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공기’란 도시 뜻과 달리 한때 밀무역 성행
철도, 냉동선 등장 후 세계 물류 핵심 항구로 부상
아프리카 리듬, 유럽 선율, 이민자 향수 섞인 ‘탱고’
유럽의 지적 문화와 남미의 감정적 에너지 결합
읽고, 말하고, 춤추고, 응원하고, 논쟁하는 도시
유럽 수도와 경쟁하려다 영광과 실패 압축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전경. Gettyimage
이탈리아 로마 나보나 광장의 ‘네 강의 분수’에는 유럽의 다뉴브강, 아시아의 갠지스강, 아프리카의 나일강과 함께 남미의 라플라타강을 상징하는 조각물이 있다. 1651년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시대 완성된 이 분수는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다. 정치적 힘이 약해진 로마가 예술을 통해 여전히 세계의 중심임을 보여주려 한 상징이었다. 그중 라플라타강은 신대륙이 이미 유럽 경제와 권력의 흐름을 바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변방의 항구에서 세계도시로

그런데 도시의 역사는 때로 중심보다 변방에서 더 흥미롭게 움직인다. 중앙의 통제가 느슨했던 만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밀무역 등 비공식 교역이 활발했다. 유럽 상인과 선박이 드나들었고, 도시는 제국의 규칙보다 시장의 냄새에 더 빠르게 반응했다. 말하자면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태생부터 조금은 불온한 항구였다. 그리고 그 불온함이 훗날 도시의 생명력이 됐다.
도시가 본격적으로 얼굴을 바꾼 것은 19세기였다. 아르헨티나 독립 이후 유럽 이민자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전혀 다른 도시가 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 이민자가 많았다. 오늘날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말투에 이탈리아어 특유의 억양이 남아 있고, 피자와 파스타가 일상 음식처럼 자리 잡은 것도 이 시기의 흔적이다.
유럽에서 온 이들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언어와 음식, 건축양식과 생활 습관, 카페 문화와 정치적 열정까지 함께 가져왔다. 그래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에 있으면서도 유럽의 표정을 지닌 도시가 됐다. 파리를 닮은 대로(大路), 마드리드를 떠올리게 하는 광장, 이탈리아식 생활감이 라플라타 강가에 뒤섞였다.
20세기 초, 이 도시는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남미의 항구도시를 상상하고 도착한 사람들 앞에 넓은 대로와 오페라극장, 신고전주의 건물과 화려한 카페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더는 변방의 항구가 아니었다. 스스로를 세계의 수도 가운데 하나로 상상하기 시작한 도시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번영은 아름다운 거리와 유럽풍 건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도시의 황금시대 뒤에는 분명한 기술의 힘이 있었다. 철도와 항만, 냉동선과 금융이 맞물리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항구를 넘어 세계경제의 중요한 출구가 됐다.
아르헨티나의 광대한 팜파스 초원에서는 소와 양이 자랐고, 밀과 옥수수가 대량 생산됐다. 문제는 그 풍요를 어떻게 세계시장까지 보낼 것인지에 있었다. 이때 철도가 등장했다. 철도는 내륙의 농장과 목장을 항구로 연결했다. 초원의 소고기와 곡물은 기차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모였고, 항구는 그것을 다시 대서양 너머로 실어 보냈다.
하지만 결정적 변화는 냉동 기술이었다. 지금은 냉장 유통이 너무 당연하지만, 19세기 말 냉동선의 등장은 세계경제를 뒤흔든 혁신이었다. 이전까지 육류는 멀리 운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냉동 기술이 등장하자 아르헨티나의 소고기는 유럽의 식탁까지 갈 수 있게 됐다. 팜파스의 초원, 철도, 항만, 냉동선, 보험과 금융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이어지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세계 물류의 핵심 항구로 떠올랐다.
이 점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전형적인 근대도시다. 자연이 만든 강만으로 성장한 도시가 아니었다. 기술이 강의 의미를 바꾸었고, 자본이 그 흐름을 확대했다. 라플라타는 단순한 물길이 아니라 세계경제와 연결되는 거대한 회로가 됐다.
전기공학에서 중요한 것은 흐름을 읽는 일이다. 전류는 전위차를 따라 이동한다. 인간과 자본도 다르지 않다. 더 큰 시장, 더 높은 이익, 더 많은 기회가 있는 곳으로 흐른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바로 그 흐름이 집중된 도시였다. 항구는 거대한 변전소 같았고, 도시는 세계경제의 전압을 바꾸는 장치처럼 작동했다.
그래서 이 도시의 거리들은 유난히 크고 당당하다. 대표적으로 ‘7월 9일 대로(Avenida 9 De Julio·아르헨티나 독립기념일인 1816년 7월 9일을 기념한 도로로 폭이 110m에 이른다)’는 세계에서도 손꼽힐 만큼 넓다. 거대한 오벨리스크와 끝없이 이어지는 차선은 단순한 교통시설이 아니다. 그것은 이 도시가 품었던 야망의 무대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항구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세계도시가 되고 싶었고, 한동안은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항구 노동자와 선원,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라보카 지역에서 탄생한 ‘탱고’. Gettyimage
탱고, 축구, 카페가 만든 도시의 표정
하지만 항구도시의 번영에는 늘 그늘이 있다. 화려한 중심가 뒤에는 가난한 이민자와 노동자의 세계가 있었다. 특히 라보카 지역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항구 노동자와 선원, 이민자들이 모여 살던 이곳에는 여러 언어와 문화가 뒤섞였다. 좁은 집과 술집, 노동의 피로와 낯선 땅의 외로움이 한데 모였다.바로 그곳에서 탱고가 태어났다. 오늘날 탱고는 우아하고 세련된 춤으로 알려져 있지만, 시작은 훨씬 거칠었다. 항구 주변의 술집과 노동자 숙소, 하층민의 생활공간에서 나온 음악이었다. 아프리카계 리듬, 유럽의 선율, 이민자의 향수가 섞여 만들어진 도시의 음악이었다. 그래서 탱고에는 늘 슬픔이 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 성공을 꿈꾸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정서가 그 안에 들어 있다.

아르헨티나 축구 영웅 리오넬 메시. 뉴시스
카페 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유난히 말하기를 좋아한다. 카페에 앉아 몇 시간씩 정치와 축구, 문학과 경제를 이야기한다. 이 도시에는 서점도 많고, 오래된 극장과 공연장도 많다. 경제가 흔들려도 문화적 자존심만큼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유럽의 지적 문화와 남미의 감정적 에너지가 결합된 도시다.
이런 점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단순히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다. 읽고, 말하고, 춤추고, 응원하고, 논쟁하는 도시다. 도시의 문화는 박물관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카페의 테이블 위에, 축구장의 함성 속에, 탱고의 느린 발걸음 안에 살아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이야기할 때 정치를 빼놓기는 어렵다. 이 도시는 언제나 권력의 중심이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후안 페론과 그의 아내 에바 페론이 있었다. 뮤지컬 ‘에비타’의 모델로 알려진 에바 페론은 단순한 영부인이 아니었다. 가난한 지방 출신 배우였던 그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올라와 대중의 상징이 됐다. 화려한 드레스와 호소력 있는 연설, 사람을 사로잡는 감각은 그녀를 아르헨티나 현대사의 가장 강렬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가난한 지방 출신 배우에서 대중의 상징이 된,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의 아내이자 영부인 에바 페론. Gettyimage
‘페론주의’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노동자 계층에는 복지와 정치적 대표성을 제공하며 큰 지지를 얻었지만, 동시에 대중 감정에 지나치게 기대는 정치 문화도 남겼다. 단기적 인기와 국가 개입 중심의 정책은 시간이 흐르며 아르헨티나 경제를 점점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한때 세계 최고 수준의 부를 누렸던 나라가 반복적인 인플레이션과 재정위기에 시달리게 된 배경에도 이런 그림자가 남아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 갈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무대였다. 대통령궁 앞 마요광장에는 언제나 군중이 모였다. 환호와 분노, 열광과 실망이 반복해서 광장을 채웠다. 카페와 거리에서는 정치와 경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아르헨티나가 지나치게 수도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점이다. 권력과 금융, 언론과 문화, 교육까지 거의 모든 것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집중됐다. 항구를 장악한 도시가 국가 전체의 방향을 결정한 셈이다. 그 결과 수도와 지방, 엘리트와 노동계급의 긴장은 반복해서 충돌했다.
그럼에도 이 도시의 문화적 활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경제가 흔들려도 극장과 서점, 카페는 계속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탱고를 추고 축구를 이야기하며 밤늦게까지 토론을 이어갔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자주 흔들렸지만, 세계도시라는 자의식만큼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대통령궁 앞 마요광장에는 언제나 군중이 모여 정치와 경제를 주제로 목소리를 냈다. 뉴시스
유럽의 꿈과 남미의 현실이 겹친 도시
오늘날 아르헨티나는 반복되는 경제위기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한때 세계 최고 수준의 부를 누리던 나라가 왜 이렇게 흔들리게 됐는지를 두고는 여러 해석이 있다. 산업 경쟁력 약화, 외채 의존, 재정위기, 포퓰리즘 정치, 국제 경제구조의 변화가 함께 작용했다.분명한 것은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그 영광과 실패를 모두 압축한 도시라는 점이다. 이 도시는 한때 유럽의 수도들과 경쟁하려 했다. 실제로 그럴 만한 부와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흐름에 기대어 성장한 도시는 그 흐름이 바뀔 때마다 크게 흔들렸다. 항구는 세계를 연결하지만, 세계의 충격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곳이다.
그럼에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여전히 살아 있다. 오래된 카페와 극장, 유럽풍 건물과 가로수길은 아직도 매력적이다. 밤이 되면 탱고 음악이 흐르고, 축구 경기장에서는 거대한 함성이 터진다. 사람들은 여전히 정치와 경제를 이야기하고, 책을 읽고, 논쟁하고, 사랑하고, 분노한다.
그래서 이 도시는 완전히 성공한 도시도, 완전히 몰락한 도시도 아니다. 화려함과 쇠락, 예술과 정치, 부와 빈곤, 유럽의 꿈과 남미의 현실이 한 공간 안에 겹쳐 있다. 바로 그 모순 때문에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흥미롭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인간적이어서 매혹적인 도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가로지르는 라플라타강. Gettyimage
강은 물만 운반하지 않는다. 인간과 기술, 자본과 욕망, 기억과 상처를 함께 실어 나른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그 위에 세워진 도시이며, 지금도 라플라타 강가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하나의 문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