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꽃 피우고 봄 내내 영글어 초여름에 먹는 열매
여러 과일 풍미 닮았지만 대체재 없는 독보적 매력
열매 놓친 아쉬움은 사계절 마실 비파잎 차로 달래

보드라운 과육에서 여러 가지 맛이 나는 비파(위)와 비파를 올린 요거트.
수박이란, 도무지 가만히 견디기 힘든 무더위가 온 세상에 내려앉은 한여름 저녁, 커다란 쟁반 주위에 가족이 둘러앉아, 손가락 사이로 단물을 줄줄 흘리며 먹던 것. 선풍기는 쉼 없이 목을 돌리며 왱왱거리고, 활짝 열어 놓은 아파트 창문 사이로 위, 아래, 옆집 사는 사람들 소리가 스리슬쩍 넘나들던 여름밤의 주인공 아니던가. 매해 여름마다 수박을 가운데 두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숱한 밤 풍경은 내 뇌리의 ‘계절’이라는 카테고리에 ‘행복한 여름’이라는 기억과 감정으로 아카이빙돼 있다. 이러니 5월에 넘쳐나는 수박을 본 내 기억회로가 지지직거리며 버퍼링이 올 수밖에.
차가운 겨우내 꽃 피고 영그는 독특한 생장
한겨울에 더 맛있고 값싼 딸기,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쏟아져 나오는 참외, 1년 365일 전국 어디에서나 먹을 수 있는 배와 사과, 수입산보다 더 맛있는 국산 멜론 등을 보면 ‘계절 과일’ 목록을 다시 쓰긴 해야겠다. 그래도 산딸기, 자두, 살구, 복숭아, 무화과 따위는 예측 가능한 때에 여전히 만난다. 아직은 시기에 변화가 없는 제철 과일 목록에 추가할 게 생겼다. 비파다.비파라는 단어가 혹시 익숙하다면 중국 악기 이름과 같아서가 아닐까 싶다. 4줄로 된 현악기 비파의 소리통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작은 배 같기도 하고, 똑 떨어지는 물방울과도 비슷하다. 과일 비파가 이 소리통 모양과 꼭 닮았다. 비파 열매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테고, 아는 사람 중에도 먹어본 이는 더 적을 것 같다. 그나마 비파잎은 예부터 민간에서 차로 마시거나 약재로 쓰여 오히려 열매보다 익숙한 편이다. 비파 열매를 맛보기 좋은 때는 5월이니 수박이 나오기 시작하는 시기와 같다. 수박은 초가을까지 시장에 있겠지만 비파는 6월이 되기 전에 자취를 감춘다. 만날 수 있는 기간이 너무나 짧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휙 지나가 버리고 만다.
비파나무는 중국에서 들여온 상록활엽수로 따뜻한 지역에서 잘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는 완도와 제주쯤이다. 싸늘한 11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꽃이 피고, 작은 열매가 겨울부터 봄까지 자라 5월에 주로 수확한다. 비파는 나무에서 분리되는 순간부터 더 익지 않는다. 즉 후숙이 어려워 완연히 익은 것만 따야 한다. 그런데 잘 익은 과일은 손으로 살짝 누르기만 해도 멍이 들고, 쉬이 물러 나무에 붙은 꼭지를 똑똑 짧게 잘라 떼어내야 한다. 다루기 어려운 열매라 수확부터 보관, 포장에 이르기까지 세심함이 필요하다.
겉모양은 살구, 씨는 사과 닮고, 맛은 이색적
자그마하고 오동통한 비파는 유난히 귀엽게 생겼다. 보드라운 살구색에 선명한 오렌지색을 두어 방울 섞은 듯 경쾌하면서 따뜻한 주황색이다. 보송보송 난 털은 키위보다 보드랍고, 살구보다 거칠다. 내 손바닥에 두 개를 올리니 꽉 찬다. 싱싱한 비파는 껍질째 먹는다. 껍질에 털이 있어 이른바 ‘복숭아 알레르기’가 걱정될 수 있다. 비파는 장미과 나무 열매로 복숭아, 자두, 살구와 먼 친척쯤 되니 처음 먹을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복숭아와 같은 핵과(drupe·단단하고 주름진 커다란 씨가 딱 하나 들어 있는 과일)는 아니다. 비파는 사과, 감, 배와 같은 이과(pome)다. 반으로 쪼개보면 감처럼 윤기 나는 갈색 씨가 3~5개 정도 들었다. 모양은 마치 거대한 사과 씨 같다.말랑하고 보드라운 이 살구색 열매에서는 여러 가지 맛이 난다. 보기보다 물이 많아 무심코 한입 깨물면 주룩 과즙이 흐른다. 맛이 둥글둥글하며 꽤 시원하다. 새콤함이 점점이 섞인 단맛은 순하고 옅어 아주 부드럽다. 목 넘김 끝에는 열대 과일 같은 단내가 은은히 남고, 입이 쌉쌀해지는 개운함이 감돈다. 수많은 다른 과일을 먼저 먹었기에 그에 빗대어 비파를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게 다소 아쉽다. 제철이 짧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운 매력을 지닌 맛 좋은 열매다.
귀한 생과를 구했다면 일단 그대로 먹는 게 제일 맛있다. 반 쪼개 씨를 빼내고 접시에 옹기종기 담으면 곱고 예쁘다. 무언가 곁들이고 싶다면 요거트에 올려 꿀을 조금 두르고, 씹는 맛과 고소함을 더할 호두나 아몬드 정도만 섞는다. 치즈나 숙성 햄처럼 콤콤한 것들과도 잘 어울리니 가벼운 안주 삼아 먹기에도 알맞다. 행여 남아 잼이나 청을 만든다면 껍질은 손으로 살살 벗겨낸 다음 만들자. 비파 열매 100g(2~3개)은 약 45~50kcal다. 수분이 80% 이상이라 열량이 낮은 편이다. 색으로 짐작할 수 있듯 베타카로틴이 많고, 비타민C·칼륨·폴리페놀 등이 함유돼 있다. 펙틴 같은 수용성 식이섬유도 들어 있어 부드럽고 무른 잼을 만들기에 좋다.
카페인 없어 넉넉히 우려 마시기 좋은 차
비파는 사계절 푸른 상록활엽수 열매다. 우리나라 토종 나무는 아니고 조선시대에 중국에서 들여왔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앙증맞은 열매와 달리 비파나무 잎은 길쭉길쭉 큼직하고 단단하다. 앞면은 짙은 초록색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뒷면은 잔털이 있고 다소 색이 탁하다. 돋은 지 2~3년 된 늙은 잎이 제각각 떨어지고, 또 제각각 순이 난다. 그래서 사계절 푸르러 보인다. 차로 만드는 비파잎은 잘 숙성된 잎 중에 흠이 없고 건강하며 싱싱한 것만 사용한다. 보통 열매 수확이 끝나고 나무의 생장이 안정되는 시기에 채취한다.잎은 깨끗이 씻으면서 솔 같은 것으로 문질러 뒷면의 잔털을 없앤다. 물기를 말려 작게 썬 다음 불에 잠깐 덖은 후 그늘에 말리거나, 어느 정도 말린 다음 덖어 열기를 빼고 저장한다. 따뜻한 물에 우려 마시면 감잎차와 비슷하나 쌉사래한 맛은 덜하다. 물과 함께 약한 불에서 20분 정도 은은하게 끓여 먹어도 되는데, 이때 대추나 생강, 레몬을 넣으면 잘 어울린다. 카페인이 없고 맛이 순해 찬물에 넉넉히 우려두면 여름내 먹기 좋다. 비파잎 차는 기관지나 폐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계절의 경계에 놓인 달콤한 열매,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 버리는 과일, 물기 가득한 작고 노란 과육. 습기 어린 초여름의 신선함. 낯선 면모와 뒤늦게 알게 된 게 아쉬워서인지 비파라는 과일을 자꾸만 이런저런 말로 설명하고 싶어진다. 이런 와중에 비파를 반으로 딱 쪼갰을 때 번뜩 떠오른 글귀가 있다.
“여름은 그렇게 언제든 반으로 무언가를 잘라서 사랑과 나누어 먹는 행복의 계절”(고명재 시인의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중에서). 내 추억 아카이브에 저장된 여름 수박은 이제 다시 재현할 수 없는 장면이 됐다. 그러나 초여름의 맛에 비파라는 과일 한 편이 새로이 자리 잡았고, 다양한 기억과 감정의 말이 거기 쓰이겠지. 올여름엔 비파잎 차를 넉넉히 우려 민트잎 조금 뜯어 넣고 시원하게 즐겨볼 테다. 그리고 다음 초여름이 오고 비파를 만나면, 예쁘게 반으로 쪼개 내 반쪽과 실컷 나누어 먹으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