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호

30년 경력 전직 외사(外事)경찰관이 털어놓은 기밀정보 비화

“김포공항 ‘배달’된 김형욱, 검은 자루 쓴 채 끌려나왔다”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8-04-07 2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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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경력 전직 외사(外事)경찰관이 털어놓은 기밀정보 비화
    윤모(72) 전 경위는 경찰에서 31년간 외사(外事) 업무에 종사했다. 외사란 말 그대로 외국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대사관, 영사관 등 국내에 상주하는 외국 공관, 상사(商社) 및 단체에 대한 정보 수집, 외신 분석, 국내 거주 외국인 및 해외출입국자 동향 파악 등이 주요 임무다.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주한미군에 대한 정보 수집도 한다.

    윤씨가 경찰에 들어간 것은 1962년. 이듬해 4월 서울시경찰국(시경) 외사계(정보4계)로 발령 났다. 1967년 치안국(치안본부의 전신) 외사과로 옮겨간 후 1994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한 번도 부서를 옮기지 않았다.

    퇴직 당시의 계급은 경위. 1969년 경위로 진급했으니 만년 경위였던 셈이다. 퇴직한 후에는 민간인 연구관으로 외사부서에서 계속 근무했다. 컴퓨터 범죄수사에 투입된 그는 2000년 사이버테러대응센터 창설요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경찰을 떠난 것은 2005년. 서울대 법대 출신의 수재로, 군 제대 후 순경으로 경찰에 투신해 만년 경위로 지낸 수수께끼 같은 그의 이력에 대해선 뒤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윤씨는 최근 기자와 만나 경찰 재직 시절 취득한 한국 현대사의 비화를 털어놓았다. 시기적으로는 3공화국에서 5공화국까지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얘기가 많았다. 기자는 첫 인터뷰 이후 세 차례 더 만나 증언의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들려준 얘기 중에는 일반의 상식을 뒤집는 게 많았다. 이를테면 박정희가 김대중을 후계자로 생각했고, 야권 지도자에게 정치자금으로 거액을 건넸다는 얘기는 좀체 믿기지 않았다. 6·10민주항쟁 때 안기부가 야권에 거액을 지원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김대중 납치사건과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증언은 정부기관의 공식적인 조사결과와 어긋나는 것이었다.



    정보 비화인 그의 얘기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판단하기 힘들었다. 오래된 일인데다 관련자 중 세상을 떠난 사람이 많고 언론이 접근하기 힘든 권력기관의 내밀한 일이라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얘기는 확인의 실효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됐다.

    청와대에 고급정보 보고

    윤씨의 과거 동료들을 접촉한 결과 그가 경찰에서 어떤 일을 했고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몇몇 전직 경찰 간부가 그의 존재를 확인해줬다. 옛 동료 한 사람은 그의 정보력에 대해 “FBI 첩자로 의심될 만큼 고급정보와 권력층 정보에 밝았다”고 평했다.

    윤씨의 고유 업무는 외신과 국외 간행물 분석이었다. 그는 해외방송은 물론 북한방송까지 청취했다. 물론 정보업무의 일환이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업무는 매일 외사정보를 취합해 정보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외사정보보고서는 경찰 내 관련 부서 외에 청와대 종합상황실에도 전달됐다.

    윤씨의 업무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별보(별건 보고)’라고 해서, 청와대 경호실과 비서실에 비공식적으로 특별정보보고서를 건넨 것이다. 여기엔 국내 정치상황과 관련된 정보도 담았다고 한다. 그가 이런 비밀스러운 일을 했다는 것은 옛 동료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외사정보보고서는 요즘도 매일 작성돼 청와대에 전달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청 외사국 관계자는 외사정보보고서의 신빙성에 대해 “정보는 첩보와 다르다”며 “대체로 사실로 확인된 내용만 작성한다”고 밝혔다.

    현대사의 이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윤씨의 증언은 흥미로웠다. ‘사실’이 아닌 ‘정보’지만 그의 증언을 기사화하기로 판단한 데에는 그가 고급정보를 취득할 만한 위치에 있었고 제시하는 정황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점이 고려됐다. 그가 들려준 얘기 중에는 당시 외사정보보고서에 적혔던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고 한다. 이제 그와 함께 현대사의 어두컴컴한 터널로 들어가보자.

    [ 김형욱 납치사건 ]

    30년 경력 전직 외사(外事)경찰관이 털어놓은 기밀정보 비화

    1979년 11월26일 김재규 전 중정부장이 첫 재판을 받고 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실종된 것은 10·26 직전인 1979년 10월초. 2005년 이 사건을 조사한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에 따르면, 김형욱은 1979년 10월7일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중정의 사주를 받은 외국인 2명에 의해 살해됐다. 진실위가 발표한 사건 요지는 이렇다.

    ▲김재규 중정부장의 지시를 받은 이상열 프랑스 공사가 중정 해외연수생 신모, 이모 2명에게 살해 지령을 내렸다. ▲신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동유럽인 2명에게 살해를 청부했다. ▲이들은 김형욱을 차에 태운 뒤 인적이 드문 숲으로 끌고 가 중정에서 건네받은 소련제 권총으로 7발을 발사해 죽인 후 낙엽으로 주검을 가렸다.

    비행기 밑에서 대기하던 세단

    이에 대해 수사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무엇보다도 조사 대상인 국정원이 조사 주체로서 일부 관련자의 일방적 진술만을 토대로 결론을 내렸다는 게 문제라는 것. 핵심 인물인 이상열 전 공사의 증언이 확보되지 않은 점은 발표내용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꼽혔다. 그밖에 권총 분실, 치밀하지 못한 납치과정, 엉성한 시신 처리 등 미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게 공통된 지적이었다.

    윤씨는 이에 대해 “국정원 진실위 발표는 소설”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에 따르면 김형욱은 1979년 10월 김포공항을 통해 국내에 들어온 직후 실종됐다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승객이 다 내린 뒤 얼마 지나서 얼굴에 검은 자루가 씌워진 사람이 따로 내렸다. 양복을 입은 두 사람이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행기 바로 옆에 대기 중이던 검은 세단에 그 사람을 구겨 넣고 사라졌다.”

    윤씨는 이 얘기를 김포공항에 나가 있는 외사요원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했다. 그가 특이동향 보고를 하면서 “김형욱이 들어온 것 같다”고 귀띔했다는 것.

    “그날 밤 관련 내용을 정보보고서에 담아 외사관리관에게 결재를 올렸다. 보고서 밑에 ‘열람 후 즉시 파기’라고 적었다. ‘김형욱’이라고 이름을 적지는 않았다. 일주일쯤 지나 김형욱이 실종됐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날 김형욱을 태우고 김포공항에 도착한 문제의 비행기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출항한 대한항공 여객기였다고 한다. 취리히는 김씨의 예금계좌가 있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윤씨는 “(김형욱을) 마취시킨 후 기내식 창고 같은 곳에 숨겨 데려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또 “김형욱 제거는 김재규의 작품”이라고 단언했다. 청와대 지하실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총으로 쏴 죽였다는, ‘박정희 살해설’에 대해서는 “무식한 소리”라고 일축했다.

    “김재규 아니면 김형욱을 죽일 사람이 없었다. 박정희는 김형욱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박정희를 분노케 한 김형욱 회고록이 이미 일본에서 출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형욱 회고록은 국내에서는 출판이 금지됐지만 외사계는 해외 경찰 주재관을 통해 그 책을 입수했다. 내가 가장 먼저 봤다. 중정도 갖고 있었다. 김재규는 그때 이미 박정희 암살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박정희가 죽을 경우 그의 경쟁상대는 김형욱이었다. 중정 출신 인물 중 미국이 가장 맘에 들어 한 사람이 김형욱이었기 때문이다.”

    “김형욱 출국보고 늦게 했다고 혼나”

    말하자면 회고록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 후계구도에 휘말려 살해됐다는 분석이다. 윤씨에 따르면 김형욱은 1973년 출국할 때, 알려진 바와 달리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게 아니라 홍콩으로 출국했다. 김형욱이 미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하자 대사관 측에서 “외무부 보증이 있어야 한다”며 비자 신청을 반려했다는 것. 그래서 비자가 필요 없는 홍콩으로 날아간 후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김형욱이 출국한 날은 내가 외사계 숙직을 서던 날이었다. 김형욱은 205호실을 이용해 출국했다. 205호실은 중정의 공항 분실이다. 그 탓에 경찰 보고가 늦어졌다. 늦게 보고했다고 윗사람에게 혼났다.”

    30년 경력 전직 외사(外事)경찰관이 털어놓은 기밀정보 비화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마지막 공식행사가 된 삽교천 준공식에 참석했다.

    윤씨는 당시 청와대 주변 정보를 근거로 김재규가 김형욱 납치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당시 경찰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김재규와 차지철이 싸우는 얘기가 화제였다. 김재규는 차지철의 땅투기를 박정희에게 보고했다가 혼난 이후 독대(獨對)도 맘대로 못했다. 박정희를 죽일 준비를 하고 있던 김재규는 주요 사안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김형욱 건도 보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차지철에게 김형욱을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윤씨는 김형욱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김형욱이 서울로 납치돼 온 뒤 김재규가 담당에게 ‘어떻게 됐느냐’고 확인했다. 담당요원은 ‘혼수상태에 빠진 김형욱이 탄 차를 폐차장 압축장치 속에 밀어넣었다’고 보고했다.”

    [ 박정희 암살과 미국 ]

    1979년 6월 카터 미 대통령이 방한하기 직전 한미관계는 매우 나빴다. 윤씨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미국 전투기 구입에 소극적 태도를 보인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도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박정희는 핵이 개발되면 북의 남침위협이 사라질 것으로 봤다. 핵을 개발한 후 유럽식 민주주의로 한국 정치를 현대화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이런 박정희가 못마땅했다. 핵무기 개발에 돈을 쏟아 붓지 말고 자국산 재래식 무기를 구입하길 바랐다. 카터가 내세운 인권은 외교무기의 하나로, 장식물일 뿐이었다. 미국은 자국 전투기를 사는 데 적극적인 쪽과 손잡으려 했다. 그런데 카터가 방한했을 때 박정희는 미국 전투기 구매를 약속했다. 미국은 그것이 중정의 막후 공작 덕분이라고 믿었다. 박정희만 제거되면 한국을 맘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 미국은 중정을 부추겼다. 그래서 중정 쪽에 ‘박정희를 제거하면 미국이 돕겠다’는 메시지가 흘러들어가게 했다.”

    “한국 정보기관에 우리의 뜻을…”

    윤씨는 이와 관련해 매우 구체적인 증언을 했다. 카터가 방한했을 때 주한 미대사관 간부회의에서 박정희 제거 공작이 논의됐다는 것이다. 회의 참석자는 대사, 부대사, CIA 한국 정·부 책임자, 대사관 정치과장 등이었다고 한다. 당시 윤씨가 미 대사관 주변에서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회의에서 이런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외국 국가원수를 죽이는 건 위법이다. 미국이 직접 손대면 안 된다.”

    “한국 사람에게 맡기면 된다. 한국 정보기관에 우리의 뜻을 흘리자.”

    [ ‘차지철 금고’의 150억 ]

    지난해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10·26 직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한테 돈을 받은 사실이 문제가 됐다. 박 후보는 청문회에서 “전두환으로부터 9억원을 받아 3억원은 수사격려금으로 되돌려주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6억원을 받은 사실이 있다”고 답변했다.

    윤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청와대 ‘박정희 금고’에서 나온 돈은 모두 39억원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9억원이 유족 대표인 박근혜에게 건네지고 나머지 30억원은 군부실력자가 가져갔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박정희 금고’와 더불어 ‘차지철 금고’가 발견됐다는 것. ‘차지철 금고’에는 150억원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윤씨에 따르면 이 돈도 군부 실력자가 처가 쪽으로 빼돌렸다는 것이다. 5공 정권이 들어선 후 대형 사기사건이 터지고 나서 이 돈의 이동경로가 확인됐다고 한다.

    윤씨는 이 사실을 미국 한인사회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를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10·26 직후 발간된 ‘신한민보’에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는 것. “기사 내용을 어떻게 믿느냐”는 질문에 윤씨는 “기사의 근거가 미 CIA 정보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 6·10항쟁과 안기부 공작 ]

    30년 경력 전직 외사(外事)경찰관이 털어놓은 기밀정보 비화

    1987년 6월10일 서울 을지로 일대에서 시위군중이 투석전을 벌이고 있다.

    1987년 1월에 발생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전두환 정권을 구석으로 몰고 갔다. 그해 4월 전 정권이 직선제 논의를 금지하는 4·13호헌조치를 선언하자 개헌을 촉구하는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어 6·10민주항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전국적으로 500만명이 시위에 참여해 직선제 개헌과 반독재투쟁을 외쳤다. 이에 여당인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가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해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고 선언했다.

    박종규의 조종

    6·10민주항쟁과 6·29선언에 대해서는 민주화운동세력의 대승리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그런데 윤씨의 증언은 이 같은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여권의 고도의 공작이 개입된 결과라는 것이다.

    “5공 초기 전두환과 육사 11기 동기생인 노태우-정호용-김복동 4명이 돌아가면서 대통령을 하기로 밀약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체육관 대통령’으로는 권위가 안 서니 직선제로 당선돼야 한다는 의견이 여권 내부에서 제기됐다. 당시 민정당의 인기는 15%였고 김영삼은 65%였다.

    이에 따라 여권은 치밀한 공작을 폈다. 김영삼을 견제하기 위해 정치정화법에 묶여 있던 김대중을 풀었다.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 과정에도 관여했다. 1987년 직선제 개헌으로 정국이 시끄러워지자 일련의 시나리오를 가동했다. 먼저 4·13호헌 선언으로 성난 민심을 자극했다. 여권이 예상한 대로 시위는 더욱 거세져 6·10민주항쟁이 발생했다. 6·10민주항쟁 당시 안기부는 야권에 시위자금으로 20억원을 지원했다. 그런 다음 ‘대통령선거는 없다.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다’라는 소문을 냈다. 이후 대혼란의 정점에서 미리 준비해둔 6·29선언을 터뜨렸다.”

    윤씨의 정보망에 따르면 당시 시중에 떠돈 소문대로 6·29선언은 노태우 후보의 뜻이 아니라 전두환 대통령의 작품이었다. 노 후보가 직선제에 반대하자 전 대통령이 “선거는 내가 해준다”며 밀어붙였다는 것. 6·29선언 이후 정국의 주도권이 여권으로 넘어갔다는 점에서 윤씨의 증언은 귀 기울일 만하다.

    [ 김대중을 박정희 후계자로 ]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은 김영삼·김대중·이철승의 3파전으로 치러졌다. 1차 투표 결과 김영삼·김대중 두 후보로 압축됐는데, 김영삼 후보의 득표수가 더 많았다. 하지만 결선투표에서 김대중 후보는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458표 대 421표. 1차에서 탈락한 이철승이 김대중 후보와 손을 잡은 덕분이었다.

    윤씨에 따르면 당시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 청와대가 개입했다고 한다.

    “통일대통령을 꿈꾸던 박정희는 호남표를 의식해 김대중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남북통일을 앞두고 김일성이 북쪽 대통령, 김대중이 남쪽 대통령을 맡는다는 전제에서다. 그런 다음 남북한 연합선거를 통해 자신이 통일대통령에 오른다는 계획이었다. 이런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먼저 국민복지회사건을 일으켜 김종필을 쳐냈다. 김종필이 사라지자 청와대 비서실장인 이후락이 급부상했다. 후계구도와 관련해 김대중을 라이벌로 의식한 이후락은 신민당 경선 당시 김영삼을 지원했다. 당시 주일대사로 일본에 가 있었지만 국내에 있는 자신의 세력을 동원한 것이다.

    경선 초반 김영삼의 당선이 유력하다는 메시지가 긴급히 박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박정희는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김대중을 도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철승은 결선투표에 들어가자 김대중을 밀었다. 박 정권이 원하던 바였다.”

    윤씨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 과정에도 청와대의 공작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7대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53.2%의 득표율로 45.2%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95만표 차이였다.

    윤씨에 따르면 “김대중을 전국적으로 지지받는 거물로 만들라”는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중정이 직접 선거에 개입했다. 물론 김대중을 당선시키려 했던 건 아니었다. 박 대통령이 김대중 후보를 적당한 표 차이로 앞선 것도, 일부 지방에서 김대중 후보 표가 예상외로 적게 나온 것도 다 중정의 공작이었다는 것이다.

    동료가 말하는 윤씨의 정보력

    “FBI 특수요원으로 의심”


    윤씨는 경찰 외사 분야에서 ‘전설적인’ 인물이다. 서울대 법대 출신이 순경으로 경찰에 지원했다는 것과 만년 경위였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지만, 그와 함께 근무했던 동료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다.

    그의 옛 동료인 K씨에 따르면 윤씨는 동료들 사이에서 ‘비정상’이라는 평을 들었다. 일상생활과 근무태도가 남달랐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넥타이를 하나 매면 다 떨어질 때까지 그것만 맨다. 와이셔츠도 빨아 입지 않아 늘 목 부위가 꼬질꼬질했다. 늘 혼자 다니고 식사도 구내식당에서 혼자 했다.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재에게서 나타나는 이상한 행동쯤으로 이해했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장가 안 가느냐’고 물으면 ‘마땅한 게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집에도 자주 가지 않았다. 여름에는 사무실 책상에서 잠자기도 했다. 남의 숙직을 대신 해주길 좋아했고. 그런데 일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다. 밤늦게까지 북한방송과 일본 NHK방송, 유엔방송을 들으면서 부지런히 받아 적곤 했다. 따라서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K씨는 윤씨의 정보력을 높게 평가했다. 이른바 ‘스폿 첩보’에 강했다는 것이다.

    “동료들한테 ‘정신이상자 아니냐’는 눈총을 받았지만 정보력 하나는 대단했다. 큰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 알아내고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탁월해 윗사람들이 자주 찾고 비밀리에 이용했다. 당시 외사과는 청와대에 ‘별보’를 제공했다. 보통은 결재라인을 거쳐 전달했지만, 때로는 청와대에 곧바로 보고하는 경우도 있어 ‘외사과 놈들은 희한한 놈들이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는 이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특히 권력층 관련 정보에 밝았다.”

    K씨는 12·12 쿠데타 당시 윤씨의 정보력을 보고 “FBI 특수요원으로 의심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날 윤 경위와 같이 숙직을 섰는데 중앙청 앞에 탱크 4대와 함께 백마 마크를 단 군인들이 보였다. 윤이 보더니 ‘신현확 잡으러 갔다’ ‘보안사가 다 잡아먹었다’고 했다. 나는 무슨 소린지 도통 몰랐다. 이모 외사과장이 탱크를 보더니 윤을 찾았다. 그 후 직원들을 네 차례 비상소집했다. 윤은 ‘전두환이 미군 첩보부대에 잡혀갔다’고 했다. ‘혁명 교섭’하러 갔다가 연금당했다는 것이다. 새벽이 되자 ‘전두환이 성공했다’고 말했다. ‘틀림없는 FBI 스파이’라고 생각한 나는 유모 부장한테 ‘이상한 놈이다. 사직동 특별수사대로 넘겨 조사해봐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런데 상부에서는 윤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윤의 정보보고가 정확하고 중정보다 빠르다고 했다.”

    윤씨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됐다는 K씨는 “예전에 윤이 ‘정부 부처마다 FBI 프락치가 두 명씩 있고 경찰에도 수십명 있다’고 했다”며 “윤의 정체를 알려면 국정원이나 검찰에서 특수요원을 동원해 집을 수색해봐야 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반면 외사과장 출신으로 경찰 고위직을 지낸 또 다른 K씨는 다소 상반된 얘기를 했다.

    “윤씨는 정보수집보다는 자료 수집, 컴퓨터에 능했다. 업무도 주로 그쪽이었다. 어쨌든 머리 하나는 명석했다.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인데, 보통사람과 좀 달랐다. 동료들과 대화도 별로 하지 않았고, 상식적이지 않은 얘기를 자주 했다. 망상이 있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 주변 사람들의 동정을 받았다.”

    윤씨의 상관이던 J씨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며 윤씨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 김대중 납치사건 ]

    1973년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김대중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외교 문제로 비화된 이 사건은 한국 정부의 은폐와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묵인으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2007년 국정원 진실위의 조사결과 중정 개입설은 공식적으로 확인됐으나 박정희 지시설 등 결정적인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진실위에 따르면 이 사건은 이후락 중정부장의 지시로 실행됐고 사건 이후 중정이 조직적으로 은폐했다. 진실위는 박정희 지시설에 대해서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최소한 묵시적 승인은 있었다”고 밝힘으로써 박정희의 책임을 거론했다.

    이 사건에 대한 윤씨의 견해는 이와 사뭇 다르다. 이후락이 김대중을 제거하려 한 것은 맞지만, 납치극은 중정 내 또 다른 실력자가 주도했다는 것. 또 박정희는 납치 지시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윤씨의 경찰 이력

    “비밀을 너무 많이 아니 내보내면 안 된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윤씨는 1959년 5월 군에 입대해 1962년 1월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 두 달 뒤 경기도 부평에 있는 경찰전문학교 36기로 입교했다. 대학 나와도 직장을 구하기 쉽지 않던 시절이라 경찰이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간부후보생 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순경을 택한 이유에 대해 윤씨는 “교육기간이 짧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순경 교육은 원래 2주 과정인데 도중에 5·16 박람회 경비에 동원되는 바람에 5개월로 늘어났다. 간부후보생 교육기간은 1년이었다.

    원래 윤씨가 희망한 부서는 수사과였다. 형사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교육기간 중 치른 시험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논문으로 1등을 차지하는 바람에 상부의 지시로 정보 부서로 배치됐다고 한다.1962년 8월 윤씨는 순경에 임용됐다. 상부에서는 500여 명의 수료생 중에서 영어 특기자 110명을 선발해 상위 10명은 치안국에, 나머지 100명은 미군부대 주변 경찰서나 지서로 보냈다.

    윤씨의 첫 근무지는 미군부대가 있는 동두천 주변 지서였다. 그곳에서 미군 헌병들과 합동근무를 했다. 3개월 후 서울시경 정보과 남대문 분실로 발령 받았다. 아사히·산케이신문 등 일본 신문과 해외 통신사 기자들의 동향을 감시하는 게 주요 임무였다. 5·16에 반대했던 전직 군 장성 감시도 맡았다.

    1963년 1월 남대문 분실이 남대문서 정보계로 바뀌었다. 석 달 뒤 윤씨는 서울시경 정보과 4계(외사계)로 옮겨갔다. 정보1계는 서무, 2계는 정보, 3계는 대공이었다. 치안본부의 전신인 치안국으로 발령 난 것은 1967년 11월. 소속은 외사 1계였다. 1계는 서무, 2계는 일본반, 3계는 구미반이었다. 1계는 내근직으로, 외근직인 2·3계 직원들이 수집해 온 정보를 분석하고 정리하는 게 주 업무였다. 나중에 과로 확대되면서 2과와 3과는 각각 정보, 수사로 바뀌었지만, 1과의 업무는 바뀌지 않았다. 정보를 취합하고 보고서를 작성한다고 해서 종합반이라고도 했다.

    윤씨가 경위로 승진한 것은 1969년. 이후 1994년 경찰청 외사관리관실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경위로 지냈다. 그 이유에 대해 윤씨는 “승진시험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승진시험을 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불합리한 승진제도에 대한 저항이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이에 대해 윤씨의 동료 K씨는 “그 사람은 아무런 하자가 없었지만 진급을 하지 못했다”며 “시험을 보지 않았으니 진급을 거부한 셈”이라고 윤씨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한때 그의 상관이던 또 다른 K씨는 “승진에 좀 문제가 있었다”라고만 언급했다.

    윤씨는 1974년부터 1980년까지 고유 업무 외에 외사정보보고서를 청와대로 발송하는 일을 했다고 밝혔다. 긴급을 요하는 경우엔 주간에 택시를 타고 가서 전달했다고도 했다. 또 자신만이 아는 ‘비밀 정보’를 전달할 때는 별도의 봉투에 담아 이를 공식 보고서가 든 봉투에 덧붙였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이 한 비밀작업은 청와대 관계자 외 누구도 몰랐다는 게 윤씨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경찰청 외사국(외사관리관실의 후신) 관계자는 “자신이 아는 내용을 구두로 전달할 수는 있겠지만 공식 보고서가 든 봉투에 다른 봉투를 첨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의문을 나타냈다.

    윤씨는 퇴직한 후에도 경찰에 남았다. 동료 K씨의 설명으로는 외사과에서 그를 “내보내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는 것. “비밀을 너무 많이 안다”는 이유에서였다. 윤씨의 신분은 일종의 비정규직인 연구관으로 바뀌어 외사2과(정보)에 근무했다.

    컴퓨터에 능숙한 윤씨는 그 무렵 한국통신의 인터넷서버가 다운된 사건을 해결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동료 K씨는 그 일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안기부도 검찰도 추적하지 못한 해커를 윤이 잡았다. ‘삼성 아니면 해결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어려운 사건이었다. 당시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다.”

    윤씨는 1995년 외사3과(수사) 산하 해커수사대가 창설되자 그쪽으로 옮겨갔다. 이후 해커수사 업무는 수사국으로 이관됐다. 명칭도 컴퓨터범죄수사대에 이어 사이버범죄수사대로 바뀌었다. 2000년엔 사이버테러대응센터로 확대 개편됐다.

    2005년 6월 윤씨는 경찰을 완전히 떠났다. 사표를 낸 이유가 별스럽다.

    “경찰청에서 임시직 인사 문제로 소동이 있었다. 젊은 여성들이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상황에서 출입하기가 면구스러웠다. 그래서 그만뒀다.”


    “HID 전용부두로 들어와”

    윤씨에 따르면, 이후락과 중정 내 이후락 지지세력은 김대중에 대한 박정희의 온건한 태도에 불만이었다. 어느 날 이후락 측근이라 할 만한 사람이 윤씨를 찾아와 김대중 문제를 상의했는데,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김대중을 죽여야겠다. 좋은 방법이 없겠나.”

    “미국에는 총기가 많으니 강도로 가장해 죽이면 되지 않나.”

    “FBI가 신변경호를 맡고 있다.”

    “살인전문가는 뒀다가 어디에 쓰냐. HID 출신을 활용하면 되지 않겠나.”

    30년 경력 전직 외사(外事)경찰관이 털어놓은 기밀정보 비화

    1973년 8월 중정에 의해 납치됐다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HID는 대북첩보·공작을 하던 육군첩보부대. 당시 중정에는 HID 소속 현역 군인들이 들어와 대북공작에 관여하고 있었다. 윤씨는 이후락 쪽과 이런 대화를 나눈 다음 곧바로 ‘별보’를 작성해 청와대에 전달했다고 한다. “총기 많은 미국은 위험하니 총기 없는 일본으로 김대중을 유인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다는 것이 윤씨의 주장이다.

    윤씨는 “박정희가 김대중을 납치해 죽이려 했다는 건 공상소설”이라고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내막이 있다”고 했다. 중정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김대중 납치극이 벌어졌을 뿐 납치팀은 김대중을 죽일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락이 ‘박정희 이후’를 계산해서 김대중을 죽이려 했던 건 사실이다. 이후락은 실제로 부하들에게 김대중 암살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후락을 견제하던 중정의 또 다른 간부가 한국으로 납치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중정부장을 노리던 이 간부는 이 일로 이후락이 곤경에 빠지기를 기대했다. 김대중이 납치됐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박정희는 이후락을 불러 호통을 치며 김대중을 안전하게 한국으로 데려올 것을 지시했다. 이후락은 자신이 한 짓이 있기에 아무런 변명도 못했다.”

    윤씨는 박정희가 이후락을 질책했다는 얘기의 근거에 대해 “경호실 주변에서 취득한 정보”라고 했다. 아울러 당시 김대중을 싣고 온 용금호의 국내 입항과정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남해안 모처의 HID 전용부두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 박정희, 야권 지도자에게 거액 제공 ]

    윤씨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 박정희는 청와대에서 야권 지도자와 만나 2억원을 전달했다. 반독재 투쟁을 하던 야권에 정치자금을 건넨 것은 북한에 대해 체제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즉 마르크스의 이론과 달리 아무리 과격시위를 해도 자본주의 사회인 남한은 공산화하지 않는다는 걸 북한에 보여주겠다는 의도에서 민주화투쟁 세력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야권 지도자에게 건네진 2억원은 중정에서 마련한 10만원짜리 국고수표 다발이었다고 한다. 윤씨의 증언이다.

    “국고수표는 사용 후 한국은행에 다 모인다. 일련번호와 이서(裏書) 때문에 돈의 이동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 중정에서 2억원 수표의 용처를 확인했는데 대부분 시위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하자 이렇게 한마디 했다고 한다. ‘사람은 청렴하군’.”

    “사람은 청렴하군”

    윤씨는 그날 회동에서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신라호텔에서 미 CIA 관계자와 나눴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호텔에서 국제행사가 있었는데, 행사가 끝난 다음 그와 따로 만나 두 사람의 회동에 대해 물어봤다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그에게 ‘박정희와 OOO의 대화를 녹취한 자료를 입수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웃으면서 ‘모른다’고 했다. 그 친구는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사실이지만 말하기 곤란한 경우에는 ‘노코멘트’라고 한다. 어떨 때는 씩 웃기만 한다. 그 친구의 태도로 봐 뭔가 알기는 알지만 답변하기 곤란하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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