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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음악의 힘, 하여간 믿어보세요!”

‘현(絃)의 전설’ 정·경·화

  • 이혜민 기자 | behappy@donga.com

“음악의 힘, 하여간 믿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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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에서 터득한 것 담았다”

▼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 ‘세계 최고령 녹음’ 기록을 1년 경신했다고 들었습니다(이전 기록은 67세의 이다 헨델).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13세(1961년) 때 줄리아드예비학교에서 이반 갈라미언 선생님께 바흐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 오늘까지 단 한 번도 바흐를 놓아본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그때부터 5년 동안 바흐 무반주 전곡 6곡을 트레이닝 시켰어요. 저도 제자들에게 바흐 무반주라는 큰 산을 꼭 넘으라고 말해요. 막상 바흐 음반이 나오니까 꿈인지 현실인지 실감이 안 나요. 바흐 무반주곡 녹음은 정말 오랜 꿈이었는데…. 바흐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기까지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 바흐의 어떤 점이 매력적입니까.

“바흐의 하모니는 영적이고 순수합니다. 인간성에 관한 모든 표현이 들어 있어요. 저는 바흐를 좀 더 자유롭게 끌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바흐를 준비하면서 특히 집중한 건 다양한 비브라토(떨림)를 구사하는 거였어요.”

▼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2005년 부상 후부터 2010년까지 은퇴했지만, 바이올린을 못했을 뿐 음악을 그만둔 적은 없어요. 그렇게 꿈꿔오던 바흐 무반주 6곡을 2012년 명동성당에서 2회로 나눠 연주했는데, 제 연주를 듣고 우는 분이 많았어요. 올 5월 8일 중국 베이징 국가대극원에선 3000명이 이 곡에 숨죽여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바흐의 힘이 통한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2012년부터 4년간 레코딩 작업에 집중했는데, 손가락 통증이 오면 진통제도 먹었습니다.”

▼ 녹음한 음반을 들어보니 어떻던가요.

“너무 황송하게 들려요. 내가 정말 저걸 했나 싶기도 하고. 갈라미언 선생님을 신으로 모시며 공부한 것, 그리고 오늘날 내 나름대로 연구해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것, 모두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바흐 파르티타 2번 샤콘의 폭발적인 필링을 제가 전달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흥분되고 기적적인 일입니까. 손가락이 회복되면서 샤콘을 그렇게 연주하고 싶어했거든요. 바흐 자신도 무반주 전곡이 3000명 앞에서 연주될 거라곤 상상 못했을 겁니다.”



그 엄마에 그 딸, 또 그 딸

“음악의 힘, 하여간 믿어보세요!”

데뷔 초기의 정경화 [동아일보]

▼ 한창 힘 좋은 20대 때 녹음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테크닉만 익히고 무대에 쓱 나와서 한다? 난 그런 식으로 못해요. 1974년에 바흐 무반주 2곡을 녹음하다가 그만뒀어요. 내가 이걸 정말 제대로 소화해서 무대에서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겠다 싶을 때 하려고요. 스승으로부터 바흐라는 과제를 받은 후 바흐는 제 피와 살과 뼈가 되도록 지녀왔습니다. 인생에서 터득한 것들을 담아 연주했기에 곡을 들으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 인생에서 터득한 걸 연주한다?  

“살면서 1980년이 가장 힘들었어요. 그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5개월 사이에 3명이 떠났습니다. 아버지(정준채), 스승 갈라미언, 10년을 함께한 매니저(마이클 리스)…. 도무지 정신이 없었어요. 그리고 바로 아래 동생(정명철)이 갑자기 숨을 거둔 게 17년 전(1999년)이에요. 2007년 엄마처럼 따르던 큰언니(정명소)가 위암으로 내 품에 안겨 떠나고, 어머니가 2011년에 돌아가시고…. 하도 많이 울어서 눈물이 싹 없어졌어요.”

▼ 그럴 때 어떤 생각을 하면서 견뎠습니까.

“내가 살아 있는 이유를 신에게 끝없이 물었어요. 무대에서 연주할 때는 어마어마한 책임감이 들어요. ‘내가 이 기가 막히게 위대한 작곡가의 심부름꾼이구나, 메신저구나.’ 드뷔시는 연주자에게 ‘내가 잉태한 애(작품)니까 네(연주가)가 잘 기르라’고 했다잖아요. 천재적인 작곡가의 음악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할 수준이 되려면 암만 노력해도 모자랐죠.”

▼ 칠순을 앞둔 나이에 녹음하는 것이 두렵진 않았나요.

“매일같이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작업에 임했어요. 어머니도 67세 때인 1984년 신학대학에 입학했고, 졸업한 69세 때부터 뉴욕주 한인교회에서 3년간 목회를 했어요. 전도사에게 설교를 맡길 법도 한데, 1년 주일 설교 52회 중 50회를 당신이 직접 했어요. 3년 동안 설교를 150회 한 겁니다. 그 후 73세 때 한국에서 세화음악재단을 만들고, 영 오케스트라를 7년 동안 운영했어요. 제가 힘든 일을 겪고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건 어머니 덕분이에요. 어머니는 하루 20시간씩 일하면서도 자식들에게 편지를 10장씩 써 보내면서 함께 있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줬어요. 편지에서 에너지가 팍팍 느껴지니까 그걸 읽고 난 다음엔 팔딱팔딱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 어떤 얘기를 쓰셨길래….   

“그냥 뭐, 일상 얘기 이것저것. 얘는 너무 잘하고 있다, 얘는 어려움을 겪었다 등등인데, 결론적으로는 아주 긍정적인 리포트예요. 편지 마지막에는 ‘네가 녹음한 연주 테이프를 잘 듣고 있다’면서 용기를 팍팍 줬지요.”



“받을 수 있는 교육 다 받아”

▼ 6·25전쟁 때 피아노를 싣고 피란 가서 자식들에게 레슨을 받게 한 어머니뿐 아니라 외할머니의 열정도 대단했더군요. 어머니의 자서전에서 외할머니가 이화여전 가사과에 다니는 딸을 위해 재봉틀을 머리에 이고 산길을 넘어 몇 번이나 갖다줬다는 일화를 읽었습니다.

“외할머니는 글자도 모르는 분이 성경책을 외워서 줄줄 꿰셨대요. 저를 귀여워해서 여름엔 부채질하면서 재워주셨고요. 원래 제 이름이 어머니 이름의 ‘숙’, 외할머니 이름(김애화)의 ‘화’를 따 숙화였어요.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가 작명가에게 부탁해 아이들 이름을 바꿔 경화가 됐죠. 외할머니가 딸 둘 사이에 아들을 둘 뒀는데 아들들을 다 잃었대요. 외할아버지(이가순)가 독립운동 때문에 집안을 제대로 못 돌보셨는데도 큰딸은 의사, 작은딸(어머니)은 교사로 키우셨죠. 어머니는 이화여전 시절 피아노 연주 무대에 오른 적이 있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기절을 해서 공연을 못 했답니다. 어머니는 결단성이 빠른 분이라 그날 바로 피아노를 접었고요.

어머니가 식당 하시면서 번 돈은  모두 7남매의 교육비로 들어갔어요. 받을 수 있는 교육은 다 받은 것 같아요. 발레, 화성악, 피아노…. 여덟 살 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신 양해엽 선생님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셔서 저도 가겠다고 조르니까 이후에 불어 선생님을 붙여주시더군요.”

▼ 예체능 외에 국·영·수 같은 학과목도 따로 배웠습니까.

“그럼요. 우리 자랄 때는 초등학교 6학년이 아주 힘들었어요. 밤을 새워가며 공부해서 중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시절이었죠.

저도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밤새운 기억이 나요. 근데 뭐 공부가 되겠어요? (눈동자를 왼쪽, 오른쪽으로 굴리며 책 읽는 시늉을 하면서) 눈은 뜨고 있지만 글이 눈에 안 들어오는 거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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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기자 | behapp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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