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호

인터뷰

10년 준비 3년 집필 ‘이순신의 7년’ 소설가 정찬주

“우리 피톨 속 이순신 정신 끄집어내야”

  • 입력2018-04-25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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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상 기자]

    [정현상 기자]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미래가 있다고 했는데, 저는 한국인 피톨 속에 들어 있는 이순신 정신을 끄집어내야 우리 민족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척간두에서 나라를 구한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에 대해 그동안 우리는 거죽만 알고 있었다. 우리 피톨 속, DNA에 담긴 그 정신을 만나야 한다. 소설가 정찬주(65) 씨의 이 주장은 이제까지 우리가 이순신에 대해 갖고 있던 관념을 한꺼번에 뒤집는다.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전 7권)에서 그는 영웅적 존재로서뿐 아니라 우리 곁,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인간적 이순신을 흥미롭게 그려냈다. 전쟁에서는 23전 23승의 완벽주의를 보여줬지만, 눈물 많고 충청도 사투리 쓰는 인간적인 이순신을 이 작품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정씨를 만나기 위해 4월 5일 전남 화순으로 향했다. 그가 살고 있는 이불재(耳佛齋)는 신라시대 건립된 고찰 쌍봉사와 이웃하고 있다. 이불재는 ‘귀를 씻어 불(佛)을 이루는 집’이라는 뜻이다. 전라도 남녘땅이라 그런지 인근 산봉우리들은 동글동글하고, 골짜기는 아늑했다. 그의 집 앞마당엔 산벚꽃이 만개했고, 목련, 동백, 피자두꽃도 앞다퉈 피고 있었다. 봄날의 곱고 정겨운 기운이 집안에 가득했다.

    낙향하니 눈앞이 다 소설 재료

    그는 도예가인 아내 박명숙 씨와 이곳에 살고 있다. 도자기 굽는 나무 가마까지 갖추고 있는 아내는 요즘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마음이 바쁘다. 소설가 남편은 장작을 패거나 무거운 물건을 들어주기도 한다. 그런 남편을 위해 아내는 부엉이 연적을 구워줬다. 지혜를 갖춘 소설가가 되라는 뜻에서. 남편은 자신의 가장 큰 역할을 “완성된 도자기 감상해주는 일”이라며 부처님 같은 웃음을 짓는다. 정씨는 절간 스님들처럼 맑고 향기로운 차를 우려 내놓았다. 

    정씨가 이순신 장군에 대해 작가로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01년 서울에서 화순으로 귀촌한 뒤였다. 원래는 인생의 임간기(林間期)를 시작하기 위한 낙향이었다. 임간기는 인도 귀족계급인 브라만이 인생 중에 생의 후반부에 모든 짐을 놓아버리고 자연에 귀의해 사는 전통이다. 



    “불가에 ‘눈앞이 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골로 내려왔더니 제가 작가로서 쓸 내용이 눈앞에 널려 있는 겁니다. 산방을 나서면 임진왜란 때 분연히 일어섰던 백성들의 충절과 애환을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어요. 또 선비 조광조가 묻혀 있던 초분터가 인근에 있어 소설 ‘하늘의 도’(‘나는 조선의 선비다’로 개정) 모티프를 얻었습니다. ‘다산의 사랑’도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귀향은 소설가인 제게 축복과 행운을 가져다 준 셈이지요.” 

    작가가 터 잡고 있는 환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건가요. 

    “어디든 작가가 낙향해서 그 지역 역사와 문화를 보면 소설 소재는 무궁무진하리라고 봐요. 모든 낙향하는 작가들이 그런 태도를 갖는다면 그야말로 또 다른 형태의 문학 르네상스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순신 정신 발현은 우리 몫

    ‘이순신의 7년’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이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7년 전쟁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2015년 1월부터 2017년 말까지 전남도청 홈페이지에 연재하면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우리 피톨 속에 있다는 이순신 정신이란 무엇인가요. 

    “저는 이순신 정신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해봅니다. 첫째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헌신(충심), 둘째 자기를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를 봉양하는 효심, 셋째 모든 사람을 공평무사하게 대하는 공심, 한국인의 흥과 끼, 멋과 낭만을 글로 드러냈던 시심(詩心). 이 네 가지 마음이 바로 이순신 정신입니다. 

    이 네 가지는 원래 한국인의 정체성을 요약하는 핵심 요소이기도 합니다. 원래 우리 민족이 갖고 있던 마음입니다. 그것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에 의해 발현됐지요. 이제 다시 그 이순신의 마음을 발현하는 것은 오늘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 점을 알리고 싶어 ‘이순신의 7년’을 집필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발현할 수 있는지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재조명이 제대로 이뤄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의 승리와 같은 겉모습뿐 아니라 그 정신에 다가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순신이라는 특출한 인물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요. 

    “이순신 장군의 성격은 원칙주의와 완벽주의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공무에 임할 때는 원칙주의입니다. 하루 일과를 들여다보면 절대 허투루 보내지 않았습니다. 본인은 타고난 무장이 아니고, 후천적 노력형 무장입니다. 22세부터 준비해서 32세에 급제했는데 매우 늦은 것이지요. 그런데 틈만 나면 활 쏘러 나갑니다. 전라좌수영 오관오포 수장들이 보고를 위해 동헌으로 들어오면 무조건 활터로 데려갑니다. 그런 습사(習射)에 의해 이순신 장군은 명궁수가 됩니다. ‘난중일기’에 언급된 활쏘기에서 명중률을 계산해보니 80%나 됐습니다. 바람 부는 날, 안개 낀 날, 어스름 저녁에도 활을 쐈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서 정상에 이르렀다는 것, 그래서 이순신이 더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훈련과 전투에는 완벽주의를 지켰습니다. ‘난중일기’에 보면 전투에서 왜군은 수천 명이 죽는데, 우군은 부상자가 한두 명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잘 알려진 학익진(鶴翼陣)은 오케스트라처럼 장엄해요. 적선이 앞에 있으면 우리 전선이 2열 횡대로 도열합니다. 1열이 함포로 사격하고, 포신이 뜨거워지면 다시 2열이 나가서 사격합니다. 또 우리 배는 바닥이 평평해서 그 자리에서 180도 돌 수 있습니다. 이쪽 함포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돌아서 반대쪽 함포로 사격합니다. 함포사격에 유리한 배인 거지요. 일본배는 속도를 높이기 위해 바닥을 뾰족하게 만들어서 배를 돌리려면 크게 우회해야 합니다. 함포사격으로 상대가 약해지면 포위해서 압박합니다. 상상만 해도 멋있잖아요?”

    눈물 많고 감수성 예민한 인간

    정찬주 작가가 2016년 10월 전남도청에서 이낙연 총리(당시 도지사) 등 공직자와 도민이 참석한 가운데 북콘서트를 열었다. [정찬주 제공]

    정찬주 작가가 2016년 10월 전남도청에서 이낙연 총리(당시 도지사) 등 공직자와 도민이 참석한 가운데 북콘서트를 열었다. [정찬주 제공]

    이순신 장군이 눈물 많고 감수성 예민한 선비였다고요.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 흘리는 장면이 ‘난중일기’에도 수십 번 나옵니다. 어머니뿐 아니라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떠올리면서도 눈물을 흘립니다. 하급관리가 상을 당하면 문상을 꼭 갔고, 수졸이 복귀하면 불러다 막걸리를 같이 마셨어요. 여수 향토지에 보면 이순신이 막걸리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민중과 지나치게 밀착돼서 공무를 보지 않았나 하는 시각도 있는데, 사실은 토호들과도 잘 지냈습니다. 그래서 수군을 확보할 때 토호들이 노비를 많이 보내줘서 큰 도움을 받았지요.” 

    소설을 쓰면서 사실관계를 바로잡은 것들이 있는지요. 

    “당파(撞破)전술이라는 게 있는데, 우리 배가 왜군 배와 부딪쳐 격파하는 전술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취재해보니 배끼리 부딪치는 전술은 성립될 수 없고, 바다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라고 합니다. 외관이 쇠로 된 배와 나무로 만든 배가 부딪쳐도 물의 부력 때문에 양쪽 다 부서집니다. 당파전술은 가까이 가서 함포사격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술입니다. 그리고 거북선 용두와 용목이 직각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건 있을 수 없습니다. 용두에서 지자포, 현자포를 쐈다고 했거든요. 그게 가능하려면 용머리와 용목이 일직선이어야 합니다. 세종문화회관 지하 1층에 있는 거북선이나 여수에 복원된 거북선도 그 모양이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왜란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 담겨 있는지요. 

    “임진왜란과 관련된 책이나 기록을 보면 알게 모르게 식민주의 사관이 들어 있고, 패배주의 그늘이 짙습니다. 보통 부산진성 동래성이 무너지면서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양을 공격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어요. 성민과 관군은 최후의 1인까지 분투하며 싸웠어요. 조선인의 혼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왜군들이 동래성 송상헌 부사에게는 조선충신지묘라고 묘비까지 써줬지요. 부산에서도 패배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다대진(다대포)성 전투에서는 왜군과 맞서 최초로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임진왜란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비주류가 나라를 구한 전쟁이었습니다. 여수 수사라는 건 변방의 장수잖아요? 이순신 장군뿐 아니라 재야 선비나 노비, 승려, 장군 등 큰 공을 세운 이들도 비주류였으니까요.”

    역사와 허구, 매력적인 경계

    임진왜란 당시 조정은 국가 위기보다 당파 싸움에 혈안이 돼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당파 싸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의 원인을 당파 싸움으로만 돌리는 것은 식민사학의 영향입니다. 조선이 통치할 능력이 없었다는 식으로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이거든요. 사실 전쟁 전에 일본에 갔다 온 수신사들은 동인과 서인 구분하지 않고 왜군이 침략할 것 같다고 선조에게 보고했습니다. 동인인 김성일만 왜군이 곧 올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과장이라고 했지요.” 

    고증은 어느 정도 철저했나요. 

    “기본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따랐습니다. 그다음에 본 것이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입니다. 자기 주관이 아니고 옛날 사료를 백과사전식으로 따온 책이라 매우 흥미롭습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현장도 면밀하게 취재했는지요. 

    “목포에서 한산도까지 배를 타고 가면서 바다의 수심을 다 확인해봤습니다. 한산도대첩 당시 왜군이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해협인 견내량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양쪽에서 포위해 싸울 수 있는데, 왜 한산도로 유인해서 싸웠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수심 때문이었던 겁니다. 견내량은 얕은 곳 수심이 4m밖에 안 돼요. 한산도 앞바다는 전체적으로 13m이고요. 거북선은 물에 잠기는 부분이 4m30cm입니다. 수심이 깊은 곳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인 부분이 소설에서는 어떻게 섞여 있는지요. 

    “역사소설에선 허구라고 해도 뿌리는 팩트에 닿아 있어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게요. 이순신 장군이 1592년 2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두 달 전 고흥을 순시합니다. 고흥은 전략적으로 전라좌수영의 절반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입니다. 전투 태세나 군량미, 수군들의 훈련 등을 점검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때 말을 관리하는 관목관과 술자리가 벌어지는데, 순천부사가 기생 세 명을 데리고 옵니다. 난중일기에는 거기까지 나와 있어요. 그런데 저는 기생 세 명의 이름을 지어주고, 또 기생 한 명이 이순신을 좋아해서 연정이 싹트는 상상을 했어요. 이순신이 기녀에게 주는 한시(漢詩)도 직접 지었어요. 이순신의 낭만, 기녀도 허투루 대하지 않는 인간미 등을 드러내고 싶었지요.”

    1년간 철저한 준비 과정 높이 평가해야

    소설 1권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인 1591년 가을, 거대한 전쟁을 예고하듯 심란한 가을 태풍 묘사로 시작된다. ‘거친 바닷바람이 북봉 산자락에 자리한 전라좌수영 영내를 사납게 할퀴었다… 객사 뜰에는 간밤에 부러진 동백나무 가지들이 퍼렇게 질린 채 나뒹굴었다.’ 

    “전쟁 전 1년간 철저한 준비 과정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관내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비밀리에 건조한 거북선 함포사격 훈련을 마친 게 전쟁 이틀 전인 1592년 4월 13일이었습니다. 4월 15일에 왜군 90척이 부산 절영도에 나타납니다. 기가 막히잖아요. 이틀 전에 모든 준비가 끝난 겁니다. 그런데 이순신이 더 뛰어난 건 뭐냐 하면 기존 선단으로도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1차 옥포해전에는 거북선을 대동하지 않습니다. 왜군에게 거북선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으려고요. 그러다 2차 사천포해전부터는 거북선으로 적진을 휘젓고 다니며 왜군을 혼비백산케 했어요.” 

    우리가 다 아는 얘기 같지만, 거북선 건조는 새로운 혁신으로 창안된 건데요. 그것이 어떤 역사와 시간과 재능과 노력이 쌓여 탄생했는지 궁금합니다. 

    “거북선이 나오기 전에도 귀선(龜船)이라는 낱말은 있었습니다. 그 형태는 전해지지 않았고요. 거북은 용왕, 해신을 상징해요. 바다의 태풍을 진압하는 해신의 역할을 하니 배에 귀자가 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형태로 나타난 것은 이순신 때지요.” 

    책에는 이순신 장군이 판옥선 성능 개선을 고민하던 차에 군관 나대용이 ‘전선을 맹글라믄 돌거북 모냥을 참고허라고’ 하는 스님의 말을 전한다. 

    “그게 실제라고 봅니다. 무과 급제자인 나대용이 고향에 있을 때부터 전선 만드는 취미가 있었어요. 그러자 이순신은 없던 자리를 만들어 나대용을 전선감조군관에 임명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스스로 총연출을 했지만, 감독은 나대용에게 맡깁니다. 이순신은 목숨을 걸고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조정에 알리지 않고 전라감사의 묵인하에 비밀리에 건조했기 때문에 들통이 났다면 당장 의금부에 갇힐 수 있었지요.”

    민주적 리더십

    이순신 장군은 어떤 리더십을 갖고 있었나요. 

    “민주적 리더십이었지요. 왜군이 침략했을 때 원균이 이영남 군관을 보내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때가 4월 19일이었는데, 군사를 보낸 건 5월 4일이었습니다. 그사이 녹도만호 정운이나 참좌군관 송희립 등은 참지 못하고 이순신에게 항의합니다. 경상도가 무너지면 전라도도 무너진다는 거였지요. 그런데 당시 군율에 따르면 군대가 다른 도로 갈 때는 어명을 받아야 했어요. 그건 쿠데타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부하들의 적개심이 들끓게 해서 단합된 힘으로 가야 승산이 높아진다고 봤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미륵도 사량도 거제도 전체를 면밀히 수색하면서 옥포로 이동해 5000명을 수장시킵니다.” 

    이번 소설에서 ‘충청도 사투리 쓰는 이순신’이라는 새로운 인물형을 만들어냈는데, 실제로 이순신 장군이 사투리를 썼을까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를 ‘내가 죽었다는 말을 당최 허지 말으야 혀’라고 표현한 것은 좀 어색합니다. 

    “상상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한양 건천동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까지 살긴 했지만 충청도 사투리를 썼을 겁니다. 부모와 조부도 충청 사람이었고, 집안이 어려워져 여덟 살 때 어머니 고향인 아산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서른두 살 때 무과에 급제했고, 외직으로만 돌았습니다. ‘사투리 쓰는 이순신’을 생각한 또 다른 이유는 이순신이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무장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관료는 한양으로 가면 ‘했소이까’ 같은 계급언어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예외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독자 반응은 어떠한지요. 

    “어느 대학 영상학부 교수가 찾아와서는 이순신 장군이 아산 사투리 쓰는 설정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고 해요. 만약 그런 드라마가 나오면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재미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게미’가 있는 전라도 음식과 차

    이순신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 수없이 많습니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근래에 특히 좋은 반응을 얻었고요. 그런데 이런 이순신 관련 작품들을 거의 보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을 의도적으로 안 보려 했습니다. 다른 작품의 것을 저도 모르게 그게 제 생각인 것처럼 표현할 수 있고, 제 상상력을 제약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말 단재 신채호가 쓴 ‘이순신 전기’, 동아일보에 연재된 춘원 이광수의 ‘이순신’ 두 작품을 봤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이 모두 영웅주의 사관으로 이순신을 그려냈습니다. 우리 민족이 암울할 때라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관점에서 보자면 이제는 인간 이순신을 조명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해요. 그런다고 그 위대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이 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음식과 차 등 식생활 부분이 흥미롭게 묘사돼 있다는 점이다. ‘게미(씹을수록 고소한 맛)’가 있는 전라도 음식 맛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담뿍 담겨 있다. 

    “역사 소설이 스토리 위주의 거시적 관점에서 쓰인 게 많습니다. 미시적 관점이 부족했던 거지요. 그래서 저는 복식사, 무기 체계, 전술 유형, 주거문화, 음식문화 등에 대해 공부해서 소설 곳곳에 넣어뒀습니다. 그래서 완성하는 데 좀 긴 시간이 걸렸어요. 10년 준비하고 3년 집필했습니다. 2005년 흰머리가 별로 없을 때 시작했는데 이 소설 쓰고 나니 머리가 반백이 됐어요.” 

    불교 전문가의 글답게 불교 얘기도 흥미롭다. “선이런 뭣이유?”라는 이순신의 물음에 승장인 승운은 “목숨을 던지는 수련이옵니다요. 오늘이 마지막인 듯 살기 위해서 허는 것입니다요. 그렁께 선은 중덜만 허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던지듯 사는 사람이면 다 선을 하는 사람입니다요”라고 말한다. 결국 이순신 장군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선을 행한 것이다. 이순신은 처음엔 문과 급제를 위해 공부했는데, 장인이 군수로 있는 보성에 갔다가 진로를 바꿨다. 왜구의 침탈을 받아 의지할 데 없는 백성들의 딱한 사연을 듣고 임금의 신하가 아니라 ‘지댈 디 읎는 백성덜의 신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한 잔은 바다에 부어라’

    전남 순천 송광사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과 정찬주 작가. [정찬주 제공]

    전남 순천 송광사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과 정찬주 작가. [정찬주 제공]

    작가가 자연의 품안에서 살고 있어 그럴까. 전쟁을 다룬 작품이지만 그의 소설 안에는 자연의 서정이 넘친다. ‘산자락 너머의 어두운 하늘은 초승달을 막 잉태하고 있었다.’ ‘찔레꽃잎들이 흰나비처럼 너울너울 팔랑거리며 날았다.’ 같은 표현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극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인간미도 책을 놓지 않게 하는 요소들이다. 

    “주로 이순신 장군의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자연을 활용했습니다. 가령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송희립과 술 마시면서 ‘한 잔은 바다에 부어라’라고 합니다. 송희립이 ‘누구에게 주는 술입니까’라고 하자 ‘아산에 있는 아내에게 한 잔을 권하고 싶다’고 합니다. 스위스에 있는 한 동포가 그 구절을 보며 매우 인상적이라고 하더군요.” 

    아쉽게도 ‘이순신의 7년’이 아직 베스트셀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출판사는 손익분기점을 이미 넘겼다고 합니다. 인세도 많이 받았고요.” 

    지금 여기와 수백 년 떨어진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 있어 할까 하는 우려는 없었는지요. 

    “이 소설이 전남도 홈페이지에 연재될 때 댓글 2300개가 붙었습니다. 그 글을 쓰신 분들과 함께했다는 생각에 외로움도 없었습니다. 강원도에 사시는 어떤 분은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데 사투리가 정겹게 나오는 연재소설을 보며 힐링되는 기분을 느꼈다고도 했어요. 

    둘째는 역사서를 쓰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기 때문에, 깨어 있는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어느 때가 되면 제 책을 접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난 독자에게 작가로서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기다림이 있을지언정 당장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저의 집필 활동을 하늘이, 땅이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요.”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정씨는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교 교사로 활동했다. 샘터사 편집자로도 근무했던 작가는 법정 스님의 책을 10여 권 만드는 게 계기가 돼 ‘재가제자’가 됐으며,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받았다. ‘산은 산 물은 물’ ‘다불’ ‘천강에 비친 달’ 등 장편소설뿐 아니라 ‘암자로 가는 길’ ‘정찬주의 다인기행’ 등 수많은 산문집을 썼다. 행원문학상, 동국문학상, 화쟁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작가로서 향후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요. 

    “4월 중순 법정 스님의 잘 알려지지 않은 가르침과 일화 등을 담은 ‘법정 스님의 뒷모습’을 펴냅니다. 법정 스님 관련 세 번째 저작물입니다. 그리고 인터넷 매체 미디어붓다에 ‘따뜻한 슬픔’을 연재하고 있는데, 독일어로 출판될 예정입니다. 몇 년 후에는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격상시킨 인도 아소카 대왕에 관한 소설을 쓸 계획입니다.

    방문객 얘기 들어주는 소설가의 귀

    세상 사람들이 이불재(耳佛齋)를 찾아오면 얘기 들어주고 맑고 향기로운 차 한 잔 따라주는 것도 제 일 같아요. 이불재라는 당호를 처음 지을 때는 물소리 바람소리 듣고 귀를 씻어서 부처의 진리를 이루겠다고 했는데, 요즘엔 찾아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이불재가 된 것 같습니다.” 

    정씨는 새벽 세 시에 잠에서 깨어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잡다한 일을 처리하거나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불재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평범한 독자에서부터 정치인 종교인까지 다양하다. 수많은 방문객 가운데 그는 부산 성베네딕도수녀원 이해인 수녀와의 대화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수녀님이 암투병 중에 저를 찾아오신 적이 있는데 ‘투병하느라 힘드시지요’라고 했더니 ‘전 투병이란 말 싫어해요. 병과 싸우지 않고요. 불편한 손님과 동거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시더군요. 정말 훌륭한 성직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6년 대선을 준비하던 중 정씨의 이불재 부근 보성을 들른 적이 있다. 그때 정씨는 자신이 쓴 법정스님 일대기인 ‘소설 무소유’와 ‘이순신의 7년’ 1, 2권을 건넸다. 이 일화를 정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메모해뒀다. 

    ‘초심이 흔들릴 때는 ‘소설 무소유’를 보시고, 백성의 마음을 알고 싶으실 때는 ‘이순신의 7년’을 읽어보십시오, 라고 말씀드렸는데 지금도 대통령께서 정확하게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대선 2개월 전쯤 후보님께서 내게 전화를 주셨을 때 그날 아침의 장면을 생생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보석

    정씨는 또 문재인 후보 캠프 관계자가 들렀을 때 서남해안 이순신호국관광벨트안(案)을 제안해서 100대 공약으로 채택되도록 한 숨은 조력자다. 당시 캠프 관계자가 “호남 사람들이 문재인 후보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데, 가슴을 열 수 있는 그런 뭔가가 없겠습니까”라고 묻자 정씨는 “이순신 장군을 연구하다 보니 여수 순천 보성 고흥 해남 목포 등 서남해안에 이순신의 호국 얼이 스며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전남 인구의 70%가 이곳에 살고 있으니 서남해안 호국관광벨트를 만들어서 관광자원화·안보교육장화하고 한국인의 피톨 속에 들어 있는 이순신 장군의 정신이 발현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라고 조언한 것이다. 결국 대선 이후 이 안은 100대 국정과제로 확정돼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우리 안에 보석 같은 이순신 정신이 있음에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작가의 말은 울림이 있다. 마침 국가적 사업도 뒷받침되고 있고. 어쨌거나 봄날이다. 요동치는 국제 정세나 한반도 평화, 그리고 나의 고민. 다시 한번 이순신 장군에게 기대를 걸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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