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호

INTERVIEW

“한 편 쓰고 울고, 또 한 편 쓰고 울고…”

납북 아버지 추모시집 낸 최영재 씨

  • 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입력2016-07-12 16: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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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수는 ‘신동아’ 출신의 언론인이자 수필가, 만화가다.
    • 6·25전쟁 중 납북됐다. 납북 당시 네 살이던 그의 둘째 아들 최영재 씨가 아버지를 기리는 시집 ‘마지막 가족사진’을 펴냈다.
    • 칠순을 바라보는 둘째 아들은 “평생을 그리워한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숙제”라고,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뿔테 안경을 쓴 멋쟁이 아버지는 어린 두 아들을 양팔로 꼭 안았다. 단정하게 쪽 찐 머리를 한 어머니가 아직 돌도 안 된 막내딸을 어르는 순간, 카메라 셔터가 찰칵 눌렸다. ‘1950년 1월 1일 서울 혜화동 우리집에서’. 그렇게 찍은 사진은 마지막 가족사진이 된다.



    단란한 둥지 / 일곱 달 뒤 터질 시한폭탄이 / 우리 집에 장착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 부모님은 저렇게 웃기만 하신다

    최근 출간된 동시집 ‘마지막 가족사진’(지경사)에 실린 첫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지은이는 사진 속 둘째아들 최영재(68) 씨. 네 살 꼬맹이는 6·25전쟁이 터진 그해 7월 아버지가 북으로 납치되는 참변을 겪었고, 자라면서는 아버지 없는 설움에 더해 지독한 가난을 겪었다. 최씨는 2009년 서울 신월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40년간 초등학교 선생님이자, 몇 권의 동시집과 장·단편소설을 펴낸 문인(文人)으로 살았다.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에 당선됐고 1988년에는 한국 동화문학상, 1995년에는 ‘어린이가 뽑은 올해의 작가상’을 받았다.

    그런 최씨가 칠순을 앞둔 최근에야 가장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한,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시로 풀어냈다.





    ‘유쾌한 사람’

    “오랜 시간을 쓸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지나간 일을 들춰낸다는 게 가족들에겐 참 아픈 일이라서요.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 제가 꼭 해야 할 숙제란 생각이 지워지지 않더군요. 작년 여름부터 석 달 동안 집중적으로 썼어요. 한 편 쓰고 울고, 또 한 편 쓰고 울고….”

    서울 양천구 목동 집에서 인터뷰를 시작한 지 5분도 채 안 돼 벌써 그의 눈에 눈물이 비친다. 책의 왼쪽엔 그의 시가, 오른쪽엔 아버지가 1938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4컷 만화 ‘뚱딴지’가 실렸다. 그의 아버지 최영수(崔永秀·1911~?) 씨는 수필가, 만화가, 시나리오 작가, 유머소설가, 영화제작자 등으로 다방면에서 활동한 언론인이다. 193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신동아부 소속으로 ‘신가정’(現 ‘여성동아’)을 편집하며 동아일보와 신동아에 수필을 쓰고 만화와 삽화 등을 그렸다. 광복 후에는 경향신문사 초대 문화부장 및 출판국장을 지냈다. 신동아 복간호인 1964년 9월호에 실린 좌담회 ‘옛 新東亞 시절’에는 최영수에 대한 회고 한 토막이 나온다.



    아니, 왜 그 생각나세요? 어디서 나병환자가 글을 써 보냈는데, 최영수 씨가 하두 깔끔해서 장갑을 끼고 소독한 젓가락으로 원고를 넘겼지요…(웃음).


    최씨는 “집안 어른들이나 아버지 친구 분들은 아버지가 ‘늘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던 유쾌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너무 어릴 때라 생각나는 게 없지만, 혜화초등학교 1학년이던 형 최규재(崔圭哉·1944~?)는 아버지가 끌려가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고 한다.

    “몇 명의 남자가 신발을 신은 채 집 안으로 들어와 아버지를 끌고 나갔대요. 그들의 베잠방이 주머니가 불룩했는데, 그 안에 검은색 권총이 들어 있는 걸 언뜻 봤대요. 아버지가 ‘민주경찰’이라는 월간지에 만화와 수필을 썼거든요. 집에 그 잡지가 죽 꽂혀 있는 걸 보고 그들이 ‘어? 민주경찰?’ 했대요.”

    아버지가 납북된 이유에 대해 그는 “소설가 정비석 선생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가 ‘최후의 밤’이라는 반공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는데, 아마 그 때문에 사상범으로 몰린 게 아닌가 싶다”고 추측했다.



    고기반찬보다 쌀밥

    남은 가족은 부친의 고향 경기 안성으로 내려와 살았다. 경기여고 출신 어머니는 친정오빠가 마련해준 재봉틀로 삯바느질을 하고, 봉투를 부치고, 참기름을 팔아 세 남매를 키웠다. 큰 집의 주인이었지만, 건넛방에 세 들어 사는 가족보다 훨씬 가난했다.

    “건넛방 사람들은 오므라이스도 해먹고 감자도 볶아 먹었어요. 쌀겨에 양잿물을 부으면 비누가 되거든요. 우린 그런 비누를 쓰는데 저쪽은 향기 나는 비누를 사다 쓰니 부러웠죠.”


    “오빠는 누런 밀밥에 고기반찬이 좋아,

    쌀밥에 고추장 비벼 먹는 게 좋아?”

    “쌀밥에 고추장. 너는?”

    “나도.”

    -‘남매의 대화’ 중에서

    이런 남매의 대화는 진짜 있었던 일이라며 최씨는 웃었다. 밀밥이 얼마나 먹기 싫었으면 어린아이들이 고기반찬을 포기했을까.

    “미군이 밀가루를 많이 먹으니까, 그들을 위해 들여온 농산물 중에 남는 걸 배급해줬지요. 통밀과 통수수를 배급받아 밥을 해 먹는데, 밀밥은 아무리 씹어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거칠거든요. 책을 여동생에게 보내줬는데, 제 올케에게 전화해서는 ‘눈물 나서 오빠랑은 통화 못 하겠다’ 했다더군요.”

    가난만큼 그를 배고프게 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어린 아들은 마카오 천으로 만들었다는 아버지의 회색 양복을 남몰래 입어보고, 엄마 몰래 아버지 도장을 생활통지표에 찍어 냈다가 선생님이 ‘정말 아버지가 네 통지표 보셨니?’ 물으실까 봐 가슴 두근거린다. 아버지 이름 적힌 친구네 문패가 부러워 집 울타리 나무판자를 뜯어내 크레파스로 아버지 이름을 적어 대문에 박아 넣었다.

    “초등학교 5, 6학년 무렵이었어요. 어머니가 그 문패를 쳐다보시며 아무 말 않으셨던 게 기억나요. 그리고 며칠 지나 어머니가 조용히 문패를 떼어내셨어요.”

    아버지 없는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아버지 역할까지 대신했다.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밥 얻어먹는 것, 해 지고 난 뒤 밖에 다니는 것을 금했다. 최씨는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놀다가 밥상이 들어오면 즉시 밖으로 뛰쳐나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삼남매를 홀로 키운 어머니는 10년 전 작고했다.



    새끼 세 마리 먹여 살리느라 / 험악한 태풍과 맞서 싸워야 했던 어머니다 이겨내신 여든다섯 해 / 이승 떠나실 날을 잡으시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6·25 / 가서 단단히 따지시려나 보다

    6월 25일 새벽에 가셨다.

    -‘두 번의 6·25’ 중에서




    “납북 중 총살”

    아버지 소식은 전혀 없었다. 북은 “단 한 명도 납치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12년 만에, 아버지 소식은 신문기사를 통해 벼락같이 찾아왔다.



    주모자급 五명에 대해 ‘옳소!’ 식 재판으로 총살형이 언도되고 나머지  십五명은 징역형이 언도되었다. 총살형이 언도된 五명의 무명인사 중에는 하진문(변호사), 박윤선(중앙청과장), 최영수(기자) 등이 끼어 있었다.

    -동아일보, ‘죽음의 세월-납북인사북한생활기’, 1962년 4월 2일자



    납북된 인사들이 북으로 끌려가던 중 황해도 해주에서 탈출 시도가 있었고, 그 주모자 5명이 총살에 처해졌는데, 그중 한 명이 아버지라는 내용. 당시 동아일보는 조철이라는 사람이 북에서 남으로 귀순할 때 가져온 납북자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죽음의 세월-납북인사북한생활기’를 총 56회에 걸쳐 연재하던 중이었다.

    “그때 형님이 경향신문 기자였습니다. 형님이 그 기사를 보고 조철 씨를 찾아갔어요. 그가 ‘없는 일을 꾸며서 쓸 순 없는 노릇이고 아는 바, 들은 바로 썼다’고 했대요. 우리는, 아버지가 꼭 만나야 하는 가족이 있는 분이니까, 자기 맘대로 세상 떠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후 형은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고향 집에 내려와 뒤늦은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중에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최씨는 “지금껏 형님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딸은 출가하고 부부만 사는 최씨의 집 건넛방은 ‘작은 도서관’이다. 그는 어머니가 쓰시던 방에 유리문 달린 큰 책장을 들이고, 아버지의 흔적을 하나둘 모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벽에는 ‘뚱딴지’를 비롯한, 아버지가 그린 만화들을 표구해 걸었다. “1988년 월북 문인들에 대한 해금(解禁) 조치가 내려진 이후에야 아버지에 대한 기록물이 하나둘 나타났고, 그제야 구체적으로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시던 분인지 알게 됐다”고 한다. 형의 흔적도 잘 간추려져 있다.

    “저도 한때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을 만큼 아버지에게서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재능을 물려받았지만, 형님에 비하면 물려받은 재주가 10분의 1도 안 될 거예요. 형은 늘 공책에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려서 어머니에게 혼이 나곤 했어요. 카뮈의 소설을 놓고 밤새워 토론하던 형님의 고등학교 문예반 친구들은 시조시인, 국문학 교수 등이 됐지요.”



    놀랍지도, 반갑지도 않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뚱딴지’는 촌철살인의 해학이 돋보인다. “태아로 인하여 모체(母體)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가 아니면 낙태를 못한다”는 의사의 말에 할아버지는 이렇게 톡 쏜다. “이 여인의 가정 형편과 또 7년 후의 입학난을 생각하면 그보다 더 큰 이상이 어디 있소?”

    ‘뚱딴지’ 등 최영수의 1930년대 작품은 한국 만화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만화평론가 손상익은 ‘한국만화통사’(프레스빌, 1996)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최영수의 만화는 1930년대가 그 전성기였다. 그의 작품은 신문을 통해 유명세를 탔지만, 잡지라는 발표무대를 통해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다양한 장르의 만화 창작은 물론 다수의 만화 관련 이론을 잡지매체에 발표했기 때문이다. 최영수 만화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래서 1930년대 우리 만화사의 한 단면을 되짚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아버지 흔적을 찾을 때마다 기쁘다”며 그는 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 ‘눈보라의 운하·기행문’(푸른사상)이라는 책에서 소설가 박화성은 이런 구절을 남겼다.



    6월 7일 아침에 나는 최영수 씨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저희들 지금 흑산도에 갔다가 오는 길인데 꼭 박 선생님 만나고 싶군요. 어떻게 하면 뵈올까요? 백철 씨하고 전화 바꿉니다.”


    그는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듯 이 대목을 또박또박 읽으며 책장을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자취를 이런 식으로밖에 경험하지 못하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최영수의 수필이 최고라고 평가하는 책도 있어요. 그 책에 이광수의 글도 같이 실렸는데 말이죠. 아버지가 쓴 글들 중에는 ‘무릇 만화가란 종교가여야 한다.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선각자적 생각이 없다면 만화가가 돼선 안 된다’란 구절도 있어요.”

    다시 아들이 낸 책 얘기로 돌아가자.

    “제 책이 납북자 가족에겐 작은 위로가, 어린이들에게는 전쟁의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전쟁이 준 상처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아요.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걸, 어린이들에게 꼭 얘기하고 싶어요.”



    “아버지, 아버지…!” / 아버지가 달아날까 봐 끌어안고 흐느끼는데 / 또 꿈이다

    하도 많이 속아서 / 이젠 꿈에 아버지를 만나도

    놀랍지도 / 반갑지도 않다.

    -‘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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