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내란·왕권쟁탈戰 ··· 고구려, 帝國(제국)의 길 잃다

  •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내란·왕권쟁탈戰 ··· 고구려, 帝國(제국)의 길 잃다

2/4

선비족의 북방, 한족의 남방

송은 서한(西漢) 재상 소하의 자손으로 알려진 소도성의 제(齊)에, 제는 동족 소연(蕭衍)의 양(梁)에 멸망당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송, 제, 양 왕조에는 송나라 문제와 양나라 무제 등 영명한 황제도 있기는 했지만, 도를 넘은 음란(淫亂)과 골육상쟁 등 문제를 일으킨 지도자가 많았다.

양나라 무제는 초반 치세가 대단히 좋았으나 후반기로 가면서 퇴락했다. 빈부격차가 지나치게 커지면서 황족과 귀족에게 적개심을 품은 백성이 늘어갔다. 북제의 전신인 동위(東魏) 실권자 고징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고징이 보낸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패한 끝에 양나라로 망명한 후경이 무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수도 건강 부근에서만 10여만 명이 동조할 정도였다.

소씨(蕭氏) 황족이 서로를 견제하는 틈을 타 건강성을 함락한 후경은 무제를 유폐했다. 후경은 한(漢)을 세웠으나 광둥에서 봉기한 진패선에게 멸망당했다. 진패선은 557년 자신이 옹립한 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陳)을 세웠다.



大혼란의 끝이 보이다

내란·왕권쟁탈戰 ··· 고구려,  帝國(제국)의 길 잃다

란저우의 황하 상류.[동아일보]

동진-송-제-양-진으로 이어진 강남의 왕조들은 문벌 귀족사회였으며 북조에 비해 경제력은 월등했으나 정치체제의 효율성이 떨어졌다. 강남, 화북 간 군사력 격차는 인구의 차이에서도 비롯했으나, 선비족이 지배하는 북방과 한족이 주력을 이룬 남방 간 조직력과 전투력 차이가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취약한 군사력에도 강남 왕조들이 상당 기간 유지된 데는 유연과 돌궐, 고구려 같은 북방 국가가 북위, 북제, 북주 등 화북 왕조의 배후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화북을 통일한 탁발선비는 지배 민족인 선비족과 피지배 민족인 한족 간 갈등을 해소해야 했다. 북연(北燕) 출신 풍태후(馮太后)의 지원을 받아 즉위한 효문제 탁발굉은 정치체제의 안정을 위해 선비족의 한화(漢化)를 추진했다.  

효문제는 493년 풍태후의 간섭도 피할 겸 수도를 산시성 북부 평성(다퉁)에서 뤄양으로 옮겼다. 그는 조정에서 선비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호·한 모든 가문의 격을 정하는 성족상정(姓族詳定) 조치를 취했다. 황족의 성 ‘탁발’도 한족 식(式)인 ‘원(元)’으로 바꾸었다.

효문제의 한화 정책은 탁발선비가 비극의 운명을 맞는 것으로 끝났다. 뤄양으로 수도를 옮긴 지 2년 만인 495년 선비족 귀족 목태의 반란이 일어났다. 524년에는 북위 최초의 근거지인 내몽골 성락(후오하오터)에 위치한 옥야진(沃野鎭) 소속 병사 파락한발릉의 주동으로 이른바 ‘육진의 난’이 일어났다. 육진은 내몽골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옥야진, 무천진(武川鎭), 회삭진(懷朔鎭), 무명진(撫冥鎭), 유현진(柔玄鎭), 회황진(懷荒鎭)을 말한다.

육진의 진민(鎭民)은 원래 ①직업으로는 군인 ②사회적으로는 귀족 ③종족적으로는 선비라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진민은 낙양 천도 30년이 지난 후 북위 조정으로부터 버림받아 천민화됐다. 병참 중심선이 북부 내몽골 전선에서 남부 화이허(淮河) 전선으로 전환되면서 이들에 대한 처우가 나날이 나빠졌다.

진민의 반란이 육진 전체로 확산돼 북위 전역이 혼란에 빠졌다. 한족을 어떻게 통치할지를 두고 일어난 내부 갈등은 탁발선비가 세운 제국(북위)의 분열이라는 역류를 부르며, 화북을 혼란으로 몰고 갔으나 이 혼란은 새 공동체인 호한체제(胡漢體制)로의 전환 과정이었으며, 1월호에 소개한 ‘영가의 난’과 같은 아수라장은 아니었다.



고구려의 실기

내란·왕권쟁탈戰 ··· 고구려,  帝國(제국)의 길 잃다

중국 섬서성 장회태자묘 벽화를 재구성한 그림. 고구려 사신(오른쪽 두번째)이 조우관을 쓰고 있다. [뉴시스]

북주와 수·당을 창업하는 무천진 군벌의 싹이 이즈음 돋아났다. 온갖 나라 이름이 등장하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게 혼란스러웠던 시대가 저물기 시작한 것이다. 무천진 진민 중에는 북주를 세우는 우문씨(宇文氏), 수(隋)를 세우는 보륙여씨(普六茹氏), 당(唐)을 세우는 대야씨(大野氏)가 포함돼 있었다. 이들이 수·당 지배계층인 관롱집단(關隴集團)을 형성한다.

육진 반란군은 산시의 이주흉노(爾朱匈奴) 수장 이주영(爾朱榮)이 이끄는 북위 관군과 북위군을 지원한 유연군에 패배했다. 519~559년 40년 동안 화북에서는 북위 황실 금군의 난(519), 육진의 난(524), 막절염생의 난(527), 갈영의 난과 하음학살(528), 동·서위 분열(535), 북주·북제 간 전쟁 등 극도의 혼란이 되풀이됐다.




2/4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목록 닫기

내란·왕권쟁탈戰 ··· 고구려, 帝國(제국)의 길 잃다

댓글 창 닫기

2019/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