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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우리만 모르는 우리 안의 악마

‘곡성(哭聲)’과 곡성(谷城)

  • 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우리만 모르는 우리 안의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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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는데, 우리들의 지옥 같은 삶도 흘러가는데, 너무 고민하고 좌절하고 슬퍼하지 말고 살자는 생각이 든다. 그제야 귓가에서 영화 ‘곡성’의 곡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살고 싶은 것이다.
영화 ‘곡성(哭聲)’을 보니 전남 곡성(谷城)에 가고 싶어졌다. 영화를 보자 마자 그 작품의 로케(location) 장소를 찾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영화를 곡성에서만 찍은 것도 아닐 터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곡성’을 얘기하려면 곡성을 꼭 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한마디로 놀라운 작품이다. 국내에서 그리 많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공포 스릴러, 보다 정확하게는 ‘오컬트(occult) 무비’인 데다 완성도가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점에서 일단 그랬다. 무엇보다 너무나, 너무나도 섬뜩한 영화다.

영화를 볼 때는 그리 무섭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무서운 건 그다음부터다. 어디든 혼자 있게 되면 자꾸 영화 속 미스터리한 여자 무명(천우희)의 대사가 생각난다. 무명은 주인공 종구(곽도원)에게 말한다. “어디 가 시방? 오밤중에.” 무명처럼 누군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나 저렇게 뭔가를 다그칠 것 같다. 그것도 꼭 오밤중에.



‘흔들리면’ 시작되는 비극

무명은 종구에게 전라도 억양으로 단호하게 말한다. “흔들리지 말어!” 세상을 살면서 겪는 최악의 공포는 어쩌면 불신, 회의, 망설임, 변명, 그럼으로써 거짓된 모든 것을 자행하게 되는 일 때문에 빚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베드로도 아버지 하느님의 끝 간 데 없는 권능과 힘을 의심한 결과 새벽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예수를 부인한 것 아니던가. 베드로도 흔들렸기 때문에 결국 그 일을 자행했다. ‘흔들리면’ 비극이 시작된다. ‘흔들리면’ 곧바로 악령이 영혼을 겁탈하기 시작한다.



오컬트는 심령(心靈) 현상을 말한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초자연적인 일들, 예컨대  유령이나 귀신, 악마의 존재에 대한 얘기다. 세상에 유령이 있는가. 악마가 존재하는가. 평소 우리는 그런 것 ‘따위’를 믿는다는 건 감정적 사치라고 생각한다. 먹고살기 바빠 죽겠는데 무슨 유령 타령이냐고 한다. 도심 생활은 저승에 대한 상상을 불허하는 법이다.  

그런데 요즘엔 이상한 죽음이 많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죽는다. 죽지 않아야 할, 죽을 이유가 없는 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사람들도 예전 같으면 별것 아닌 일로, 어떻게든 견디고 살아야 할 작은 일로 툭하면 목숨을 끊는다.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도 토막을 내고, 토막을 내도 몸뚱이를 반으로 동강 낸다.

요즘은 정말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극악하게 잔인해졌는데 타인에 대해서 만이 아니라 자신에게조차 그렇게 군다. 뭔가 이상한 기운이 세상을 잔뜩 감싸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지 않으면 허구한 날 이럴 수가 없을 것이다. 깨어났다 일어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서 죽음이 횡행한다.

얼마 전까지 사람들, 특히 지식인연하는 이들은 그걸 사회병리 현상으로 치부했다. 사회구조의 문제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차근차근 설명하는 척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인간의 과도한 욕망을 국가 시스템이 올바르게 컨트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들 했다. 욕망을 끝없이 부추기는 체제의 문제가 모든 일의 시발이라고 입을 모았다. 토마 피케티의 세습 자본주의론, 파레토의 법칙(인구의 20%가 부의 80%를 차지하고, 인구의 80%가 부의 20%를 나눠 가지며 살아간다는 이론)을 들먹였다.

그런데 요즘은 그 모든 것으로도 잘 설명되지 않는다. 요령부득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까지 만들고 있는지, 아니 만들어버렸는지 이성의 기제(機制)만 가지고는 풀어낼 수가 없다. ‘곡성’은 바로 그 지점에 놓여 있다. 너희는 너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너희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임을 아느냐. 거기에는 이상한 무엇인가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알고 보니 그게 다 우리 마음에서 스스로 모든 걸 불러낸 탓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악마란 건 존재하는데 그 악마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 때문이라는 끔찍한 공포를 얘기한다. 영화 속에서 종구의 장모(허진)가 그런다. “안 되겠어야. 아무래도 아가 이상허다 안 했냐. 옆집이 그라는데 용한 사람이 있다는구만.” 늘 그 ‘용한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 문제다. 그것이 화근이다.



곡성으로 가는 밤길

전북 무주를 거쳐 곡성에 갔다. 무주구천동으로 유명한 그 무주다. 무주에서는 해마다 이때쯤 ‘무주산골영화제’를 하는데, 정말 ‘산골’에서 하는 느낌을 주는 영화제다. 영화를 상영하는 곳은 무주 군내(郡內)이지만 덕유산 산세로 둘러싸인 야외 상영 공간 때문인지 산속 깊은 곳에 와 있는 느낌을 준다.

영화제는 늘 두 가지를 추구하는데, 새로운 영화를 발견하고 지원·육성하는 것 하나와 사람들과 재미있게 한바탕 노는 축제를 만드는 것이 다른 하나다. 무주산골영화제는 애초부터 전자에는 별 관심이 없다. 새 영화보다는 ‘헌’ 영화가 더 많다. 그런데 서울에서 부산에서, 도심에서 산골로 몰려간 사람들은 그제야 고백한다. “사실은 저 영화를 아직 안 봤거든.” 그러면서 영화를 본다. 많이도 아니다. 하루에 한 편 정도만 본다. 무주에서는 영화를 본다는 것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하여 무주에 가면 한판 흐드러지게 놀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낮이 아무리 더워도 해만 떨어지면 기온이 확 떨어진다. 산속은 산속이다. 겉에 뭘 걸칠 게 없으면 몸이 살짝 떨린다. 이만한 피서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만족감이 몰려온다. 도시는 너무 덥다. 살갗이 부딪치는 일을 혐오하게 만든다. 사람이 사람을 증오하게 하고 살의를 품게 만든다. 그렇게 보면 이 영화제는 세상의 평화를 위한 영화 축제다.



무주에 안국사가 있는 것은 그래서 새삼스러울 게 없다. 안국사는 安國寺라고 쓴다. 나라의 안위를 바라며 창건한 절이라는 뜻이다. 조선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고려 충렬왕 때(1277) 세워졌으니 750년 가까이 된 절이다. 그때 여기는 더 첩첩산중이었으리라.

고지인 이곳에 누가 저 커다란 목재와 석재를 이고, 지고, 끌고, 밀고 해서 절 지을 생각을 했을까. 옛 시절의 노예 노동력은 진정 가공(可恐)할 일이다. 여기를 오르는 길은 걸어서는 언감생심이다. 차로 오르는 와중에 위쪽 지척에 목적지가 보일 듯 말 듯하지만, 한참을 굽이굽이 돌아서 오르되 대부분 꽤나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이건 마치 ‘곡성’에서 무당 일광(황정민)이 처음 나오는 장면 같다. 이 남자는 주인공 종구의 장모가 “아가 이상하다 혀서” 급히 곡성 마을로 가는 길이다. 아마도 일광은 (지금 내가 오르는 안국사 길과 같은) 산길을 넘어 차를 몰고 가는 참인데 그때 그걸 마치 누군가 위에서(그것도 한참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요즘 한창 유행인 드론을 이용해 부감(俯瞰, bird eye′s) 샷으로 찍힌 이 장면은 왠지 이상하고 불길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이 신(scene)을 생각하면 내려다보는 누군가가, 저 봉우리 어디에선가 겨드랑이에서부터 크게 나온 날개를 요렇게 오므리고 발끝으로 선 루시퍼(라틴어의 ‘빛(lux)을 가져오는(ferre) 것’에서 나온 말로 ‘샛별’이란 뜻. 일반적으로 사탄의 고유명사로 쓰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안국사 가는 이 구불구불한 길 구석구석에 악귀의 눈이 뒤따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가 시방? 오밤중에…

그런데 뭐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이야말로 원혼이 곳곳에 스며든 때가 아닌가. 우리 모두 억울한 죽음, 이상한 죽음에 대해 무언의 책임이 있다면 응당 악마의 추적을 받고 있을 것이다. 무서움이 일상이 돼버린 시대라는 얘기며, 가장 큰 문제는 그 공포에 대해 지나치게 수세적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공포는 이겨내라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어느 틈엔가 공포에 쉽게 좌절하고 또 너무 무감각해졌다. 가장 무서운 일은 앓고 있는 사람들, 아픈 세상에 대해 어느 순간부턴가 통증을 못 느끼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다. 그럴 때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악마가 된다.

굳이 깊은 밤에 무주를 떠나 곡성으로 간 것은 정말 실수였다. “어디 가 시방? 오밤중에”라는 대사가 다시 머리카락을 쭈뼛하게 만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이어지고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주는 대로 따라가는 외딴 논두렁길과 거기서 이어지는 농가의 후미진 골목길은 영락없이 기이한 살인사건이 벌어진 영화의 공간 같았다. 어둡다. 무주 인구가 2만5000명이라고 했다. 곡성은 무주보다 약간 더 많다는데도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인적이 없다. 농가 대부분이 비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들 깊은 잠에 빠져서일까. 조용하다 못해 괴괴하다는 느낌이다.

국도로 이어지는 램프 길 주변 모텔을 발견하니 반가운 마음이 든다. 이름도 관능적이다. 어울리지는 않지만, 어쩌면 농가 구석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수작’을 보는 듯해 마음이 약간 설렌다. 그러나 모텔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황급히 후진해서 바깥으로 나왔다. 모든 불이 꺼져 있고 입구에 흐린 전구 하나만 달랑 켜져 있는데, 왠지 여기에 들어가면 아침에 다시 못 나올 것 같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 것이다. 히치콕이 만든 ‘사이코’의 베이츠 모텔도 여기보단 안 무서울 것이다.

결국 곡성 바로 옆에 붙은 구례로 차머리를 돌렸다. 거기는 여기보다 큰 곳이다. 조금 더 밝고 덜 무서운 모텔급 호텔도 많다. 영화에 나온 곡성경찰서 전경은 오전 일찍 찾아가 찍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누군가로부터’ 황급히 피하는 게 급선무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심야의 국도를 보고 있자니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가 떠올랐다. 자신이 살인을 하고도 살인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남자의 이야기다. 남자는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정신분열은 세상을 분열시킨다. 주인공 프레드(빌 풀먼)는 헤드라이트에 비친 자기 앞 하이웨이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경험한다.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데 왔다갔다 한다. 흔들리지 말아야 할 때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래서 파국이 빚어진다.



이상한 죽음, 두드러기    

‘곡성’은 전남 곡성의 시골 마을에서 이상한 연쇄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종구 일가에게 닥쳐오는 비극을 그린다. 살인을 저지른 자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으며 발열 증세를 보인다. 그래서 언뜻 이게 무슨 환경오염에 따른 정신착란, 분열증세가 빚은 촌극이 아닌가 싶게 한다. 경찰관인 종구의 눈에 자꾸 그 두드러기가 보인다. 술집 작부의 몸에서도, 애지중지하는 딸아이 효진(김환희)의 몸에서도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

소심하고 착한, 그래서 겁이 많은 종구는 첫 번째 살인이 일어난 밤에 비바람과 천둥 번개가 치는 와중에 파출소 문 앞에 귀신처럼 서 있던 아낙네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종구의 절친인 정육점 주인이 여자에 대해 설명하는데 역시 두드러기 얘기를 한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 가지고 홀딱 벗고 동네를 다녔다는 거잖여.” 뭐 그런 식으로 증언 아닌 증언을 함으로써 좀 둔하긴 해도 경찰관의 촉을 지닌 종구는 두드러기에 관심을 갖게 된다. 두드러기. 마을 사람들에게 두드러기를 퍼뜨리는 것, 혹은 퍼뜨리는 자는 누구인가.

효진은 이상 증세를 나타내며 극도의 폭력성을 보인다. 특히 아빠인 종구를 향해 악다구니를 해댄다. 효진은 자신을 더듬으며 두드러기 자국을 찾는 아빠에게 눈을 허옇게 치켜뜨고 말한다. “지금 뭐하는 겨. 딸내미 치마는 들추고 뭐 할려고?” 그러고는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종구의 장모는 효진이 이상해졌다며 용한 무당을 데려와야겠다고 한다. 그래서 무당 일광이 온다.

종구는 언제부턴가 마을에 들어와 깊은 산속에 사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인(구니무라 준)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듣는다. 그가 짐승을 날것으로 먹는다는 것이다. 살인은 그가 저지르고 있거나 그 남자 때문에 사람들 정신이 이상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실제로 일본 남자는 마을에서 죽은 사람, 혹은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들의 사진이며 물건을 갖다놓고 주술 같은 것을 걸거나 외우고 있음이 밝혀진다.


나는 네게 악마인가

종구는 그가 사람들에게 두드러기를 옮겼다고, 특히 딸 효진에게 그랬다고 여긴다. 여기서 ‘그랬다’는 것은 한마디로 성적인 강압 행위를 뜻한다. 종구는 (영화에서는 한 번도 그렇게 언급되는 적은 없지만) 그 나쁜 일본놈이 일가를 죽인 며느리를 포함해 효진까지 강간했거나 꼬드겨서 섹스를 했다고 생각한다. 점차 이성을 잃어가는 종구는 경찰관 정복을 벗어던지고 불알친구들과 일본인을 응징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때부터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하는데, 그게 현실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자 어쩔 것인가. 영화 속 대사로 얘기하면 ‘어쩔 겨’다. “어쩔 겨? 뭣이 중헌지도 모르는 당신들. 대체 어쩔 겨?”

영화 줄거리만 말해도 이렇게 한참을 간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게 이 영화의 마력이다. 줄거리가 끝이 아니다. 앞에서 설명한 저 줄거리가 줄거리만으로도 전부가 아니다. 줄거리 설명을 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왜냐하면 영화가 갖는 층위가 여러 겹, 수많은 겹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종교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고, 살인극으로도 풀 수 있으며, 가족 이야기, 사회정치적인 어젠다를 개입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가진 심연의 골짜기에 대해 얘기하게 되는 작품이다. 우리의 심연에 자리 잡은 것은 무엇인가. 일본인은 십자가를 앞세워 자신을 벌하고 죽이러 온 젊은 사제를 향해 한껏 비웃듯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내가 악마가 아니더라도 이미 네가 나를 악마라고 부르지 않았느냐. 나는 악마가 아닌데 악마인 것이니라.”

악마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며, 선의 존재를 믿지 않고 계속 의심하고 회의함으로써 악마를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우리 자신이 악마가 돼버린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섬뜩하고 무서운 것은 그런 결론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악마인가. 나는 너에게 악마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내 안의 악마를 나만 모르고 있는 건 아닌가.

‘곡성’은 지금 벌어지는 세상의 ‘이상한’ 죽음에 대해 그것이 진정 ‘이상한 것임’을 깨닫게 만든다는 점에서 놀라운 정치·사회 드라마다. 공포의 장치를 통해 지금 우리 사회를 이만큼 명징하면서도 모호하게 갈파한 텍스트는 보기 드물다. 우리가 지금 얼마나 끔찍한 공포 사회에서 살아가는지, 그것을 얼마나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악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하염없이 부들부들 떤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어두운 밤에 혼자 있으면 그들의 모습과 언행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소름이 돋는다. 부들부들 무릎이 떨린다. 심령술 따위는 믿지 않던 유물론자도, 이성적이라 자부하던 사회과학자도 떨린다. 공포는 지척에 있다. 무서운 진실은 저 산 너머에 X파일과 같은 존재로 있는 게 아니라 내 몸 근처에 딱 붙어서 언제부턴가 같이 지내온 터다. 매일매일의 사건, 사고가 사실은 하나하나 다 연결돼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어쩔 것인가.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오밤중에 돌아다니지 말아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중한 것’이 대체 무엇인지 잘 알아가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삶이다.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 대목에서 발견된다.

곡성경찰서 앞에 도착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영화에서도 연신 비가 내렸다. 비가 워낙 많은 곳인가, 아니면 이것도 무슨 징조인가. 문 앞을 지키던 의경이 사진촬영은 안 된다며 막아선다. 아마도 요즘 이상한 취미를 가진 관광객이 늘었을 것이다. 나처럼 ‘곡성’ 때문에 곡성에 와서 기념사진 찍고 그러는 사람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출입을 엄중하게 통제하던 의경도 화장실이라는 말에 표정이 순해진다. 출입증 비표를 내주면서 의경은 말한다. “요즘은 분위기 때문에 꼭 출입증을 달고 다녀야 해요.” 경찰서 안이 괴괴했다. 화장실 안에는 인기척도 없다. 자꾸 무서워졌다.

화장실에 앉아서 의경 친구가 말한 ‘요즘 분위기’란 게 뭔지 불현듯 떠올랐다. 곡성 공무원의 ‘이상한’ 죽음을 염두에 둔 게 아닐까 싶었다. 영화 ‘곡성’이 뜨자 곡성 군청의 공무원들에게 일이 많아졌는데, 늦게까지 야근하던 이곳 공무원이 퇴근길에 투신자살하는 대학생에게 깔려 둘 다 사망한 사건이다. 대학생은 공무원 임용시험을 준비 중이었고 몇 차례 떨어진 적이 있어 신변을 비관하던 터였다.

그 사건을 곡성에서 생각하자니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영화 속에서 무당 일광이 억울하게 죽은 두 사람을 생전에 봤다면 대체 어떤 점을 쳤을까 싶다. 쌀을 휙 집어 던지면서 그들의 운명을 어떻게 예견했을까. 어찌 이다지도 이상한 일이 속출하는 것일까.

곡성은 그냥 작고 평범하며 아담한 도시다. 밤에 볼 때 무서웠던 건 순전히 그렇게 생각했던 나의 시선 탓이다. 아무리 비가 점점이 내린다 한들 밝은 낮의 곡성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외부인들과 자연스럽게 조우하며 살아갈 동네로 보였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이 많이 보여 좋았다.

젊은 친구가 많다는 것은 그 자체가 생기(生氣)다. ‘곡성’을 만든 나홍진 감독은 죽음을 통해 생생한 삶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배우고 느끼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삶이 막바지, 밑바닥에 있을 때다. 그렇다면 우리도 지금이야말로 산다는 것에 생생함을 불어넣어야 할 때가 아닐까.

영화에서 가장 평화롭게 보이는 듯한 장면과 그 공간을 마지막으로 들르고 싶었다. 모든 일이 벌어지기 직전 종구-효진 부녀가 강가에 앉아 한가로이 얘기를 나누던 곳. 실제로 영화를 찍은 섬진강변도 그렇게 안심되게 보였다.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는데, 우리들의 지옥 같은 삶도 흘러가는데, 너무 고민하고 좌절하고 슬퍼하지 말고 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귓가에서 ‘곡성’의 곡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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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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