해가 중요하더라고 이를 넘어서는 더 근본적인 가치와 체제, 이른바 ‘핵심 이익’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반중 정서는 반자유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중국에 대한 거부감에 기인한다. 한국의 미래세대는 권위주의가 아닌 자유 진영에 서길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중 정서는 글로벌 흐름이기도 하다. 2021년 퓨리서치센터가 전 세계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일본(88%), 스웨덴(85%), 호주(78%), 미국(76%), 영국(74%), 독일(71%) 등 17개 선진국에서 중국에 대한 반감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한국도 77%로 사상 최고치였다.

대북정책에서도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북·미간 운전자/중재자라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 러·중·북의 권위주의 대 미·유럽·한 자유 진영 간 대결이라는 국제관계의 큰 틀 속에서 대북정책도 펴야 한다. 미국과 유럽 간 안보협력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한국도 유럽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미국·일본에 이어 유럽에 특사단을 파견한 것은 시의적절했다. 한미동맹 역시 권위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 진영과의 폭넓은 관계 강화로 이어져야 한다.

반중노선을 천명하거나 북한을 괜스레 자극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국도 국제사회에서 존중받는 보편 가치 즉 민주주의와 인권, 주권, 국제규범에 대한 준수 의지를 더욱 분명하게 천명해야 한다. 물론 대중관계에 있어 경제 등 현실적 이익 때문에 고민이 깊어질 수 있고, 남북관계의 특수성 역시 마냥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은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다른 나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1945년 이후 자유민주주의 국제질서하에서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다. 이젠 한국이 민주적 규범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차례다. 무임승차란 없다. 세계 10위권 선진국의 의무도 있다. 민주주의가 권위주의에 패하면 한국의 미래도 없다. 미국 내 지식인이나 정책 담당자들은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국의 대외전략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의 주시하고 있다. 권위주의 세력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민주주의 진영을 지원하길 바라는 심정일 것이다.

역사의 교훈

1990년 12월 14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왼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모스크바 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중국과 소련 등 공산국가와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는 이른바 북방외교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동아DB]

1990년 12월 14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왼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모스크바 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중국과 소련 등 공산국가와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는 이른바 북방외교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동아DB]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청일, 러일, 6·25전쟁으로 점철된 근대 한국의 쓰라린 경험이 포개진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오늘의 한국을 이룬 자랑스러운 역사도 오버랩된다. 19세기 말 국제 정세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해 식민지로 전락한 역사, 1945년 분단의 혼란 속에서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진영을 선택해 오늘의 한국을 이뤄낸 저력, 1991년 냉전이 종식된 이후 북방정책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구축한 경험이 떠오른다. 1945년과 1991년 이후 재편된 국제질서 속에서 올바른 방향타를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이승만·노태우 정부가 보수 진영이라는 점은 특히 흥미롭다.

19세기말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자 조선의 리더와 지식인은 대체로 3그룹으로 나누어졌다. 첫째는 서재필·이승만 등으로 대표되는 ‘문명개화론’으로 서구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 근대적 개혁에 나서자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일본·중국 등 주변 아시아국과 연합해 서구 제국주의를 몰아내자는 ‘아시아 연대론’으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도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신채호·박은식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론’이 있다.

하지만 국론은 사분오열됐고 근대적 개혁에 실패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서재필·이승만은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일본의 배신에 울분을 토하던 안중근은 ‘아시아 연대론’의 대표 격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민족주의론은 이광수 등에 의해 개량주의로 변모했고 결국 신채호는 아나키스트로 변신했다. 지정학적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개혁에 실패했던 지도자와 나라의 운명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반도는 또다시 격랑의 파도에 휩쓸렸다.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한반도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됐다. 광복 후의 혼란과 6·25전쟁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를 겪었다. 국제질서가 냉전구도로 급변하는 시기에 공산 진영에 선 북한과 달리 다행히 남한은 자유 진영을 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국내 정세에 가장 어두웠던 이승만은 국제 정세에 가장 밝은 지도자였고, 한국이 자유 진영에 속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만일 공산국가가 됐다면 현재의 모습은 어떠했을지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독재로 얼룩진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국제 정세의 흐름을 읽었던 이승만의 혜안은 인정해야 한다.

윤석열호가 마주한 두 개의 강풍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인 3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 마련된 당선인 사무실에서 크리스토퍼 델 코소 주한미국대사대리를 접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인 3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 마련된 당선인 사무실에서 크리스토퍼 델 코소 주한미국대사대리를 접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990년대에 냉전구도가 해체되면서 한국은 또다시 국제질서의 변곡점을 맞게 됐다. 1989년에 생각지도 못하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됐다. 기존의 국제질서가 빠르게 해체되는 혼란 속에서 노태우 정부는 역사적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90년 한·소 수교,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1992년 한·중 수교가 숨 가쁘게 이어졌다. 일부 보수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과감한 북방정책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구축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할 기틀을 마련했다. 어쩌면 중·러에 의해 국제 정세가 요동치는 지금이 이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신북방정책이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물론 신북방정책의 핵심은 권위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 연대에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으킨 회오리바람이 어떤 방향으로 귀결될지는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현재로선 잔잔한 미풍으로 그치기보다는 태풍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 방향과 강도를 미리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한 점은 기존의 국제규범과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을 것이고, 한국에 미치는 영향 역시 적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이미 한국은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태풍의 눈 속에 있으면 그 위력을 잘 보지 못하다 지나간 후에야 피해를 통감하는 것처럼 말이다. 몇 년 후에는 피부로 체감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막 출항한 윤석열호는 두 개의 강풍을 동시에 마주하게 됐다. 먼저 지난달 칼럼에서 지적했던 대로 한국 민주주의를 강타하고 있는 대내적 바람이다. 또 이번 칼럼에서 서술했듯 한반도를 비롯한 국제질서를 강타하는 대외적 바람도 있다. 둘 다 엄청난 도전이다. 역사의 우연인가. 이번을 포함해 외부에서 발생한 세 차례의 강풍은 공히 보수 정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비장한 각오로 한국호의 키를 똑바로 잡아야 할 이유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이승만·노태우 정부처럼, 폭풍을 헤치고 순항하는 정부가 되길 간곡히 바란다.


신기욱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워싱턴대 사회학 석·박사
● 미국 아이오와대, UCLA 교수
● 現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 및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
● 저서 : ‘슈퍼피셜 코리아: 화려한 한국의 빈곤한 풍경’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하나의 동맹, 두 개의 렌즈’ 등



신동아 2022년 6월호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아시아 태평양 연구소장 gwshin@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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