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호

우리가 한눈파는 동안 스쳐가는 세상의 아름다움

  • 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입력2015-07-24 09:1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우리가 한눈파는 동안 스쳐가는 세상의 아름다움
    첼리스트의 체성감각 피질에는 왼손가락의 감각을 처리하는 세포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많다. 왜일까? 전문 첼리스트는 왼손을 능숙하게 다뤄서 반사적으로 맞는 음을 짚고, 손가락의 압력과 진동을 조절해 음악적으로 뛰어난 연주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관찰의 인문학’ 중에서

    얼마 전 아주머니 한 분이 스마트폰을 열심히 보며 걷다가 내 어깨를 정말 세게 부딪치고 가셨다. 정말 아팠지만, 나도 모르게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생각해보니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저쪽에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전방 주시에는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을 보고 있었고, 최대한 길을 비켜주려 했으나 휴대전화를 보면서도 매우 빠른 속도로 걷는 그녀의 저돌적인 몸놀림을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다.

    거리를 걷다보면 이와 비슷한 순간을 꽤 자주 맞닥뜨린다. ‘저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치고 싶은 순간. ‘앞을 좀 보시면 안 될까요?’라고 묻고 싶은 순간. 우리가 서로를 조금 더 신경 써서 관찰해야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그저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느라 스쳐 지나가버리는 순간들, 사람들, 풍경들. 우리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에 목마른 삶을 살고 있지만, 사실 진짜 필요한 것은 참신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신중한 관찰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반가운 책을 만났다. ‘관찰의 인문학’은 ‘개의 사생활’이라는 흥미로운 책으로 미국 독자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심리학자 알렉산드라 호로비츠의 에세이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인 이 책은 ‘같은 길을 걷더라도, 전혀 다른 풍경을 바라보는 법’을 들려준다.

    저자는 늘 똑같기만 해보이던 평범한 동네 산책길을 때로는 반려견이나 어린 아들과 함께, 때로는 시각장애인이나 일러스트레이터와 함께, 때로는 곤충학자나 도시사회학자나 물리치료사와 걷고 또 걸으며, ‘같은 길을 다르게 관찰하는 법’을 배운다. 어린 아들과 길을 걷는다는 것은 때로 ‘걷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아이는 걸핏하면 멈춰 서서 ‘새로운 것’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그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사물로 인식하는 모든 것을, 아이들은 온 신경을 집중해 관찰하고, 만져보고, 심지어 먹어보려 한다. 우리는 셜록 홈스처럼 추리력이 뛰어난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천재일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엄청난 지능을 뽐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사실 ‘남다른 관찰력’을 가진 사람일 경우가 많다.

    보지만, 제대로 못 보는

    우리는 ‘눈으로는’ 보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보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저 스쳐지나갈 뿐 충분히 주시하고 관찰하고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보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다. 우리는 눈을 사용하지만, 시선이 닿는 대상을 경박하게 판단하고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기호를 보지만 그 의미는 보지 못한다. 남이 우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만화가 제임스 서버는 성인이 된 후 시력을 잃었지만 손가락 사이로 연필을 움직이며 보지 않고 그리는 기술을 익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얼굴이 긴 사냥개 캐릭터를 계속해서 그릴 수 있다. (…) 올리버 색스의 책에는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극도로 민감해진 의사가 한 명 등장한다. 그는 체취는 물론 우리 몸에 묻어 있는 로션, 비누, 세제의 향기, 나아가 걱정스럽거나 불행할 때 몸에서 나는 냄새마저 맡을 수 있다. -‘관찰의 인문학’ 중에서

    우리는 집중력이 중요하다고 배우지만,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주의가 산만한 아이들에게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지만, 집중이 반드시 효율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떤 정보에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그 밖의 것들을 쉽게 놓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집중이라는 것은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대상’을 배제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런 심리학 실험이 있다. 피험자들의 미션은 영상으로 농구경기를 보면서 팀별로 패스 숫자를 세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실험에서 심리학자들이 보고자 한 것은 사실 다른 것이었다. 농구공에 주의를 기울이던 사람들에게 질문한 것은 ‘경기 중에 특이한 것을 보진 못했는가’였다. 알고 보니 고릴라 분장을 한 사람이 요란스럽게 춤을 추고 가슴을 두드리며 경기장을 활보했지만, 피험자의 반 이상은 패스 개수를 세느라 고릴라 분장을 한 사람을 포착하지 못했다.

    이렇듯 아무리 눈에 띄는 존재라도,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관찰은 세상을 파악하는 기술일 뿐 아니라 세계를 ‘편집’하는 기술인 것이다. 관찰의 기술은 곧 우리 몸의 감각을 확장하는 지혜이며, 우리 두뇌의 활동을 심화하는 결정적인 열쇠이기도 하다.

    우리 몸이 확장되면 놀랍게도 뇌에서도 주변 공간이 확장된다. 모자를 처음 쓰면 낮은 문으로 들어설 때마다 머리를 부딪치겠지만 하루 종일 모자를 쓰고 있으면 곧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된다. 젓가락을 꾸준히 사용하면 뇌는 젓가락을 손가락의 확장으로 여긴다. 야구 선수의 뇌는 야구 배트를 손의 확장으로 경험하고, 트럼펫 연주자는 트럼펫을 몸의 부속품이나 다름없이 생각한다. 또 지팡이를 오래 사용한 시각장애인은 운동선수나 음악가처럼 고유한 기술을 갖게 된다. -‘관찰의 인문학’ 중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

    각종 미디어는 우리로 하여금 ‘더 잘 보고, 더 잘 느끼고, 더 많이 알게 하기 위한 도구’임을 자처하지만, 미디어에 중독된 신체는 오히려 미디어의 매트릭스에 갇혀 자신의 몸이 느낄 수 있는 자극조차 감지하지 못한다. 휴대전화를 계속 주시하면서 길을 걷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바로 그 ‘도구’의 빛과 소리에 집중하느라 우리가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함께 이야기하다가 자꾸만 휴대전화를 곁눈질하거나, 손으로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면서 눈으로는 앞의 사람을 보는 ‘신공’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보면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휴대전화를 주시한다는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기도 하고, 눈앞의 훨씬 많은 정보를 ‘관찰’하지 않음으로써 소중한 많은 것을 놓치는 행위이기도 하다.

    특히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시각장애인이 길을 걸을 때, 많은 사람이 휴대전화를 주시하고 있으면 보행자끼리 충돌사고를 일으킬 확률이 높아진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로 잘 알려진 작가 올리버 색스는 한쪽 눈의 시력이 극도로 떨어졌을 때 수많은 사람이 휴대전화에 정신을 팔고 다니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고 한다.

    휴대전화를 보는 행위는 시각만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살아가는 마음의 여유마저 빼앗아간다. 휴대전화에 정신을 빼앗기게 되면 건강한 사람들도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바로 곁에 있어도 듣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타인을 배려하는 감수성을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이 휴대전화의 치명적인 위험이다.

    마음 챙김의 기술

    주변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주변의 존재를 더욱 세밀하게 인지하는 것은 감각을 확장함으로써 이 세상을 더욱 깊고 넓게 느끼는 방법이다. 셜록 홈스가 추리의 천재이기에 앞서 ‘관찰의 마니아’였듯이, 우리도 ‘멋진 아이디어’라는 결과를 얻기 전에 더 깊고 신중하게 관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최근에 나는 관찰이라는 행위 자체에 치유의 힘이 있음을 발견했다. 얼마 전,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오랜만에 연필과 수첩을 준비해 다니면서 눈앞의 사소한 사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평범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그리는 데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그저 단순한 컵 모양으로만 보던 휴대용 플라스틱 컵에는 알고 보니 무려 다섯 줄의 미세한 홈이 파여 있었다. 홈 파인 플라스틱을 그리는 작업이 어찌나 어려운지 나도 모르게 대상을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그리기 쉬운 쪽’으로 왜곡하고 있었다.

    그런데 컵 하나를 그리는 동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무언가를 오래오래 관찰한다는 것은 급박한 상황, 황당한 상황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마음 챙김의 기술이기도 하다. 상황을 지나치게 빨리 간파하고 즉시 행동하면 일을 그르칠 위험이나 감정에 사로잡힐 염려가 많아진다. 상황을 조금 더 오래 관찰하고 내 마음을 좀 더 오래 들여다보면 굽이치던 마음은 가라앉고 뜻밖의 지혜가 떠오르기도 한다.

    관찰력은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무언가를 깊이, 오래 관찰한다는 것.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멋진 방법이자 감정의 격랑을 다스리는 훌륭한 치유의 기술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