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호

이문열 장편소설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제1부 - 제국에 비끼는 노을 | 10화. 또 봄은 오고

  • 이문열

    입력2018-05-13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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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1.
    길고 오랜 전화벨 소리에 깨어나 보니 그가 서재로 쓰는 사랑방이었다. 밤샘 치다꺼리를 대강 마친 뒤 식구들을 모두 집에서 내보낸 뒤에야 이부자리에 들면서 다시 내린, 남쪽 창틀 두터운 커튼을 뚫고 가는 햇살이 올올이 다발 지어 어둑한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집안이 조용해서인지, 그를 깨운 거실의 전화벨 소리가 이상하게 깊고 그윽한 여운으로 남아 자신이 아주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오래 전화를 안 받은 탓인지 그를 깨운 벨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잤나. 며칠은 푹 자고 일어난 것 같구나.”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다 보니, 바로 몇 시 간 전 아내가 갈아준 채소 주스로 요기를 삼고, 다시 이부자리로 들어갈 때까지 본 광경이 차례로 퍼뜩퍼뜩 떠올랐다. 

    먼저 아내가 네 종류의 내용이 다른 원고 묶음이 든, 핸드백이라기보다는 손가방에 가까운 갈색 가방을 들고 9시 동대구발 서울행 특급열차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이어 그해 추첨으로 도심에 있는 국립사범대부속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돼 버스로 등하교하는 큰아이가 때마침 집을 나서는 아내를 따라나선 게 대략 아침 8시쯤이었다. 이어 그가 미처 잠들기도 전에 어머니가 지난달에 갓 유치원에 들어간 둘째를 데리고 다시 집을 나갔다. 

    그때 어머니와 둘째가 마지막으로 집을 나가면서 대문을 거는 소리를 잠자리에서 아슴푸레 들었으니, 아무리 빨라도 아침 8시 반은 크게 넘지 않았을 터였다. 거실로 나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시침과 분침이 모두 11에서 12 사이에 몰려 있었다. 사흘도 못 누릴 해방감이지만 그것도 원고 마감을 했다고, 기껏해야 3시간 남짓 눈 붙였을 뿐인데도 이렇게 편안하고 푸근한 느낌으로 깨어날 수도 있구나. 



    아내가 손가방에 넣어 간 것 가운데 따로 서류 봉투를 만들어야 할 만큼 부피 많고 힘들인 원고로는 먼저 다음 달 5월부터 일일 연재를 시작할 신문소설 원고 보름치 80매 내외와 계간문예지 여름호의 ‘황제 만세’ 분재 마지막 회가 되는 350매가 있었다. 

    하나는 하루 6매씩 쪼개져 나가지만 겨우, 등단 3년차의 신인이 세칭 3대 일간지 가운데 하나에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별난 주목을 받게 될 장편 역사물이었다. 그 무렵 한창 학계의 관심을 끌던 백제의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을 배경으로 2년 정도 연재를 예정하고 있었는데 그가 받은 주목은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것이었던 성싶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등단 이듬해 새로 창간된 계간문예지에 ‘황제 만세’란 800매 남짓의 경장편 초고를 바탕으로 시작한 장편 분재가 6회 1년 반 만에 2000매가 훨씬 넘는 두꺼운 장편으로 완결되었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별난 감회가 있었다. 

    작은 원고 봉투에 따로 넣어 아내의 손가방 다른 편 주머니에 들어 있는 원고 가운데 하나는 오랜 권위를 자랑하는 어떤 월간 문예지 5월호에 보내는 단편이었다. 등단 초기 그가 부린 쓸데없는 오기로는, 긴 습작 시절 동안 그의 투고를 무시했던 문예지의 원고 청탁에는 자신이 무시당한 횟수만큼 거절한 뒤에야 응한다는 원칙 같은 게 있었다. 그 잡지사도 이전에 두 번이나 등단 추천을 구하는 그의 투고를 아무런 설명 없이 무시한 적이 있고, 그도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횟수만큼 원고 청탁을 거절했다. 그러다가 지난달에 다시 세 번째 청탁을 받자 이번에는 더 거절하지 못하고 원고를 보내게 되었다. 그것도 바쁘다는 핑계로 남은 재고 중에서 하나를 성의 없이 손질한 것이 아니라, 근래 제법 정성 들여 준비한 신작 중편을 정성껏 추고해. 

    그 밖에 후발 메이저 신문사가 새로 만들어 한창 기세 좋게 뻗어나가는 여성종합지 편집장과 어떻게 알음으로 엮여 거절할 수 없게 된 잡문 20매와 새로 생긴 대기업의 사보(社報) 책임자로 들어간 동인(同人)의 사정으로 쓰게 된 콩트 한 편이 있었다. 원래 단편 이하의 짧은 글과 마감 기한이 넉넉히 남은 원고는 등기속달 우편을 이용했고, 나머지는 매달 한 번씩 그가 서울에 올라갈 때 직접 들고 갔다. 

    그런데 신문사를 그만두고부터는 서울의 볼일과 원고 마감 날짜를 맞출 필요가 없어졌다. 거기다가 써야 할 글이 점차 늘어나면서, 각기 다른 마감 기일에 맞춰 서울까지 그 먼 길을 언제까지고 그가 직접 원고를 들고 오르락내리락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신문사를 그만둔 지 석 달째부터 원고 마감은 아내의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그날이 아내가 그 일로 나선 네 번째 서울 나들이였다. 

    특히 신문 연재 원고는 서울에 있는 신문사 문화부로 바로 보내지 않고, 삽화가에게 미리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라, 여의도 어디에 산다는 삽화가의 아파트에 직접 전해야 했다. 그 원고를 읽고 거기 맞는 삽화를 그린 뒤에 그 둘을 연재 일자에 맞게 신문사에 전하는 것은 삽화가의 몫이었다. 그 뒤 남은 원고를 원래 주어야 할 곳에 고루 나누어주고, 때에 따라서는 출판사나 잡지사에서 고료까지 거두어오기도 하는 아내는 아마도 저물녘에야 돌아올 것이고, (새로 개봉된 영화나 좋은 공연이라도 하나 보고 오게 되면 오후 9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가 가까운 종이모 댁에서 놀다가 유치원에서 둘째를 데리고 돌아오는 것도 오후 4, 5시는 되어야 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조용하고 한가로운 하루가 되겠구나. 긴 잠을 푹 자고 일어나서가 아니라 한바탕 악전고투 뒤의 휴식이라, 그 푸근한 기대가 며칠 푹 자고 난 다음의 느낌을 앞당긴 것이로구나…. 그는 그런 생각으로 느긋하게 일어나 주방으로 나갔다. 그날따라 유난히 입안이 깔깔해 잘 우린 녹차 한 잔이 생각났다.
     
    주방으로 가보니 아내가 식탁 구석 작은 다반에다 찻잔과 다관 다완 따위 다기(茶器)를 차려놓은 게 있었다. 그 곁에 지난가을 해인사 쪽으로 출장 갔다 온 문화부 기자가 얻어준 반야(般若)차와 흰 타월 천 상보까지 개켜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깨어나 찾을 것을 짐작하고 차려놓은 듯했다. 덕분에 그는 신문사 근무 때 어떻게 배워 나온 한국 전통 녹차를 별 번거로움 없이 홀로 달였다. 

    그가 제법 그득해오는 속으로 세 번째 우린 차를 마시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거실로 나가 받아보니 이제는 신문사 동료나 선후배가 아니라 지방 문단의 문우(文友)로 더 가까워진 김경수 시인이었다. 

    “아이고, 김형 오랜만이오. 그러고 보니 얼굴 대한 지 벌써 한 달 가깝게 됐네. 그날 ‘혹톨’에서는 탈 없이 돌아갔소?” 

    그가 기억나는 대로 마지막 헤어진 술집을 떠올리고 뒷일을 물어보았다. 

    “나야 칼같이 집에 들어가는 사람 아니오? 이형이나 무사히 돌아갔는지 모르겠네. 헤어질 때 하마 한잔 깝뿍 된 거 같아 보였는데. 그건 그렇고 지금 뭐하고 계시오? 신문 연재 준비는 잘돼 갑니까?” 

    “예, 그건 이럭저럭 첫 보름치 넘겼어요. 계간지 ‘황제 만세’도 이번 여름호로 손 털고. 오늘 아침 일찍 집사람이 원고 한 보따리 싸들고 서울 올라갔어요.” 

    “잘됐네요. 그럼 점심 같이 어때요?” 

    “잠을 늦게 자 좀 전에 일어난 거나 매한가지요. 라면이나 끓여 먹고 집에서 내쳐 뒹굴거나 범어시장 근처에서 얼큰한 해장국이나 먹고 대포 몇 잔 곁들일 작정이었습니다만. ‘황제 만세’ 그거, 그래 봬도 2500매짜리 탈곱니다. 책이 상하 두 권이라고요.” 

    “그럼 잘됐어요. 크게 한 건 한 셈이니, 오늘 점심은 밖에서 왜식으로 거하게 때립시다. 향촌동 어림(魚林) 알지요? 시청 가는 쪽 큰길가 왜식(倭食)집. 거기서 1시에 여기 문협(文協) 지부 젊은 패들, 점심 겸해서 되는 대로 모이기로 되어 있어요. 이형도 아직은 갈데없는 우리 지부 소속이라, 오셨으면 싶은데.” 

    “오늘 무슨 일 있습니까? 점심을 향촌동 골목에서도 비싼 왜식집씩이나. 누가 양놈 지갑이라도 주웠어요?” 

    “와보면 알 거요. 와서 후회할 일 없을 테니 너무 늦지는 마시오.”

    2.
    택시를 타고 신문사 부근을 지나다 보니 지난해 7월 말에 신문사를 그만둔 지 겨우 여덟 달 남짓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새 거리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사표를 낸 뒤로 신문사를 찾아본 게 한두 번에 지나지 않아 그 부근이 서먹해진 탓도 있지만, 그 여덟 달 그의 생활 방식이 그만큼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예상보다 일찍 전업 작가가 되는 바람에 글쓰기에 긴장하며 매달린 탓일까, 그는 스스로도 이상할 만큼 밤낮없는 글쓰기로 줄곧 집 안에 갇혀 지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서울에 다녀오는 것 말고 시내 외출조차 뜸했다. 갑자기 한 방향으로 몰려 쏟아부어진 것 같은 시간이, 그리고 등단 뒤에 처음 맞는 전일적(專一的)인 집필 환경이, 그를 이전에 없던 열심과 몰두로 글쓰기에 빠져 있게 만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대학교를 떠난 뒤로 지난 10년 남짓, 그는 어느 하루도 한 가지 일에 전일하게 매달려 보낸 적이 없다. 명색 사법시험을 보겠다는 핑계로 학교를 그만두어놓고도 3년 동안 그가 몰두한 것은 이른바 ‘백 리 길을 위한 도시락’과 ‘만 리 길을 가야 할 석 달 양식’을 함께 장만하는 일이었다. 한쪽은 법학이고 한쪽은 문학 수업이었을 터인데, 엉뚱한 것은 어느 쪽이 하루 길을 위한 도시락이고 어느 쪽이 석 달 양식인지를 그는 자주 헷갈려 했다. 

    그 뒤 대학 중퇴자로 다시 세상에 돌아와 먼저 결혼부터 한 뒤, 3년이나 늦어진 병역 의무를 치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되도록 나이 든 사병의 요령을 부림이 없이 병역의무를 다해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흠 없이 직업을 구할 수 있는 전문인으로 자신을 복구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또 다른 자아는 이전보다 더한 조급으로 아직 그 앞에 그대로 남은 ‘만 리 길을 갈 석 달치 양식’을 모으는 데 욕심을 부렸다.
     
    책은 무엇이든 포켓판 크기만 되면, 그리고 어떤 두께의 양장본이라도 적당한 분량을 떼어 접어서 속주머니에 넣을 수만 있으면, 아낌없이 해체되어 그의 통신장비 창고 기재(器材)교본 속에 갈무리되었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의 지루한 휴무며 잠 못 이루는 밤 두세 번씩 남의 불침번이나 외등(外燈)이 있는 곳 동초(動哨)를 대신 서주며 읽었는데, 아마도 그 무렵의 복무기간 35개월 중 절반은 그 무망한 읽기로 유용(流用)했을 성 싶다. 

    대구로 나와 공무원 시험 학원가에서 생업을 구하면서 지낸 3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 시절 대부분을 ‘전천후(全天候) 강사’란 별명으로 수급이 고르지 못한 고시학원 강사 인력의 빈 곳을 메워주며 보냈다. 강사 자리가 비면 어떤 과목이든 맡는 식인데, 어떤 때는 자신조차 한 번도 정식으로 응시해본 적이 없는 과목을 한 분기 과정 모두 강의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4급(뒷날 7급) 행정직이나 법원 검찰서기 시험 같은 것이 있을 때, 아주 개론적인 것이긴 하지만 행정법이나 경제원론 같은 것들을 떠맡는 경우가 그랬다. 

    또 그때 고시학원가에서는 갑자기 강사가 사라져, 학원이 다음 강사를 구할 때까지 결강을 메워주고, 수강생들의 강의료 환불 요구를 막아주는 강사를 ‘빵꾸나우시(펑크 때우기)’란 약간 비하 섞인 일본식 조어(造語)로 불렀다. 오전 강의 잘 하고 점심식사를 하러 나갔던 강사가 무엇 때문인지 머리를 깎고 돌아와 산으로 들어가겠다고 사직을 통고하고 떠나버리거나, 학원 강사 노릇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기부 공채며 고위 별정직 공무원 비정기 특채 따위를 준비하던 이가 어느 날 마침내 그 시험에 합격해 슬그머니 학원에서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경우에 대비해 요긴했다. 

    말이 빠르고 발음이 분명치 않은 데다, 수강생들의 인기를 끌만한 말주변이나 재치 있는 연출 재간도 없어 진작부터 입시학원에서 밀려나 가게 된 곳이지만, 고시학원에서 전천후 ‘빵꾸나우시’ 강사로 보낸 3년도 나중에 돌아보니 군 복무 3년에 못지않게 쓰임새 있는 세월이었다. 준비 없이 도회지로 나온 여섯 식구가 일용할 양식을 얻는 데도 부족함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쓸데없이 세월을 낭비한 것 같은 기분으로 언제나 불안한 ‘만 리 길의 석 달 양식’에도 적잖은 보탬이 되었다. 

    그 시절 그는 하루 10시간, 특강 보태면 1주일에 60시간 넘게 강의했는데, 그 태반이 자신은 한 번도 대학에서 개론 강의조차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교과목이었다. 그 바람에 그 시절 강의 시간 외의 그의 하루는 강의안과 강의 보조 서브노트 작성에 기본 교재, 전문 개론서, 수험 준비서 참조 따위만으로도 남는 게 없었다. 그런데도 별 불평 없이 그 힘든 나날을 버텨낸 것은 그게 함부로 대학을 떠나면서 헝클어버린 자신의 삶을 복구하는 데 당연히 물어야 할 페널티로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그의 의식에 흔적을 남긴 억지스러운 지적 축적과 습득은 그만큼 ‘만 리 길을 가는 석 달 양식’에 보탬이 될 수도 있는 잡학(雜學)의 외연을 넓혀주기도 했다. 

    신문사로 직장을 정하고 보낸 4년도 고단했던 내용은 비슷했다. 처음 3년은 경우에 따라서는 신문사에서 늙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은 여전히 아직은 가야 할 길로 남아 있는 듯한 ‘만 리 길’을 흘금거렸고, 그래서 여유만 생기면 그 모색과 추구는 다른 더 아득한 곳을 지향했다. 그러다가 등단 뒤 두 해를 버텨내지 못하고 결국 전업 작가의 길을 결행했다.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사직 결정이 조금은 충동적으로 이루어졌고, 예전 대학을 때려치우고 혼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길 위로 나섰을 때의 으스스함과 막막함은 있었지만, 더는 ‘가야 할 만 리 길’을 멀고 추상적인 곳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는 게 신문사를 그만둘 때의 믿음과 결의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믿음과 결의는 동시에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불안이면서도 격려가 되어 그의 지난 여덟 달을 몰아댔을 것이다. 거기에 내몰린 맹렬한 글쓰기의 충동이 지난가을에서 이 봄에 이르는 깊은 동면과도 같은 그의 칩거와 몰두의 원인임에 틀림없었다.

    어렵게 시간을 맞춰 왜식집 ‘어림’으로 가니, 점심 약속이라면서도 모인 사람은 그사이 교류가 더해져 제법 문우(文友)로 어울리게 된 비가비 동인 몇 명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부른 김경수 시인의 얼굴까지 안 보여 같은 동네에 살아 비교적 가깝게 지내는 다른 비가비 동인에게 물었다. 

    “서형, 김경수 시인은 어찌 된 거요? 나는 그가 불러 영문도 모르고 나왔는데, 김형이 아직도 안 나와 있으면 어떻게 해?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네. 왜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 점심을 먹게 된 겁니까?” 

    “이 작가, 요새 집에 틀어박혀 글만 쓴다 카디 참말로 아무것도 모리는 가베. 오늘 춘파(春坡) 선생 송별차 소장파 시인들 모예 점심 한 그륵 먹는다꼬 여다 모인 거 아인교?” 

    서 시인이 뜻밖이라는 듯 그렇게 받았다. 평소 말투에 빈정거림이 섞여 자주 시비에 엮이기도 하는데, 그날은 별로 그런 데가 없었다. 

    “춘파 선생 송별이라고요? 왜, 춘파 선생이 어딜 가는데요?” 

    “에헤이, 김경수도 이형 얼굴 보기 힘들다 카디, 참말로 세상 안 돌따(돌아다) 보고 사는 가베. 이형, 인자 마 신문기자 놨뿌랬다꼬 신문도 안 보고 방송도 안 듣는교? 춘파 선생 오늘 저녁차로 상경하믄 서울 사람이 돼가(되어서) 언제 돌아올지 모를 낀데.” 

    춘파 선생은 바로 고등학교 교과서에 헝가리 혁명 때 죽은 소녀를 참여적인 열정으로 노래한 시가 실려 있는 원로 시인이었다. 광복 전부터 시인으로 누려온 전국적인 명성 말고도, 지역 대학에서 교수를 오래 지내 적잖은 젊은 시인들에게는 은사가 되고, 그런 학연이 없는 젊은 문인들에게도 벌써 40년을 넘기는 시업(詩業)으로 스승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 대구를 고향처럼 여기며 뿌리내리고 살아온 그가 왜 갑자기 서울 사람이 되는 지에 대해서는 얼른 집히는 게 없었다. 그때 서 시인의 말투가 답답하다는 듯 강씨 성 쓰는 시인이 참견했다. 

    “알콰(알려)줄라믄 바로 알콰줘야지. 뭐 글케 쉬쉬할 일이라꼬 말을 이꾸저꾸(이리저리) 돌리쌓노? 아무리 밤낮없이 써댄다 카지만 이형도 이번에 제5공화국 새로 서고, 내일모레 새 국회 개원하는 거는 알지요? 아매(아마도) 춘파 선생님이 바로 거기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나가게 된 거를 모리게나(모르거나) 잘 기억 못하는 모양인데, 바로 그 국회 개원이 내일모레 아입니꺼?” 

    그 말을 듣자 저장은 되어 있었으나 무엇 때문인가 인출이 잘 안 되던 기억의 일단이 어렵게 인출되어 하나씩 의식 표면으로 떠올랐다. 먼저 새로 도입된 중(中)선거구제로, 지역구마다 여당 하나 야당 하나가 동반 당선이 되는데, 야당은 여럿으로 갈라져 새로 창당된 민정당이 원내 제1당이 된 일이 한 열흘 전에 있었던 국회의원 총선 개표와 함께 퍼뜩 떠올랐고, 또 그런 지역구 의석에 비례한 전국구 배정으로 전국구 의석 절반이 민정당에 배정된 일이 떠올랐다. 맞다, 춘파 선생도 민정당 전국구 명단에 들어 있었지. 그래 상당히 앞 순위였어. 유신(維新) 시절에 무슨 일인가로 오래 감옥살이를 한 송(宋) 아무개란 언론인보다는 뒤였지만. 

    “유정회(維政會)인가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나가게 됐다는 소리는 들은 것 같지만 춘파 선생이 서울 사람이 된다는 건 또 무슨 소립니까?” 

    “왕창스럽게(난데없이) 웬 유정회는. 하루가 백날 같은 세월에, 유신 끝난 지가 하마 언젠데. 이형 참말로 신문기자 하다 치운 사람 맞는교? 비례대표제는 서양 선거제도에도 족보에 있는 거고, 중(中)선거구제도 택도 없이 맹글어낸 거는 아이니, 비례대표제로 전국구의원 되는 거 하고 유정회로 임명되는 거하고는 달라도 아주 다르제. 우짜튼 그래서 서울 올라가는 긴데, 대학에 휴직계를 내기는 했지마는, 하마 환갑진갑 다 지난 어른이 다시 강단으로 돌아올 수 있겠는교? 우짜믄 전국구 한 번 더 하는 수도 있고, 또 다음번 선거에는 지역구로 돌아 본방으로 정치에 나서는 수도 있고…. 거기다가 시절이 또 하수상하니, 춘파 선생 대구로 다시 돌아오기를 누가 꼭 기약할 수 있겠는교? 더군다나 여기가 선생님 고향도 아인데. 아직 자택까지는 처분 안 했다 카드마는, 마, 모두가 춘파 선생은 이제 가믄 돌아오기 어렵다꼬 보는 기지요.” 

    강 시인과 그가 그렇게 주고받고 있는데 갑자기 출입문이 열리며 춘파 선생을 부축하듯 앞세운 김경수 시인이 지역 문인 대여섯과 함께 어림으로 들어섰다. 그런 김 시인을 향해 서 시인이 빈정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사람 불러 모은 것도, 여기로 장소를 정한 것도 김형인데, 눈알이 콱 빠졌뿐(빠져버린) 것 맹키로, 선생님만 따로 모시고 몇몇이만 어불래(어울려) 댕기다가 이마이(이만큼)나 늦어 오믄 우예노? 김형 어예 된 기요? 보이 모도 어데 한테(같이) 있다가 온 거 같은데 어디서 오는 길인교?” 

    “아이 미안, 미안. 우리 모두 선생님 모시러 갔다가 함께 만나 이리로 출발했는데, 선생님께서 백화점에 잠깐 들르실 일이 있다시기에. 그런데 그 잠깐이 이 낭패를 시켰네.” 

    김형이 들고 있던 백화점 상품 케이스가 든 봉투를 들어 보이며 늦은 이유를 변명했다. 

    “백화점에? 백화점에는 왜요? 대낮에 남자들이 대여섯씩이나.” 

    “선생님께서 봄가을 콤비 정장에 맞는 와이셔츠 한 벌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잠깐 골라 나온다는 게 여럿이 거드는 바람에 시간이 걸린 모양이네.” 

    거기까지 듣자 그는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갔다. 

    춘파 선생은 모두가 어려운 일제 때인데도 어릴 적 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유치원에 다녔을 만큼 유복하고 개화된 집안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아니면 동경 유학까지 한 ‘모던 뽀이’ 시절이 있어서인지 복식에서도 장신구에서도 좀 별난 서구 취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 나이에 흔치않게 겉옷은 물론 속옷과 머플러며 넥타이 핀, 커프스버튼에까지 손수 골라 자신이 설정한 어떤 수준에 맞추는 것 같았는데, 그 때문에 제자들이나 후배들을 데리고 이따금 백화점 양품부 같은 데를 들르는 경우가 있었다. 그도 전에 한 번 김 시인과 함께 그런 선생의 양품 쇼핑에 따라갔다가, 혁대와 넥타이 하나씩 고르는 데 거의 한 시간이 걸려 따라다니기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선생의 성품을 잘 알고 있어선지, 김형이 그렇게 늦어진 경위에 해명을 덧붙이자 아무 이의 없이 양해했다.

    3.
    원래 그날의 모임은 제5공화국 국회 비례대표제 의원으로 상경하게 된 춘파 선생을 위한 제자 시인들 중심의 간소한 송별 회식으로 계획되었던 듯했다. 회 정식에 데운 정종 몇 잔을 곁들이는 것인데, 계산은 따로 와서 할 물주가 있고 예약도 잘되어 있어, 예정 시각보다 조금 늦게 시작된 회식은 별일 없이, 그리고 작별을 앞두고 일쑤 과장되기 쉬운 비감에 빠져드는 일 없이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대략 열두엇의 후배 문인, 특히 시인 제자들이 나라의 부름에 따라 초야(草野)를 떠나 도성으로 향하는 스승 또는 원로의 장도를 축원했다. 춘파 선생도 별 특별한 감회를 내비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 앞에 열린 새로운 길을 바라보는 듯했다. 

    시작한 지 대략 한 시간쯤이 지나자 쓰케다시가 풍성한 회(膾)정식 정도의 식사에 이어 몇몇이 송별주를 올리는 형태로 술이 한 순배 돌았다. 데운 정종과 맥주를 취향대로 골라 몇 잔씩 걸치는 식인데, 사이사이 주로 대학 제자가 되는 시인들이 천천히 비어가는 은사의 맥주잔을 차례로 헌주하듯 채웠다. 춘파 선생께 따로 술잔을 따라 올려야 할 만큼 애틋한 정감이 있는 사이까지는 못 돼, 그는 좌석 한구석에서 멀거니 그런 그들의 작별 의식을 건너보았다. 그런데 술잔을 올리는 사람들의 표정과 헌사가 각기 달라 그는 자신도 모르게 관찰하는 눈길이 되어갔다. 

    그가 앞서 살펴본 대여섯은, 좀 비딱한 눈으로 보면, 지난 왕조 시절 그때껏 초야에 묻혀 있다가 마침내 조정의 우악한 은혜를 입어 불려가는 스승을 보내는 제자의 다함없는 흠모와 상찬의 정이거나 늦은 환로(宦路)의 순탄함을 비는 축수의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히려 춘파 선생이 잔을 받을 때마다 마른기침과 함께 내키지 않은 후렴처럼 웅얼거렸다. 

    “하도 사람을 보내 조르니까 가기는 한다마는 이거 잘하는 짓인가 몰라. 여기서 내 시와 함께 이대로 마뜩하게 늙어 죽는 게 백번 옳은 일인지도….” 

    그리고 다시 한 번 위로와 격려를 바라는 눈길로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선생의 물음과 눈길 때문인지 다시 그 뒤를 잇는 네댓의 헌사와 축수에는 앞서 말한 사람들보다는 조심스러운 자제와 유보(留保)의 어감이 실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고옵니다. 고! 키에르 케고르의 말처럼 득실이 반반일 때는 가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합니다. 앞뒤 돌아볼 거 없이 그래도 한번 가보십시오.” 

    “선생님께서 구걸한 것도 아니고, 세상이, 시대가 부른 깁니다. 가보고 신통찮으면 돌아오시면 됩니다. 거기다가 어쩌면 이번 행비가 선생님 시업(詩業)을 마무리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요.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의 행간에도 언뜻언뜻 비치는 그 참여 의식과 이상을 구현하는 기회일 지도….” 

    그렇게 우물거리면서도 춘파 선생의 출사(出仕)를 지지했다. 다시 나머지 두엇 중에도 그 네댓보다 한결 기세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춘파 선생의 상경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거기 나온 이들 가운데는 춘파 선생이 요청만 한다면 수행원처럼 서울로 따라 올라가 기꺼이 정치적 보좌 역할이라도 마다 않겠다는 축까지 있었다. 그런 게 아직 참여문학보다는 순수문학 쪽이 성했던 1981년도 4월 초순 대구 문단 한 모퉁이의 풍향이었다. 

    그런데 그사이 오후 2시가 넘고 식사뿐만 아니라 따라놓은 술도 거지반 비어갈 무렵 나타난 두 사람이 어수선하고 들뜬 가운데도 그런대로 정연하던 분위기를 깨고 좌중에 전혀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었다. 기능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슈바벤의 등불’ 시인과 신기림인가 하는 동화작가였다. 

    “아이고, 선생님. 제가 좀 늦기는 해도 아주 늦어삐리지는 않은 갑네요. 저도 술 한잔 올리려고 왔심더. 점심에 동종업자들 회식이 있어 얼굴이라도 비치고 온다는 게 그만, 몇 잔 받다보니 이래 늦었심더.” 

    “여다는(여기는) 시인만 모이는 줄 알았는데, 중앙통에서 황 사장 만나 들으이 시인 아이래도 된다 캐서…. 글찮애도 춘파 선생님께 한 말씀 디릴 것도 있고오.” 

    두 사람이 오다가 어디서 한잔 걸쳤는지 술기운이 느껴지는 떠들썩한 목소리로 늦게 자리에 끼게 된 사유를 대는데, 왠지 먼저 와 있는 시인들 표정이 그리 달가워 보이지 않았다. 

    “아이, 도통 조합이 안 맞는 저 둘이 우짜다가 한 조(組)가 돼 가주고 여다까지 찾아왔노? 보소. 신 선생. 신 선생하고 황 사장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는 맞는교?” 

    서 시인이 왠지 뾰족하고 날카롭게 들리는 목소리로 둘에게 그렇게 물었다. 신씨 성 쓰는 동화작가가 넉살 좋게 받았다. 

    “이 바닥에서 문학 한다 캐싸미 ‘슈바벤 등불’ 황진상이를 모리믄 우예 되노? 또 내도 글타. 조선일보 신춘문예 한 지가 하마 언젠데 아직도 이 신기림이 모른다 카믄 그거는 대구경북 문인 아이제. 그런데 서 시인은 그런 우리 둘이 알고 지내는 게 글케 신기하던 가베.” 

    그 말을 이번에는 황 시인이 동화작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어받았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저만치 조리대 근처를 치우고 있는 요리사에게 반말로 기세 좋게 소리쳤다. 

    “어이 봐라. 거기 이다바(板場). 하마 꼬라지 보이 술도 밥도 다 파장인 거 같은데, 새로 판 한 번 더 짜야 될따. 여(여기), 우예(어떻게) 하이볼 같은 거 안 되나? 산토리든 동, 마사무네(正宗)든 동, 아무 걸로나 하이볼 뺄 수 있으믄 한 주전자 산뜻하게 섞어내고, 회 한 사라 새로 떠라. 나도 춘파 선생님한테 술 한잔 따룼고, 남는 거는 우리끼리 논가(나눠) 먹게.” 

    그때 춘파 선생이 몸을 일으켜 옷걸이에 걸어둔 윗도리를 걷어들며 술판으로 키우려는 황 시인을 달래듯 말했다. 

    “내가 3시에 원대 쪽에 약속이 있어 그쪽에 한번 들러봐야 되고, 5시까지는 집에 돌아가 7시 밤기차 타고 서울 갈 채비하는 안사람도 거들어야 하네. 황 시인 술 한잔 잘 받은 걸로 치고 이만 일어나야겠네. 그동안에 대접 받은 것도 여러 번인데, 술은 그걸로도 넉넉할 테니 오늘은 정만 받겠네. 실은 여기 우리끼리 나눈 반주도 낯술이라 그런지 받은 잔에 겨우 입술이나 축였나.” 

    그러자 함께 있던 다른 시인들도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 그날 오후의 ‘어림’을 오래 뒤까지도 인상적으로 기억나게 만든 것은 거기서도 한발 더 나간 돌발과 돌출이었다. 먼저 와 있던 그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으므로 그 두 사람이 그렇게 불쑥 나타난 것은 그대로 사태의 돌발이었고, 그 둘 중 하나가 앞뒤 안 살피고 내던진 말은 인화성 폭발물을 내던진 것과도 같은 별난 의식의 돌출이었다. 

    아직도 방문 앞에서 뭔가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서 있던 신 아무개라는 동화작가가 갑자기 신발을 벗어던지듯 방으로 들어와 춘파 선생이 앉았던 자리 곁에 반 무릎을 꿇으며 무언가로 들떠 있는 것 같은 목소리로 춘파 선생을 향해 말했다. 

    “선생님, 제가 진작에 찾아뵙고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그랠 기회가 없었십니더. 그런데 오늘 우연히 점심 먹으러 간 식당에서 여기 황 시인 만나 선생님을 뵈러 간다는 말을 듣고 택도 없이 따라나서게 됐심더. 암만 캐도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이미 때늦은 줄 알면서도 선생님께 한 말씀 올릴라꼬요.” 

    워낙 진지한 말투에 춘파 선생도 손에 쥐고 있던 윗옷을 다시 옷걸이에 걸어놓고 엉거주춤 자리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내 알기로 신 선생은 동화작가라 그러던 것 같은데. 어디 바닷가 국민학교에서 교편 잡고 있고오. 그런데 시로 늙어가는 내한테 무신 일로?” 

    “어디요. 동화는 벌씨로 60년대 일이고, 교직도 포항에 있는 중등학교로 옮긴 지 하마 몇 해 됩니더. 또 70년대 들어서는 소설로 다시 등단했고요. ‘현대문학’으로.” 

    “‘현대문학’이라꼬? 그건 처음 듣는 소릴세. 거기는 등단이 추천제인 거로 아는데, 누구 추천으로 나왔는공.” 

    그때 비가비 동인 가운데 하나가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이 ‘현대문학’도 요새 추천제가 없어진 거 같더라꼬요. ‘창비’나 ‘문지’맨쿠로 잡지에 바로 실어주는 게 추천을 대신한다 카든가. 맞아, 신 선생, 언제부터인가 현대문학 쪽에 자주 들락거린다는 소리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애.” 

    그러면서 무언가 부연 설명하려는 시인의 말허리를 자르며 춘파 선생이 신기림 작가에게 물었다. 

    “장르야 우째튼 같은 대구 문인인데, 그래, 인제 떠나는 내한테 그래 꼭 하고 싶은 말이 뭐꼬 싶으네. 무신 말이오?” 

    그 말에 반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엉거주춤 앉아 있던 신 작가가 세운 무릎을 털썩 뉘어 책상다리 같은 자세로 춘파 선생 옆에 앉았다. 그리 되고 보니 두 사람이 처음부터 무릎을 맞대고 앉아 무언가 심각한 논의를 주고받아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거기다가 앞뒤 없이 불쑥불쑥 던지는 신 작가의 말은 더욱 그런 느낌이 실감 나게 했다. 

    “선생님 후배 문인으로 진심으로 재고를 요청합니다. 꼭 서울로 가셔야 되겠습니까?” 

    “서울? 내 서울 가는데 신 선생, 무신 부탁할 일 있어요?” 

    춘파 선생이 난데없다는 얼굴로 그렇게 반문했다. 조금 전까지의 좌석 분위기가 워낙 자신의 상경에 우호적이라 그전까지의 막연한 망설임까지 씻어버린 뒤여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신 작가는 혼자 마음속으로 준비해 온 말이 있었던지 대답에 거침이 없었다, 숙려도 자제도 없는 충언과 만류가 정확하지 못한 정보와 어우러져 쏟아졌다. 

    “유정회(維政會)로 국회에 가는 거 말입니다. 향기로운 미끼 아래 물고기의 죽음이 있고, 높은 벼슬 아래 좋은 선비의 죽음이 있다꼬, 유정회, 그거 거창한 벼슬도 아이면시로 유신 10년에 좋은 문인, 논객 마이 잡아 묵었습니데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거 하로 서울로 떠나는 거, 다시 함 생각하시이소.” 

    그러자 듣다 못한 서 시인이 곁에서 쏘아붙였다. 

    “보소. 동화를 짓든 동 소설을 쓰던 동 사실은 지대로(제대로) 알고 말하소. 난데없는 유정회는 무신. 선생님이 가시는 것은 제5공화국 전국구 의원이라꼬. 국민투표로 개헌하고, 직접선거로 뽑은 국회의원 당선인에 비례해 배정된…. 그래고 인용을 할라 카믄 똑바로 하소. 향이지하 필유사어(香餌之下 必有死魚)란 말은 들어보았지만, 높은 벼슬 아래 뭐가 어째고 하는 그런 구절은 또 듣던 중 처음이오. 어디서 어룸하게(확실치 않게) 듣고는.”
     
    그때 춘파 선생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면서도 먼저 서 시인을 나무라 놓고, 정색한 표정으로 신 작가의 말을 받아주었다. 

    “아이(아니), 서 시인, 그래 사람 마구잡이로 인신공격할 거는 없고오, 고마 간단하게 답할란다. 신 선생이라 캤소? 나를 위해 여기까지 찾아와 깨우쳐주니 고맙소만 짐작하신 대로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소. 아마도 조금 전 서 시인이 말한 구절과 짝이 되는 대구(對句)는 ‘무거운 상 아래는 반드시 용사가 있다(重賞之下 必有勇夫)’일 터인데, 무신 큰 용사는 못 되지만 이 늙은 몸은 이미 5공화국이 보낸 폐백을 거두어들였다오.” 

    그래도 신 선생은 자신의 열정에 취해 수그러들 줄 몰랐다. 

    “선생님, 역사를 무서워할 줄 알아야 됩니데이. 광주, 아이, 전라도 그래 깔보지 마이소. 작년 5월 18일에 거기서 벌어진 거는 2·28 학생의거로 여다 대구서 시작된 4·19 같은 혁명이라꼬요. 지금 번드르르 하다꼬 제5공화국 저거 너무 믿지 마이소. 신군부 저눔아들, 저거 지금은 찌딱거리고(거들먹거리고) 댕기지마는 결국은 박정희 맹키로 숭악한 쿠데타 한 기고, 그라이 오래 못 갈 끼라 이깁니더. 언젠가는 역사 앞에 단죄될 끼라꼬요. 광주가, 전라도가, 반드시 피값을 받으러 올 끼라꼬요. 유정회, 아이, 민정당 전국군 동 뭔 동, 택도 모리고 5공 국회에 들어가 허재비(허수아비) 짓 하다가 만약 그런 날이 온다 카믄, 선생님 평생 가꾸어 오신 시업(詩業)까지 터도 망도 안 남을 낍니데이.” 

    “무신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공권력에 여지없이 진압된 내란 가주고 무신 대단한 혁명이나 한 거 맨키로. 혹시 신 선생 고향이 그쪽이요? 말이사 바른말이지, 무신 혁명이 저그 지역정치가, 저그 슨상님 잡해 들어간 다음 날 아침에 벌어지고, 무신 혁명 구호 제일 앞대가리가 바로 아무개 슨상님 석방이고? 하다못해 동학란도 앞대가리에 내세운 구호는 ‘권귀(權貴)를 죽이자!’랬다 카더라. 적어도 혁명구호가 되자면 거칠디라도 그 정도 공의는 있어야지. 그런 동학란도 벌씨로 백년이 다 돼가는데 아직 혁명이란 소리를 못 듣고 근근이 ‘농민운동’으로 교과서에 올라갔는데, 뭐시라? 혁명이라꼬? 여기서 시작해도 서울까지 올라가 경무대 앞에서 피탈을 보고서야, 그것도 이승만이 같은 홍몽천지 반공주의자가 지(제) 발로 하야하고 나서야 겨우 혁명 대접을 받게 됐지만, 아직도 ‘옆으로부터의 혁명’이란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는 4·19하고 견주노? 모도 노고지리(종달새) 통에 들어앉아 목이 붙어 있을지 떨어질지 모르는 사람들 보고 도로 피값 물리로 올 끼라이.”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그때 누군가 모두를 일깨우듯 큰 소리로 그렇게 소리치고는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더니 구두를 찾아 신고는 방 안에 대고 냅다 소리쳤다. 

    “여, 모도 안 갈라 카이껴? 언제까지 퍼질러 앉아 저러매이(저따위) 되지도 않는 소리 듣고 앉았을라 카이껴?” 

    그러고는 신 작가를 한심하다는 눈길로 내려다보며 인정사정없이 쏘아붙였다. 

    “우리보다 낫살 너댓 더 훌쳤다꼬(먹었다고) 봐줄라캤디, 더럽고 육육해(느끼해) 그양 들어주지를 몬하겠네. 지난겨울에는 과메기 싸들고 자유실천 무슨 협의회하고, 민중민족 문학 쪽 여기저기 찾아댕기드라 캐쌓디 참말로 티 나네 티. 보소. 인자 됐으이, 이만 일나(일어나) 갈 길 가보소. 이번 여름방학에 서울 올라가믄 사람 좋다는 ‘자유실천’ 이 아무개나 민중민족 문학 혼자 다 아는 백 아무개한데 떠벌릴 꺼리는 이만하믄 넉넉히 장만했으이. ‘거 말입니데이 대구의 세칭 춘파 선생 말이요. 유정회 말석에 끼게 됐다고 똘마니들 모아놓고 송별식 한다미 떠들썩하길래, 내 찾아가 한마디 따끔하게 말해줬지. 역사를 두려워할 줄 알라꼬, 민중민족의 대의를,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금남로에 흘린 피를 잊지 말라꼬요.’ 그카믄 그 사람들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우리 신 투사한테 높은 자리 하나 턱 내줄 낍니더.” 

    그래놓고는 춘파 선생한테 인사하는 것조차 잊고 씨근거리며 왜식집을 나가 버렸다. 

    신 선생이란 작가도 곧 만만치 않았다. 성난 기색으로 자리에서 분분히 일어나는 사람들에게 별로 기죽어하는 기색 없이 함께 일어나 식당 홀 구석 툇마루에 발을 얹고 구두끈을 묶더니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맞받아쳤다. 

    “저 사람 저거, 강 머시기라는 시인 아이가? 나도 들은 소리는 있제. 저 사람 형 신군부 핵심에 끼예(끼어) 이번에 별 달았다는 하나회 멤바 맞을 끼라. 신군부 핵심이든 동 하나회 멤바든 동 별 달고 잘나가는 거는 즈그 형이제, 지가 아이(아니)잖나? 지나 내나 중학교 접장질이나 하는 병아리 주제에 벼슬은 꼭 장닭맨큼이나 흔들라 카네. 형이 있는지 애비가 있는지도 모리고(모르고), 아무데나 대고마고 성을 팩팩 내가미….” 

    그러자 끝내 참지 못한 서 시인이 모진 소리로 한마디했다. 

    “하, 그 사람 그거 참 말 많네. 형이라도 큰형뻘이라 참고 들어줄라캐도 영 안 되겠네. 참여를 하든 동 민주화를 하든 동, 그거 할라 카믄 저쪽 동네 가서 외지(외치지) 와 여다 덮치가지고. 보소, 황 시인도 앞으로 이런 자리에 낯선 사람 달고 올라꺼든 쪼매 살피보고 데불고 오소. 아무따나 대고마고 델꼬 오믄 점잖은 입에서 욕 나가는 수 있구마는.”

    4.
    “그럼 여기서 기다리시죠. 손 기자 곧 내려보낼게요.” 

    그가 그만두자마자 새로 옮긴 사옥 1층에 넓게 빼둔 커피숍 입구에서 그 사이 신문사 문화부 차장으로 돌아간 김경수 시인이 그렇게 말하고 편집국이 있는 이층 층계 쪽으로 갔다. 

    “취재할 게 있다 그러니 오기는 왔지만, 하긴 좀 쑥스럽네. 내가 손 기자한테 취조를 당하게 됐다니.” 

    그가 조금은 멋쩍은 기분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빈자리를 찾아 앉는데, 한쪽 탁자에서 누가 손을 번쩍 들어 알은체를 했다. 보니 작년엔가 겨우 사서말이(사쓰 마우리)를 끝내고 사회복지와 노동청 쪽에 출입처를 얻었다는 동기였다. 그러나 이미 그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어 그도 손만 들어 답례하고 속으로 지목해 찾아간 자리에 앉았다. 그때 다시 다른 쪽 구석에서 손을 들어 자신을 알리는 사람이 있었다. 보니 정치부장을 오래 하다가 근래 편집국장이 되었다고 들은 아득한 선배였다. 

    “여기 누구하고 약속 있어 온 거 아니요?” 

    그가 이번에는 손만 들어주고 알은체할 사람이 아니어서 그쪽으로 가니 옛날 정치부장이 그렇게 인사말을 대신했다. 

    “예, 문화부 손 기자가 좀 보자고 한다 해서.” 

    “아, 문화부 그 막내 여기자? 지가 무슨 일로? 그래고 일이 있다믄 지가 이형 찾아가야지. 재작년 편집 수습할 때는 이형이 사수 노릇도 했잖소? 우리가 해병대는 아이지만 한번 선배는 영원히 선배라꼬. 거기다가 천하의 이불휴 작가를.” 

    “김경수 차장하고 점심을 같이 했는데, 거기서 손 기자가 저를 찾아볼 일이 있다고 하더라기에. 지방 문단 신춘 동향 같은 의례적인 기사인 모양인데, 마침 제가 시내까지 나온 길이라, 김 차장 따라 잠깐 신문사에 들르기로 했습니다. 보니 나를 만나려는 까닭이 점심 때 제가 나간 자리하고도 관련이 있는 것 같고.” 

    “어디를 갔디랬는데?” 

    “춘파 선생님 오늘 저녁 상경하신다고 시인들하고 점심 같이 했습니다. 거기 김 차장이 나를 불러주었는데, 손 기자도 춘파 선생 서울 가는 거 하고 제 거취 문제 엮어 알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아서…. 그런데 국장님은 이 시각에 어떻게 여기 내려와 계십니까?” 

    “춘파 영감 결국은 그 감투를 받아 쓸 모양이네. 글치만 만만찮을 꺼로. 자칫하면 호호 불어가며 다듬어온 시인 이름 국회의원 한 번으로 다 끄시러(그을어)버릴 껜데.” 

    국장이 그래놓고 입구 쪽을 보다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지방지 편집국장이 무신 큰 벼슬이라꼬 족징(族徵) 인징(隣徵)이 다 들어오네. 이웃, 친지뿐만 아니라 삼족(三族) 안에 검경(檢警) 쪽 애로 있는 사람은 모지리 다 나를 찾아오는 같구마는.” 

    그런데 자리에 앉아 한참을 기다려도 금세 내려올 것 같던 손 기자가 영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저기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어 흘깃거리는 게 뜻밖으로 당황스럽고 난처하기까지 했다. 

    겉보기와 달리 과격한 우파 시인과 나름으로는 외로운 참여파 혹은 반체제 저항 작가가 각기 제풀에 벌겋게 성이나 제 갈 길을 떠나고, 다시 춘파 선생 아래서 조교를 지낸 시인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춘파 선생을 원대로 모신 뒤, 남은 여남은은 잠시 무언가 미진한 머뭇거림 속에 있다가 하나둘 작별 인사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벌써 술기운으로 목이 삐딱하게 ‘뿔라진(부러진)’ 황 시인이 쓰러져 가는 깃발을 황급히 움켜잡듯 목소리를 높였다. 

    “마, 오후 3시가 좀 빠르기는 하지만, 어떤 때는 낯술로 시작한 저녁술이 더 운치 있을 때도 있구마는. 더군다나 자우룩하게 목련 지는 봄 저물녘에 비우는 술잔은 사람을 어쩔 줄 모르게 할 만큼 막막하게 만들기도 한다꼬. 안갠지 저녁 이낸지로 자우룩해지는 슈바벤 거리에 하나둘 밝아오는 가로등 불빛처럼 말이라. 백지로(백줴) 신기림 작가를 델꼬와 춘파 선생 보내는 자리 망화뿐(망쳐놓은) 죄도 있으이 내 술 한잔 사지. 어디 가까운 데 들어가 술이나 한잔하고 히입시다(헤어집시다).” 

    그래놓고는 무슨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 손바닥까지 치면서 한쪽을 가리켰다. 

    “보자, 여기가 향촌동이라, 그래, 바로 조짝에(조기) 있는 요석궁으로 갑시다. 얼마 전에 가봤는데 물 좋은 방석집이라. 까짓것 기분도 끌끌한데 거기서 한잔 콱 쫄았뿌지(졸여버리지, 잔 비우지) 머.” 

    하지만 김 시인도 그도 그들과 함께 가서 낮부터 술병을 ‘확 졸여버릴’ 처지가 못 되었다. 김 시인은 신문사 문화부 차장으로 돌아가 그날 마감을 해야 하고, 그도 김 시인에게서 그사이 손 기자와의 인터뷰 문제를 전해 듣고 함께 신문사로 돌아가 양쪽 모두 간편하게 일을 처리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말고 남은 사람들 가운데도 그 ‘물 좋은’ 요석궁으로 갈 수 없는 사람이 몇 더 있었다. 그 바람에 벌이 좋은 시인이 한잔 거나하게 사겠다는 데도 그리로 몰려간 것은 그 오후 나머지에 딱히 가야 할 곳이 없는 시인 대여섯뿐이었다. 

    실은 술 생각이라면 그날 새벽까지 탈고에 매달려 있었던 그에게 더 간절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대사형(大師兄)이 초짜 문학 담당 기자가 된 후배 편하게 해준다고 몸소 신문사까지 왕림하셨는데, 이렇게 늑장을 부려…, 그런 생각에 슬며시 서운해지려 하는데 커피숍 입구 쪽이 훤해지듯 누가 들어섰다. 손 기자였다. 

    “어이, 손 기자. 여기.” 

    그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며 알은체를 했다. 소리가 조금 컸던지 몇몇이 힐끗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조금 머쓱해진 그가 일으키려던 몸을 슬그머니 제자리에 앉히며 손 기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좀 기다리셨죠? 마감해야 할 원고가 있어 마저 손보고 퇴근 준비해 오느라 늦었어요.” 

    “문학 담당 됐다고 벌써 옛날 선배도 몰라보긴가. 아무리 취조당하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이 대사형, 중앙에선 제법 잘나가는 신예 작가인데.” 

    “그렇다고 신문사 커피숍에 와서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도록 큰소리로 반가운 체를 해요?” 

    “얼굴 보니 반가워서 나도 몰래. 오래되잖아? 나 신문사 그만두고 처음 보지?” 

    “오래되긴요. 이번 정초에도 우리 보았잖아요? 신춘문예 시상식 때.” 

    그제야 그도 그때 생각이 났다. 문화부장 부탁으로 신문사 신춘문예 예심위원 명단에 이름을 빌려준 죄로 할 수 없이 시상식에는 나가야 했지만, 그때 그의 시간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특히 두 번이나 못 받아준 ‘현대문학’ 청탁을 세 번째 받고는 미안해서, 그 무렵 새로 구상한 것으로는 가장 기대를 걸었던 중편 ‘묘시조(妙翅鳥)’를 억지로 쥐어짜고 있을 때라 시상식 날인 정월 초순은 거의 탈진해 제정신이 아닐 때였다. 시상식장에 억지로 나가기는 해도 점심 식사까지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와 잤을 정도라 손 기자를 만난 것조차 기억하지 못한 듯했다. 

    “우리 다른 데로 옮길까? 퇴근하고 나왔다니 어디 조용한 곳으로.” 

    그가 좀 머쓱해서 분위기를 바꿀 겸 그렇게 말을 돌렸다. 손 기자가 아직은 조금 덜 풀린 얼굴로 핀잔주듯 말했다. 

    “그렇게 요란스럽게, 오만 사람이 다 쳐다보도록 떠들썩하게 반가워해놓고, 둘이 조용한 곳으로 사라지면 좀 이상하지 않겠어요? 여기서 그냥 취재해야겠네요.” 

    그러고는 볼펜이 꽂힌 취재 노트를 꺼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춘파 선생 보내는 회식자리 얘기는 차장님께도 좀 들었어요. 참여문학 쪽 기웃거린다는 신기림 작가와 ‘비가비’ 동인 강정환 시인 부딪친 얘기까지는 대강.” 

    “그럼, 그걸 기사로 쓸 거요?” 

    “아뇨. 그런 주변 얘기까지야. 하지만 그걸 보신 선배님의 느낌은 좀 듣고 싶네요. 그게 중앙 문단의 섹트화 현상이 지방으로까지 번져오는 것인지, 아니면 양쪽 모두에게 돌발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이 우연히 오늘 그 자리에서 충돌하게 된 것인지.” 

    “그거 갑자기 말 어려워지네. 정말 취조가 될 모양이군.” 

    그가 그렇게 빈정거리면서도 조금씩 손 기자의 물음에 끌려 들어갔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생각하지도 않은 말을 본심 비슷하게 털어놓기까지 했다. 

    “나처럼 ‘변경(邊境)’이란 특이한 인식 틀, 또는 일종의 체제론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이 변경 체제에서 일어나는 모든 가치판단 문제에 중립적 혹은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는 소리를 언젠가 손 기자에게도 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오늘도 나는 그들의 불같은 분노와 부정을 그저 흥미롭게 바라보기만 했소. 앞으로 더 자주 그런 쪽을 바라보고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지만.” 

    “언젠가 선배님이 이념으로서의 무이념(無理念)을 얘기하신 적이 있는데, 저는 속으로 그걸 비틀린 자의식, 혹은 아주 어릴 적에 불에 덴 기억이 상처로 내장되면서 의식 바닥에 남긴 흔적 같은 걸로 이해했어요. 특히 이데올로기와 연관된 부분은. 그런데 오늘 보신 것도 그런 것들과 관계있나요?” 

    “그것 참 말 어렵게 하네. 그런 거라면 오늘 영 날을 잘못 잡았는데. 실은 취재에 응하는 데도 준비가 필요하지. 그런데 오늘은 전혀 준비 안 된 취재를 당하는 것 같군. 그것도 그리 간단한 주제가 아닌 걸로. 그런 거라면 따로 날 잡기로 하고, 오늘은 꼭 나를 만나 듣고 싶던 것이나 물어보는 게 어때요? 그 뒤에 어디 가서 저녁이나 같이 하고.” 

    그러자 손 기자도 퍼뜩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우리 이불휴 작가님은 언제 서울로 올라가나요?” 

    “글쎄. 가기는 가야 될 것 같지만, 직장을 구해 옮기는 것도 아니고, 받아둔 날이 따로 있는 것 같지도 않아서. 그렇다고 춘파 선생처럼 불러주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끝끝내 여기 머물러 살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속된 살이(生)와 연관 지어 우리 대여섯 한데 모여 살 집 한 칸 장만하는 걸 최저 출발선으로 삼지.” 

    “서울의 집이라는 게 천차만별이라던데요.” 

    “그거라면 지금 정하지. 서울에서 가장 잘나가는 동네에 여섯 식구 살 단독주택으로. 이번이 오출한성(五出漢城), 부모님 몸속에서 포함 다섯 번째 서울길인데, 또 참담하게 패퇴해서 쫓겨날 수는 없지.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서울살이라는 게 워낙 할애비는 정승이라도 손자는 거지가 될 수도 있는 구조라 우리 경상도 재지사족(在地士族)에게는 서울이 언제나 겁나는 곳이거든.”

    5.
    그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그날 밤 9시가 넘어서였다. 신문사 커피숍에서의 취재가 끝나갈 무렵에야 일을 마친 문화부 김 차장이 김 시인으로 합류해 셋이 함께 저녁을 먹고 반주까지 곁들이다 보니 예상보다 귀가가 늦어졌다. 

    서울로 원고를 전하러 갔던 아내부터 어머니와 두 아이, 그리고 어머니가 데리고 온 종이모 둘까지 합쳐 집 안이 그득한 느낌이었다. 

    “전화가 왔어요. 서울서 여러 번. 그중에도 황 선배란 그분은 두 번이나 전화했고.” 

    서울서 오는 전화에는 가끔씩 사람 혼을 빼놓는 게 섞여 있어 그는 공연히 불안해하며 물었다. 

    “황 선배가 ? 무슨 일이래?” 

    “무슨 긴한 일이 있는가 봐요. 돌아오는 대로 전화 달랬어요.” 

    그러면서 아내가 전화번호 하나를 주었다. 황 선배 자택 번호가 아니었다. 그가 준 번호대로 전화하니 황 선배가 뭔가 왁자한 분위기 속에서 전화를 받더니 곧 조용한 밀실 같은 곳으로 전화를 옮겼다. 

    “선배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 저녁에 두 번씩이나.” 

    “야, 너 왜 저번에 서울 와서 날 안 보고 갔어? 작년에 우리 신문사 일, 그걸로 삐친 거야? 그놈의 영감탱이들, 그거. 편집국장, 주필 모두 논설실로 질러가는 길목에다 너를 받아주기로 했는데. 그건 그렇고. 너 다음 주말쯤 서울 한번 올라와라. 여기 와서 어른 한번 뵙고 만찬 같이 하고 가.” 

    황 선배는 그의 예고대로 지난가을 ‘블루 하우스’ 출입기자에서 비서관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가 말하는 어른은 그들끼리 쓰는 대통령 별칭이었다. 

    “아니, 거긴 왜요? 그리고 제가 무슨 그 어른과 만찬을?” 

    갑자기 이태 전의 ‘궁정동 만찬’까지 떠올리며 그가 떨떠름해져 물었다. 황 선배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촌놈 티 내지 마라. 그렇게 떨 거 없다. 어른께서 비중 있는 문화예술인들 모아 만찬 하시면서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아. 그래서 한 100여 명 추려 이리로 부르시는데 네 이름도 거기 들었어. 헤드 테이블은 아니더라도 어른과 몇 마디 대화 정도는 나누게 될지도 몰라.” 

    “아니 어제 아래 문단에 나온 신출내기 작가가 청와대는 왜요? 혹시 선배님이 그 명단에 날 넣은 겁니까? 대통령이 어떻게 알고.” 

    “그건 나도 모르겠어. 어른께서 대학 국문과 다니는 영식에게서 들었다는 말도 있고, 신문에 난 베스트셀러 기사 보고 고르셨다는 말도 있고. 어쨌거나 그날 꼭 올라와. 우리 청와대에서 한번 보자.” 

    황 선배는 어딘가 신나하는 구석이 있었지만, 그는 왠지 낭패한 기분이었다. 여기 와서 바로 이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여기’가 어디고, ‘바로 이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며, ‘만나게 되는’ 게 정작 누구일지 아무런 확정이 없는데도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느낌으로 후끈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그 막연한 당혹에서 깨나면서 순간적인 발상의 전환이 일어났다. 

    “선배님. 그거 참 좋은 일인데요. 아무래도 전 좀 빠졌으면 싶네요.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인지 모르지만 우선은 그런 형태의 만남부터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요. 여럿이 죽 줄 지어 서서 악수 한 번 나누고 이름표 한 번 보이고 제자리에 돌아가 식사 한 끼 나눈 뒤에 헤어지는 거 저도 몇 번 보았는데요, 그거 문화 정책이나 청와대 의전으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몰라도 제가 나중에 꼭 끼어보고 싶은 자리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거기 끼자고 대구에서 서울까지 천 리 길을 오라니요. 그날 제가 못 가더라도 좀 봐주세요. 선배님.” 

    그가 한꺼번에 그렇게 쏟아놓자 한동안 아연해 있는 것 같던 황 선배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너 그거 스무 살짜리 문청(文靑)이 한번 기고만장해 떠들어보는 소리냐? 아니면 서른두 살 곰삭은 문장으로 등단한 신예가 앞뒤 없는 기염으로 토해본다고 하는 소리냐? 어쨌든 알았다. 지난번 경력직 면접 때 왜 우리 신문사 사주와 사장이 너를 기어이 마다했는지도.” 

    황 선배가 그러면서 전화를 끊었다. 차고 여지없는 데도 어딘가 정중함이 남아 있는 목소리가 그런대로 그를 안도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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