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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인생은 짧아요, 혁명은 더 짧아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 글 · 사진 오동진|영화평론가

인생은 짧아요, 혁명은 더 짧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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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이 치열하다 한들 예술의 끈기와 인내를 이겨내지 못한다. 사람들이 끝내 삶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사회적 혁명이 완수돼서가 아니라 예술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예술가가 聖人의 대우를 받는 건 그 때문이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세군도, 페레르, 곤잘레스야말로 곤궁한 삶의 구원자다.
모든 여행이 다 그렇지만, 이제 좀 익숙해질 만하면 짐을 꾸리고 돌아갈 채비를 할 때가 다가온다. 쿠바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아바나에서 시작해 산타클라라, 바라데로, 시엔푸에고스를 거쳐 다시 아바나로 왔다가 하루 일정으로 비날레스를 다녀오는 비교적 긴 여정을 끝낼 때쯤엔 이제 쿠바에서 살아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화폐 가치도 감이 오고, 물건 하나를 살 때도 가격의 높낮이가 피부로 느껴지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음악만 나오면 몸을 살살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난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가난은 조금 불편할 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기도 했다. 더위마저 견딜 만했다. 옷을 갖춰 입지 않아서 차라리 편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더 덥다는 소식이 간헐적으로 문자와 카카오톡,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전달되고 있던 차였다. 돌아가면 더 힘든 일이 이어지리라는 생각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그럼에도 여행은 사람을 성숙시킨다. 성찰에 이르게 한다. 그건 영화가 늘 하는 일이기도 하다. 영화와 여행이 이란성 쌍둥이같이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한국은 일상을 살아내기가 녹록하지 않은 나라로 꼽힌다. 다들 그렇게나 일을 열심히 하는데도 삶의 만족도는 점점 떨어진다. 그 누구도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서울 강남에 아파트를 가졌든, 부산 마린시티에 큰 평수 주상복합 건물을 가졌든 모두들 인생이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산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위기감에 절어 사는 인간도 드물다. 지진과 태풍의 공포 속에 살아가는 일본인들이 오히려 더 차분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마침내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201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 같은 석학에 따르면, 개인의 소득수준은 행복을 포함한 삶의 질과 일정한 연관 관계가 있는데, 연봉 7만 달러를 기준으로 만족도는 상승을 멈춘다고 한다. 그러니까 1년에 8000만 원을 벌기까지 죽어라 일해도 힘든 것을 모르다가,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연봉이 1억이 됐든 2억이 됐든 아니면 수십억이 됐든 살아가는 게 그냥 그래진다는 것이다. 재미도 없어지고 의미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걸 미처 못 깨닫고 ‘한방에 훅 갈 때’까지 쉼 없이 엔진을 가동하며 산다. 10억을 벌면 20억을 못 벌어 불안하고, 20억을 벌면 100억을 번 사람과 비교하며 여전히 모자람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하지가 않다. 심지어 불행하다고 느끼며 살아간다.

쿠바는 좀 다른 것 같았다. 쿠바에 와서 느끼게 된 건 바로 그 점이었다. 쿠바 사람들은 가난해도 덜 불행해하는 것 같았다. 불행을 잘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두어 번의 쿠바행으로 여기를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것이다. 그것처럼 무식한 일도 없다. 다시 디턴의 주요 연구 분야인 ‘개발경제학’으로 돌아가보자. 가난한 나라의 행복지수를 판단할 때 실증적 조사를 병행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쿠바에 대한 판단 역시 더 많은 조사와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50살 넘은 남자

쿠바 여행사가 짜놓은 마지막 저녁 일정은 대부분 클래식 오픈카를 타고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에 가서 한바탕 신나게 노는 것으로 돼 있다. 결론적으로 충고를 하나 하자면 오픈카는 굳이 안 타도 된다. 일단 많이 비싸다. 1인당 쿠바 돈으로 70쿡(CUC), 우리 돈으로 8만 원이 든다. 아바나를 한 바퀴 도는, 그래서 그 정도면 돈이 아깝지 않게 주행하는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아바나 신시가지 베다도를 순회한 뒤 내시오날 호텔 안에 있는 클럽으로 안내한다.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 오픈카는 매연이 문제다. 겉모습만 화려할 뿐 기능적으로는 진짜 ‘옛날식’이어서 승차감도 좋지 않다.

오픈카를 이용하든 아니면 다른 교통시설을 이용하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얘기를 하는 걸 보고 있자면 빔 벤더스의 영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이 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영화 한 편이 지니는 위대함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영화가 세상을 바꿔 내고 개혁해내는 것까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을 국가와 민족, 인종, 계급과 계층, 남녀노소의 차이 없이 하나로 만들어낸다. 영화 한 편은 전 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궁극의 소통에 이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는 이 영화 한 편을 만들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념비적인 평가를 받는다. 영화감독이 거장 소리를 듣는 것은 걸작 때문이다. 그 걸작은 찰나적인 영감에서 비롯되지만, 그것이 떠오를 때까지 수없는 고민과 번뇌가 뒤따랐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뇌우(雷雨)처럼 번쩍이는 생각은 비교적 젊을 때보다 인생의 이런저런 일을 거친 후에야 떠오를 때가 많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1999년 빔 벤더스는 54세였다. 사람은, 특히 남자는 50이 넘어야 세상을 제대로 보기 마련이다.

쿠바를 가면 모두들 이 클럽을 찾는 게 유행이 됐지만, 정작 영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얘기를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모두들 이 영화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일까. 너무 사랑해서일까.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가 결국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얘기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여유롭고 따뜻한 시선

그래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된다. 영화를 정말 다 본 걸까. 그건 마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지 않았는데 주변에서 하도 얘기를 듣다 보니 언제부턴가 자신이 책을 읽은 것처럼 착각하게 되거나, 아니면 사실은 책을 안 읽었다는 걸 고백할 타이밍을 놓친 탓에 그냥 읽은 것처럼 넘어가는 것과 같은 걸까. 물론 모두들 영화의 줄거리는 꿰고 있는 듯 보였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은 미국의 음반 프로듀서 라이 쿠더가 쿠바의 잊힌 재즈의 전설들, 그러니까 콤파이 세군도와 이브라힘 페레르, 루벤 곤잘레스를 찾아내 그들과 6일 만에 해낸 새 앨범 작업과 그들의 뉴욕 카네기홀 공연을 담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아까 얘기한 것처럼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이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정작 영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이 지니는 가치와 인식은 점점 희미해져간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온 1999년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기 직전이었다. 빔 벤더스는 어쩌면 새로운 100년이 오는 것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전의 100년과 앞으로의 100년이 분절된 시대가 되지 않으려면 뭔가 예술적 가교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으로써 삶은 계속된다는 것, 세상은 직선과 곡선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전작 ‘파리 텍사스’(1984)와 ‘베를린 천사의 시’(1987)를 이어가는 가장 적절한 작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빔 벤더스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을 넘어서면서 세상에 대해 좀더 여유롭고 따뜻한 시선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9·11사태 이후 미국을 횡단하는 두 남녀(삼촌과 조카)의 이야기를 그린 ‘랜드 오브 플렌티’(2004)가 그랬고, 30여 년 만에 아들을 찾아온 망나니 서부극 스타의 이야기 ‘돈 컴 노킹’(2005)’이 무엇보다 그랬으며, 피나 바우쉬 사후(死後) 그녀의 주변을 인터뷰하고 공연 리허설 장면을 3D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피나’(2011)를 통해서는 예술에 대한 자신만의 심오한 철학을 더욱 다져나가는 듯 느껴졌다. 빔 벤더스의 영화세계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갈린다.

영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위대함은, 혁명이 치열하다 한들 예술이 지니는 지속적인 끈기와 인내를 이겨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사람들이 끝내 삶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사회적 혁명이 완수돼서가 아니라 예술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예술가가 예수와도 같은 성인(聖人)의 대우를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 속 세군도처럼, 페레르처럼, 곤잘레스처럼 예술이, 예술가가 낮은 데에 임했을 때만이 비록 늙고 초라하더라도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휘황찬란한 척 진실로 곤궁한 삶을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이 영화는 정치와 종교를 뛰어넘어 예술적 신념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욕망을 이해하는 사회주의

실재하는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공연 역시 그러한 감도(感度)를 주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제 영화 속 전설의 연주자와 가수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그들의 자취가 느껴진다. 쿠바 음악은 마치 그 음악을 만들어내는 누구나가 다 그렇게 뛰어난 가창력, 연주 실력을 지녀 마치 ‘음악적 평등’을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누구나 노래하고 누구나 춤을 추며 그래서 누구나 즐길 수 있다고, 무대에서 노래하는 노인들은 ‘권하듯’ 음악을 들려준다. 그들의 음악은 속삭인다. 노세요, 인생은 짧아요, 혁명은 더 짧아요,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기세요, 자신을 여세요,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세요….  

무엇보다 중간 중간 사람들의 손을 스스럼없이 이끌어대며 살사를 추는 무희들, 그 마력에 가까운 몸매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일탈의 욕망을 부추긴다. 욕망이 추해지는 것은 자꾸 그것을 감추기 때문이다. 욕망은 드러낼 때 건강해 보이는 법이고, 실제로 건강해지는 것이다.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 새삼 쿠바 여인들이 아름답다고 경탄하게 된다. 섹시하다. 어떻게 저렇게 몸을 움직일 수 있을까, 저건 연습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게 된다.

나도 춤을 좀 잘춰 봤으면 싶다. 돈도 명예도 필요 없고 저런 여인과 남은 인생을 밥을 같이 먹고, 얘기를 나누며, 고민을 고백하고, 살을 섞고, 아침에 같이 깨어나기를 바라게 된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안에 있으면 이 모든 것이 다 자유롭게 느껴진다. 이런 욕망을 인정한다면 사회주의 국가라도 자본주의 국가와 하등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아니 사회주의 국가가 오히려 더 인간의 욕망을 이해하는 게 맞는 게 아닐까. 그런데 현실은 늘 정반대였다. 여기만큼은 인간이 지니는 욕망과 충족의 변화체계를 잘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클럽을 나와 호텔로 돌아와서도 쿠바 재즈가 남긴 흥분이 채 가시지 않는다. 내일은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하고 공항으로 떠나야 한다. 가능하면 짐을 다 꾸려놓고 자야 아침에 허둥댈 일이 없다. 그렇게 마음이 바쁜데도 한잔 더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다이키리(Daiquiri, 럼 베이스의 대표적인 쿠바 칵테일)나 모히토 같은 칵테일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여유로운 마음이 생긴다.



코히바 가서 쿠바 한 대?

빨리 돌아가서 뜨거운 밥에 찌개로 끓여낸 김치 한 조각을 얹어서 그 위에 김 한 장을 둘러서 먹고 싶다는 생각도 간절해진다. 쿠바에 있는 동안 내내 매끼를 랍스타, 스테이크,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만 먹었다. 사람들은 이 얘기를 들으면 잘 먹고 다녔다고 할 것이다. 특히 랍스타를 얘기하며 호들갑을 떨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 사흘쯤 지나면 정말로 이런 식단은 사람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된다. 무릇 사람은 김치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맵고 짠, 뜨거운 국물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 여행 끝물에 단순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시가를 피면서 나누는 대화가 점점 심플해진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둥,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라는 둥 클리셰(cliche′)가 공기에 둥둥 떠다닌다.

그러다 보면 쿠바산 시가를 한 대 피우고 싶어진다. 아침 나절에 아바나 서쪽에 있는 비날레스로 가는 길에 시가 농장에 들러 산 쿠바 시가는 실해 보인다. 모두들 왜 쿠바산 시가 ‘코히바’만을 얘기하는지 현지에 와서 보면 단박에 그 이유를 안다. 그 향긋하고 그윽한 냄새는 담배 냄새라면 질겁하는 여성들까지 살짝 궁금하게 만들 정도다.

일일이 하나하나 수공업적으로 만들어지는 쿠바 시가는 잘 말린 담배 잎을 마는 기술에 따라 맛과 품질이 결정되는 모양이다. 정교한 손재주가 필요할 터이다. 쿠바 시가는 모두 국가 것이다. 국가가 제조하고 판매 수익금 역시 국가로 귀속된다. 시가를 만드는 기술자들도 다 공무원인 셈이다.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얘긴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판매 행위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 같진 않았다.



비날레스 벽화 절벽

마지막 일정으로 다녀온 비날레스의 절벽 얘기를 끝으로 쿠바 여행기를 접으려 한다. 비날레스는 쿠바 서쪽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다녀본 쿠바 중에서 가장 쿠바스럽지 않은, 열대지방에서 볼 수 있는 자연휴양림이자 국립공원이다. 유네스코가 199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산세가 독특하고 무엇보다 동굴과 강이 있다. 그렇다고 기대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다.

비날레스의 장관은 벽화가 그려진 절벽이다. 1960년대에 활동한 쿠바 화가 레오비질도 곤잘레스가 그린 것으로, ‘무랄 데 라 프레이스토리아(Mural de la Prehistoria)’라고 한다. 선사시대 벽화라는 뜻이다. 고생대 화석인 암모나이트부터 호모사피엔스와 공룡의 그림이 뒤섞여 있는데, 어떻게 보면 진짜 선사시대 인류가 그린 것처럼 표현돼 있다. 곤잘레스는 왜 이런 거대한 작업을 하려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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