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아주머니 한 분이 스마트폰을 열심히 보며 걷다가 내 어깨를 정말 세게 부딪치고 가셨다. 정말 아팠지만, 나도 모르게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생각해보니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저쪽에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전방 주시에는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을 보고 있었고, 최대한 길을 비켜주려 했으나 휴대전화를 보면서도 매우 빠른 속도로 걷는 그녀의 저돌적인 몸놀림을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다.
거리를 걷다보면 이와 비슷한 순간을 꽤 자주 맞닥뜨린다. ‘저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치고 싶은 순간. ‘앞을 좀 보시면 안 될까요?’라고 묻고 싶은 순간. 우리가 서로를 조금 더 신경 써서 관찰해야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그저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느라 스쳐 지나가버리는 순간들, 사람들, 풍경들. 우리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에 목마른 삶을 살고 있지만, 사실 진짜 필요한 것은 참신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신중한 관찰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반가운 책을 만났다. ‘관찰의 인문학’은 ‘개의 사생활’이라는 흥미로운 책으로 미국 독자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심리학자 알렉산드라 호로비츠의 에세이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인 이 책은 ‘같은 길을 걷더라도, 전혀 다른 풍경을 바라보는 법’을 들려준다.
저자는 늘 똑같기만 해보이던 평범한 동네 산책길을 때로는 반려견이나 어린 아들과 함께, 때로는 시각장애인이나 일러스트레이터와 함께, 때로는 곤충학자나 도시사회학자나 물리치료사와 걷고 또 걸으며, ‘같은 길을 다르게 관찰하는 법’을 배운다. 어린 아들과 길을 걷는다는 것은 때로 ‘걷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아이는 걸핏하면 멈춰 서서 ‘새로운 것’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사물로 인식하는 모든 것을, 아이들은 온 신경을 집중해 관찰하고, 만져보고, 심지어 먹어보려 한다. 우리는 셜록 홈스처럼 추리력이 뛰어난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천재일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엄청난 지능을 뽐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사실 ‘남다른 관찰력’을 가진 사람일 경우가 많다.
보지만, 제대로 못 보는
우리는 ‘눈으로는’ 보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보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저 스쳐지나갈 뿐 충분히 주시하고 관찰하고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보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다. 우리는 눈을 사용하지만, 시선이 닿는 대상을 경박하게 판단하고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기호를 보지만 그 의미는 보지 못한다. 남이 우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만화가 제임스 서버는 성인이 된 후 시력을 잃었지만 손가락 사이로 연필을 움직이며 보지 않고 그리는 기술을 익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얼굴이 긴 사냥개 캐릭터를 계속해서 그릴 수 있다. (…) 올리버 색스의 책에는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극도로 민감해진 의사가 한 명 등장한다. 그는 체취는 물론 우리 몸에 묻어 있는 로션, 비누, 세제의 향기, 나아가 걱정스럽거나 불행할 때 몸에서 나는 냄새마저 맡을 수 있다. -‘관찰의 인문학’ 중에서
우리는 집중력이 중요하다고 배우지만,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주의가 산만한 아이들에게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지만, 집중이 반드시 효율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정보에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그 밖의 것들을 쉽게 놓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집중이라는 것은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대상’을 배제하는 작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