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중앙집권 국가 성장 계기 된 ‘백년전쟁’
풍요로운 땅 가져 결핍에 따른 절실함 부족
늘 2인자 자리…문화·예술은 세계 최고 자부심

1453년 프랑스 구국의 영웅 잔 다르크가 등장해 전쟁의 판세를 뒤집으면서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Gettyimage
프랑스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강대국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고, 인구 면에서나 국토 크기에서나 언제나 선두권이었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세계 1등이 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1등만 못했을 뿐 2인자 자리는 늘 지켰고, 다른 1등 국가들이 겪는 장기적 쇠퇴도 없었다. 12~13세기 샹파뉴 정기시(fair)가 번성했을 때는 프랑스가 유럽의 경제 중심지였던 적도 있다. 당시 프랑스 샹파뉴 지방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그리고 독일과 에스파냐를 연결하는 유럽 대륙의 최대 교역지이자 경제 중심지였다. 하지만 이곳도 14세기 이후에는 지중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항로가 발달하면서 점차 기능을 상실했다. 샹파뉴(Champagne)의 영어 이름은 ‘샴페인’으로, 지금은 이 지방의 백포도주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프랑스가 군사적으로 유럽 최강인 적은 있었을까. 1494년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공격했을 때, 1672년 루이 14세가 네덜란드를 공격했을 때, 그리고 19세기 초 나폴레옹전쟁 때 프랑스는 유럽 전체를 긴장시킬 만큼 강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를 거두고 유럽의 중심이 되는 데는 실패했다.
프랑스 원조는 ‘서프랑크 왕국’
지금부터는 프랑스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로부터 프랑스는 갈리아 지방이라 불렸고, 그곳에는 켈트족이 살았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카이사르 장군이 이곳을 정복하고 여기서 나온 부(富)를 바탕으로 로마의 권력을 잡았을 정도로 갈리아는 물자가 풍부한 지역이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의해 암살당하고,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뒤를 이으면서 로마가 갈리아 지방을 완전히 정복한다. 파리도 당시 로마가 시테섬을 중심으로 건설한 요새다.서기 3세기 이후 로마제국의 약화, 기후변화와 훈족의 침공 등으로 게르만 민족이 남하하면서 갈리아 지방에 서고트, 동고트족, 프랑크족 등이 침략했다. 486년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 1세가 갈리아 지방을 통일하고 가톨릭교로 개종하면서 프랑크왕국은 번성한다. 732년에는 재상인 카롤루스(카를) 마르텔이 이슬람 세력의 북진을 막아내면서 프랑크왕국의 실권을 장악했고, 그의 아들 피핀은 751년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루스 왕조를 연다. 피핀 3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카롤루스 대제(카를 대제 또는 샤를마뉴 대제)는 서로마제국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로마 문화, 게르만 문화, 기독교가 융합된 서유럽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루트비히(루이) 1세가 죽은 뒤 843년 프랑크왕국은 서프랑크왕국, 중프랑크왕국, 동프랑크왕국으로 분리된다. 여기서 서프랑크 왕국이 지금의 프랑스가 됐다.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역사에서 바이킹이 끼친 영향력은 상당했다. 9세기 중반 이후 노르만 바이킹이 서프랑크를 침략했다. 911년 왕 샤를 3세는 계속되는 바이킹의 침공을 막기 위해 노르만족의 수장 롤로에게 센강 하류 지역인 노르망디 영토를 주고 노르망디공(公)으로 삼았다. 그 후 많은 노르만인이 이주하면서 노르망디는 실질적 독립국이 됐다.
987년 카롤루스 왕조의 대가 끊기고, 카페 왕조(987~1328)가 들어섰다. 1066년에는 노르망디공인 윌리엄(영국의 정복왕 윌리엄 1세)이 영국을 침략해 앵글로색슨족의 웨섹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영국의 노르만 왕조 시대(1066~1135)를 열었다. 그가 죽은 뒤에는 장남이 노르망디공이 되고 차남이 영국 왕이 되면서 영국과 노르망디가 분리됐다가 영국 헨리 1세 때 다시 합병돼 노르망디는 100년 이상 영국의 영토가 됐다.
존엄왕 필리프 2세(재임 1180~1223) 때 프랑스의 왕권이 강화된다. 그는 루브르에 요새를 세워 파리를 프랑스의 실질적 수도로 만들었다. 또한 영국 왕실의 불화를 이용해 1204년 노르망디의 수도인 루앙을 공격하면서 노르망디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 당시 영국의 왕은 사자왕 리처드 1세와 그의 동생 실지왕(失地王) 존이었다. 필리프 2세의 아버지인 루이 7세의 전처가 바로 리처드 1세의 모친인 ‘엘레오노르 다키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만큼이나 이 둘의 관계도 묘했다. 노르망디는 1259년 루이 9세 때 공식적으로 프랑스 영토로 편입된다. 14세기 초 필리프 4세(재임 1285~1314) 때 프랑스는 통일국가 체계를 갖추었다. 그는 교회 소유의 영지에 세금을 부과했고, 1309년에는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으로 이전시켰을 정도로 왕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카페 왕조는 필리프 4세의 아들인 샤를 4세 때 문을 닫는다. 샤를 4세가 자식이 없어 왕위가 그의 사촌 동생인 필리프 6세로 넘어가면서 발루아 왕조(1328~1589)가 시작됐다. 이때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어머니가 샤를 4세의 여동생이므로 자신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백년전쟁(1337~1453)을 일으킨다. 백년전쟁은 이미 중세의 전쟁사 편에서 다뤘으므로 여기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프랑스의 패색이 짙어갈 무렵, 프랑스 구국의 영웅 잔 다르크가 등장해 전쟁의 판세를 뒤집으면서 백년전쟁은 1453년 프랑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백년전쟁은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전까지는 평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내가 살고 있는 영토를 지배하는 영주였다. 그러나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평민들에게 국민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또한 전쟁 중 많은 귀족이 사망하고 상비군과 과세권을 가지게 된 왕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프랑스가 근대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중세는 저물고 근세가 시작된다.
백년전쟁 승리에 큰 역할 한 ‘대포’
15세기 중반 막 백년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의 군사력은 막강했다. 백년전쟁에서 화약 무기인 대포가 전쟁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 대포의 힘을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은 1494년 이탈리아 전쟁이었다. 1483년 즉위한 샤를 8세는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오스만제국을 꺾고 유럽을 제패하겠다는 야망에 불탔다. 때마침 나폴리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가 사망하자 그는 자신이 나폴리왕국을 승계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면서 1494년 전쟁을 일으켰다. 샤를 8세는 기동성이 향상된 청동 대포로 6개월 동안 이탈리아 전역을 제패했다.하지만 프랑스의 패권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페인 때문이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으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스페인은 16세기에 들어서자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재임 1515~1547)는 스페인의 카를 5세와 영국의 헨리 8세와 마찬가지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노렸다. 하지만 그 자리는 그의 처남인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에게 돌아간다. 이 둘의 경쟁 관계는 결국 전쟁으로까지 번져 이탈리아의 밀라노 공국을 둘러싸고 두 나라가 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 5세가 승리함으로써 유럽의 패권은 스페인에 넘어간다.
프랑수아 1세는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지는 못했지만, 프랑스에 르네상스를 전파했고, 파리가 예술과 문화의 도시로 발돋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초청해 그리도록 한 모나리자 그림이 지금 루브르박물관에 걸려 있다. 이탈리아를 사랑했던 프랑수아 1세는 메디치 가문 출신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며느리로 맞이했다.

루이 14세. Gettyimage
17세기에 들어서도 프랑스의 정치·경제 상황은 여전히 불안했다. 하지만 루이 14세(재임 1643~1715)와 재상 콜베르가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프랑스의 정세는 안정되고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궁전을 세우고 지방 귀족들을 궁전에 머물게 함으로써 귀족 세력을 통제했다. 신교도인 위그노들이 경제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금융도 활발해졌다. 보조금과 관세를 통해 국내의 산업을 장려했고, 네덜란드의 조선공과 플랑드르의 직물 제조공 등 해외 기술자를 유치했으며, 교역에서 영국 및 네덜란드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낭트, 브레스트, 로리앙, 로슈포르 등에 항구도시를 건설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궁전을 세우고 지방 귀족들을 궁전에 머물게 함으로써 귀족 세력을 통제했다. Gettyimage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전쟁
1715년 루이 14세가 죽으면서 엄청난 재정적자를 남겼다. 이후에도 7년 전쟁 수행, 미국 독립전쟁 지원 등으로 프랑스의 빛은 더 늘어났다. 잦은 채무 불이행으로 신용을 잃은 프랑스는 국채 발행을 위해 높은 이자를 지급해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이 16세(재임 1774~1792)는 귀족과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려 했으나 국가 대부분의 부를 가지고 있는 이 특권계층은 세금을 내려 하지 않았다.루이 16세는 이들 계층의 특권을 폐지하기 위해 1777년 스위스의 은행가 자크 네케르를 재무장관에 발탁했다. 이에 귀족과 성직자들이 반발하자 네케르는 국가 예산을 공표했는데, 엉뚱하게도 비난의 화살이 왕실로 쏟아졌다. 국가 세입 중 반이 왕실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민중이 격분한 것이다. 설상가상 당시 인플레이션과 함께 불황에다 흉작까지 발생하는 등 경제는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1789년 루이 16세는 네케르를 파면했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대혁명(1789~1799)이 일어난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처음 구성된 국민의회는 입헌군주제를 선포했다. 부르주아 등 부유층이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부르봉 왕정의 채권을 회수하려면 어떻게든 부르봉 왕정을 유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회복되지 않자 국민의회는 힘을 잃고 서민층을 대표하는 자코뱅파가 정권을 잡고 국민공회를 구성한다. 그들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하면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에서 처형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당의 공포정치도 오래가지 않았다. 1794년 반대파의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는 처형당했다.
1795년에 합의제를 중심으로 한 총재 정부가 수립된다. 하지만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거기에 반란까지 일어났다. 이 반란을 진압한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와 이집트 원정을 통해 국민 영웅으로 부상했고,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군사 침략을 강행하고, 국민의 최대 걱정거리였던 인플레이션을 해결하면서 국민으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는다. 나폴레옹의 최대 치적 중 하나는 ‘나폴레옹 법전’이라고 불리는 민법전을 만든 것이다. 이 법전의 핵심은 소유권의 절대성, 계약 자유의 원칙 등 부르주아의 재산권을 보장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사유재산을 보장하자 투자가 늘면서 경제가 살아났고, 국민 생활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1815년 6월 워털루전투는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가 됐다. Gettyimage
프랑스가 세계 최강 되지 못한 이유
1804년 7월 국민투표를 통해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가 된다. 이에 긴장한 유럽 국가들은 1805년 대(對)프랑스 동맹을 결성한다. 1806년 나폴레옹은 독일 전선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군을 격파하고 이들 국가와 라인동맹을 결성하면서 이름뿐인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운은 여기까지였다. 1812년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러시아 원정에서 많은 전투력을 상실했고, 1814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영국으로 구성된 연합군에 파리를 점령당하고, 나폴레옹은 퇴위당한다. 이후 잠시 다시 복귀하지만, 1815년 6월 워털루전투는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가 됐다. 결국 나폴레옹은 영국 군함에 실려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된 후 그곳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나폴레옹 실각 후 다시 부르봉 왕가가 복위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1830년 7월혁명이 일어났고, 이어 1848년 2월혁명으로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를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정이 들어선다. 1852년 나폴레옹 3세는 스스로 황제가 된 후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하고 산업혁명을 일으키면서 국가의 부흥을 꾀했다. 그러나 1870년 프로이센과 벌인 ‘보불전쟁’에서 패한 후 폐위당한다. 이후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전쟁의 패배를 수습하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에 뛰어든다. 열강들의 제국주의 경쟁 속에서 1890년 즉위한 독일 빌헬름 2세의 확장 정책은 세계 정세에 갈등과 긴장을 고조시켰고, 1914년 때마침 터진 사라예보 사건이 도화선이 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프랑스도 다른 유럽 열강들과 함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진다.
프랑스는 왜 유럽의 일인자가 되지는 못했을까. 풍요로운 땅으로 인해 결핍에서 오는 절실함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네덜란드, 영국 등이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도전과 혁신으로 새로운 시장과 분야를 개척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런 추론도 그 나름대로 말이 된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프랑스가 세계 최강이 되지 못한 원인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든다.
첫째는 프랑스가 세계의 산업을 주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때 샹파뉴가 유럽의 경제 중심지였던 적이 있으나 당시는 봉건 질서가 중심이던 중세다. 전성기였던 루이 14세 때 재상 콜베르가 중상주의를 추진하면서 프랑스가 세계 최강국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콜베르가 죽자, 루이 14세는 1685년 낭트칙령을 폐지했고, 이 때문에 200만 명에 달하는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났다. 위그노들의 이민으로 프랑스는 산업자본과 기술, 그리고 인적 자원을 잃었다. 콜베르가 살아 있을 때 프랑스는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나라였지만, 그가 죽고 나서 프랑스는 활기를 잃었다. 경제 최강국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이 명예혁명으로 정치적 안정을 찾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영국은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제치고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1716년 존 로는 방크 제너랄 프리베 은행을 설립했다. Gettyimage
세 번째는 재정이 부실하고 금융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근세 이후 유럽 국가 대부분이 전쟁 등으로 재정이 취약했지만, 프랑스처럼 채무불이행을 많이 선언한 나라도 없었다. 재정이 부실했던 이유 중 하나는 금융이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은행, 거래소, 보험 등 대부분의 금융 분야에서 프랑스는 영국에 비해 100년을 뒤져 있었다. 재정이 열악한 나라가 적은 비용으로 국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영국과 같은 나라를 이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역사학자들은 프랑스인들이 신용과 금융을 신뢰하지 않게 된 이유를 ‘미시시피 버블’ 사건에서 찾는다. 루이 15세가 왕위에 오르고 오를레앙공이 섭정했을 때,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는 왕립은행을 설립해 화폐를 발행하면 재정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재정적자로 머리가 아팠던 오를레앙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1716년 존 로는 방크 제너랄 프리베(Banque Generale Privee) 은행을 설립했다. 존 로의 은행이 은행권 발행, 어음할인 등으로 큰 이득을 거두자, 1718년에 왕립은행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1719년 존 로는 미시시피회사(Mississippi Company)를 설립하고, 북미의 미개척 땅인 미시시피를 개발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며 시민들에게 회사 주식을 팔았다. 돈이 없는 사람은 은행에서 저리로 대출받아 주식을 샀다. 처음에 회사의 주가가 크게 올랐지만, 투자자들이 미시시피의 진상을 알게 되면서 주식은 휴지 조각이 돼 투자자들은 돈을 거의 다 날렸다. 미시시피 사건을 겪은 후 프랑스인들은 은행과 금융을 신뢰하지 않게 됐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그들이 일인자가 아니라는 주장에 크게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그들은 문화와 예술 등 많은 부분에서 자신들이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고, 과거 최강국이었던 이탈리아(로마), 네덜란드, 영국 등도 지금은 프랑스에 한참 못 미친다고 생각한다. ‘굵고 짧은 한 방’보다는 프랑스처럼 ‘적당히 굵으면서 긴 실속’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도 모른다.

●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 행정고시 제35회
●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 前 한국은행 감사
● 前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 現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 저서 : ‘역사는 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