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호

‘한국판 마타하리’김수임 사건 美 비밀문서 집중분석

‘여간첩은 고문 조작…베어드 대령의 對남로당 정보원?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08-10-08 1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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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임 사건 다룬 美 비밀문서 ‘베어드 파일’ 김수임 아들이 찾아내
    • “기소사항 중 군사기밀유출 등 미군과 관련된 어떤 증거도 없다”
    • 베어드, 김수임 구할 수 있었지만 혼자 미국으로 도망
    • 이강국 “김수임 이용해 베어드를 만나 협력 약속” 진술
    • 김원일 “역사와 화해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건 정부의 몫”
    • 오재호 “김수임은 고문으로 들것에 실려 법정에 들어와”
    ‘한국판 마타하리’김수임 사건 美 비밀문서 집중분석
    1950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김수임. 그 앞에는 항상 ‘미모의 여간첩’ ‘한국판 마타하리’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는 광복 직후 남한 최고 권력자의 하나였던 주한미군 헌병사령관 베어드 대령의 내연녀였다. 동시에 북한 최고 실력자의 한 명이었던 이강국(북한 초대 외무부장)의 애인이었다. 1946년 미 군정청이 이강국에 대해 체포령을 내리자 베어드 대령의 차를 이용해 월북시켰는가 하면, 이강국의 지시에 따라 남한의 군사비밀을 빼돌리는 등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1950년 4월 체포돼 6월 사형당했다. ‘애인’ 이강국 역시 6·25전쟁 종전 직전 북한에서 간첩혐의로 처형당했다.

    사라진 재판기록

    이처럼 그는 반공의식을 고취시킬 대표적 사례였을 뿐 아니라 삼각관계, 죽음, 비극적인 사랑 등 극적인 요소가 많아 오랫동안 영화와 드라마, 소설의 단골 소재로 인구에 회자됐다.

    1950년 미국잡지 ‘코로넷(Coronet)’에서는 그를 ‘남한 사교계의 여왕은 빨갱이였다’라는 제목의 기사로 소개하며 ‘미국을 배신한 한국인 팜파탈’이라고 규정했다. 그의 이야기는 미국에서도 드라마로 여러 편 제작될 정도였다. 로널드 레이건이 주연한 드라마에서는 ‘아시아의 마타하리’로 묘사됐다. 워싱턴의 칼럼니스트 드류 피어슨은 ‘그의 간첩행위가 6·25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하는 도화선이 됐다’며 6·25전쟁을 유발시킨 장본인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영화 ‘나는 속았다’(1963),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1974), TV드라마 ‘제1공화국-여간첩 김수임’(1981), 실화소설 ‘특별수사본부-여간첩 김수임’(1980) 등을 통해 주로 ‘붉은 여간첩’ ‘한국판 마타하리’로 그려졌다. 또한 가택수색을 하러 온 수사관들에게 술상을 차려주는가 하면, 미리 몸단장을 할 수 있도록 사형 전날 알려달라고 당부했다는 ‘요부’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하면서 김수임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씩 달라졌다. 사랑에 목숨까지 바친 ‘순수한 여인’, 사랑 때문에 간첩행위까지 했으나 결국엔 사랑마저 이용하는 공산주의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은 ‘가엾은 여인’으로 그려졌다. 배우 윤석화가 김수임 역을 맡은 연극 ‘나, 김수임’(1997), 김수임의 대학후배 전숙희씨의 실화소설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2002), 드라마 ‘서울 1945’(2006) 등이 그것이다.

    학계 일각에선 ‘남북대립 상황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됐다’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과 미군정의 과도기에 벌어진 정치게임의 희생양’이라는 주장도 제기됐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사건의 진실을 파악할 자료가 너무 빈약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규정상 영구보존해야 하는 판결문 등 재판기록마저 행방불명이다. 앞뒤의 사건기록과 판결문은 다 남아 있는데 김수임 사건 기록만 사라졌다. 따라서 언제 사형이 집행됐는지조차 공식기록이 없다.

    그런데 최근 미국 AP통신에서 그의 죽음과 관련 새로운 시각을 보도했다. 비밀 해제된 ‘베어드 조사보고서(이하 베어드 파일)’ 등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발굴한 1950년대 기밀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는 것. 사건 자체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베어드 파일’은 미 육군성이 작성한 비밀문서다. 미 육군성은 1950년 8월2일부터 김수임의 자백 및 재판기록을 토대로 베어드 대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조사했다. 그가 정부(情婦)인 김수임에게 주한미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는지 여부와 그녀의 공산주의 활동을 보호, 지원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게 핵심이었다. 3개월에 걸친 조사를 마친 뒤 30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게 ‘베어드 파일’이다.

    기사에 따르면 김수임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연구한 사람은 바로 김수임의 아들 김원일(59·캘리포니아 라시에라대학·신학) 교수였다. 김 교수는 10년 넘게 어머니 김수임을 연구했는데, 그가 찾아낸 자료만 ‘베어드 파일’ 등 1000여 쪽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김 교수의 곁에는 김수임을 새로운 시각으로 영화화하려는 조명화(63) 감독이 있었다. 조 감독 역시 6년째 김수임을 연구 중이라 서로 자료와 정보를 교환해왔다.

    김원일 교수가 발굴한 베어드 파일 등 미국의 기밀문서들과 김수임 사건 재판 보도 기사, 북한의 이강국 재판기록, 관련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김수임 사건의 진실을 재조명했다.

    파란만장한 삶

    출생에서 죽음까지 김수임의 삶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다. 1911년 개성에서 빈농의 딸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부모가 이혼하고 각각 재혼해 가계(家系)가 복잡하다. 어머니가 다른 이복(異腹)동생도, 아버지가 다른 이부(異父)동생도 있다. 가난으로 11세 때 민며느리로 팔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로 올라와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총명한 머리로 이화여전 영문과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렇다고 외모까지 출중한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베어드 파일엔 서울 옥인동 자택에서 찍은 2장의 사진을 첨부한 뒤 “알려진 것(대단한 미인)과 실제 외모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메모가 붙어 있다.

    ‘한국판 마타하리’김수임 사건 美 비밀문서 집중분석

    1930년대말 세브란스병원 근무 당시 자신의 상관인 치과과장 부소 박사와 함께 찍은 사진.

    1932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성공회 기숙사에서 기거했는데,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시인 모윤숙과 같은 방을 썼다. 능통한 영어 실력으로 세브란스병원 치과과장 비서 겸 통역으로 일했다. 지인들은 그를 사교적이고 활동적이었으며 폭스트롯(사교춤의 일종)을 잘 추고, 패션 감각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모윤숙은 에세이 ‘회상의 창가에 서서’에서 김수임을 “마태복음을 줄줄 외는 기독교 신자” “아주 명랑하고 어떤 장소에서든 웃음을 한 바가지씩 들고 나오는 여자”라고 표현했다.

    김수임은 이 무렵에 이강국을 만났다. 이강국은 당대 최고의 수재로 유명했으며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다. 전숙희씨는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서 1929년 이강국이 원산노동자총파업과 관련해 구속됐을 때 모윤숙이 김수임을 데리고 면회를 가면서 두 사람이 처음 알게 됐다고 기록했지만, 사실이 아닌 듯하다. 당시 이강국이 구속됐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이강국은 1938년에 구속된 적이 있는데 이때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김수임과 이강국은 각각 자신의 재판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940년대 초였다고 진술했다. 특히 김수임이 “1942년 동무의 집에서 윷을 놀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첫인상이 좋아 교제를 시작했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한 것이 눈에 띈다. 두 사람은 사회주의운동을 함께 하며 동지에서 연인으로 발전했다.

    해방 정국에서 이강국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회단체와 정당들이 연합 결성한 민족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 사무국장에 오르면서 정치적 입지를 굳혀간다. 하지만 1946년 8월 동아일보에 미군정을 비판하는 칼럼을 발표하자 미군정에서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다. 이에 김수임의 도움으로 북한으로 탈출한다.

    반면, 김수임은 선교사의 추천으로 반도호텔에 취직한다. 당시 반도호텔은 미군정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는 미군 헌병대장 베어드 대령의 통역 겸 수행비서로 일했다.

    베어드의 배신

    ‘한국판 마타하리’김수임 사건 美 비밀문서 집중분석

    김수임 사건을 다룬 기사. 사진 속 여인은 김수임이 아니다. 김수임은 재판 전에 들것에 실려 들어올 정도로 고문을 당했다.

    김수임이 어떻게 베어드와 인연을 맺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전숙희씨는 “김수임이 피했지만 베어드가 워낙 김수임을 좋아해 계속 쫓아다녔다. 결국 자기도 외로우니까 받아들였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김수임은 이강국을 월북시킬 때(1946년 9월) 이미 베어드가 마련해준 옥인동 집에 살았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났던 셈이다.

    베어드 파일에 의하면 베어드는 김수임을 위해 집(옥인동 19번지)을 마련하고 동거했다. 김수임은 1949년 11월 베어드의 아이를 낳았다. 김수임의 친구였던 낸시 킴은 “그녀는 베어드 대령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는 당시 김수임의 유일한 남자친구였어요. 그는 그 집에서 여러 밤을 보냈습니다. 아이도 아버지를 닮았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김수임은 임신 사실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서인지 출산을 전후해 6개월 동안 청량리 위생병원에 장기입원하기도 했다.

    김수임이 한국 수사당국에 검거된 것은 1950년 4월21일이었다. 검거과정도 불분명하다. 김수임과 모윤숙은 생일이 비슷해 기숙사 시절부터 한날에 생일파티를 함께 하곤 했다. 그가 붙잡힌 날은 모윤숙의 생일(음력 3월5일)이었다.

    검거 당시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는 모윤숙의 에세이와 전숙희의 실화소설, 오제도 검사의 수기가 있다. 그런데 붙잡힌 상황 설명이 저마다 다르다. 모윤숙은 김수임이 먼저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오겠다고 해 자기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있는데 경찰들이 들이닥쳤다고 기록했다. 반면 전숙희는 모윤숙이 먼저 김수임에게 자신의 집으로 와서 밥을 먹자고 전화를 해서 김수임이 집을 나섰다가 경찰에 붙잡혔다고 적고 있다.

    당시 김수임이 살던 옥인동 19번지는 미군 관할 구역이라 한국 경찰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따라서 김수임을 붙잡으려면 그를 집 밖으로 끌어내야 했다. 그래서 모윤숙이 김수임을 밖으로 불러낸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조명화 감독은 “베어드가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 말했다.

    “베어드는 처녀였던 김수임에게 접근하면서 ‘본국에 아내와 자식이 있지만 사이가 안 좋아 이혼수속 중이다. 내가 한국근무 끝나면 결혼해 미국에 가서 살자’고 했다. 김수임은 그렇게 믿었을 것이고, 그래서 낙태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윤숙의 증언에 따르면 베어드는 김원일의 백일잔치에도 참석해서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1949년에 베어드의 부인과 아들이 한국에 와서 함께 살고 있었다. 김수임을 속인 것이다.

    또한 김수임이 한국 경찰에 잡혔을 때, 베어드는 그를 구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김수임이 간첩이 아니라면 누구보다도 그걸 증언해줄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김수임의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서둘러 한국을 떠나 미국의 가족에게 가버렸다. 갓난아이까지 팽개치고.”

    간첩 논란의 쟁점과 진실

    1950년 6월14일, 베어드가 한국을 떠난 지 9일 후, 김수임은 남한 군사법정에 섰다. 처음엔 혐의가 19가지였지만 정식 기소장에 기재된 것은 13가지였다. 가장 중대한 혐의라 할 수 있는 ‘1948년 12월에 육군특무대에 수감 중이던 남로당의 빨치산 총책인 사형수 이중업을 빼내 의사로 가장시켜 월북시켰다’는 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던지 기소장에서 삭제했다. 가택수색 과정에서 집에서 권총 3자루와 총알 180정이 나왔다든지, 북한으로 보내려던 많은 기밀물건이 압수됐다든지 하는 내용은 증거로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기각됐다. 기소에 무리가 있었다는 반증이다.

    김수임을 사형으로 이끈 13가지 혐의는 다음과 같다.

    1. 1946년 9월 이강국을 자신의 집에 은닉시킨 후 베어드 대령 지프로 개성까지 데려다줌으로써 월북을 가능케 함.

    2. 1946년 12월부터 1948년 7월까지 이강국의 연락원을 은닉 보호하며, 그를 통해 서신을 수신하고, 이강국에게 다량의 커피, 미제 연초 등의 물자를 제공.

    3. 1947년 12월 이강국이 남로당에 보낸 정치자금(일본은행권)을 베어드 대령이 제공한 군용트럭으로 서울에 옮김.

    4. 1948년 9월 북한에서 온 남로당원을 자신의 집에 은닉 보호.

    5. 1948년 12월 및 1950년 1월 초 남로당 박민호, 김용봉에게 미군철수문제 한국경찰 무장문제에 관한 정보를 제공.

    6. 1948년 9월 베어드 대령으로부터 지프 2대를 공짜로 얻어 1949년 7월 남로당 박민호 최만용에게 매도.

    7. 1949년 9월 남로당 최만용이 장물고매(臟物故買)한 지프에 대해 자동차 사용허가를 내줌.

    8. 1949년 7월 자신의 자동차를 남로당 최만용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함.

    9. 1949년 8월 남로당 최만용이 군 수사기관에 체포된 것을 구호 석방하는 자금을 대줌.

    10. 1949년 8월 남로당 최만용의 불법무기를 자가에 은닉.

    11. 1949년 8월 남로당 박민호에게 자가에서 라디오 1대 미제 무전기 1대를 제공.

    12. 1949년 12월 남로당 이용원에게 돈을 빌려주어 적을 이롭게 함.

    13. 1949년 12월 남로당 이용원의 불법무기를 자신의 집에 은닉.

    김수임은 위와 같은 혐의로 6월28일(베어드 파일 근거) 사형을 당했다. 과연 이것이 사형을 당할 정도로 엄중한 간첩혐의였을까? 베어드 파일과 조명화 감독은 이의를 제기한다.

    우선, 1946년 9월 이강국이 월북할 때는 남과 북 모두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다. 한반도가 하나의 국가가 될지 두 개의 국가가 될지 모르는 상태였다. 38선은 당시 미국과 소련의 군사상 분계선일 뿐이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따라서 이강국은 월경죄에 해당하고, 이를 도와준 김수임은 설사 범죄가 성립된다 할지라도 간첩죄가 아니라 범인은닉 도주방조 정도에 해당할 뿐이다. 사형 받을 정도의 혐의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강국에게 담배와 커피를 보낸 것이 간첩혐의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기밀 아닌 기밀

    김수임의 혐의 중에서 가장 큰 게 국가기밀을 빼돌려 남로당에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수임이 베어드로부터 국가기밀을 빼내 북한에 넘겼다면 베어드 역시 처벌을 면할 수 없다. 하지만 베어드 파일은 베어드에 대해 반역행위를 한 증거가 없다고 명시했다. 무엇보다 베어드는 국가기밀을 취급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돼 있다. 하지 준장을 포함한 많은 미군 장교가 베어드 대령은 미군 철수와 관련된 기밀사안들에 관한 접근권한 자체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기소 사항인 ‘미군 철수 사실’과 ‘한국 경찰 무장’ 문제에 대해서도 베어드 대령은 “1948년 당시 미군 철수에 대해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1950년 미 대사관의 한 직원에게서 한국 경찰의 화기를 곤봉으로 대체해야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으나 실행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며 김수임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실을 부인했다. 미군 지휘관들도 베어드 대령이 미군철수계획의 전모나 구체적 실행계획을 알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1948년 9월 철수개시계획이 무산된 이후 1949년 새 계획이 수립됐으나 유사한 정보가 일본에서 출간되는 ‘성조기’에 보도되는 등 충분히 예측 가능한 내용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수임은 법정에서 “박민호 등은 미 군정청에서 일을 하고 있어 자신들의 미래와 고용 여부를 걱정했기 때문에 베어드 대령에게 철수 계획에 관하여 물어보았고 그 정보를 친구들과 공유했다”고 진술했다.

    기소 내용 중에 6개가 남로당 최만용이란 인물과 관련이 있다. 그는 김수임의 이부(異父)동생으로, 옥인동 19번지에 함께 살면서 미군부대 차량 운전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수임이 군 수사기관에 체포된 동생을 위해 석방자금을 대주고, 미군에서 나온 지프를 사도록 도와준 것이 간첩행위였는지 의문이다. 또한 그의 집에 불법무기를 은닉했다는 것도 남로당원이었던 최만용이 은닉한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김수임의 간첩행위로 단정하기엔 무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베어드 파일은 이강국을 월북시키거나 남로당 정치자금을 운반하는 데 미군 차량이 동원된 부분, 군용 지프가 김수임을 통해 남로당으로 흘러들어갔다는 내용 등에 대해 ‘입증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규정했다. 공산주의 활동을 위해 사용된 라디오와 기타 장비들의 불법적 운용과 관련해서도 베어드는 김수임과 육체적 관계를 갖는 대가로 이를 주는 등의 협약을 했다는 혐의를 부인했고, 미군 감찰관은 증거들이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지긋지긋했던 고문

    ‘한국판 마타하리’김수임 사건 美 비밀문서 집중분석

    김수임의 아들 김원일 교수.

    이는 기본적으로 용의자의 자백이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전적으로 의존한 당시 한국의 수사관행과 철저한 물적 증거를 내세우는 미국 관행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북 간의 대립, 갈등이 전쟁으로 발전되는 당시 상황에서 김수임을 거물간첩으로 만듦으로써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려는 목적으로 조작됐다는 의심을 낳는다고 AP통신은 주장했다.

    그 증거로 베어드 파일은 김수임이 고문에 의해 강압적으로 혐의를 시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베어드 파일엔 “김수임으로부터 강압적으로 자백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지만, 목격자 증언으로 볼 때 이 문제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되어 있다. 한국 자문단 대표였던 윌리엄 라이트 대령은 ‘김수임의 자백은 자발적인 증언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을 늦추기 위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백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고문은 보통이고, 전기 고문에 펜치까지 사용된 지긋지긋한 고문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AP통신 기자는 당시 검사였던 김태청 변호사에게 “그녀는 고문을 받았는가?”라고 묻자 “내가 아는 것이라곤 법정에서 일어났던 일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 김수임 관련 수사드라마를 집필했고 나중에 실화소설도 펴낸 오재호씨는 새로운 사실을 들려주었다.

    “사건을 취재하던 중, 당시 수사경찰관으로부터 ‘김수임이 마지막 재판에 자백을 하기 위해 들것에 실려 법정에 들어왔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 그 정도로 고문을 심하게 당했다는 것이다. 자백을 하지 않으면 또다시 고문실로 끌려갈 것이 두려워 김수임이 결국 모든 걸 포기하지 않았나 싶다.”

    재판 절차도 의문으로 남는다. 민간인이었던 그를 군사법정에서, 그것도 3일 동안 연속해서 재판하고 마지막 날 사형을 선고했다. 군에서는 ‘국방경비법’ 33조 간첩이적행위 조항을 적용해 민간인인 그를 재판하는 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국방경비법은 법을 공포한 날이 미상으로 되어 있다. 또한 미군정에서 만든 법이었으므로 영문으로 먼저 법을 만든 후 이를 한글로 번역했을 것이다. 따라서 영문으로 된 법령집과 한글로 된 법령집이 똑같이 있어야 함에도 이 법은 영문 법령집에는 없고 한글판에만 있다. 이에 대해 한홍구 교수는 미군정 말기에 법이 제정된 것처럼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법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이 김수임을 포함해 1000명에 달했다.

    베어드와 이강국

    의문은 또 있다. 미 육군성은 베어드 대령을 조사한 후 ‘간첩동조 및 방조혐의’에 대해 무혐의 판결을 내렸지만, ‘한국인 정부와의 스캔들 때문에 미군 명예를 실추시킨 것’에 대해 군사재판에 회부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이 파일은 종결사건으로 분류됐다. 이 부분에 대해 AP통신은 ‘누가 이 재판을 저지했고 도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의문을 제기한다.

    ‘한국판 마타하리’김수임 사건 美 비밀문서 집중분석

    김수임 사건은 삼각관계, 목숨을 건 사랑 등 극적 요소가 강해 영화, 드라마 등의 좋은 소재가 됐다. 연극 ‘나, 김수임’(왼쪽)과 드라마 ‘서울 1945’.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선 베어드와 이강국의 관계를 눈여겨봐야 한다. 이강국은 북한에서 열린 재판에서 자신이 미국에 고용된 간첩이었다고 자백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35년 독일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는 길에 미국에 들렀다가 미국 정탐부에 포섭됐으며, 김수임을 이용해 1946년 6월 베어드를 만나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또한 “1946년 9월 베어드의 지시로 애국자로 위장하여 북한에 올라가 1948년 5월까지 5차례에 걸쳐 베어드에게 매우 중요한 기밀을 제공했다” “베어드가 내게 ‘김수임을 남로당과 연계해달라’고 해 이승엽을 소개해주었다”고 진술했다. 이강국은 1948년 실각하면서 더 이상 김수임과 연락할 수 없게 됐고, “1948년 8월 이후에 김수임은 이승엽과 연계된 것으로 보인다”고 진술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강국이 김수임을 통해 남한의 정보를 수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베어드가 김수임을 통해 북한 정보를 수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김수임이 재판에서 최만용과 박민호 등이 남로당원이었지만 동시에 미군정 첩보원이기도 했다고 진술한 것을 보면, 이 주장은 제법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해방전후사를 전공한 고지수 현대사자료실 연구원에 따르면 당시 미군정에서 대(對)남로당 첩보원들을 두고 있었는데 이런 사실을 모르는 한국 검경에 의해 공산당으로 분류돼 붙잡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즉, 국내 검경은 김수임이 미군정의 북한정보원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수사를 하고 구속, 사형까지 끌고 간 것일 수도 있다.

    김수임 검거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남로당에서 활동하던 양한모(본명 홍민표)가 1949년 전향하면서 남로당 조직을 대거 밀고한 사건이다. 당시 150여 명의 남로당원이 일망타진됐는데, 여기에 김수임이 포함됐다. 김수임 사건 담당검사였던 고(故) 오제도 변호사도 자신의 수기에서 “김수임이 검·경·군 합동수사분실의 수사망에 걸려든 것은 1950년 2월 말이었다”고 회고했다.

    조명화 감독이 만난 김원일 교수

    “역사에 의해 익사한 어머니 영혼 감싸 안고 싶다”


    ‘한국판 마타하리’김수임 사건 美 비밀문서 집중분석

    조명화 감독

    조명화 감독은 김수임의 아들 김원일 교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6년 전부터 김수임에 대한 연구를 해온 조 감독은 현재 김수임을 소재로 한 한미합작 영화를 준비 하고 있다.

    조 감독이 김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김수임의 아들이 있다는 얘길 듣고 무작정 미국까지 찾아갔다. 김 교수는 처음엔 만남 자체를 꺼렸지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그 후 10여 차례 만났고, 지금도 수시로 전화통화를 한다.

    조 감독은 김 교수가 한국말이 능숙한 정도가 아니라 경북 영주(양어머니 안귀분 씨의 고향) 사투리까지 섞어 쓴다고 했다.

    ▼ 김원일 교수에게 수차례 인터뷰 요청 메일을 보냈지만 답장조차 받지 못했다.

    “어머니 이야기를 떠들어서 자기가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처럼 비치는 게 싫다고 한다. 한국 언론에 대해 불신도 큰 모양이다. 2006년 KBS ‘인물현대사’라는 다큐 프로그램에서 김수임을 다뤘는데 일부 언론에서 ‘여간첩을 두둔한다’고 비난했다. 김수임을 소재로 한 드라마 ‘서울 1945’를 방영할 때는 ‘좌빨선동방송’이라는 비난까지 나왔다. 그런데 AP통신에서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김수임에 대한 보도 태도가 바뀐 것에 대해 이해를 못하겠다고 한다.”

    김 교수는 생후 1년도 안 돼 아버지 베어드는 미국으로 떠나고 어머니 김수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졸지에 천애 고아가 됐다. 다행히 그가 태어난 청량리위생병원의 수간호사였던 안귀분씨 부부의 양자로 입양됐다.

    ▼ 김 교수가 생모 김수임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인가.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로부터 ‘간첩새끼’ ‘네 엄마는 간첩’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순간, 차에 치인 것처럼 막막해지고,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판단이 안 되고 그냥 눈물만 났다고 하더라. 집에 돌아와 밤새 울고 나서 길러주신 어머니에게 사실이냐고 물었는데, 어머니도 한참을 울더니 사연을 들려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얘기를 들었다고 해서 생모의 흔적을 찾는 등 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 미국엔 언제 어떻게 가게 된 것인가.

    “김 교수는 백인혼혈이라 생김새부터 우리와는 다르다. 공부를 잘해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도 했지만 아무래도 외모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한국에서 살아가기에 불편할 것이라고 판단한 양부모가 그를 위해 이민을 결심했다. 하지만 김원일이 간첩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처음엔 불허됐다. 1970년에 가까스로 한국을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 생부인 베어드 대령은 만났나.

    “미국에서 우연히 김수임과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했던 엄마 친구를 만나게 됐고, 그로부터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한다. 그 후 베어드가 로드아일랜드의 한 양로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1980년 양로원을 찾아갔다. 90세의 베어드는 ‘나는 사생아 자식이 없다. 넌 내 자식이 아니다”며 부인했다고 한다. 베어드는 1950년 조사를 받을 때도 사생아는 없다고 부인했었다.

    그런데 김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헤어질 때 베어드의 눈빛은 미안함을 담고 있었다고. 그렇게 믿는다고. 그래서 이해한다고. 베어드는 김 교수를 만난 지 몇 달 후 사망했다. 소식을 듣고 김 교수가 묘지를 찾았는데, 베어드와 그의 부인이 함께 묻힌 그 묘비엔 ‘Together Forever’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김수임 죽은 터에서 밤새 진혼제 올려

    ▼ 김 교수가 어머니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사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김 교수는 미국 여성과 결혼해 아이 셋을 두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로부터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가면 당시 한국자료를 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 교수는 1996년부터 그곳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고, 베어드 파일 등 총 1000여 쪽의 문서를 찾았다. 이 외에도 김 교수는 한국에서 김수임의 호적등본, 학적부도 찾아냈다. 학적기록을 보면 김수임은 전 과목에 걸쳐 상위권이었고, 특히 영어실력이 뛰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그물질하듯 어머니에 대한 자료를 걷어올리고 싶어했다.”

    ▼ 김 교수가 한국에 처음 온 것은 언제인가.

    “1997년 한국에서 연극 ‘나, 김수임’을 공연했다. 그 극단 단원 중에 김 교수를 기억하는 고교 선배가 있었다. 그래서 김 교수를 초청해 27년 만에 한국에 왔다고 한다.”

    ▼ 생모 이야기를 다룬 연극을 봤을 때 소감이 남달랐을 텐데.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원래 심장병이 있었는데 연극을 보고 돌아가서 심장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연극을 볼 때의 심정이 어땠을지 조금은 상상이 갔다. 김 교수는 감성적인 성격이다. 어머니 이야기를 하려면 눈시울부터 붉어지는 등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그래서 본인이 그런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때 수색에 살았던 고등학교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김 교수에게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김수임이 죽은 곳이 저곳이란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그곳에서 밤새 진혼굿을 했는데, 그날 많이 울었다는 말을 들었다.”

    ▼ 지난 6월에도 한국에 오지 않았나.

    “김수임 재판에 참여했던 김태청 변호사를 만났다. 김원일은 슬프지만 아들로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김수임에 대한 취재를 했던 오재호씨를 만나게 해주었다. 동아일보가 일제에 의해 폐간됐다 복간된 것을 빗대 김수임이 1937년 동아일보에 ‘오빠의 쾌유를 빌며’란 칼럼을 기고했다. 이걸 알고 동아일보에 가서 그 기사를 복사해갔다.”

    ▼ 김 교수는 김수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어머니는 역사라는 장기판의 졸이었다, 역사에 익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격동의 세월을 살다 간 지극히 인간적인 한 영혼으로 어머니를 감싸 안고 싶다’는 말도 했다. 김수임과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낼 생각은 없지만, 여건이 되면 5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어머니의 영혼과 나눈 대화를 글로 쓰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은 있다.”


    이에 대해 조 감독은 “이강국이 미국의 간첩이고, 김수임이 이강국과 베어드의 연결고리가 되려면 베어드는 군 정보 관계자여야 한다. 그런데 당시 한국정보팀을 담당했던 사람은 쉴리 소령이었고, 쉴리 파일에서 한국 관련 정보들이 발견됐다. 베어드 파일에선 어떤 정보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아직 아무도 열람하지 않은 당시 한국관련 자료와 서류들이 미국 문서보관소엔 쌓여 있다. 거기에서 어떤 자료가 나올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베어드가 정보 일을 했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며 조심스럽게 이강국과 베어드의 연관설을 부인했다.

    JACK와 CIC

    이강국이 베어드에게 고용된 정보원(또는 간첩)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미국에 고용된 간첩 혹은 정보원이었다는 기록이 최근 발견됐다. AP통신은 1956년 작성된 미 육군 극비자료 프로필에 이강국이 CIA에 의해 ‘JACK(한국합동공작단, Joint Activities Commission, Korea)’에 고용됐으며, 실제로 1953년 6·25전쟁 휴전 직전에 ‘미군 첩자’로 북한에서 처형됐다고 적혀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강국이 실제 미군과 연결돼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부연했다. 이 파일엔 “1953년 11월 보고에 따르면 이강국은 일본 동경도 차기구 내 JACK에 고용된 것이 확인됐다(A report of nov 53. stated that Yi was employed by JACK in Chagi-ku, Tokyo-to, Japan)”고 돼 있다. 여기엔 고용됐다고만 되어 있을 뿐 언제 어떻게 되었고, 어떤 활동을 했다는 언급은 없다.

    이강국이 미국 간첩일 수 있다는 근거는 2001년 발견된 문서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여기엔 이강국, 임화,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남로당 선전부장 등이 미군정 산하 주한미군방첩대(CIC·Counter Intelligence Corps)에 포섭된 정보원이라고 돼 있다.

    물론 이 기록들에 의심의 여지는 있다. CIA는 1947년 7월에 설립됐다. 따라서 산하조직인 JACK 역시 그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 기구는 6·25전쟁 시기에 활약했고, CIA 일본지국의 지휘를 받았다. 그러나 이강국이 월북한 것은 1946년 9월이었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또한 CIC와 이강국의 관계도 당시 정황에서 ‘간첩’으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CIA의 전신인 OSS와 협력했던 아시아공산주의자 명단엔 마오쩌둥, 호치민 등의 포함돼 있을 정도로 당시 동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은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었다. 특히 남로당 고위급 인사였던 이강국이 미군정과 비선(秘線)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특기할 만한 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게 학계의 이야기다.

    조명화 감독은 이강국의 간첩혐의 의혹에 대해 이런 추측을 내놓았다.

    “이강국이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면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당시 지식인들이 원하는 국가는 통일국가였다. 그런데 북한은 이미 김일성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선 남한만의 정부를 만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자인 이강국으로서는 투쟁지역이 남한이 아닌 북한이 돼야 한다. 이강국은 북한에서 사회주의 투쟁을 하기 위해 북한에 안착할 방법을 찾았고, 미국의 도움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강국이 미군에 고용된 간첩이든, 미군과 협력관계였든 미군과 연계돼 있었다면 김수임에게 간첩죄는 성립되지 않는다.”

    치열한 삶을 산 여자

    김수임이 간첩이냐 아니냐를 떠나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김수임은 이념에 무지한 채 한 남자에 목숨을 걸었거나, 아무 것도 모르고 두 남자에게 이용당한 무지하기만 한 여성이었느냐는 것이다.

    모윤숙의 에세이에 보면 모윤숙과 이강국이 ‘이승만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놓고 격론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김수임은 이승만을 비판하며 “자본주의자인 이승만이가 미국에 한국을 팔아먹을지도 모른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또한 재판 최후진술에서 “나로서는 일생일대의 잊지 못할 사랑이었다. 나를 위해 힘써준 분이 여럿 있고 애인도 있지만, 그분들을 위해 나로서는 당연한 일을 했고 후회하지 않는다. 죽기 전에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자기 생각을 갖고 자기 신념대로 행동했다는 이야기다. 조 감독은 “지금까지 김수임에 대한 시각이 반공 이데올로기, 또는 ‘버림받은 여인’이라는 남성중심 관점에 머물러 있었다”며 “김수임은 ‘일과 사랑’을 통해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인물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김수임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46년 미군이 여론조사를 했는데, 남한 주민 77%가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바랐다. 이들이 말한 사회주의는 지금의 사회주의와는 다르다. 제국주의와 봉건제도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회주의를 생각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로 했던 게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국민은 자유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를 때였다. 김수임도 일제에 반대하고, 봉건제도에 반대하는 의지가 강했다. 그게 사회주의 사상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미 군정청의 하지 준장은 그 같은 여론조사 결과의 이면을 무시했다.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친일파 관료를 등용했다. 이것이 바로 김수임이 빠져든 역사의 함정이요 딜레마였다고 조 감독은 말했다.

    진실과 화해

    김수임 사건은 현재도 역사의 미제(未濟)로 남아 있다. 몇몇 학자나 아들인 김원일 교수, 조명화 감독 등 개인들의 노력만으로는 진실을 밝혀내기엔 한계가 많다. 이런 사건의 진실을 밝히라고 만든 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다. 그런데 2005년 12월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출범 직후 1년 동안만 사건 신청을 받아 지금은 그 기간이 지났다.

    김원일 교수는 당시 이런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그는 “이제라도 아들 자격으로 진정서를 제출하는 게 어떠냐”는 한 언론사의 e메일 질문에 “역사와 화해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그 의무를 위탁받은 위원회의 역사적 과제이지 유가족이나 친지의 개인적 과제는 아니라고 본다. 위원회의 판단과 역량을 믿고 지켜보는 것이 내가 서 있어야 할 가장 적절한 자리”라며 자신이 나설 계획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진실화해위원회 측은 “신청기간이 지났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진정을 받거나 하는 것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다만, 최종결정기구인 전원위원회에서 직권조사하기로 결정하면 조사에 착수할 수는 있다. 현재까지는 그런 결정이 내려지거나, 논의할 계획이 서 있지는 않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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