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호

‘모던 타임스’

산업화 파도에 말살돼가는 인간성의 풍자

  • 윤문원 이지딥 논술연구소장 mwyoon21@hanmail.net

    입력2006-02-02 13:4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노동은 인간의 영원한 화두다. 비정규직 채용, 파업 사태, 실업 문제에 이르기까지 노동은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영화 ‘모던 타임스’는 산업화가 가져온 인간소외의 문제를 블랙 코미디로 그려냈다. 20세기 공업화 시대의 사회 모순을 풍자하는 이 영화를 통해 21세기 노동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모던 타임스’
    인류의 역사가 발전하면서 노동의 방식도 바뀌어왔다. 산업혁명을 거치며 등장한 공장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덕분에 땅과 결별하는 사람이 많이 생겨났다. 공장의 작업은 규격화됐고, 이러한 단순 작업에 투입되는 사람은 별다른 기술이 없어도 좋았다. 노동자는 기계 부속처럼 단순한 동작만 되풀이하면 됐다.

    산업혁명이 100여 년간 진행돼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규모가 커진 공장을 경영할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부응해 테일러는 노동자의 작업시간을 측정하고 그들의 목표량을 설정하는 과업 관리를 통해 작업의 효율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그리고 포드는 이를 바탕으로 컨베이어 벨트 위에 흘러가는 물건에 단순한 조작만 가하면 되도록 작업대를 설치해 일괄생산체계를 자신의 자동차 공장에서 현실화했다.

    이와 같은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는 인간의 행동을 기계를 다루듯이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저변에 깔고 있다. 노동자의 미세한 동작 하나하나를 관리자의 의지대로 길들이고 작동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테일러나 포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기계’라는 사실이 문제의 출발점이다.

    노동은 현실 사회에서 영원한 과제다. 미래 노동의 전망, 기계의 발전에 따른 인간 삶의 변화, 노동의 변화에 따른 직업의 다양화, 비정규직 채용, 파업 사태 등 노동과 관련한 여러 논제가 논술시험에 출제돼왔다.

    영화 ‘모던 타임스’의 시대적 배경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大恐慌) 시기로 채플린은 영화에서 당시 미국의 자화상을 풍자의 방식으로 그려냈다. 특히 자동화 기계 속에 말살돼가는 인간성과 산업사회가 가져다준 필연적인 인간 소외의 문제를 빠른 템포의 팬터마임과 몽타주 기법을 동원해 생생한 블랙유머로 그려냈다. 그는 20세기 공업화 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풍자함으로써 장밋빛으로 여기기 쉬운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사회적 모순까지 성찰하도록 일깨운다.



    채플린은 신문기자에게서 디트로이트의 한 청년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신경쇠약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기계를 사회와 인간을 위해 이용한다면 오히려 인간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지적 향상과 양질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습관적으로 볼트 조이는 노동자

    자막과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운 시계의 바늘이 6시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배경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이것은 ‘시간은 곧 생산량과 이윤을 좌우한다’고 여기던 당시 자본주의 제도의 속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특히 시계는 하루 일정한 시간 노동을 해야 했던 노동자의 정형화된 생활을 암시한다.

    화면에 영화 내용에 대한 해설이 자막으로 나온다. 영화는 대부분이 무성으로 해설이나 대사를 자막으로 보여주면서 가끔 목소리를 들려준다.

    “모던 타임스, 이 영화는 점점 공업화하는 각박한 사회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화면에 양떼가 몰려가는 장면이 나오고 그후에 수많은 단순노동자가 일터로 나가는 장면이 오버랩된다. 이처럼 채플린이 그리는 현대는 냉혹하다. 노동자들은 축사로 끌려가는 양떼처럼 공장으로 몰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당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저임금을 받고도 양처럼 순종했던, 노동자들의 열악한 지위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양떼가 몰려가는 장면에서 흰 양들 사이 까만 양이 한 마리 있다. 이것은 단순노동자들인 흰 양떼 속의 까만 양인 방랑자, 주인공 채플린의 외로운 모습을 상징한다.

    많은 이가 출근해 각자의 일터에 자리를 잡는다. 전기철강주식회사 사장은 집무실 스크린을 통해 작업 속도까지 일일이 점검하며 지시한다. 주인공인 채플린(찰리 채플린 분)은 전기철강주식회사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흘러가는 기계에 너트를 조이는 단순 작업을 반복한다. 벌이 눈앞에서 뱅뱅 돌며 위협해도 채플린은 쫓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러다간 조여야 할 기계가 어느새 저만큼 지나가버리기 때문이다.

    채플린이 잠시 틈을 타 화장실에 들어간다. 담배를 피우며 쉬는 사이 사장이 화장실에 설치된 화면에 나타나서 “꾸물거리지 말고 자리로 돌아가 일을 해!” 하고 외친다. 채플린은 컨베이어 벨트에 돌아와 볼트 조이는 일을 계속한다.

    노동자들의 식사시간을 줄이는 자동 급식 기계를 팔러온 사람들이 사장에게 “이 급식 기계는 점심시간을 없앰으로써 생산을 증가시키고 경비를 절감해줍니다. 노동자들 중 한 명에게 기계를 시험해보십시오. 귀하의 경쟁 회사를 앞서기 위해선 이 급식 기계의 중요성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하고 선전한다.

    점심시간. 채플린은 컨베이어 벨트 옆을 지나가는 사장 여비서의 옷에 달린 단추를 보고 볼트를 연상해 조이려 하고, 옆의 동료 노동자가 식사를 하기 위해 수프를 접시에 따라놓자 접시를 들고서도 볼트 조이는 동작을 하다가 수프를 다 쏟아버린다. 자동기계처럼 손으로 나사를 죄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습관, 아니 직업으로 인해 생긴 고질이었다.

    급식 기계를 파는 업자들은 사장과 함께 작업장으로 와 채플린에게 실험을 한다. 하지만 급식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엉망이 돼버리자 사장은 “이게 뭐야, 실용적이지 않잖아” 하면서 나가버린다. 채플린은 나중에 자서전에서 “나는 점심시간에도 노동자에게 일을 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시간을 단축하는 자동 급식 기계라는 것까지 궁리했다”며 기계화·자동화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오후 시간. 컨베이어 벨트의 돌아가는 속도를 최고로 올려 작업이 시작된다. 일관된 작업 속에서 잠시라도 손을 쉴 수가 없다. 한참 단순 작업을 하다가 그만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놓쳐 컨베이어 벨트 위에까지 올라가 볼트를 조이다가 톱니바퀴 기계에 빨려들어가서도 볼트를 조인다. 기계의 노예가 된 인간의 비애를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채플린은 지나가는 여인이 앞가슴에 달고 있는 볼트 모양의 단추와 엉덩이 부분의 단추를 조이려다 치한으로 몰린다. 볼트를 조이는 일에 완전히 미친 채플린은 정신병원으로 실려가 치료를 받는다. 신경쇠약은 치료했지만 실업자 신세가 된 그는 병원을 나와서 길거리를 배회한다. 문득 데모대를 선동하는 차량에서 떨어진 깃발을 주워 흔들다가 그는 주동자로 몰려 경찰관에게 잡혀간다.

    “감옥에 더 있으면 안 될까요?”

    장면은 주인공인 채플린에서 부둣가에 사는 젊은 처녀(폴레트 고다르 분)가 등장하는 배경으로 바뀐다. 그는 배 위에서 바나나를 훔쳐 굶주리는 부둣가의 아이들에게 던져주고 나머지를 어머니를 잃고 배가 고픈 두 여동생과 실직한 아버지에게 나눠준다.

    공산주의자들의 주모자로 오인된 채플린이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다. 교도관들이 죄수들을 상대로 마약 수색을 실시하자 죄수들은 교도관들을 붙잡아놓고 탈옥을 시도한다. 이때 죄수 신세인 채플린은 다른 죄수들의 탈옥을 막고 이들을 붙잡는 데 공을 세운다.

    밖에선 실업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돼 실직자들이 데모를 한다. 젊은 처녀의 아버지도 데모를 하다가 경찰관의 총에 맞아 숨진다. 젊은 처녀와 두 여동생은 부둣가의 거리에서 땔감을 훔치다가 경찰관에 붙잡혀 두 여동생은 소년원으로 보내지고 젊은 처녀는 도망을 친다.

    채플린은 죄수들의 탈옥을 막은 공로로 형무소에서 신문을 보며 안락하게 지내고 있다. 신문에는 ‘파업과 폭동, 폭도들 식량배급 공격’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돼 있다. 사면을 받아 자유의 몸이 된 채플린은 밥과 잠자리를 제공해주던 감옥에서 나오기가 두려워 보안관에게 “여기가 너무 좋은데 더 있으면 안 될까요?” 하고 묻는다. 보안관은 그에게 취직에 도움이 될 소개장을 써준다.

    배고픔과 실업이 일상화된 대공황 사회로 다시 내던져진 채플린은 조선소에 소개장을 들고 가서 취직을 한다. 조선소에서 선임 노동자가 쐐기를 찾아오라고 하자, 만들던 배를 고정해 놓은 쐐기를 빼 배를 진수시키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조선소를 그만둔 채플린은 죄를 저질러서 형무소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거리로 나선다.

    젊은 처녀가 빵을 훔쳐 도망가다가 채플린과 부딪쳐 넘어지면서 잡히고 만다. 지나가는 경찰관에게 빵 가게 주인이 “이 여자애가 빵을 훔쳤어요”라고 하자 채플린이 “아니오. 내가 훔쳤소”라고 말한다. 하지만 목격자의 진술로 젊은 처녀가 잡히고 만다.

    형무소로 돌아가려고 채플린은 카페에 가서 무전취식을 하고 거리에서 돈 없이 담배를 사고, 물건을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난 뒤에 경찰을 불러 일부러 잡힌다. 경찰차에 실려가는 채플린. 젊은 처녀도 차에 실려 있다.

    경찰차가 가다가 고장을 일으켜 길바닥으로 튕겨져 나온 채플린과 젊은 처녀는 도망쳐 잔디밭에 마주앉는다. 채플린은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 젊은 처녀와 행복한 가정을 꾸밀 것을 상상한다.

    “노력한들 무슨 소용이 있죠?”

    채플린은 백화점에 가서 보안관이 써준 소개장을 보여주고 경비로 취직한다. 밤에 백화점 경비를 하고 있는데 강도가 들었다. 이 강도들은 전에 전기철강회사에 근무하던 동료였다. 실직한 뒤 배가 고파 강도짓을 한 것이다. 채플린은 강도들과 백화점에 있는 술을 마신다. 취한 채플린은 판매대 위에서 잠을 자다가 백화점 개장 시간에도 일어나지 못해 경찰에 넘겨진다.

    열흘 뒤 풀려난 채플린은 젊은 처녀와 함께 비어 있던 낡은 나무 집에 보금자리를 꾸민다. 채플린은 신문에서 공장의 모집 광고를 보고 달려가 수많은 지원자를 밀치고 일을 얻지만, 반나절 만에 공장이 파업에 들어가 일을 그만두게 된다(그가 실수로 판자를 밟고 그 위에 있던 돌멩이가 파업을 해산하는 경찰에 날아가 잡혀간다).

    일주일 후 젊은 처녀가 부둣가 길거리에서 춤을 춘다. 이를 본 카페의 주인은 젊은 처녀를 채용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게 한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채플린은 젊은 처녀의 주선으로 카페에 웨이터 겸 가수로 취직이 된다. 한편 경찰관들은 도망친 젊은 처녀를 찾고 있다. 채플린은 카페에서 웨이터로 일하지만 실수를 연발해 결국 노래하는 일을 하게 된다. 채플린이 노래할 순서다. 반주가 나오는데도 가사를 잊어버려 노래를 부르지 못하자 소녀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입 모양으로 “노래해요. 가사는 상관 말고 불러요” 하고 말한다.

    채플린은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흥겨운 목소리로 무국적어의 가사로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가 ‘티티나’다. 이것이 이 영화에 나오는 채플린의 유일한 목소리다. 카페 손님들은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이제 젊은 처녀가 춤을 출 차례다. 춤을 추러 나온 젊은 처녀는 대기하고 있던 경찰관들에게 붙잡히지만 채플린의 도움으로 도망친다. 새벽에 언덕에 마주앉아 젊은 처녀가 먼저 말을 건넨다.

    “노력한들 무슨 소용이 있죠?”

    “그렇지만 죽는다고는 말하지 마! 삶을 포기해선 안 돼. 우린 잘 해낼 수 있어!”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쭉 뻗어 있는 비포장도로를 걸어가면서 새로운 방랑을 시작한다. 희망과 행복을 상징하는 힘찬 음악과 함께 엔딩 타이틀이 나오면서 영화는 끝난다.

    70년 전인 1936년에 상영된 ‘모던 타임스’에서 감독, 주연, 각본, 제작, 음악을 모두 맡은 전설적인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1889∼1977)은 빠른 동작과 짤막한 농담이 곁들인 희극(slapstick comedy)으로 서민의 삶이 갖는 비애와 유머를 동시에 표현했다.

    “롱샷은 희극이고, 클로즈업은 비극이다.”

    롱샷은 희극, 클로즈업은 비극

    이 한마디에 찰리 채플린의 영화 철학이 모두 담겨 있다. 그는 멀리서 보면 웃는 얼굴이지만, 클로즈업하면 눈물이 흐르는 모습을 통해 희극 뒤에 감춰진 비극을 표현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채플린은 일생을 희극을 통해 물질 만능, 인간 기계화를 향해 치닫는 사회를 통렬히 비판했다. 거의 모든 작품이 단순한 웃음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적인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중절모에 코밑수염을 하고 헐렁하고 짤막한 바지에 지팡이를 든 특유의 ‘방랑자(Tramp)’ 캐릭터가 엮어내는 갖가지 희비애락(喜悲哀樂)은 단순한 광대가 아닌, 끊임없이 사회와 대립하는 방랑자의 모습을 상징한다. 채플린 특유의 ‘비애감이 서린 유머(pathos-humor)’의 농도는 더욱 짙어졌다.

    그는 1950년대 미국사회의 서슬 퍼런 매카시즘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미국을 떠났다. 이후 1972년 아카데미 특별공로상을 받기 위해 잠시 미국에 들렀으나 다시 스위스로 돌아갔으며 1977년 크리스마스에 8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영화 속 논술·구술 워밍업’

    사람이 ‘왜 일을 할까?’를 생각해보자.

    ‘핵심 기본 논제 1’

    ‘모던 타임스’는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을 묘사한 것이지만, 2000년대 정보화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주고 있다. 당시에 기계가 인간을 종속시켰다면 현재는 컴퓨터로 대변되는 정보화가 인간을 종속시키고 있다. 역사적으로 변천해온 노동의 의미와 미래 노동의 전망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예시 답안’

    노동은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다. 인간은 노동함으로써 재화를 획득할 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과정에서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수행한다. 자급자족 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노동이 행해졌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이러한 노동의 본래 의미는 퇴색했다. 포드주의의 대두와 대량생산(大量生産) 체제의 도래로 인간의 노동은 더는 성취를 위한 일이 아닌 생존 수단으로 전락했다.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에서 보듯이 생산의 효율성을 증진하기 위해 인간이 기계에 예속되고 만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할 삶까지 무시당한 격이다. 따라서 산업화 시기에 노동의 인간 지배는 지양돼야 하며, 미래의 노동은 노동의 인격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앨빈 토플러가 지적했듯이 현대사회는 기계에 의한 자동화를 중심으로 한 제3의 물결로 나아가고 있다. 그는 독창적이고 지능적인 ‘두뇌 노동자’의 출현으로 산업사회에서 반복 작업으로 인해 노동자가 고통 받는 폐해는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사회에서는 인간이 적응력, 독창력, 고학력을 통해 노동의 인간 지배를 막으면서 오히려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엔 많은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정보화 시대의 도래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사회가 기술적으로 진보하면서, 노동자의 기능이 종전 시대와는 현격하게 다를 것이란 기대감과 희망도 생겼다.

    하지만 인간의 적응력과 독창성에는 개인차가 있고,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고학력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개인의 능력차에 따른 노동 불평등은 미래로 갈수록 심화될 전망이다.

    지식정보화 사회에서는 단순한 일을 반복 숙달한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없다. 정보의 불균등으로 인해 교육 수준이 낮은 노동자는 오히려 종전의 산업사회에서 누리던 최소한의 혜택도 점점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결국 과거 산업사회의 생산수단이 이제 정보로 바뀐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지식정보화 사회의 출현으로 새로운 노동자 개념이 형성될 것이라는 시각은 옳지만, 노동의 본연적(本然的) 가치를 원상 복구하는 데 역시 문제가 발생한다.

    지식정보화 사회의 도래로 노동의 비인간화가 더욱 심화될 수 있다. 노동의 비인간화를 최소화하려면 사회보장제도의 확립과 충분한 교육 기회의 보장, 정보 공유 등을 통해 노동이 인간적인 삶에 다가갈 수 있도록 그 바탕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핵심 기본 논제 2’

    산업혁명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계의 발전이 인간의 사회 관계와 문화 양식을 어떻게 변화시켜왔으며, 이러한 변화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논술하시오.

    ‘예시 답안’

    산업혁명 이후로 계속된 과학기술과 공업의 발달은 인류에게 물질의 풍요를 가져다줬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한 베이컨의 발전 지향적 사고에 따라 노력해온 결과, 재화의 생산량은 증대되고 공간거리는 단축되었다. 하지만 문명의 발달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도 나타났다.

    기계 문명은 인간을 기계화·상품화했다. 기계의 발달로 시장 체계가 성립되고 이는 대량 생산으로 인한 인간의 몰(沒)개성화를 야기했다. 시장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단지 한 단위의 노동 요소로 간주된다. 기계 문명의 발달은 문화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문화의 획일화를 초래했다. 발달한 정보 매체와 운송 수단을 통해 중심지의 문화가 주변의 문화를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문명의 발달은 행위 동기를 이윤 동기로 변화시켰다. 문명의 발달은 사람들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의식에도 혼란을 가져왔다. 문명사회는 인류에게 생각의 변화도 요구한다. 이러한 문화 변화는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이윤 동기가 판단의 주요한 요소가 됨에 따라 소유 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기계 문명 아래 오로지 성장과 발전만을 목표로 자연과의 생태학적 관계나 다른 구성원과의 유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달려 나가고 있다. 결국 이것은 현대사회가 소유 양식의 삶을 추구하는 사회임을 방증한다. 둘째는 전통 의식의 혼란에 따른 아노미 현상을 들 수 있다. 최근 증가하는 자살률과 반인륜적 범죄가 곧 아노미 현상을 의미한다.

    그간 인류는 기계의 발달을 통해 물질적 풍요와 시공간의 단축이라는 혜택을 향유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했고 지역의 고유성을 파괴하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결국 이는 현대사회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이익사회임을 보여준다. 이익사회는 소유 양식의 삶을 의미한다. 요즈음 인기 있는 슬로 푸드나 느리게 살기 운동은 이익사회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미래의 우리 사회는 이익사회의 부작용을 어떻게 고쳐 가느냐에 달렸다.

    ‘모던 타임스’

    찰리 채플린 주연 영화 ‘모던타임스’의 포스터.

    *관련 기출문제*

    제시문 (가), (나)를 활용하여 ‘노동’과 관련한 (다)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라. 1,600±60자 (서강대 2003 정시)

    제시문

    (가-1) 낙원에서는 노동을 한다는 것이 고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즐겁기만 하였을 것이다. 인간의 노동 덕분에, 하느님이 창조하신 바는 자라나고 성숙하여 풍부한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이었다. …(중략)… 하느님이 인간을 낙원에 들여보내신 것은 일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노동하는 사람은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의 시선을 창조계 전체로 옮겨간다. 정말 세계는 한 그루 나무와 같다. 세계에는 섭리가 이중으로 작용한다. 자연에 맡겨진 부분과 의지에 맡겨진 부분이 이중으로 작용한다. 그 모두가 인간이 교육을 받는 표지이고, 교양을 쌓는 밭이며, 인간이 발휘할 기술인 것이다. 이제 의미가 밝혀진다. 하느님이 인간을 낙원에 들여보내신 것은 일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거기서 농사를 지으라는 뜻에서였다. 그것은 노예가 하는 강제 노역이 아니라 자유의지에서 우러난 지성인의 작업이었다. 이런 일에 종사하는 것처럼 순진무구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인간이 그것을 지혜롭고 현명하게 수행한다면 노동보다 고상하고 그보다 성취적인 일이 또 있겠는가?

    아우구스티누스, ‘창세기 축자 해석’에서

    (가-2)

    23. ① 사람은 누구나 일하고,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공정하고 유리한 노동 조건을 누리고, 실업에 대해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② 사람은 누구나, 어떤 차별도 받지 않고, 동일한 노동에 대해 동일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③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에게 인간의 존엄성에 알맞은 생활을 보장해주는,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사회적 보호 수단으로 보충되는, 공정하고 유리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④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또 이에 가입할 권리를 가진다.

    24. 사람은 누구나, 합리적인 노동 시간 제한 및 정기적인 유급 휴가를 포함한, 휴식과 여가를 가질 권리를 가진다.

    ‘세계인권선언’ 1948년, 제3차 유엔총회에서

    (나-1) 공장을 끼고 흐르는 작은 내를 건널 때는 숨을 쉬지 않았다. 시커먼 폐수 폐유가 그냥 흘렀다. 근로자들은 아침 일찍 공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녁때 노동자들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계속 조업 공장의 새벽 교대반원 얼굴에는 잠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공원들은 잠을 쫓기 위해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일했다. 영국의 상태는 아주 끔찍했던 모양이다. 로드함 공장에서는 어린 공원들이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채찍질을 했다는 기록을 나는 읽었다. 이 로드함 공장이 오히려 인간적이었다는 기록도 나는 읽었다. 리턴 공장에서는 어린 공원들이 한 공기의 죽을 먹기 위해 서로 싸웠다. 성적 난행도 당했다. 공장 감독은 무서웠다. 공원들의 손목을 묶어 기계에 매달았다. 공원들의 이를 줄로 갈아버릴 때도 있었다. 리턴 공장의 공원들은 겨울에도 거의 벌거벗고 일했다. 하루 열네 시간 노동은 보통이었다. 공장 주인은 노동자들이 시계를 갖는 것을 금했다. 하나밖에 없는 공장 표준 시계가 밤늦게까지 일을 하게 했다. 이들 노동자와 가족들이 공장 주변에 빈민굴을 형성하고 살았다. 노동자들은 싸고 독한 술을 마셨다.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복음만이 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참혹한 생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아편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자식에게까지 쓰는 사람이 있었다. 공장 주인과 그의 가족들은 상점이 들어선 깨끗한 거리, 깨끗한 저택에서 살았다. 그들은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교외에 그들의 별장이 있었다. 신부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영국의 노동자들은 공장을 습격했다. 그들이 제일 먼저 때려부순 것은 기계였다. 프랑스의 철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망치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절망에서 나온 부르짖음이었다.

    조세희,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서

    (나-2) 오늘날 생산물만이 중시되고 그것을 만들어낸 노동이 등한시된다는 것은 단지 상점이나 시장, 무역의 경우에 한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적인 공장 안에서도 노동자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적으로 동일하다. 작업상의 협력이나 이해, 상호평가란 그야말로 고위층의 권한에 속할 뿐이다. 노동자 계층에 있어서 여러 부서와 여러 직무 사이에 형성된 관계란 다만 사물간의 관계일 뿐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아니다. 부품은 명칭과 형태, 원료가 기입된 쪽지가 붙여져 유통된다.

    이 부품이야말로 바로 인간이며, 노동자는 다만 교환 가능한 부품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부품은 제조 명세서를 갖는다. 또 몇 개의 큰 공장의 경우처럼 노동자가 출근시에 죄수같이 가슴에 번호를 단 사진이 붙어 있는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 그 신분 확인 절차는 가슴을 찌르며 고통을 주는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사물이 인간의 역할을 하고 인간이 사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야말로 악의 근원이다. …(중략)… 큰 공장은 물론이고 조그만 공장에서까지 남녀 노동자들은 명령에 의해 있는 힘을 다해서 대충 1초마다 한 번씩 행하는 대여섯 개의 단순한 동작을 끊임없이 되풀이할 따름이다. …(중략)… 기계 작업은 마치 시계의 똑딱 소리처럼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 경우 하나의 일이 끝나고 다른 일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의 기운 빠지는 듯한 단조로운 소리를 오랫동안 듣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노동자는 자기 몸으로 그것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몬 베유, ‘노동일기’에서

    (다-1) 우리는 노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곧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나 르네 크렐의 ‘우리에게 자유를’을 연상합니다. 분명 그들의 이미지나 비판은 지난날 옳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통적인 산업주의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오늘날 급속히 진화되고 있는 새로운 산업에는 들어맞지 않습니다.

    분업화된 공장 노동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역시 비참합니다. 그러한 공장형의 노동은 오피스에도 들어와 개개의 노동자는 작은 반복 작업만을 되풀이함으로써 자기의 일이 전체에 이어진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자기 재량이나 창조력을 발휘할 기회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직업을 보존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노스탤지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이제까지의 ‘제2의 물결’ 산업에서는 공정을 분업화, 반복화해서 인간이 기계처럼 일하는 것이 능률을 올리는 요령이었습니다. 이제 그런 일은 컴퓨터가 더 빠르게 잘해주고, 위험한 작업은 로봇이 해줍니다. 지금까지의 공정은 시대와 함께 채산성도 생산성도 떨어지고 있습니다. 변화를 촉진하는 조건은 갖추어진 셈입니다. …(중략)…

    ‘제3의 물결’의 노동자는 더욱 독창적이고 더욱 지능적이라서 이제는 기계의 부속품이 아닙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기능과 특수 지식이 있는 인간입니다. 자기 전용의 연장 상자를 가지고 있었던 산업혁명 이전의 직업인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말하자면 ‘두뇌 노동자’는 기능과 정보가 가득히 들어 있는 ‘두뇌 도구 상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숙련 노동자가 갖지 못한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노동자는 자립한 직업인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아무하고나 교체가 가능한 조립 라인의 노동자와는 그 질이 다릅니다. 젊고, 교육 수준도 높고, 반복 작업은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일을 해 내기 때문에 상사의 잔소리를 싫어하고 항상 자기 주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애매한 공정이나 직제의 변화에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새로운 노동력이며 그 수는 자꾸자꾸 늘어나고 있습니다. 경제가 ‘제2의 물결’에서 ‘제3의 물결’로 옮겨짐에 따라 새로운 가치체계가 생겨남과 함께 노동자의 기능도 새로워집니다. …(중략)…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와 정반대, 말하자면 ‘마르크스를 물구나무 세운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경제에서 흥성하는 부문은 수천명에 이르는 노동자에 의한 동일화, 규격화된 반복 작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필요로 하는 것은 적응력과 독창력과 고학력을 갖춘, 개성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노동자입니다.

    앨빈 토플러, ‘전망과 전제’에서

    (다-2) 미래의 노동은 자동화 시대의 ‘생활 배우기’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전기 테크놀로지에서 흔히 나타나는 패턴이다. 이것은 문화와 테크놀로지, 예술과 상업, 일과 여가라는 낡은 이분법을 없애버린다. 단편화가 지배적이던 기계 시대에는 여가란 일이 없는 것, 또는 단순히 놀고 지내는 것이었지만, 전기 시대에는 그 반대가 맞는 말이 된다. 정보 시대가 모든 능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시대의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대상에 관여함으로써 가장 한가하게 여가를 누리게 된다. …(중략)… 현재의 노동력을 산업으로부터 철수하려고 하는 이 자동화의 작용 때문에 학습 그 자체는 생산과 소비에서 중요한 것이 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실업에 대한 불안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때 급료를 받아가며 배우게 되는데, 이는 이미 지배적인 고용 형태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내에서 새로운 부(富)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회 내에서 인간이 떠맡는 새로운 ‘역할’이다. 반면에 기계적인 구식 관념인 ‘직능’, 즉 ‘노동자’에게 주어진 단편화된 일이나 전문가적 직위와 같은 개념은 자동화 상황에서는 더 이상 의의를 가지지 못한다. …(중략)…

    자동제어 기구의 전기 시대는 갑자기 사람들을, 앞선 기계 시대의 기계적·전문가적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킨다. 기계와 자동차가 말을 해방시켜서 오락의 세계 속으로 던져 넣은 것처럼, 자동화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 해방에 대한 대가로, 내부의 자원을 이용해 스스로 고용을 창출하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사회에 참여해야 하는 부담을 갑자기 안게 되었다. …(중략)…

    ‘모던 타임스’

    영화 ‘모던타임스’의 주인공 찰리 채플린과 젊은 처녀.

    전기적 에너지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장소나 작업의 종류와는 무관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작업에서의 탈중심화와 다양성이라는 패턴을 형성한다. 예를 들면, 이것은 난롯불과 전깃불의 차이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논리이다. 따스함과 빛을 찾아 난롯가나 촛불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은 전깃불을 지급받는 사람만큼 생각이나 과제를 자유롭게 추구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자동화 속에 숨어 있는 사회적·교육적 패턴은 자기 고용(self-employment)과 예술적 자율성의 패턴이다. 자동화가 세계적 규모의 획일화를 가져온다고 놀라 당황하는 것은, 이제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기계적 규격화와 전문화의 미련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마셜 맥루언, ‘미디어의 이해’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Tip’

    ●제시문은 노동에 대한 보편적 이해와 구체적 현실 그리고 변화된 정보화 사회에서 노동의 새로운 전망 등을 다룬 세 묶음의 글로 이뤄져 있다. 출제자는 제시문을 통해 노동에 대한 확장된 논의를 펼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 노동의 새로운 조건과 의미를 타진하는 (다)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야 하는데, (가)와 (나)에서 구체적 논거를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제시문의 의미와 구조를 먼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가), (나)는 ‘노동’에 대한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가-1)은 ‘노동은 고상하고 성취적인 일’이라며 노동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내비친다. (가-2) 또한 ‘세계인권선언’을 명시하면서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반면 (나)는 노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나-1)에서는 산업혁명 당시의 영국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묘사하며, (나-2)는 노동이 교환 가능한 부품으로 여겨진다. 단순 반복되는 작업에 인생을 소진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진다.

    ●논제는 (다)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라는 것으로 (다-1)에서는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노동의 의미는 산업사회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노동의 새로운 의미를 전망하고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 노동자는 독창적이고 지능적인 전문인이기 때문에 공업화 시대의 노동자가 겪었던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2)에는 미래 사회의 자동화가 인간을 해방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앨빈 토플러가 예견한 미래 사회에서 맥루언의 전망처럼 사람들이 산업사회에서 겪었던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펼쳐야 한다.

    ‘예시 답안’

    시오노 나나미는 한 작품에서 노동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노동은 단순히 돈벌이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가치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현상에 비춰 보았을 때 노동은 제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수많은 청년이 직장을 구하지 못해 상실감에 빠져 있으며 노동자들에게도 노동은 단순히 생계수단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인간은 더욱 소외될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의 제 기능 상실에 대한 원인 진단과 해결책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노동은 단순한 생계수단으로 전락하기 전까지는 즐거운 행위이자 주어진 소명이었다. (가-1)과 (가-2)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노동은 ‘자유의지에서 우러난 지성인의 작업’이고 하나의 권리였다. 하지만 이런 개념은 대량생산체제의 도래로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대량생산체제는 노동의 주체인 인간을 기계 부품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생산의 효율성을 증진하기 위해 분업을 도입했고, 노동자는 한 가지의 작업을 맡게 되어 자신의 일이 어떤 가치를 갖는지도 모른 채 단순 작업만 반복하는 역할로 전락한 것이다. 노동자는 기계 부품화됐고,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착취하기 시작했다. 저임금·고강도의 노동, 인권 유린 등의 착취를 통해 노동자는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동의 제 기능 상실로 인한 인간 소외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 바로 (다-1)과 (다-2)의 견해다. (다-1)에서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이라는 새로운 가치체계의 도래로 종전의 개념과는 다른 독창적이고 지능적인 ‘두뇌 노동자’의 출현을 예측하고 있다. ‘두뇌 노동자’의 출현으로 산업사회에서 반복 작업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의 폐해는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는 예측도 함께 내놓았다. (다-2)도 (다-1)과 마찬가지로 전기 시대에는 기계 시대의 노동자 개념이 사라진다는 주장이다.

    분명 지식정보사회의 출현으로 새로운 노동자 개념이 형성될 것이라는 견해에는 수긍이 간다. 그러나 노동 본연의 가치를 원상 복구하는 데는 여전히 문제가 있다. 첫째, 산업화 시대의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양상이 계속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뇌 노동자’들은 지식과 정보가 곧 ‘부(富)’인 현 사회에서 특권 계층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교육 기회가 불균등한 현실에서 자본가-노동자의 구도가 두뇌 노동자-일반 노동자의 양상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둘째, 로봇과 소수의 두뇌 노동자가 생산을 전담하게 되면 대량 실업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노동자에게서 생계 수단인 노동의 기회마저 박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다수의 실업자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없게 돼 인간 소외의 문제는 더욱 심화된다.

    ‘모던 타임스’
    尹文遠
    ● 1953년 부산 출생
    ●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 KBS 라디오 사회교육방송 토론 프로그램 진행, 숙명여대·장안대 강사
    ● 現 이지딥 논술연구소장, (사)100인 영상작가위원장
    ● 저서 : ‘이지딥 논술·구술 골격 제시문’ ‘영화 속 논술’ ‘애수에서 글래디에이터까지’ ‘대한민국 보고서’ 등


    노동의 본연적 가치는 대량생산체제의 도래로 인해 설 자리를 잃게 됐고 지식정보사회의 출현 또한 노동의 본연적 가치를 침해한다. 노동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첫째, 노동을 원하는 사람에게 모두 일자리를 공급해야 한다. 둘째, 앞으로의 지식정보사회에 대비하여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셋째, 노동자를 이윤 창출의 도구가 아닌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 위의 세 가지 대책이 실현돼야 산업화로 인한, 지식정보사회의 도래로 인한 노동 본연의 가치 상실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동의 변질로 인해 발생하는 인간 소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탕도 마련될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