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행, 최신형, 핫딜 등을 내세운 소비만능주의에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노(NO) 쇼핑을 실천하는 사람이 최근 늘고 있다. 무조건 안 사는 것은 아니다. 시기를 정하고, 품목을 정하고, 약간의 예외를 두면서 천천히 현명하게 소비 습관을 바꾼다. 노쇼핑족들은 말한다. 많이 사야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하게 소비해야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달라진 집안 풍경은 또 있다. 거실과 베란다, 부엌, 욕실 수납장에 빈 공간이 생겼다. 전과 같은 집인데 신기하게도 집 안이 훨씬 넓어 보인다.
“초등학생 딸이 친구네 넓은 집을 부러워하며 “이사 가자”고 노래하더니, 요즘엔 그런 말 안 해요. 네 식구가 살기엔 20평대 아파트가 비좁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여유 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서미영 씨)
맞벌이를 하는 윤세빈(30·여) 씨는 올 1월부터 두 달간 ‘대형마트 노 쇼핑’을 실천했다. 집에서 마트까지 꽤 멀다는 이유로, 가격이 저렴하다는 핑계로 그는 치약 하나를 사더라도 4개들이를 구매하곤 했다. 이제는 아니다. 집 근처 시장과 가게에서 필요할 때 하나씩 산다. 결과는 대만족.
‘택배순이’가 달라졌어요
“대형마트를 끊었을 뿐인데도 평소보다 신용카드 사용액이 15%가량 줄었어요. 동네 시장에선 꼭 필요한 것만 소량으로 사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절약되는 것 같아요.”이 경험을 바탕으로 윤씨 부부는 올해 말까지 ‘피규어 노 쇼핑’에 도전하기로 의기투합했다. 이들 부부의 공통된 취미는 애니메이션 피규어를 수집하는 것인데, 올해는 ‘없는 것을 자랑하는 해’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10대 때부터 유난히도 옷 사 입기를 좋아했다는 주부 강연서(46·가명) 씨는 임신과 출산으로 체중이 늘자 엉뚱한 소비 습관이 생겼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입지도 못하는 스커트와 원피스를 색깔별로 구입해 옷장에 걸어두는 것. ‘옷 안 사기’에 나선 그는 습관을 조금씩 고쳐나갔다. 강씨는 “지난 1월에는 3만 원대 운동복 한 벌만 샀고, 2월엔 단 한 벌의 옷도 새로 사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매달 책값으로 10만 원씩 지출하던 주부 김선미(35) 씨는 2년 전부터 ‘책 노 쇼핑’을 실천하고 있다. 집 안에 쌓인 책은 중고로 내다 팔았다. 대신 그는 집 근처 구립도서관에서, 초등학생 아들은 학교 도서실에서 책을 빌려 읽는다.
“아이가 학교 도서실에서 운영하는 책 읽기 프로그램을 좋아하더라고요. 거기 참여하면서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요. 저도 전보다 책을 더 열심히 읽습니다. 도서 대여 기간을 지켜야 하니까요(웃음).”
노 쇼핑이란 새로운 물건을 사지 않고, 물건의 수를 늘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절제만을 강조하는 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불필요한 것은 거둬내고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함으로써 삶의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는 생활양식이다. 이러한 점에서 노 쇼핑은 미니멀 라이프와 결을 같이한다. 미니멀 라이프는 2013년 책 ‘두 남자의 미니멀 라이프’(책읽는수요일) 출간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 유행처럼 번져나간 트렌드다.
시민운동가 헬렌 니어링은 저서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보리, 1997)에서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비 창출에 사활을 거는 현대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여유를 주지 않는다.
‘노 쇼핑족’은 이런 현실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노 쇼핑을 실천해보면 주어진 예산 안에서 내가 어떻게 돈을 써야 행복한지를 알게 된다”고 말한다. 노 쇼핑을 통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소비 습관을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쇼핑에 탐닉했던 ‘진짜 이유’
화장품 노 쇼핑 중인 임성은 씨의 간결한 화장대(왼쪽)와 옷 노 쇼핑 중인 강연서(가명) 씨의 행거. 즐겨 입는 옷만 따로 모아놨다. [임성은 제공]
서씨가 인터넷 쇼핑에 빠진 것은 2015년 무렵. 인터넷에서 우연히 ‘믹서 파격 특가’ 광고를 보았다. 마침 믹서를 장만하려던 참이었다. 이날 정가 13만 원짜리 믹서를 3만 원에 사고 믹서 택배가 올 때까지 그는 자아도취에 빠졌다. ‘득템’의 기쁨에 취한 그는 이후 아침에 눈뜨자마자 인터넷 쇼핑몰 이곳저곳을 돌며 ‘핫딜(Hot Deal)’을 뒤졌다.
“믹서, 식품건조기, 요구르트 제조기, 각종 그릇과 식기…. 집안에 쟁여놓고 쓰지 않는 물건 천지더라고요. 그것들을 처분하면서 새로 산 물건이 내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엉뚱한 물건에 돈과 시간을 쏟으면 삶이 공허해질 수 있다는 것도요.”
‘마트 노 쇼핑’ 중인 윤세빈 씨 부부는 장 보는 시간이 줄어 주말에 여유가 생기자 배드민턴을 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주말 시간이 남아 여가를 알차게 보낼 방법을 궁리 중이다. 윤 씨는 “노 쇼핑을 실천한 뒤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버는 대로 쓰기 때문에 없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돈을 덜 쓰면 그만큼 돈 걱정이 줄어들 텐데, 그걸 잊고 살았어요. 이제는 현명하게 소비하려고 합니다. 꼭 필요한 물건만 사서 알차게 잘 쓰는 게 목표예요. 이렇게 마음가짐을 바꾸니 노후 걱정도 줄었어요. 저축 여력이 늘어서만은 아니고, 적은 것으로도 충분히 잘 사는 방법을 터득했으니까요.”
경제협동조합 푸른살림 박미정 대표는 저서 ‘적정 소비 노트’에서 “왜 돈을 쓰는데도 불행한지를 생각해보면 심리 문제와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옷 노 쇼핑’을 실천 중인 강연서 씨 역시 자신의 옷 욕심에 대해 “심리적 결핍에 그 답이 있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사업하시는 아버지 덕에 부유했거든요. 꽤 고가의 아동복 브랜드 원피스를 입고 학교에 가서는 공주가 된 것처럼 으쓱한 기분을 느끼곤 했어요. 그러다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서 비싼 옷은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됐는데, 이후로 옷 사는 데 집착했던 것 같아요. 직장인이 된 다음에는 월급을 받으면 옷 사 입기 바빴지요.”
이제 강씨는 친구들에게 “패셔너블한 옷이 사람을 빛나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깨끗하고 단정한 옷, 밝은 표정, 바른 자세만으로도 사람이 충분히 빛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옷을 마구 사들이던 때보다 지금 마음이 더 편안하고 풍요롭다고 한다.
김선미 씨는 책 노 쇼핑을 개시한 후 집 근처 도서관을 즐겨 이용한다. [김선미 제공]
“‘아이에게 책 읽는 즐거움을 알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그보다는 책을 사는 그 순간만큼은 집에 틀어박힌 아줌마가 아니라 저명한 지식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드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러한 허영심 때문에 책 사던 일을 그만두고 나니 한결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노 쇼핑족들의 활약은 미니멀 라이프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노 쇼핑 진행 경과를 보고하거나, 실천 노하우를 공유한다. 노 쇼핑 도전자들이 늘면서 노 쇼핑 유형과 기간, 목표가 다양해지는 추세다.
쇼핑 앱부터 삭제
우선 노 쇼핑의 ‘시작’은 스마트폰에 설치한 소셜커머스나 오픈마켓 애플리케이션을 삭제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아예 해당 사이트에서 회원 탈퇴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언젠가 필요할 것을 염두에 두고 지금 싸니까 사두는’ 소비 행태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무조건 안 사기가 아니라, ‘숨통은 틔워주는’ 노 쇼핑 전략도 있다. ‘화장품 노 쇼핑’ 중인 화장품 마니아 임성은(29·여) 씨는 신상품이 쏟아지는 봄 시즌에는 ‘세일 기간 하루만 품목별로 하나씩’ 사기로 했다.
“카페 회원들에 따르면 쇼핑 욕구를 무작정 참다 보면 금단현상처럼 폭풍 소비로 연결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예전처럼 많이 사는 자신으로 돌아가 자책할 바에야 숨통을 틔워주는 게 낫다고요. 이 봄만 지나면 완전 노 쇼핑에 다시 도전할 거예요.”
‘옷 노 쇼핑’ 중인 강씨도 요즘 화려한 패턴이 수놓인 봄옷을 보며 ‘인생템’을 건지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불쑥 치솟는다. 이럴 때 그는 인터넷 쇼핑에서 눈여겨본 옷을 염두에 두고 집에 있는 옷들로 비슷하게 코디해 사진을 찍는다. ‘나는 비슷한 옷을 이미 갖고 있다’는 일종의 셀프 세뇌(?)다. ‘극약 처방’으로 옷장을 정리하기도 한다. 충동 구매해 한 번도 안 입은 옷을 보고 만지면서 쇼핑 욕구를 참는 것이다.
한 달 단위로 노 쇼핑을 실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독서, 명상, 산책, 운동, 봉사활동 등 돈이 들지 않는 여가 생활을 하면 쇼핑 금단현상을 한결 쉽게 이겨낼 수 있다. 그래도 쇼핑 욕구가 생길 땐 그 물건을 사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돈 등 기회비용을 따져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어느 정도 마음에 들어서’ ‘가격이 저렴해서’가 아니라 ‘100% 마음에 들 때’ 물건을 사는 습관을 기르도록 한다. 물건 구매 시점을 일주일간 유예하는 것도 방법이다. 네이버 카페 ‘미니멀 라이프’ 회원 ‘탄테르트’는 “노 쇼핑에 성공하려면 스스로에게 즉각적인 만족감을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쉽게 구매하지 않는 습관만 가져도 순간적인 쇼핑 욕구를 다스릴 수 있다”고 귀띔한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 노 쇼핑에 임하는 각오와 자기반성을 남기는 것도 좋은 팁이 된다. 사람들에게 격려 댓글을 받으며 느슨해지는 자신을 다잡을 수 있다.
탄테르트는 “노 쇼핑 실천 전에 반드시 가족의 양해를 구하라”고도 조언한다. 노 쇼핑으로 가족이 불편을 겪으면 서로 지치게 되기 때문. 가족과 함께 노 쇼핑에 도전할 때는 가계의 기존 수입 및 지출을 정확하게 파악한다. 쇼핑 기준도 분명하게 세우고,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만 쇼핑하기로 하는 등의 규칙을 미리 정하는 것도 노 쇼핑 실패를 막는 비법이다.
삶의 가치관 재정립하는 ‘계기’
노쇼핑족들은 그러나 “단순히 돈을 아끼기 위한 목적으로 노 쇼핑에 도전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에서 자취 생활을 하는 20대 직장인 강민혁 씨는 그러한 생각에 노 쇼핑에 나섰다가 지출을 줄이기는커녕 스트레스만 받았다고 한다. 쇼핑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은 오히려 그를 인터넷 쇼핑몰에 붙잡아두었다. 그는 “퇴근 후 집에서 두세 시간씩 장바구니에 물건을 넣다 빼기를 반복하곤 했다”며 “그저 지출 안 하기에 집중할 게 아니라, 삶의 가치관을 재정립한다는 생각으로 노 쇼핑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책 노 쇼핑’ 중인 김선미 씨 역시 “식이 조절 다이어트가 무작정 굶는 다이어트보다 더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라며 “노 쇼핑은 단순히 물건 사지 않기 운동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양식에 맞는 소비 습관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