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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기열전(史記列傳)’⑤

유협열전

말에는 믿음이 있었고 행동은 과감했다 평생 재능을 자랑하지 않았고, 보답도 바라지 않았다

  • 원재훈│시인 whonjh@empal.com│

유협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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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부’의 한 장면.

지난 4000년 역사에서 나타난 범죄조직들의 또 다른 주요 특성은 이들이 국가의 폭력 독점에 도전하며, 그 조직원과 희생자를 모두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포를 이용하고, 서열구조와 내부 규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국가란 큰 도적단이며, 도적단이란 작은 국가일 뿐인가?”

협객의 존재 이유

왜 협객은 존재할까? 중국 고대의 천재 역사학자이면서 선비인 사마천은 장엄한 역사의 강물을 바라보면서 세상살이가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를 먼저 밝힌다. 공자와 같은 대성현도, 백이와 같은 절개의 인물도, 여상 이오 등 선비로서 수양을 닦은 어진 이들도 인생을 살면서 기가 막히는 일을 당한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모두 선비로서 이러한 재난을 만났는데, 하물며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어지러운 세상의 혼탁한 흐름을 건너자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들이 재앙을 겪는 경우를 일일이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문장에는 한 무제에게 이릉 장군을 변호하는 정의로운 말을 했다가 화를 당한 자신의 심경이 포함되어 있다. 사마천이 전통적인 유가의 해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으로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삶의 억울함과 가난하고 불우한 자의 심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라의 신하였던 사마천은 국가가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대명제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유협의 세계를 무시하는 태도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칭찬할 점을 찾아 기록했다.

“지금 유협의 경우는 그 행위가 비록 정의에 부합되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말에는 믿음이 있고 행동은 과감하며, 한번 승낙한 일은 반드시 성의를 다해 실천하고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닥친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 그들은 생사존망을 돌아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뽐내지 않았고,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이런 점은 높이 칭찬할 만하다. 사람은 누구든지 위급한 상황에 부딪힐 때가 있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위급한 상황에 부딪힐 때가 온다. 그 순간 우리 앞에 정의를 실현해줄 국가와 법은 저 높은 곳에서 별처럼 빛날 뿐이다. 절차를 거쳐 법의 심판을 받기 위해 세월을 기다려도 그 정의는 실현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민주적이라는 미국에서도 그러할 때가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할 때가 있다.

협객이 필요한 ‘보통사람들’

시카고 갱단의 보스 알 카포네로 상징되는 마피아를 모델로 만든 영화 ‘대부’는 미국으로 이민한 한 평범한 이탈리아인이‘대부’에게 와서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는 어두운 장면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딸을 성폭행한 놈들이 가벼운 벌금형을 받고 법정에서 유유히 빠져나가면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고백한다. 그 순간 법의 정의를 믿었던 시민은 분노하고 좌절한다.

열심히 일해서 세금 내고, 교통법규 지키고, 범법행위와는 거리가 먼 착한 시민을 지켜주어야 할 국가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로 치자면 대통령쯤 되는 대부는 힘없고 가난한 그를 직접 만나 독대를 해서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간단하게 마피아 ‘애들’을 시켜서 속 시원하게 그 원한을 풀어준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국가가 실현하지 못하는 정의를 유협이 ‘속 시원하게’ 해결해준다. 우는 아이에게 젖병을 물리는 대부, 그는 가난한 자의 자애로운 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대부라고 부르면서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물론 미국 마피아 조직이 사마천의 유협으로 분류될 수는 없다. 그들은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각종이권 개입, 탈세, 살인을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일종의 비즈니스맨이기 때문이다.

유협이 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의 홍길동이나 일지매처럼 사심이 없어야 한다. 하여간, 이것은 매우 일천한 비유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대부’가 필요한 경우를 의외로 많이 겪는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경우는 사방 도처에 있다. 아이들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행위, 성폭행, 주차장에서 당하는 황당한 주차싸움과 같은 일들, 일일이 거론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러한 문제가 나름 잘 정리된 국가나 사회를 지금 세계에서 몇 나라나 찾아볼 수 있을까?

유협을 원하지 않는 권력자

유협은 철저하게 가난한 자, 시민과 백성의 시각으로 형성된다. 가진 자와 권력자들은 정의로운 유협의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 사마천은 말한다.

“백이는 주나라가 온 천하를 얻는 것을 추악하게 여겨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지만 문왕과 무왕은 이 때문에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도척과 장교는 포악하고 잔인했지만 패거리들은 그들이 의기 있는 사람이라고 끝없이 칭송했다. 이것으로 볼 때 허리띠의 갈고리를 훔친 사람은 처형되고, 나라를 훔친 사람은 제후가 되며, 제후의 문하에는 인의가 있다는 말은 허튼 소리가 아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어 처형당하지만(국가에 의해), 전쟁을 일으켜 수십만명을 죽인 자는 자국에서는 영웅이 돼서 국가 권력을 독점한다. 그러니 국가 권력이 유협의 세계를 멀리할 수밖에 없다. 민중이 유협을 지지하면 정권 유지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홍길동과 같은 유협은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국가권력은 정의로운 유협일지라도 그 존재 자체를 기록에 남기지 않기도 한다. 사마천은 이러한 국가의 횡포에 대해 지적했다.

“옛 서민 협객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다. (… ) 시정의 협객들은 오로지 행실을 닦고 절개를 지켜 명성을 온 천하에 떨쳤으니 현명하다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유가와 묵가에서는 모두 이들을 배척하고 버려 책에 기록하지 않았다. 진나라 이전의 서민 협객에 대해서는 사라져 알 길이 없다. 나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사마천의 이러한 시각은 유가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마천의 자유로운 시각 때문에 오늘날까지 사기열전이 생명력을 갖게 됐다. 사마천은 한나라 시대 주가, 전중, 왕공, 극맹, 곽해와 같은 인물들을 유협열전에 기록한다. 이들은 당시 국가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기도 했으나, 개인의 품위와 덕망, 청렴, 겸양에 있어서는 선비들과 백성들이 그 뒤를 따랐다고 기록했다. 즉 폭력을 동원한 깡패는 유협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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