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호

아주 사적인 타인의 리뷰

배우 권오중이 본 영화 ‘영웅본색4’

청춘과 함께 흘러간 찬란했던 한 시대의 기억

  •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8-04-19 17:3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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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1987년, 권오중은 고 1이었다. 두 살 위 형과 함께 서울 금호동 한 극장에 갔다가 영혼을 뒤흔드는 영화를 만났다. ‘영웅본색’. 세상 멋진 남자는 다 모아놓은 듯한 작품이었다. 사실 그전까지 소년의 꿈은 성룡(청룽) 같은 액션 배우가 되는 거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쿵푸 도장에 다녔다. 그러나 ‘영웅본색’을 본 바로 그날 이후 권오중의 관심은 온통 적룡(티룽), 주윤발, 장국영에게 쏠렸다. 그들의 카리스마, 미소, 쓸쓸한 눈빛이 권오중의 마음을 내내 떠나지 않았다. 틈날 때마다 극장을 찾았고, 선택한 영화는 늘 ‘영웅본색’이었다. 같은 장면을 보고 또 봐도 좋기만 했다. 주위 친구들도 다 그랬다. 

    “제가 이 영화를 극장에서 스물다섯 번쯤 봤어요. 그때는 그게 평균이었던 것 같아요. 친구 중에 누가 ‘나는 서른 번 봤는데’ 하면 ‘아유, 졌다’ 그랬죠.”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도 ‘영웅본색’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주인공 ‘동룡’이는 이 영화를 4720번 봤다고 말하기도 한다. 극중에서 동룡을 비롯한 ‘쌍문동 5인방’은 모두 1971년생, 권오중과 동갑내기다. 

    “저는 동룡이만큼은 안 돼요. 하지만 비디오로 본 것까지 치면 서른 번은 족히 넘죠. 그때는 그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어요. 제 또래 남자애들은 거의 다 ‘영웅본색’에 미쳐 있었거든요. 중국어를 하나도 못하면서 ‘영웅본색’ 대사를 다 외우는 애도 있었고…. 이 영화를 안 보면 학교에서 대화가 안 될 정도였어요.” 

    한국에서만 그랬던 게 아니다. ‘영웅본색’은 세계 각국에 홍콩 영화 열풍을 일으켰다. 이후 ‘첩혈쌍웅’ ‘천장지구’ 등 ‘영웅본색’ 류 영화가 쏟아졌고 ‘영웅본색’ 시리즈도 계속 나왔다. 첫 편을 만든 서극(쉬커·제작), 오우삼(우위썬·연출) 콤비가 다시 뭉쳐 이듬해 선보인 ‘영웅본색2’는 전편 못지않은 인기와 화제를 모았다. 1989년엔 서극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고 ‘영웅본색3’을 내놓기도 했다. 그 후 약 20년 만에 ‘영웅본색4’라는 제목의 영화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웅본색’과 싸우는 ‘영웅본색4’  

    미리 밝혀둘 것은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이 ‘영웅본색4’일 뿐, 원제는 ‘영웅본색 2018’이라는 점이다. 전자는 기존 ‘영웅본색’ 후속편처럼 느껴진다. 반면 후자는 ‘2018년판’으로 새로 만든 ‘영웅본색’이라는 인상을 준다. 후자가 맞다. ‘영웅본색4’는 ‘영웅본색3’ 다음 이야기가 아니라 1편을 각색한 영화다. 원작의 제목과 주요 설정을 차용했을 뿐 배우·감독·제작자도 전부 바뀌었다. ‘북경문화’ 등 중국 투자사가 자금을 대고, ‘베이징필름아카데미’를 졸업한 딩성(丁晟) 감독이 연출했으며, 왕다루·왕카이·마톈위 등 젊은 중국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의 주요 배경 또한 중국 반환 이전의 홍콩이 아니라 현재의 칭다오(靑島)다. 권오중은 이 시도에 대해 “정말 용감하다”고 평했다. 

    “‘영웅본색’이 보통 영화가 아니잖아요.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갖고 있고, 많은 이의 뇌리에 각인된 명장면도 많고…. 그 작품을 리메이크하는 건 잘해야 본전, 잘못하면 엄청난 비판만 받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죠. 이 영화 제작진이 ‘영웅본색’ 30주년을 기념해 기꺼이 그 위험을 무릅썼다는 데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어쩌면 이 정도가 권오중이 ‘영웅본색4’에 보낸 찬사의 전부였다. 그의 말처럼 ‘영웅본색4’는 필연적으로 30년 전의 ‘영웅본색’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우삼의 ‘영웅본색’은 권오중의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던 시절, 그의 삶 전체를 뒤흔들 만큼의 충격과 감동을 준 작품이다. ‘영웅본색4’가 그 후광을 넘어서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 아닐까. 

    권오중은 말했다. “‘영웅본색4’를 보는 내내 1편의 장면 장면이 떠올랐다”고. ‘저 부분을 왜 저렇게 찍었을까’ ‘주윤발은 그때 저렇게 하지 않았는데…’ 같은 생각이 계속 났다고 말이다. 그래서 ‘영웅본색4’에서 출발한 그와의 인터뷰는 1987년의 ‘영웅본색’ 이야기로, 나아가 권오중을 포함한 많은 이가 홍콩 영화를 사랑했던 ‘그때 그 시절’에 대한 추억으로 연이어 흘러갔다.  

      주윤발이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  

     ‘영웅본색’이 뭐가 그리 좋았나. 

    “1987년 그때 말인가. 그렇게 물으면 할 말이 너무 많다. 다 좋았으니까. 그때까지 내가 본 홍콩 영화는 성룡, 홍금보(훙진바오) 주연의 무술 영화가 전부였다. ‘영웅본색’은 그것들과 완전히 달랐다. 진짜 멋진 남자들이 롱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걷고, 라이터 가스를 입으로 빨아 마시고…. 범죄자들이긴 하지만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충격적으로 멋있어서 정신을 못 차렸다.” 

    스토리는 어땠나. 

    “돌아보면 그전에는 영웅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영웅이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적룡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고, 심지어 죽어가는 순간에조차 장국영을 살려내려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는 주윤발. 그는 내가 스크린에서 본 첫 영웅이었다. 요즘은 ‘어벤저스’ 때문에 영웅이 너무 흔해졌다. 할리우드 영웅들이 ‘인류’ ‘지구’ 이런 걸 구하러 뛰어다니니까 젊은 사람들이 보기엔 친구 하나 살리는 게 무슨 영웅적 행동이냐 싶을 수도 있겠다. 우리 때는 안 그랬다. ‘저게 남자구나’ ‘진짜 영웅이구나’ 생각했고, 나도 어른이 되면 그렇게 살고 싶었다.” 

    권오중이 말했듯 ‘영웅본색’은 그 시절 소년들에게 ‘영웅’의 상(像)을 제시한 영화였다. 위조화폐를 만드는 범죄 조직의 중간 보스 적룡·주윤발, 그리고 적룡의 동생이자 경찰인 장국영이 주인공이다. 부하의 배신으로 적룡이 감옥에 갇힌 사이, 주윤발은 그의 복수를 대신하다 다리에 총상을 입고 장애인이 된다. 형이 평범한 사업가인 줄 알았던 장국영은 뒤늦게 형의 실체를 알고 분노와 배신감에 휩싸인다. 적룡은 출소 후 동생을 위해 새로운 삶을 살고자 노력하지만 과거의 그림자가 계속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자신을 이용하려는 조직에 맞서 적룡이 마지막 싸움을 벌일 때, 주윤발은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다 끝내 목숨을 잃는다. 

    ‘영웅본색4’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들이 저지르는 범죄 종류가 위폐 제작에서 마약 밀매로 바뀌고, 이들의 활동 무대가 홍콩·대만에서 중국·일본으로 달라졌을 뿐이다. 1편의 적룡, 주윤발, 장국영의 배역은 각각 배우 왕카이, 왕다루, 마톈위에게 돌아갔다.  

      ‘영웅본색’이라는 탈출구  

    어린 시절 성룡 영화를 보며 액션 배우의 꿈을 키운 권오중은 ‘영웅본색’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조영철 기자]

    어린 시절 성룡 영화를 보며 액션 배우의 꿈을 키운 권오중은 ‘영웅본색’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조영철 기자]

     ‘영웅본색4’를 보면서 ‘영웅본색’ 원작 생각이 많이 났나.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이번 영화는 배우들이 모두 빼어난 미소년이라 ‘남자’ 느낌이 안 나는 게 가장 아쉽다. 원래 ‘영웅본색’은 성숙한 남자 영화였다. 주인공들의 고급 정장과 롱코트, 선글라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어마어마했다. 지금도 고2 수학여행을 앞두고 친구들이 전부 롱코트를 사러 동대문시장으로 달려갔던 게 기억난다. 누가 더 긴 코트를 입는지가 그때는 멋의 척도였다. 어떻게든 발목까지 오는 코트를 찾아내야 했다. 그 시절 남자애들이 하나같이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걸어 다닌 건 다 ‘영웅본색’ 때문이다. 그런데 ‘영웅본색4’ 주인공들은 캐주얼 점퍼를 입은 채 뛰어다니고, 막대사탕을 입에 물더라. ‘영웅본색’의 새로운 해석인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진짜 멋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쉬웠다.” 

    담배가 안 나오는 것도 과거 ‘영웅본색’과 달라진 점으로 보였다. 

    “그러게, 주인공 중 단 한 명도 담배를 안 피우더라. 원래 ‘영웅본색’에서는 장국영마저 담배를 피워 물었는데 말이다. 담배는 분명 몸에 나쁘다. 하지만 ‘영웅본색’ 속 담배가 갖고 있던 독특한 힘이 있었다. 주윤발이 위조지폐를 태워 담뱃불을 붙이고 라이터 가스를 깊이 빨아들이던 장면은 그 시절 소년이라면 누구나 기억하지 않겠나. ‘영웅본색’을 특별하게 한 건 우울하고 비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바로 그 분위기였다.” 

    그 때문에 ‘흡연 권장 영화’라는 비판도 받긴 했다. 

    “범죄를 미화한다, 폭력을 조장한다 등 여러 지적이 많았던 걸 안다. 사실 총 쏘는 장면이 지나치게 멋있긴 했다. 그러잖아도 멋진 주윤발이 권총까지 들고 나타나니 어느 남자가 반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내 또래가 ‘영웅본색’에 빠진 건 그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사로잡았던 건 그들이 보여주는 ‘사나이들의 의리’였다. 친구를 위해서는 목숨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가르쳤다는 점에서 ‘영웅본색’은 교육 영화이기도 했다.” 

    권오중은 그 시절 야간자율학습을 빼먹고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소주를 나눠 마시며 ‘이게 사나이들의 의리지, 여자애들이 이런 거 알겠냐’고 으스대던 일을 이야기하다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보면 철없던 기억이지만, ‘영웅본색’을 통해 배운 우정과 의리의 소중함이 고되던 고등학교 시절 그와 친구들의 작은 탈출구가 돼준 건 분명하다고 했다. 

    고교 시절을 힘들게 보냈나. 

    “우리 학교가 꽤 규율이 셌다. 머리를 거의 빡빡 깎다시피 하고 아침 7시부터 밤 10시, 11시까지 공부만 해야 했다. 그 시절 고등학교 대부분이 그랬겠지만 매일매일 학교 가는 게 지옥 같았다. 너무 힘든 공부를 심지어 맞아가면서 해야 하니까. 우리 때는 학생 수가 무척 많았고 대학 입학 경쟁도 치열했다. 아침마다 오늘은 어느 과목 시간에 무슨 일로 맞을까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한 대도 안 맞고 집에 돌아올 때는 뭔가 허전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삶에 갑자기 ‘영웅본색’이 나타난 거다.” 

    그래서 권오중은 주말마다 극장에 갔다.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 오직 순종만 해야 했던 소년은 세상의 금기를 깨부수며 신나게 총을 쏘아대는 스크린 속 ‘무법자’를 통해 억눌린 감정을 풀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신도 그런 ‘남자’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영웅본색4’에서는 범죄자가 그리 강력해 보이지지 않더라. 경찰이 훨씬 힘이 세 보이고, 영화 마지막에 상황을 정리하는 것도 경찰이다. 

    “그것도 원작과 달라진 부분인 것 같다.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은 ‘나는 신(神)이야.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신이니까’라고 한다. 그 시절 ‘영웅본색’ 주인공은 다 그랬다. 진짜 어른, 진짜 남자, 세상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영웅본색4’ 주인공들에겐 한계가 많다. 그들이 마약 밀매 범죄자로 설정된 것도 아쉽다. 내 관점에서 보면 위조지폐 제조는 그나마 용납할 수 있는 범죄다. 하지만 마약은 아니다. 마약 파는 사람은 그를 아무리 멋있게 묘사해도 결코 동경할 수 없을 것 같다.” 

    돌아보면 ‘영웅본색’ 원작에서는 적룡을 배신한 악당조차 멋있지 않았나. 

    “정말 그랬다. ‘아성’ 역을 맡은 이자웅은 정말 근사했다. 그가 쫙 빠진 정장을 입고 부하들과 함께 걸어 나오다 다리를 저는 주윤발한테 돈을 뿌려주던 장면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건 주윤발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핏빛 복수를 정당화하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암흑세계 보스의 매력을 선명히 드러내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영웅본색’에서는 악역이 워낙 멋있었기 때문에 그에 맞서는 주윤발, 적룡이 훨씬 더 훌륭해 보이는 효과도 있었다. 그런데 ‘영웅본색4’의 악당은 외모, 옷차림부터 그냥 ‘나쁜 놈’이다. 왕카이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그의 여자 친구를 마약에 취하게 해 빼앗을 만큼 비열하기까지 하다. 아쉬웠다.” 

    영화를 보며 ‘내가 저 배역을 맡았다면 좀 다르게 연기했을 텐데’ 같은 생각은 안 했나. 

    “글쎄. 솔직히 말하면, 영화는 아쉬웠지만 배우들은 부러웠다. 어쨌든 ‘영웅본색’ 30년을 기념해 만든 작품 아닌가. 어릴 때 ‘영웅본색’을 보며 자란 세대에게는 꿈같은 프로젝트다. 그 영화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을 때 배우들이 무척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이런 작품에 캐스팅되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은, 그런 아쉬움이 있다.”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위조지폐로 담뱃불을 붙이고(왼쪽), 장국영에게 형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 ‘영웅’ 주윤발은 이런 모습으로 소년 권오중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위조지폐로 담뱃불을 붙이고(왼쪽), 장국영에게 형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 ‘영웅’ 주윤발은 이런 모습으로 소년 권오중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영웅본색4>에서 각각 주윤발과 적룡 배역을 맡은 왕다루와 왕카이(왼쪽). 이 영화에서 위아이레이는 비열한 악당 ‘창’을 연기했다.

    <영웅본색4>에서 각각 주윤발과 적룡 배역을 맡은 왕다루와 왕카이(왼쪽). 이 영화에서 위아이레이는 비열한 악당 ‘창’을 연기했다.

      “이제 내게는 저런 배역이 오지 않겠지”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지금도 ‘영웅본색’ 같은 영화에 참여해보고 싶나. 

    “물론이다. 멋있는 남자들이 같이 나와 총 쏘는 영화, 얼마나 근사한가. 총기가 금지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영화에 참여할 기회가 많지 않다. 내가 톱 배우라면 원하는 스타일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져 내 앞에 딱 오겠지만, 나는 누군가 뽑아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오랫동안 그저 속으로만 그런 영화에 대한 꿈을 품고 살았다. 딱 한 번 기회가 온 적은 있다. 한국판 ‘오션스 일레븐’ 같은 범죄 영화에 캐스팅된 것이다. 그런데 촬영을 거의 90% 마친 뒤 감독과 제작자의 불화로 영화가 뒤집혔다. 감독이 바뀌고 촬영을 아예 처음부터 새로 하는 걸로 결정이 났다. 그때 내가 그 영화를 끝내고 바로 다른 드라마에 출연하기로 약속돼 있던 상황이라, 나는 부득이 영화에서 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내 배역은 다른 배우가 맡았다.”
     
    만약 누군가 ‘영웅본색’ 같은 영화를 만들고, 권오중 씨를 캐스팅 물망에 올린다면 어떤 배역을 하고 싶나. 

    “역시 주윤발. 적룡의 복수를 결심한 뒤 권총을 잔뜩 준비해 식당 여기저기에 숨겨놓던 장면 있지 않나. 그 뒤 총격전이 시작되자 권총을 하나씩 꺼내 들어 악당을 처치해나가던 그 연기를 한번 해보고 싶다. 쏴도 쏴도 총알이 떨어지지 않는 권총, 무척 멀리 있는데도 기어이 그 총에 맞아 죽게 되는 사람들…. 지금 보면 웃음이 날 수 있지만 슬로모션으로 천천히 흐르던 그 장면들이 소년 시절 내겐 정말 로망이었다. ‘영웅본색’ 마지막 부분도 기억난다. 주윤발이 끝내 적룡을 용서하지 않는 장국영을 붙들어 강제로 적룡 쪽을 보게 한 뒤 ‘봐, 네 형이야. 형은 새 삶을 살 준비가 됐는데 넌 왜 형을 용서할 용기가 없는 거야’라고 하다 총을 맞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자기 머리에서 터진 피가 장국영의 얼굴에 뿌려지자, 그 위험한 상황에서도 장국영을 살리고자 마지막 힘을 다해 그를 밀어내던 주윤발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영웅본색’ 최고의 장면이다. 그 순간을 내 머릿속에서 얼마나 되돌려봤는지 모른다.” 

    권오중은 ‘영웅본색4’를 보면서 그 시절 주윤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던 자신을,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를 배신하지 말자며 ‘의리’를 다짐하던 그때 친구들을 다시 떠올렸다고 했다. 이제 그들은 전부 40대 후반, 분명 어른이지만 결코 영웅은 아닌 평범한 중년 남자가 됐다. ‘영웅본색4’의 풋풋한 배우들을 보며 ‘이제 내게는 저런 배역이 오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에 쓸쓸했다는 권오중처럼, 그의 친구들 또한 삶의 많은 부분을 자의 또는 타의로 포기해가고 있다. 

    “회사 들어간 친구들은 벌써 퇴직을 고민하더라고요. 이제는 동창들과 만나도 ‘남자’니 ‘의리’니 하는 얘기를 하지 않죠. 폼 나게 사는 것보다 중요한 건 우리 식구들을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해주는 거라는 것, 그러려면 참고 견뎌야 할 일도 많다는 걸 이제는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요.”  

      ‘영웅본색’ 키즈의 오늘  

      문득 권오중을 언제부턴가 영화, 드라마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더 자주 만나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났다. 그가 원했던 멋진 ‘남자’ 배역을 맡으려면 그런 제안을 거절하면서 이미지를 관리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권오중은 “배우로 일할 때 가장 행복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연기만 하며 살겠노라 고집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고 했다. 

    이날 ‘영웅본색4’를 보는 자리에는 권오중의 ‘절친’ 봉만대 감독도 함께했다. 그쪽을 바라보며 권오중은 “감독님도 그렇잖아요” 하고 말을 꺼냈다. 

    “요즘 일이 정말 많아지셨어요.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나오는 걸 보면 ‘이제 좀 안정적으로 사시겠구나’ 싶어 흐뭇하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연출도 하셔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죠. 마지막 작품을 발표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거든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감독님 꿈을 잘 아니까 ‘조만간 영화도 만들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혼자 생각하곤 해요. 우리 나이가 그런 것 같아요. 꿈이 있지만, 현실도 아는.” 

    권오중은 ‘영웅본색’ 세대들이 ‘영웅본색4’를 통해 자신처럼 스스로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고, 다시 한번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에게 ‘영웅본색4’는 바로 그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 내가 한때는 간절히 어른이 되고 싶었지’라는 걸 떠올리고, 그사이 얼마나 많은 것이 변했는지도 되돌아보고요. 그러니 남편이나 아버지가 ‘영웅본색’을 보면서 옛 생각에 잠겨 있으면 ‘아유, 유치하게 지금 뭐 하는 거야’ 하지 말고 힘껏 응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바로 그 아내, 자식들이 있어 오늘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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