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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흙탕물… 찌꺼기 가라앉혀 作福해야”

대한불교 천태종 운덕대종사

  • 배수강 기자 | bsk@donga.com

“마음은 흙탕물… 찌꺼기 가라앉혀 作福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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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ROTC 1기생, ‘生佛님’ 풍문 듣고 구인사 行
  • ● 26년간 총무원장…초가삼간을 대형 종단으로
  • ● 낮엔 일하고 밤엔 마음 비우는 晝耕夜禪
  • ● ‘사장 되겠다’에서 ‘최고 회사 만들겠다’로 생각 바꿔야
철쭉이 만개하던 화창한 봄날, 충북 단양 구인사로 향하는 길엔 남한강이 길동무가 됐다. 굽이굽이 남한강을 따라 난 강변도로를 달리다 이름 모를 저수지를 끼고 도니 널따란 구인사 주차장에 들어선다. 소백산 골짜기에 안긴 구인사는 가지 양쪽에 달린 초롱꽃을 닮았다.  일주문에서 꼭대기 대조사전까지 길 양쪽으로 들어선 20여 채의 전각이 각양각색이다.

“절집까지 먼 길 오셨습니다, 허허.”

운덕대종사(75, 속명 전운덕)는 소년처럼 맑은 웃음으로 일행을 반겼다. 그는 1966년 구인사에서 출가해 대한불교 천태종 총무원 총무국장을 시작으로 26년간 총무원장(7~13대)을 맡아 오늘날의 천태종을 만든 인물이다.

1945년 상월원각대조사(上月圓覺大祖師·1911~1974, 이하 대조사) 스님이 초가삼간에서 창건한 구인사는 이제 천태종 총본산의 위용을 자랑하고, 천태종은 전국 160여 사찰에서 500여 스님과 250여만 명의 불자가 주경야선(晝耕夜禪)하는 거대 종단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 중심에 운덕대종사가 있었다. 출가할 당시 그는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ROTC 1기로 예편한 ‘전도유망한 엘리트’였다.

▼ ROTC 출신 큰스님은 처음 뵙네요.



“1963년에 ROTC 1기로 임관했습니다. ‘기왕 군대 갈 거면 장교로 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지원했어요. 경기 양평 28사단에서 포병장교로 복무하다 예편한 뒤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모님을 모시려고 했지요.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경북 울진이 고향인데, 제대하고 내려가 보니 그곳에 중학교가 없더라고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30리 길을 걸어 울진중학교에 가야 했어요. 그래서 친구, 선배 7명과 뜻을 모아 재건중학교를 만들었어요. 소나무 베어다 책상 만들고 교실도 지었습니다.

그때는 문교부 승인이 나기 전에 임시로 재건중학교를 세워 가르칠 수가 있었어요. 먼 길 등하교하는 아이들이 불쌍하고, 서울에서 가정교사 노릇한 경험도 있고 해서 시작한 겁니다. 학교 짓고 신입생 뽑아놓고는 경북 안동에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갔어요. 훈련 마친 뒤 훈련비 5000원 받아 쥐고 고향으로 오는 길에 구인사에 들렀습니다.”



‘산신령’ 대조사 스님

▼ 왜 구인사로 향했습니까.

“당시 구인사에 ‘생불(生佛)님’이 계시다는 풍문이 돌았어요. 도를 깨달은 생불님이 계시다는 말이 제게는 참 감동적으로 들렸습니다. 길 나선 김에 찾아갔어요. 안동에서 버스 타고 배 타고, 여관에서 하루 묵고 구인사에 찾아갔더니, 아, 대조사 스님이 마치 산신령처럼 보였어요. 맑고 깨끗한 유리알처럼….”

▼ 뭐라고 하시던가요.




“웃으시면서 ‘여긴 왜 왔느냐’고 하세요. ‘마음이 하나로 통일돼야 무슨 일을 해도 제대로 할 것 같아서 왔다’고 했더니 굉장히 좋아하시며 ‘잘 왔다’고 그래요.

그때는 저녁에 신도 30여 명이 함께 기도했는데, 다른 종단처럼 불경을 외우는 게 아니라 ‘궁궁강강(弓弓降降), 궁궁을을(弓弓乙乙)’을 읊었어요. ‘부처님 강림해주세요’라는 뜻인데, ‘활 궁(弓)’자 두 개를 맞대면 원(圓)이 생기잖아요? 원이 곧 ‘불(佛)’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소리 내 한참 기도했지요. 낮에는 채소를 가꾸는데, 당시 배추, 무, 양배추는 아무 종자나 받아서 심은 터라 무에서 장다리가 생기고 생장이 나빴어요. 제가 농고(울진농고) 출신이라 좋은 종자를 주문해서 다시 심기도 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천태종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선 수행 가풍을 유지하고 있는데, 일상생활과 깨달음의 길이 다르지 않다고 믿고 실천하는 겁니다. 천태종의 주요 사찰이 주로 도심에 있는 것도 밤에 공부하는 이러한 대중불교를 지향하기 때문이지요.”


無心空心 현상

▼ 그래서 기도를 하고 고향으로 갔습니까.

“아, 그 얘기를 마저 해야죠(웃음). 일주일 기도를 하고 가려는데, 떠나기 전날 밤 이상한 체험을 했어요. 나는 ‘궁궁강강’을 외치는데 입에선 다른 소리, 그때는 알지도 못한 경률론(경장, 율장, 논장의 3가지 불서)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부처님의 결인(結印)을 하고는 몸이 절로 올라가는데…(운덕대종사는 당시 상황이 회상되는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난생처음 접한 현상이라 공부를 좀 더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대조사 스님이 그래요. ‘모든 게 마음 공부다. 무심공심(無心空心)이 돼야 나오는 현상이다’라고. 눈을 감고 앉아 있는데 세상이 환하게 보이기도 하고. 재미를 붙였죠. 안동 훈련소에서 받은 훈련비도 다 떨어져 집에다 손 벌릴 처지가 됐고요.”

▼ 가족과 재건중학교 학생들이 많이 기다렸겠네요.

“그럼요. 스님이 웃으시면서 ‘절은 사람을 키워 학교도 보내고 유학도 보내는데, 밥값 걱정은 말고 기도에 전념하라’더군요. 날아가고 싶었어요. 울진 향교 전교(典校, 향교의 총책임자로 주로 지역 문중의 대표 인물이 맡음)인 아버님이 두 차례나 단양에 오셔서 저를 데려가려 하셨어요. 그런데 대조사 스님을 뵙고는 발길을 돌렸지요. 재건중학교도 친구와 선배들에게 맡기고. 그 후 3년간 집에 돌아가지 않고 기도했습니다(웃음).”

운덕대종사가 집에 돌아간 것은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직후였다. 이승복 군이 공비들에게 희생됐는데, 그때 대조사 스님이 고향에 가서 가족들을 모시고 오라 해서 길을 나섰다고 한다. 가산을 정리하고는 가족 모두 구인사 근처로 이사했다.

▼ 당시 초가삼간이던 구인사가 이제 천태종 총본산이 됐습니다
.  

“제가 출가할 적에만 해도 한국 불교는 참 고단했어요.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종파는 없어졌고, 일제 조선총독부는 한국 불교를 통폐합해 장악했거든요. 광복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불교가 다시 살아났는데, 대부분 조계종으로 문교부에 등록하더군요. 그런데 불자들이 보기엔, 절마다 예부터 내려오는 불교의 맥이 있거든요. 그래서 태고종, 법화종 등 각 종단이 중창된 거 아니겠어요? 천태종도 이런 흐름 속에서 중창한 겁니다.”



애국·생활·대중불교

운덕대종사는 문교부에 천태종 종단 등록을 하던 1966년 무렵을 떠올렸다. 그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녀 서울 지리에 밝은 데다 대졸 출신이라 한자도 제법 알고 있기에 대조사 스님은 그에게 종단 등록을 하고 오라고 했다. 그는 대조사 스님을 미륵부처로 여기던 터라 ‘대한불교 미륵종’으로 등록하려고 했지만 이미 숱한 미륵종단이 등록돼 있었다고 한다. 이틀 뒤 대조사 스님이 “천태종으로 등록해라”고 해서 다시 서울로 가 알아봤더니 천태종으로 등록된 종단은 없었다.

“대조사 스님은 ‘종단을 만드는 것은 종파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교의 세계화를 위함이다’라고 하셨어요. 불교가 세계화돼야 인류 평화가 이뤄진다는 믿음이 컸습니다. 1966년 8월 30일에 천태종 중창을 선포하셨지요.”

▼ 천태종은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들여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대립을 풀고 불교 중흥을 이끈 것으로 압니다만.

“맞아요. 천태종은 원래 중국 진나라 말에서 수나라 초기에 활동한 지자(智者·538~597) 대사가 ‘법화경’을 중심으로 수행법을 정립하면서 만들어졌어요. 지자 대사께서 활동한 지역이 중국 저장성의 천태산이어서 ‘천태대사’로 불렸는데, 열반 후 천태산에 국청사(國淸寺)가 건립돼 천태종 근본 도량이 됐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백제의 현광 스님과 신라의 연광 스님이 천태종의 가르침을 배우고 귀국해 전법에 앞장섰고, 대각국사 의천 스님(1055~1101)에 의해 개성 국청사가 설립됐어요. 의천 스님은 당시 교종과 선종이 대립하던 불교의 폐단을 바로잡고 불교 이론인 ‘교(敎)’와 실천수행법인 ‘지관(止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며 ‘교관병수(敎觀幷修)’를 주창하고 불교 개혁과 불교문화 중흥기를 이끌었습니다.”   

▼ 맥이 끊긴 천태종을 중창한 대조사 스님의 수행법도 ‘교관병수’였습니까.


“대조사 스님은 늘 ‘보고 듣고 외워서 아는 게 아니다. 보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아는 게 옳게 아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이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불교는 애국불교, 생활불교, 대중불교가 돼야 한다고 하셨지요. 일제 치하에서 도를 닦으신 분이라 ‘나라 없는 종교는 없다’며 스스로가 애국자가 돼야 한다고 하셨어요. 부처님께 복을 비는 ‘기복(祈福)불교’가 아니라 낮에는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되 노동이 아닌 수행으로 생각하고, 밤에는 마음을 닦으라고 하셨어요.

제가 총무원장 때 주로 도청·군청 소재지나 대도시에 150여 개 사찰을 지은 것도 생활불교를 실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종립 금강대학교를 설립한 것은 인재를 양성하지 않고는 국가와 민족의 발전이 불가하기 때문이지요. 일부 대학들처럼 등록금 받아서 치부(致富)할 게 아니라 전액 장학금과 학생 기숙사를 제공하며 한국과 세계를 이끌 인재를 제대로 길러내야죠. 금강대학의 풀 한 포기, 향나무며 소나무 한 그루 모두 제 손으로 직접 심었습니다.”



논산에 금강대 세운 까닭

▼ 천태종 총본산은 단양에 있는데 금강대는 충남 논산에 있네요.

“흔히 ‘정감록’ 등에 보면 ‘정씨가 계룡에 새 도읍지를 세운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50여 년 전 대조사 스님은 ‘정씨’가 사람 성씨가 아니라, 부정부패가 없는 ‘정심자(正心者)’라고 하셨어요. 그러고는 땅 기운으로 보건대 계룡에 새 수도를 건설해야 한다고 하셨죠. ‘패망(조선왕조)한 도읍에 새 도읍을 정한 적이 없다’며 빨리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대학도 현재의 서울이 아니라 미래의 서울에 세워야 훌륭한 인재가 몰려든다는 겁니다. 그 기운이 논산(현재의 계룡시) 부근에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곳에 대학을 설립했는데 훗날 세종시가 생겼잖아요. 세종시가 생기기 훨씬 전 대전에서 종단 행사를 할 때 여러 정치인과 기관장 앞에서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패망한 도읍에 새 도읍을 세우니 위정자의 말로가 좋을 리 없다고.”

▼ 대조사 스님이 꿈꾸던 ‘불교 세계화’는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국제적인 사찰을 지으려면 거점을 잡아야 했어요. 그래서 캐나다 토론토 2만5000평(8만2644㎡) 부지에 평화사를 짓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계획했어요.  몽골에는 대형 불상을 모시려고 여러 번 현지를 다녀왔지요.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출가하고 열반한 도량인) 개성 영통사도 어렵게 복원했습니다.”

운덕대종사가 총무원장이던 2003년, 천태종은 북측 조선불교도연맹과 함께 16세기에 화재로 폐사된 영통사 복원불사를 시작했다. 2년간 16회에 걸쳐 기와 46만여 장, 단청재료, 중장비, 조경용 묘목 등 복원에 필요한 자재를 육상으로 옮겨 1만8000여 평(5만9504㎡) 규모에 전각 29곳을 복원했다.

“대각국사 스님은 남북한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명성이 높은 큰스님입니다. 동북아 불교사에서 의미가 크죠. 그런데 당시 영통사를 복원하려면 북한이 우리 정부에 복원 요청을 해야 우리가 나설 수 있었어요. 일본 천태종 인사들과 조총련 관계자들이 평양에 가서 요청했지만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일행이 두 번째 방북 때 장성택을 만나 ‘일본 돈 200억 엔을 만들어줄 텐데 그래도 안 할 거냐’고 제안했더니 그제야 김정일의 승낙을 받았어요. 북한이 우리 정부에 공문을 보내 문화재 복원 공동 진행을 요청한 겁니다.”


“불심이 먼저”

▼ 북한에 200억 엔을요?

“현찰로 당장 준다는 게 아니라 기왓장 등 공사 자재와 육로 관광 수익 등을 포함한 금액입니다. 공사가 지연되자 우리가 나서 복원 공사대금 10억 원 정도를 댔는데, 나중에 절반 정도는 정부에서 지원받았어요. 영통사는 어렵사리 그렇게 복원했지만, 고려왕궁터도 복원해서 영통사-선죽교-고려왕궁을 잇는 개성 관광이 이뤄졌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이런 일은 자금을 미리 만들어놓고 진행하면 잘 안 풀려요. 먼저 진행하면서 불심을 모아 자금과 인력을 대야 합니다. 제가 전국 150여 사찰을 지을 때도 자금을 미리 만들어놓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총무원장 그만두고 난 뒤 언제부터인가 돈 문제를 먼저 거론해요. 그러다 보니 캐나다 평화사 건립과 몽골 불상 건립도 이후에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 대종사께도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마음은 쓰는 겁니다. 사람은 마음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면 마음은 없어지지 않아요. 마음은 어떻게 써야 하느냐, 흙탕물을 대야에 가만히 두면 흙 찌꺼기가 가라앉죠? 마음도 안 쓰면 가라앉고, 쓰면 일어납니다. 어떤 것을 가라앉히고, 어떤 것을 떠올리느냐의 문제입니다.”



마음, 흙탕물, 作福

▼ 어떤 것을 가라앉혀야 합니까.

“그건 각자의 몫이죠. 내가 주인이고 부처이고 공자니까요. 살아가면서 스스로 연구해야 합니다. ‘사장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부처님 앞에서 ‘사장이 되게 해달라’고 비는 건 욕심입니다. 돌탑에다 소원을 비는데, 그건 일종의 미신이죠. 사장이 되겠다는 사람은 자기 발전을 위해서는 ‘좋은 마음’이겠지만, 직원들이 원치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럴 땐 ‘이 회사를 최고의 회사로 만들겠다’는 마음을 가져야죠. 이것이 ‘작복(作福)’입니다. 스스로 복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장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뭐합니까. 마음은 비우고 가라앉혀야 해요.

굳이 절간에 안 와도, 낮에는 정당한 일을 하고 밤에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해보세요. 주경야선은 거창한 게 아닙니다. 그러면서 ‘흙 찌꺼기’를 부단히 가라앉혀야죠. 부처님 말씀은 부처님이 최고가 아니라 우주 만물이 제일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는 겁니다. 육식동물도 채식동물도 모두 생물이고, 자연의 이치로 순리대로 사는 겁니다. 부정부패, 권력남용, 사리사욕이라는 흙 찌꺼기를 부단히 잠재워야 합니다.”

▼ 말씀을 참 잘하시는데 그동안 왜 인터뷰는 하지 않았습니까.

“편하게 받아주니 말이 나오네요. 평소엔 말주변도 없어요(웃음). 내세우려는 마음도 가라앉혀야지요.”

서울로 돌아오는 길, 하행길에선 안 보이던 단양 적성이 강 너머에서 멀찌감치 일행을 내려다본다. 아래로는 경북 문경, 위로는 충북 충주, 여기에 남한강 물길까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저 야트막한 야산을 차지하기 위해 1500여 년 전 신라와 고구려는 대전(大戰)을 벌였다. 그때에도 남한강은 유유히 흘렀으리라. 볕 좋은 고장 단양(丹陽)은 한 폭의 수묵화에 대하소설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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