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호

석굴암의 유리문을 걷어치워라!

손댈수록 망가지는 유물들…입장객 제한이 유일 대안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21-12-1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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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거치며 본모습 잃은 석굴암

    • 이후 보수 공사했지만 결로 현상까지 일어나

    • 훼손 막기 위해 유리문으로 석굴암 막았지만…

    • 보호막이 감상 방해, 석굴암 감동 전혀 느낄 수 없어

    석굴암 전실에서 본 주실의 내부. [한석홍 국립문화재연구소 기증]

    석굴암 전실에서 본 주실의 내부. [한석홍 국립문화재연구소 기증]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다. “경주 석굴암에 다녀왔는데, 정말 감동적이었어. 역시 최고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석굴암은 현재 유리문으로 막아놓아 전실(前室)과 주실(主室) 등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 그저 유리문 밖에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유리문의 반사와 흔들림으로 석굴암 본존불과 팔부중상(八部衆像), 인왕상(仁王像) 등의 조각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내부 공간의 구조도 경험할 수 없다. 누군가 석굴암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건 현장에서의 감동이 아니라 그동안 보아온 ‘석굴암 사진’의 감동일 것이다.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기억하고 있는 멋진 이미지를 현장에 대입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는 사진작가들의 멋진 사진을 떠올리며 석굴암에 간다. 그러나 본존불이나 팔부중상은 유리문이 가로막고 있어 우리는 본존불의 숨결을 느껴볼 수 없다. 사진작가가 보여주는 기막힌 앵글을 현장에서 경험할 수 없다. 그저 유리문 밖에서 석굴암 사진의 미학을 기억해 낼 뿐이다. 그런데 감동이라니, 대체 이 유리문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일제 손 닿으며 망가지기 시작한 석굴암

    경주 토함산 석굴암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 한국의 국보를 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됐다. 석굴암은 1000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런데 지금처럼 즐기고 답사하고 여행하는 인기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일제강점기에 시작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석굴암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기록도 남아 있다. 하지만 석굴암은 조선 말기 언젠가 일부 무너져 내렸고 그 상태로 방치됐다. 조선을 식민지화하던 일제는 석굴암에 주목했다. 비록 무너진 상태였지만 불교 조각의 걸작임을 그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일제는 석굴암을 식민지 통치에 활용하기로 했다. 일제는 석굴암을 해체해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것이 무산되자 1913~1915년 조선총독부는 석굴암을 대대적으로 수리 보수했다.



    이러한 분위기와 함께 석굴암에 대한 가치 평가가 진행됐다. 1910년대 일제는 석굴암을 ‘조선고적도보’에 소개했다. 국어학자 안확의 글과 일본인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의 ‘조선미술사’에서도 석굴암을 부각했다. 민예 이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자신의 글 ‘석굴암 조각에 관하여(石佛寺の彫刻について)’에서 “영원의 걸작”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무너진 채 방치된 석굴암의 존재 가치와 매력을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920년대 석굴암 여행 붐이 일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이르면 교과서를 통해 그러한 인식이 더욱 확산되고 재생산됐다.

    여기에는 일제의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석굴암 등 신라의 미술 문화를 한반도 문화의 최정점으로 두고 이후 점점 퇴락해 조선시대에 이르렀다는 인식, 문명화된 일본이 석굴암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보수함으로써 석굴암의 옛 영화를 찾아주었다는 인식을 이식하기 위한 것이었다.(강희정,‘식민지 조선의 표상:석굴암의 공론화’, 동악미술사19호, 동악미술사학회, 2009)

    보수하려다 원래의 아름다움 잃어

    수난도 적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석굴암을 수리하면서 본존불이 있는 주실의 천장 외부를 시멘트 콘크리트로 덮어 씌웠다. 석굴암을 콘크리트 돔 구조물로 바꿔버린 것이다. 1961~1964년엔 우리 정부가 석굴암을 보수했다. 이 보수공사에서 일제가 씌워놓은 콘크리트 외부에 또 한 겹의 콘크리트층을 만들어 씌웠다. 석굴암을 현대식 콘크리트로 완전히 밀봉해 버린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황당한 보수공사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콘크리트로 인해 내부와 외부의 온도차가 커져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 더 많이 차고 이슬이 맺히는 결로(結露) 현상이 발생했다. 급기야는 1966년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에어컨을 설치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이런 상태로 석굴암을 개방해 왔고 급기야 석굴암의 보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1976년 12월 유리문을 설치한 것이다.

    두 차례의 보수공사는 석굴암에 지울 수 없는 후유증을 남겼다. 석굴암은 본존불을 모신 원형의 주실, 그 앞에 있는 사각형의 전실, 주실과 전실을 연결하는 통로로 이뤄져 있다. 전실을 보면 좌우 벽에 각각 4구의 조각상이 일렬로 배치돼 있다. 이를 팔부중상이라 한다. 그런데 보수공사 이후 팔부중상의 수와 배치 등을 놓고 논란이 불거졌다. 좌우 4구가 지금처럼 일직선으로 놓여 있는 것이 석굴암의 원래 모습일까, 좌우의 4번째 팔부중상이 안쪽으로 꺾여 있는 것이 원래 모습일까, 이 의문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일제는 1915년 석굴암 보수공사 과정에서 전실 좌우 벽에 불상을 3구씩 세우고 그 끝 전실 입구 쪽에 각각 한 구씩을 직각으로 꺾어 연결했다. 그 후 1964년 우리가 다시 석굴암을 보수하면서 일제가 직각으로 꺾어놓았던 부분을 곧게 펴서 전실 좌우 벽에 4구씩 직선으로 펼쳐놓았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이다. 1913년 보수공사 이전에 촬영한 사진을 검토하면, 좌우 3구씩 배치돼 있음이 확실해 보인다. 일제는 보수공사 하면서 주변에서 발견한 조각상을 덧붙여 4구씩 배치했다. 그런데 그것을 일제는 꺾어서 배치했고 1964년 우리 정부는 그것을 일직선으로 펼쳐놓았다. 무엇이 석굴암의 원래 모습일까. 아직도 의문거리다.

    팔부중상 가운데 일제가 추가했다는 2구(왼쪽 벽의 아수라 조각상과 오른쪽 벽의 금시조 조각상)의 모습도 논란거리다. 나머지 6구와 크기, 조각 수법, 표현 방식 등이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조각상은 옹색하기 짝이 없다. 팔부중상이나 석굴암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수라의 경우, 상반신과 하반신의 두 조각으로 돼 있는데 하반신은 다른 팔부중상의 개체이며 그것도 위아래가 뒤집혔다”는 주장도 있다. (한정호, ‘석굴암 전실의 중수(重修)에 관한 제문제, 신라사학회 제104회 발표논문, 2011) 석굴암의 명성이 무색해지는 의문과 논란이 아닐 수 없다.

    개신교계 반대로 석굴암 1만 원권에 쓰지 못해

    석굴암 본존불과 불국사의 모습이 앞뒷면에 그려져 있는 1만 원권 시쇄품(試刷品). 개신교계의 반발로 이 시쇄품은 1만 원권이 되지 못했다. [동아DB]

    석굴암 본존불과 불국사의 모습이 앞뒷면에 그려져 있는 1만 원권 시쇄품(試刷品). 개신교계의 반발로 이 시쇄품은 1만 원권이 되지 못했다. [동아DB]

    두 차례의 보수공사는 콘크리트 후유증과 팔부중상 논란을 초래했다. 근대기에 석굴암이 겪은 상처라 할 수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72년 최고액권인 1만 원권을 처음 만들 때였다. 한국은행은 고심 끝에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꼽히는 석굴암 본존불과 불국사를 앞뒷면에 디자인해 넣기로 결정했다. 이어 시쇄품(試刷品)을 만들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서명을 받아 발행 공고를 마쳤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개신교계에서 “불교 문화재인 석굴암과 불국사를 1만 원권에 표현하는 것은 특정 종교를 두둔하는 일”이라고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반발은 거셌다. 반대가 그치지 않자 한국은행은 결국 발행을 취소하고 말았다. 국내 최초의 1만 원권 발행은 이렇게 어이없이 무산돼 버렸다. 결국 이듬해 1973년 세종대왕 초상과 경복궁 근정전으로 도안을 바꿔 새로운 1만 원권을 만들었다. 박 전 대통령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 석굴암 1만 원권 시쇄품은 현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옛 한국은행 건물) 1층에 전시돼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석굴암과 함께 20세기를 건너왔다. 최초의 1만 원권에 불국사와 석굴암을 디자인해 넣으려 했던 것은 석굴암을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가짜 석굴암 만들겠다는 의견까지

    광복 이후 1960~70년대, 석굴암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많은 학교의 단골 수학여행지는 경주였고 그 하이라이트는 석굴암이었다. 신혼여행지로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석굴암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두 차례의 보수공사에서 콘크리트를 덧씌웠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부 상황은 악화되었고 훼손 우려가 커지자 결국 1976년 유리문을 설치했다.

    유리문 설치의 기본 취지는 석굴암 보존이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관람객들은 팔부중상, 인왕상, 보살상, 본존불 등을 유리문 밖에서 관람해야 했다. 대강만 보일 뿐, 특히 주실의 내부는 전혀 경험할 수 없었다. 그 멋진 본존불의 매력을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없게 된 것이다. 석굴암 관계자, 문화재 관계자 몇몇은 문을 열고 전실과 주실로 들어가 그 성스러운 공간을 체험할 수 있지만 일반인은 그럴 수 없다.

    석굴암 보존을 위해 또 다른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했다. 실물 석굴암을 개방하지 말고 주변에 실물 크기의 석굴암 모형을 만들어 그곳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이었다. 1976년 유리문을 처음 설치할 때부터 이런 의견이 제기됐다. 2002년 전후엔 이 문제를 놓고 뜨거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석굴암 측은 석굴암 일주문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 계곡 아래편에 제2석굴암(모형전시관)을 지을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석굴암 바로 앞이어서 석굴암의 경관을 훼손한다는 문화재위원회의 지적에 따라 그 계획은 무산됐다.

    보호각으로 가두는 게 능사 아냐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의 원각사터 10층 석탑. 탑의 훼손을 막기 위해 탑 외부에 유리 보호각이 설치돼 있다. [동아DB]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의 원각사터 10층 석탑. 탑의 훼손을 막기 위해 탑 외부에 유리 보호각이 설치돼 있다. [동아DB]

    서울 탑골공원에 가면 국보인 원각사터 10층 석탑(1467)이 있다. 그런데 이 탑엔 유리 보호각이 덧씌워져 있다. 탑의 훼손이 심해지자 보호를 위해 2000년 유리 보호각을 설치해 탑을 완전히 덮어씌운 것이다. 산성비와 비둘기 배설물을 막아낼 수는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가장 완벽한 보존 대책일지 모른다. 하지만 탑의 아름다운 경관은 완전히 망가졌다. 유리의 반사로 인해 탑의 전체적인 모양이나 몸체에 새겨진 무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가까이 가보면 유리 보호각은 먼지와 얼룩으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국보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마애삼존불·6세기 말~7세기 초)에도 목제 보호각이 있었다. 비바람으로부터 마애불을 보호하기 위해 1965년에 세운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보호각과 암벽 접합 부위의 시멘트가 빗물에 녹아내리면서 바위를 뿌옇게 변색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목제 보호각 속에 마애불을 가두어놓다 보니 통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내부에 습기가 차는 등 마애불의 보존 관리에 역효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보호각이 관람을 방해한다는 사실이었다. 보호각 내부가 어두침침해 마애불의 아름다운 미소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 상태로 세월이 흘렀고 한국 마애불의 최고 명작인 이 불상의 진면목을 느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제대로 볼 수 없으니 그 매력을 느낄 수 없고, 제대로 느낄 수 없으니 사랑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지적이 끊이지 않자 문화재청과 서산시는 2006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보호각을 모두 철거했다. 그 후 자연 채광과 통풍이 가능해졌다.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 40여 년 만에 햇살을 다시 맞이했고 그제야 그 멋진 백제의 미소를 제대로 만날 수 있게 됐다. 늘 사진으로 보았던 바로 그 백제의 미소 말이다.

    유리문 철거하고 제한 관람으로 바꾸어야

    유리문을 통해 본 석굴암의 주실. 유리문에 반사된 주실 밖 상들이 감상을 방해한다. [문화재청]

    유리문을 통해 본 석굴암의 주실. 유리문에 반사된 주실 밖 상들이 감상을 방해한다. [문화재청]

    석굴암에 가면 늘 아쉽다. 관람객들은 유리문 앞에서 전실과 주실 쪽을 기웃거리다 이내 밖으로 빠져나간다. 여기저기 엉뚱한 것들이 유리에 반사돼 석굴암의 진면목을 감상하기란 쉽지 않다. 전실의 팔부중상에 조명까지 뒤섞여 관람을 심하게 방해한다. 게다가 유리문의 알루미늄 새시 틀이 석굴암의 품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멋없기 짝이 없는 자물쇠까지 덜렁 채워놓았으니 이곳에서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솔직히 말하면 무척이나 촌스럽다.

    석굴암을 보존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보존이라는 명분 아래 석굴암 앞을 유리문으로 떡하니 막아놓은 것은 일차원적이고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1970년에는 불가피했을지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바꿔야 한다. 누군가는 “쉽지 않은 일이다” “양자택일이 불가피하다”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석굴암이라면 생각은 달라져야 한다. 감동을 앗아가는 유리문은 이제 곤란하다.

    유리문을 걷어내고 ‘제한 개방’으로 전환하면 어떨까. 유리문을 걷어내되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 시간을 정해 제한적으로 내부 관람을 허용하는 것이다. 물론 관람 인원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 당연히 관람료도 높여야 할 것이다. 감동을 주지 못하는 지금 석굴암의 유리문 보존 방식보다 제한된 인원에게라도 감동을 주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그래야 그 감동이 확산되고 지속될 수 있다. 설령 유리문을 존속해야 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촌스러운 상태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렇게 자랑하는 석굴암인데, 유리문 디자인은 어처구니가 없다.

    우리는 석굴암을 진정 경외하는가

    한석홍(1940~2015), 안장헌과 같은 문화재 전문 사진작가들이 찍은 석굴암 사진을 보면 무척이나 아름답다. 특히 본존불의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 경외스럽다. 카메라 앵글의 각도는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위에서 내려다보기도 하고, 밑에서 올려다보기도 한다. 본존불의 뒷모습은 정면 옆면에서 보는 것과 확연히 다른 새로운 분위기를 전해준다. 궁륭형(반원형) 천장을 배경 삼아 올려다보는 각도로 촬영한 본존불의 상호(얼굴)는 특히 압권이 아닐 수 없다. 그 완벽한 구도, 한없는 아름다움, 깊은 사유와 성찰…. 아, 저것이 종교미술이고 저것이 8세기 통일신라의 본질이구나 하는 생각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데 현장에 가면 그런 모습을 경험할 수 없다. 접근할 수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그와 유사한 각도나 구도로 석굴암 본존불을 만날 수는 없는 걸까. 대좌 아래에서 궁륭형 천장을 배경으로 본존불을 올려다보거나 본존불의 옆모습과 뒷모습을 만나보거나 가까이서 그 숨결을 느껴볼 수는 없는 걸까.

    1976년 이후 석굴암 본존불을 바로 옆에서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럴진대 석굴암 현장에서 감동을 느끼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유리문 앞에 서면 본존불은 저 멀리 있다. 잘 보이지 않는다. 흔들리고 번지고, 거기 쓸데없이 내 얼굴이 비치고, 조명 빛이 반사하고…. 유리문 설치 이후 우리는 사진을 통해 석굴암의 미학을 그저 암기해 왔을 뿐이다.

    석굴암은 고품격 문화유산이다. 그렇기에 관람 환경도 고품격이고 정교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정말로 석굴암을 경외하는가? 석굴암으로부터 진정한 감동을 받고자 하는가? 저 유리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석굴암 #경주 #유네스코 #일제강점기 #신동아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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