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호

아마추어 예술소품 불티 “취미 즐기고 돈도 벌고”

엽서, 머그, 회화, 텀블러, 전화케이스…

  • 이단아 | 고려대 미디어학부 3학년 lovedanah@naver.com

    입력2016-11-03 17:4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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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어느 주말 오후 책상 앞에 앉아 하릴없이 낙서를 했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그림 몇 개를 그렸다. 그냥 버리기 아까워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이것을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으로 몇 번 보정한 뒤 지인에게 보여줬다.

    “엽서로 만들면 예쁠 것 같은데?”

    이 말을 듣고 귀가 솔깃해졌다.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로 엽서 제작 사이트를 검색했다. 푹신한 베개를 받치고 엎드려 찍은 사진을 업로드하고 종이 재질을 정하고 주소를 입력했다. 주문완료 창이 떴다.   

    며칠 뒤 집으로 묵직한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단돈 1만5000원에 내가 만든 200장의 엽서를 배달받은 것이다. 미대에 다닌 적도, 미술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는 내가 그림엽서를 찍어냈다는 게 신기했다.  



    “와, 예쁘다!”

    생각나는 지인들에게 있는 대로 선물로 돌려도 170여 장이 남았다. 어찌 할까 고민하다 ‘혹시 돈도 벌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학교 동아리가 아스팔트 스튜디오의 플리마켓(벼룩시장 같은 노점상가)에 나간다는 말을 듣고는 나도 참여하겠다며 얼른 손을 들었다.

    행사 당일 서울 신촌 거리에 천막이 설치됐다. 좌판에 170여 장의 엽서와 며칠간 새로 만든 수제 엽서를 늘어놨다. 가격은 1장에 1000원으로 책정했다. 원가는 1장당 75원이었다. 더운 날씨였지만 사람들은 곧잘 부스에 들러 한참 동안 구경했다. 엽서 끝을 만지작거리며 “와, 예쁘다!” 하는 목소리가 들리면 절로 귀가 쫑긋해졌다.

    몇몇 손님은 엽서를 사갔다. 지폐가 차곡차곡 쌓였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흐뭇했다. 전문가들만 이런 걸 만들어 내다 파는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요즘 20대 대학생 중엔 필자처럼 취미로 만든 물건을 파는 이가 많다.

    필자는 중간에 동아리 부원들에게 좌판을 맡기고 다른 부스를 구경했다. 흰색 천막이 줄줄이 들어선 한 쪽에서 여가수가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천막 안 진열대에는 붓글씨가 빼곡히 쓰여진 부채, 수십 가지 파스텔 색으로 그려진 거북이 액자, 마커로 그림을 그린 LP 음반, 화려한 원색의 소녀가 그려진 에코백 같은 상품이 가득했다.

    이 상품들 중 대부분은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평범한 학생들이 만든 것들이었다.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가 거의 전업으로 삼아 일을 크게 벌인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안동혁(23) 씨도 그중 한 명이다.  

    필명 ‘글입다’로 활동하는 안씨는 다양한 색의 휴대전화 케이스 같은 캘리그래피 상품을 만든다. 그 앞에는 캔버스가 나지막하게 놓여 있었다. 안씨는 “캘리그래피 상품을 팔아 월 150만~200만 원의 순익을 내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가 이 일에 투자하는 시간은 하루 한 시간 남짓. 큰돈은 아니지만 수입은 끊이지 않고 들어온다고 한다. 학업을 병행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엔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색칠공부가 컬러링북 되듯

    그는 “처음엔 온라인 주문만 받다가 최근 개인사업자등록을 하고 오프라인 매장에도 입점했다”고 말했다. 주력 상품은 휴대전화 케이스지만 머그컵, 텀블러, 액자, 엽서 같은 것도 만든다. 그는 “디자인을 기획하는 건 온전히 내 일이다. 주문하면 그 디자인대로 제작된다”고 말했다.

    안씨는 미디어학부에 재학 중이며 캘리그래피를 시작한 지 2년이 됐다. 그는 “딱히 전문적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다른 캘리그래피 작품들을 보면서 혼자 연습했다”고 했다. SNS에 올린 자신의 작품이 좋은 반응을 얻자 상업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문과계열 대학생인 전보라(25) 씨는 수채화를 그린다. 주로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을 그리지만, 꽃부터 도시 풍경까지 다양한 소재를 다룬다. 전씨는 2년 전부터 취미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온라인 모임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좋은 반응이 나오자 전씨는 자신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보여주는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이어 상업활동에 나섰다. 주로 명함을 디자인하거나 그림을 판매한다.

    대학생들이 사진 찍기 같은 취미생활로 돈을 버는 건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일러스트나 카툰처럼 개성이 중시되는 장르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전문 예술인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분야에 많은 사람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스며들고 있다. 이는 애플리케이션 같은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작업의 상당 부분을 도와주는 것에 힘입은 측면도 있다.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졌다는 얘기다.

    반재윤(26) 씨는 전공이 생물학이지만 수필을 써서 돈을 번다. 그는 SNS 상의 ‘사라의 없음’이라는 페이지에 글을 쓰고 그 글을 담은 엽서를 만들어 판매한다. 반씨는 자신과 같은 비전공자들의 창작활동이 늘고 있다고 전한다.

    “이러한 변화는 필요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창작은 ‘작은 구원’이 될 수 있다. 소셜미디어와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예술을 통한 자기표현’을 쉽게 만들어줬다.”



    “대중과 직접 교감”

    지난 3월 ‘열여섯의 사계절’이라는 사진집을 낸 고교생 장동비(17) 양은 이렇게 말한다.

    “나 같은 비전문가도 사진 전시회를 열거나 책을 출판하기도 한다. 예술의 정의가 변하고 있다. 이전엔 전문성과 완성도가 중시됐지만, 이젠 미숙함도 하나의 예술성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서점가에선 캘리그래피 관련 판매대를 따로 마련했다. ‘색칠공부’는 ‘컬러링북’으로 변신해 성인들에게 다가간다. 밑그림대로 긁으면 화려한 야경이 드러나는 스크래치 북, 지시된 순서대로 아크릴 물감을 칠하는 명화 그리기 키트도 인기다. 캘리그래퍼 보혜(20) 씨는 “재능이나 지식이 부족해도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 ‘힐링’ 하는 문화가 생겨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마추어가 만든 작품을 취급하는 플랫폼도 여럿 생겨났다. 아트리, 워너비 아트, 아트리셋, 아이디어스는 작가를 그다지 선별하지 않는 플랫폼이다. 4월 문을 연 아트리는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오픈마켓으로 통한다. 김정윤 아트리 대표는 “판단은 최대한 대중에게 맡기려고 노력한다”며 “우리는 작품 제작이나 판매를 돕는다”고 했다.

    소비자는 전문가의 평가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한다. 동시에 작가는 대중 앞에서 자신을 직접 선보일 기회를 얻는다. 김 대표는 “경매장이나 화랑 같은 곳이 판매를 독점하는 시대는 지났다. 제작자와 대중이 직접 교감하는 통로가 생기고 있다”고 전했다.

    아트리셋도 비슷한 플랫폼을 운영한다. 장성환 아트리셋 대표는 “아마추어의 제작 활동이 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업계의 주류로부터 인정받진 못했다”고 지적한다. 장 대표는 “해당 분야 학벌이나 인맥이 없어도 작품만 좋으면 성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다. 비전공자들이 만든 것들 중에 창의적인 것이 많다. 이런 점을 대중에게 알려 수익으로 연결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탐사기획보도’ 수강생이 박재영 교수의 지도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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