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호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고? 천만에!

[황승경의 Into the Arte] 영화 ‘빅 쇼트(The Big Short)’

  • 황승경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23-02-10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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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나 그럴듯한 생각을 해낸다. 그 나름 탄탄한 근거와 논리를 둘러 견고함도 더한다. 제법 그럴싸하게 포장됐다고 자찬하며 ‘역시 난 이성적 인간이야’라고 뿌듯해한다. ‘논리의 철옹성’을 구축했다고 믿는다. 이견(異見)과 반론은 공성(攻城)으로 간주한다. 성벽은 점점 높고 두꺼워진다. 밖을 보지 못한다. 사실 성은 처음부터 ‘감정의 모래성’이었다. 이를 모르는 이는 오직 한 사람, 바로 당신이다.
    영화 ‘빅 쇼트’에서 펀드매니저 마이클 버리는 주식시장을 꿰뚫어보고 전 재산을 ‘폭락’에 베팅한다. [(주)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빅 쇼트’에서 펀드매니저 마이클 버리는 주식시장을 꿰뚫어보고 전 재산을 ‘폭락’에 베팅한다. [(주)롯데엔터테인먼트]

    인간은 흔히 자신은 합리적·이성적이라고 믿는다. 상대가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를 ‘감정적’이라거나 ‘비이성적’이라며 탓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인간 ‘자체’가 이성적 존재이긴 할까. 인간의 뇌는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수한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을까. 굳이 뇌과학까지 가지 않더라도 역사적으로 인간은 그러지 못했다. 종교적 광기를 보여준 중세 십자군전쟁이나 마녀사냥만 봐도 그렇다. 이뿐이랴. 17세기 네덜란드에 불어닥친 튤립 광풍은 3년간 튤립 뿌리 가격을 5900% 상승시켰다. 결국 튤립은 이전 가격의 1% 이하로 곤두박질쳐 네덜란드는 경제공황을 맞았고 세계경제 주도권을 영국에 뺏기게 된다.

    ‘천재’도 예외가 아니다.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은 남해주식회사 주식에 전 재산을 투자했다가 빈털터리가 됐다. 재정 위기에 처한 영국 왕실이 부채 탕감의 반대급부로 남해주식회사에 남미와 독점적으로 무역할 수 있는 권한을 줬는데, 남미산 금괴를 시가 100분의 1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말에 혹한 것이다. 뉴턴은 “내가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계산할 수 없다”는 슬픈 명언을 남겼다.

    인간이 비이성적인 데엔 감정의 영향이 크다. 베스트셀러 작가 로버트 그린은 ‘인간 본성의 법칙’에서 뇌 시스템상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사고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그의 말대로 인간의 감정이란 당연히 쾌락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이성적·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론 고통과 긴장을 줄이려, 자존심을 세우려 감정적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인간 본성엔 확증편향(믿고 싶은 것을 더 확신하는 심리), 우월성 편향(남보다 객관적이며 윤리적이라고 믿는 심리)이 박혀 있다. 감정적 자아를 다스리려 노력해야 하는 이유다.

    모래성을 철옹성으로 믿은 어리석음

    2016년 개봉한 영화 ‘빅쇼트(The Big Short)’는 2008년 세계경제를 뒤흔든 ‘서브프라임 모기지론(sub-prime mortgage loan·저소득층 대상 미국 주택담보대출제도) 사태’를 통해 인간의 비(非)이성을 조명한다. ‘쇼트(Short·공매도)’란 하락이 예상되는 주식을 빌려 먼저 판 후에 나중에 가격이 떨어지면 판 만큼 주식을 사들여 빌려온 주식을 갚는 방식이다. 하락에 베팅하는 투자 기법 전반을 일컫기도 한다.

    영화의 주연들은 시장 곳곳에 숨어 있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붕괴 신호를 알아차리고 재빠른 ‘쇼트’로 대박을 챙겼다. 고정금리에서 변동금리로 바뀔 때 부채를 상환하지 못할 사람이 늘어날 것임을 예측해 부동산 하락에 베팅한 식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데, 이들은 하늘이 무너질 것을 알고 미리 솟아날 구멍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 결과 20조 원을 벌며 벼락부자가 된 반면 다른 개미투자자들은 쓰디쓴 눈물을 삼켜야 했다.



    영화는 당시까지 최고 재테크 수단이자 안전자산이라고 깊게 신뢰받던 부동산투자가 얼마나 부실한 모래성이었는지, 그리고 안정적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허영과 확증편향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세밀한 시선으로 하나하나 발가벗긴다.

    영화는 금융 저널리스트 겸 논픽션 작가인 마이클 루이스(62)의 ‘공매도: 패닉 이후, 시장의 승리자들은 무엇을 보는가’가 원작이다. 아카데미상 5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각색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영화 속 경제용어가 어려우면 어쩌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쉬운 예시를 통해 설명된다. 진지하게 극이 진행되는 도중 출연 배우가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 설명하는 방식인데, 좀 생뚱맞긴 하지만 참신해 오히려 지루하지 않다. 거기에 크리스천 베일, 라이언 고슬링, 브래드 피트, 스티브 카렐 등 쟁쟁한 배우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탐욕, 재앙의 근원

    1929년 대공황이라는 결정타 한 방으로 미국 경제는 만신창이가 됐고, 도미노처럼 세계경제도 마비됐다.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미국 정부는 이후 금융업계를 더 엄격하게 통제했고, 미국 경제는 별 탈 없이 성장했다. 1980년대 이전만 해도 각종 규제에 발목 잡힌 미국 금융권은 벼락부자가 출몰하는 ‘노다지 세상’이 아니었다. 대출, 채권, 보험, 회계 등 한정된 업무로 명맥을 이어갈 뿐이었다.

    ‘루이스 라니에리’라는 한 인물이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채권전문투자은행 ‘살로먼 브라더스’에서 근무하던 그는 담보대출을 받은 주택저당권을 묶어서 MBS(Mortgage Backed Securities·주택담보대출 채권)를 고안한다. 금수저가 아니고서야 대다수 사람은 집을 살 때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다. 알뜰살뜰 저축하며 이자와 원금을 갚다 보면 부동산 가격이 올라 결국 대출금을 상환한다.

    주택담보대출은 등급이 낮은 상품이지만 이것들을 모아 새로운 상품으로 탈바꿈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미국은 신용등급이 ‘프라임’ ‘알트-A’ ‘서브프라임’으로 나뉘는데, 신용등급이 낮은 저소득층 등급(서브프라임)의 주택담보대출을 묶으면 당연히 위험 상품이어야 한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은 꾸준히 상승한다는 믿음 때문에 이를 우량 상품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대박 상품으로 거듭난 MBS는 금융권을 먹여 살리는 효자상품으로 등극한다. 미국 은행권은 여러 개의 MBS를 모아 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부채담보증권)를 탄생시켜 주식시장에 출시한다. 이 덕에 은행은 막대한 수익을 거두며 돈방석에 앉는다.

    불난 데 기름을 붓듯 2001년 ‘9·11 테러’로 경기가 침체되자 미국 정부는 경기부양책으로 유례없던 ‘초저금리’ 카드를 꺼냈다. 주택대출 상품이 늘어나고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지금 안 사면 손해’라는 강박관념이 사람들을 자극했다. 자고나면 뛰어오르는 집값 때문에 저소득층까지도 앞다퉈 대출을 받아 주택을 구매했다. 은행은 당장 MBS로 얻을 이익에 눈이 멀어 신용등급을 묻지도, 상환 여부를 따지지도 않고 대출을 남발했다.

    누가 진짜 ‘호구’일까

    영화 ‘빅 쇼트’에서 시장의 폭락을 예측한 극소수 사람은 떼돈을 번 반면 대다수 투자자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주)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빅 쇼트’에서 시장의 폭락을 예측한 극소수 사람은 떼돈을 번 반면 대다수 투자자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주)롯데엔터테인먼트]

    주택시장이 과열되자 정부는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원금은커녕 이자도 갚을 능력이 안 되는 서브프라임 등급의 빚은 늘어만 갔다. 부동산 가격이 추락하자 집주인은 서둘러 집을 팔아보려 하지만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대출 연체가 계속돼 MBS는 위태로워졌고, MBS를 근간으로 하는 CDO는 바람 앞의 촛불이 됐다. ‘빅쇼트’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을 살려 쉽게 설명해준다. 모든 재앙의 근원은 되짚어 보면 결국 얽히고설킨 인간의 탐욕이다.

    2007년 이미 먹구름이 스며들기 시작했는데도 뉴욕 금융가는 여전히 화려하고 태평하다. 영화 ‘빅 쇼트’는 이러한 폭풍전야에서 시작한다. 펀드매니저 마이클 버리(크리스천 베일)는 어릴 적 한쪽 눈을 잃었다. 의안을 사용하다 보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부담스러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사회성엔 문제가 있지만 주식시장을 꿰뚫어보는 안목은 탁월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에 무언가 감지된다. 그는 며칠 동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MBS(주택담보대출 채권)를 구성하는 담보 주택 수천 채의 상태를 확인하곤 경악을 금치 못한다.

    놀람도 잠시, 버리의 머리엔 새로운 투자 아이디어가 번뜩인다. 이내 대형 은행을 돌며 ‘모기지 채권 스와프’라는 생소한 상품을 만들어달라고 엄포를 놓는다. 은행은 어리둥절하다. 모기지 채권 스와프란 모기지 채권 가격이 폭락할수록 수익이 나는 채권으로 이른바 ‘신용부도보험’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주택이라는 담보물이 있는, 안전한 모기지론의 부도를 짐작하긴 어려웠다. 은행은 그를 ‘얼빠진 호구’라고 조롱하며 ‘CDS(모기지 채권 스와프·Credit Default Swap)’를 만들어 거액을 유치한다.

    무책임한 쾌락의 말로

    영화 ‘빅 쇼트’에서 나타나는 주택시장은 자본주의 회의론자도 믿기 어려워할 만큼 부실하다. [(주)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빅 쇼트’에서 나타나는 주택시장은 자본주의 회의론자도 믿기 어려워할 만큼 부실하다. [(주)롯데엔터테인먼트]

    버리는 자신의 전 재산은 물론 자신에게 돈을 맡긴 투자자들의 재산까지 모두 ‘폭락’에 베팅하는 일생 일대 모험을 한다. 매달 일종의 보험료라 할 수 있는 수수료를 지불해 가면서까지.

    버리의 투자 소식은 삽시간에 뉴욕 증권가에 퍼진다. 투자자들은 투자금을 회수하겠다며 연일 성화를 냈다. ‘모기지 채권 스와프’를 유지하기 위해 매달 지불해야 하는 수수료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하지만 버리를 비웃는 자들 사이에서 그의 소식을 들은 도이치뱅크의 자레드 버넷(라이언 고슬링)만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다.

    버넷은 자본주의 회의론자인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에게 연락해 “현재 담보대출 연체율이 4%인데, 8%가 되는 순간 부도는 예견된다”고 주장한다. 또 “10~20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CDS를 사야 한다”고 역설한다.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는 바움조차 버넷의 급진적 발상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대신 팀원들과 함께 현장 조사를 나간다. 증권가 한복판에서 짐작하는 주택시장과 일반 국민이 체감하는 주택시장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유령도시처럼 텅 빈 주거지역을 감안하면 부동산 가치 하락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다. 또 갚을 능력도 없는 사람이 몇 채씩 집을 사다 보니 연체율이 날로 높아졌다. 설상가상 이를 감독해야 할 은행 감독관은 오히려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은행 사람들과 친분을 쌓는 데 열중이었다.

    당장 부도가 나도 이상할 게 없는 현실이었건만 신용평가기관들은 여전히 부실 상품에 AAA등급을 부여했다. 경쟁사에 고객(은행)을 빼앗기는 것이 두려워 은행이 원하는 대로 신용도를 높게 남발한 것이다. 시장을 조작하고 교란하는 세력 때문에 채권 부도는 더 더디게 다가왔고, 그럴수록 더 많은 개미투자자의 단꿈이 산산조각 났다.

    결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은 고금리에 부동산 가격 하락이 더해지면서 대혼란을 맞는다. 이자 연체자가 대거 발생하고, 금융회사들이 파산하리라고 예측한 주인공들은 영화 제목처럼 ‘대형 공매도’를 치며 무책임하게 쾌락(이익)을 추구한 은행과 증권사의 어리석음을 죽비로 내리친다. 역사적으로 늘 그랬듯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에게 돌아갔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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