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12년(1736) 11월 28일, 봉조하(奉朝賀) 민진원이 세상을 떠났다. 민진원은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의 오빠이자 노론의 영수로서, 정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그가 죽자 영조는 애도하는 뜻을 담아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는데, 그 내용이 그의 부음 기사인 졸기(卒記)에 기록되었다. 그중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봉조하 민진원은 고락을 함께한 신하로, 고집이 세기는 했으나 일편단심으로 나라를 위했다. 그렇기에 내가 시종일관 그를 소홀하지 않게 대우했고, 몇 년간 고심하면서 두 봉조하를 화해시키려 한 마음이 깊었던 것이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특이하게도 ‘고집이 셌다’는 점을 부각했다. ‘두 봉조하를 화해시키려 했다’는 언급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두 봉조하는 민진원과 이광좌(李光佐)다. 두 사람은 각각 노론과 소론의 영수로서 중요한 국면마다 치열하게 맞붙었다. 영조는 두 사람을 화해시켜서 노론과 소론의 화합을 도모하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니 여기서 말한 고심 자체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 고심을 왜 굳이 민진원의 죽음을 애도하는 와중에 언급했느냐는 점이다. 이 고심은 애도의 대상인 민진원의 노력과 업적이 아니라, 영조의 노력인데 말이다.
민진원은 노론 강경파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닌, 노론 영수로서의 활동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매우 민감한 부분이다. 그리고 영조의 비망기는 노론 측의 의구심과 반발을 살 수 있는 내용이었다. 영조도 그러한 점을 의식했는지, 며칠 후인 12월 1일에 자신의 의도에 대해 재차 설명했다.
전에 내린 하교에서 나의 마음을 다 말하였다. 고집이 세다는 말을 이제 와서 꼭 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그러하다는 것을 내가 마음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거짓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일편단심으로 나라를 위했다는 말로 마무리한 것 또한 나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다. …… 전에 두 봉조하를 함께 거론하여 유시(諭示)한 것에 대해서는 분명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모두 넌더리를 내겠지만, 같은 날 함께 벼슬을 그만두게 한 것은 실로 내가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는 고심에서 한 일이다. 두 사람의 자손들이 이런 나의 뜻을 안다면, 결코 다시는 감히 미워하고 방해하는 짓을 일삼지 못할 것이다. 나의 이런 뜻을 깨치지 못한다면 이는 임금을 무시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실로 아비도 무시하는 것이다. <영조실록 12년 12월 1일>
영조가 추구한 탕평 정국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두 당파의 영수인 민진원과 이광좌의 협조가 꼭 필요했다. 이광좌는 소론 내에서 비교적 온건파로 영조의 탕평책에 동조하는 입장이었지만, 민진원은 워낙 소론을 적대시했고 탕평책에 대해서도 격렬하게 반대했다. 결국 영조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는 데 실패했고, 당쟁은 계속됐다. 영조가 보기에 민진원의 비타협적이고 강경한 성향은 정국의 향방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요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진원에 대한 평가는 고인에 대한 평가일 뿐 아니라 영조가 구상하는 탕평 정국을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영조는 민진원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동시에 이를 계기로 무분별한 당쟁을 중지하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러나 훗날의 정국이 영조가 바란 대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당쟁은 여전히 치열했고 상대 당파를 공격하는 행위도 그칠 줄 몰랐다. 이러한 대립은 사관의 논평에도 흔적을 남겼다. 민진원의 졸기에는 각기 노론과 소론의 대변인 발언 같은 두 건의 논평이 덧붙어 있다.
먼저 민진원의 졸기를 기록한 사관의 논평이다.
민진원은 성격이 고집스러운 데다 당파에 몹시 치우친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관직에 있는 동안 청렴하고 검소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영조실록 12년 11월 28일>
영조의 평가는 당대 조정의 관료들을 향한 발언이고, 사관의 평가는 훗날 실록을 펼쳐 볼 후손들을 향한 전언(傳言)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사관은 아마도 소론 측 사람이었을 것이다. 만약 이 논평이 어떤 식으로든 공개되었다면 노론 측의 탄핵이 빗발쳤을 것이다. 그러나 사초는 당대에 열람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논평도 그 당시에는 논란이 되지 않았다. 수십 년 후, 영조가 세상을 뜨고 ‘영조실록’을 편찬할 때가 되어서야 이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진다. ‘영조실록’의 편수관은 앞서 본 사관의 논평 뒤에 다음과 같은 논평을 덧붙였다.
민진원은 왕실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가학(家學)을 계승하였고,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 강직한 품격을 굳게 지켜 당대에 명망이 높았다. 신축년, 임인년의 화가 닥치자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을사년(영조 1년·1725)에 가장 먼저 정승에 임명되자 임금을 직접 뵙고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경종에게 병환이 있었다는 것을 조정 안팎에 선포하여 왕위 계승자를 정한 것이 도의에 맞는 일이었음을 밝히자고 청하였다가 반대파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정미년(1727) 이후에는 조정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결국 이광좌와 동시에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사관이 그에 대해‘고집이 세고, 당파에 치우친 것이 고질적인 문제였다’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이광좌의 당파에서 어떻게든 그를 비난하고 폄하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영조실록 12년 11월 28일>
민진원의 인품과 공적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민진원의 단점을 기록한 사관을 ‘이광좌의 무리’라며 노론의 시각에서 비판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기사에 상반되는 논평이 모두 실릴 수 있었던 배경은 ‘영조실록’의 편찬 과정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영조실록’은 정조 2년(1778)부터 5년(1781)까지 만들었는데, 노론의 김상철(金尙喆), 이휘지(李徽之), 정존겸(鄭存謙)과 소론의 서명선(徐命善) 등이 주관하였다. 정조의 노선을 따르는 시파(時派)와 그 반대인 벽파(僻派)로 갈린 노론 가운데서 김상철 등은 시파로서 극단적인 당론에 반대하였다. 소론의 서명선 역시 포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편수관들 또한 시파 계열의 노론이 중심에 있고 소론, 남인 등이 고루 분포해 있었다. 이는 정조가 탕평으로 정국을 꾸준히 이끌어간 방식이 ‘영조실록’의 편찬에도 적용된 것이라 추측된다.
정조 5년에는 영조 때 소론에 의해 편찬된 ‘경종실록’과는 별개로 노론 측의 요청에 따라 수정한 ‘경종수정실록’이 간행되었다. 이때 원본과 수정본을 모두 남기는 주묵사(朱墨史)의 전통에 따라 이미 간행된 ‘경종실록’도 남기도록 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기술하고 시비 판단은 후대의 몫으로 남긴다는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한 것이다. 이러한 전통과 원칙, 정치적 고려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우리는 역사서에서 패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실록 또한 승자의 기록일 수밖에 없지만, 여전히 큰 가치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