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LG의 하나로통신 인수전 막전막후

‘명분’ 믿고 청와대 대시, 쉽게 가려다 ‘도루묵’

  • 글: 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3-08-22 1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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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G, 청와대에 2차례 보고서 제출 “구조조정 할 테니 8개항 지원해달라”
    • ‘통신 3강 당위성’ 삼성·SKT에 안 먹혀 LG 고위관계자, “이지 고우잉 반성”
    • ‘하나로’ 살리기인가, 데이콤 살리기인가 외자·SKT, 배짱 맞는 까닭
    LG의 하나로통신 인수전 막전막후
    지난 7월31일 서울 여의도 트윈타워. 정홍식 (주)LG 통신사업 총괄사장은 기자회견 중, 참석자들이 제 귀를 의심할 만한 폭탄선언을 했다. “하나로통신의 유상증자가 실패로 돌아가면 책임자로서 그룹에 통신사업 철수를 건의하겠다.”

    그로부터 5일 후 하나로통신 임시주총회장. LG그룹이 하나로통신 인수를 위해 추진한 유상증자안이 2, 3대 주주인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의 반대로 부결됐다. LG측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정사장은 그 날 오후부터 나흘 간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구본무 LG 회장은 정사장이 제출한 사표를 반려했다.

    그러나 두 달여간 계속된 LG의 하나로통신 인수 총력전을 지켜본 통신업계의 반응은 의외로 싸늘했다. “그럼 될 줄 알았나” “쉽게 빨리 가려다 큰 코 다쳤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주총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신 지금, LG 내부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명분 있으니 될 줄 알았다. 업계 현실을 잘 모른 채 이지 고우잉(easy going) 한 점에 대해 반성한다.” 인수전에 참가했던 한 고위관계자의 심경 토로다.

    그렇다면 LG가 ‘현실을 모른 채 이지 고우잉한’ 부분은 무엇인가. 업계 역학구도 분석에 바탕한 유효 전략 수립 대신, ‘국부유출’ ‘통신 3강 정책 실현’ 등 명분을 내세워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끌어내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점이다. 그러나 정통부는 LG안(案) 지지를 암시하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경쟁사들은 명분엔 아랑곳없이 각 사의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와 관련 ‘신동아’는 LG가 청와대에, 통신시장 구조조정 구상과 정부의 이해 및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린 사실을 확인했다. 보고서는 6월 중순 무렵과 7월31일, 2회에 걸쳐 제출된 것으로 보인다. 이 중 2차 보고서는 기자가 직접 그 실체와 보고 시점을 확인했다. 1차 보고서의 경우 관계자를 통해 상세한 내용을 전해들었다.



    정부에 ‘전폭적 지원’ 요청

    먼저 6월 중순경 제출된 것으로 보이는 A4 8장 분량의 보고서는 크게 ▲하나로통신 외자유치의 문제점 ▲외자유치의 대안 ▲정책 지원 요청 사안 등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당시 하나로통신은 유동성 문제 해결을 위해, 환란 위기 이후 단일기업으로는 최대 규모인 11억달러(약 1조3200억원) 외자 유치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로통신의 1대주주(15.88%)인 LG는 이를 맹렬히 반대했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헐값 매각’에 ‘국부 유출’이라는 것이었으나 속내는 달랐다. 외자유치가 성공할 경우 LG는 AIG-뉴브리지캐피탈컨소시엄에 1대 주주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는 곧 지난 3월 신윤식 회장 사퇴 후 유리하게 이끌어 온 하나로통신 경영권 장악 구상이 물거품이 됨을 의미했다. 보고서는 이런한 상황에 처한 LG가 요로에 자사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LG는 보고서에서 예의 외자유치 문제점을 적시한 후 대안으로 ‘선 구조조정, 후 외자유치’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로·데이콤 합병 후 이를 주축으로 두루넷·온세통신까지 합병, 후발주자 간 구조조정을 단행한 뒤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외자유치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에 성공할 경우 예상되는 추가 수익(5450억~8050억원)과 비용절감액(1050억~2180억원)도 명시했다.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8개항의 ‘정책 지원 요청 사안’이다. △휴대인터넷 서비스에 필수적인 2.3기가헤르츠(GHZ) 주파수 허가시 후발 사업자 우선 배려 △노조 등 이해 관계자들이 하나로·데이콤 간 합병을 지원할 수 있도록 여건 조성 △파워콤에 하나로·데이콤 통신망 매각 허용 △하나로·데이콤의 온세통신·두루넷 인수 시 합리적 조건으로 인수 가능토록 지원 △합병회사 증자 및 외자유치시까지 산업은행 등 하나로통신 주채권자들의 채권 일부를 롤 오버(만기연장)할 수 있도록 지원 등이다. 한마디로 LG는 후발사업자 합병에 있어, 정부에 전폭적이고 거의 전방위적인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7월3일, 하나로통신 외자유치안은 LG그룹의 반대로 부결됐다. 이후 LG는 5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안을 상정했다. 주당 2500원에 유상증자를 추진하되, 실권주 발행시 전량을 LG가 인수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렇게 되면 LG는 하나로통신의 명실상부한 대주주로서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2, 3대 주주인 삼성전자, SK텔레콤이 가만있지 않았다. 조건이 월등하게 유리한 외자유치안을 마다하고 유상증자를 밀어붙이는 것은, 싼값에 하나로통신을 인수해 LG그룹의 통신사업 부실을 해소하는 데 활용하려는 의도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국내 초고속통신망 시장의 27%를 차지하는 하나로통신은 외국자본의 남다른 구애를 받아온 몇 안 되는 한국 기업 중 하나다. LG로서는 얼마든지 ‘데이콤 망의 파워콤 매각으로 파워콤 인수 시 발생한 부채 해결→경영 사정이 어려운 데이콤과 하나로통신 합병→외자 유치 및 두루넷·온세통신 합병, 이 때 정부의 적극적 지원 요구→유무선통합사업자 변신→유무선 번들링 상품 개발로 매출 신장→기업가치 상승’의 시나리오를 그려볼 수 있는 상황이다.

    LG는 유상증자 실현을 위해 삼성전자, SK텔레콤을 상대로 다각도의 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또 한번의 청와대 보고를 계획했다. 증자안 처리를 6일 앞둔 7월30일, 정홍식 사장은 권오규 청와대 정책수석과 김태유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을 상대로, 유상증자의 당위성과 경제 효과, ‘선 증자 후 외자유치’의 장점, 외자유치 추진 상황 등을 보고했다. 아울러 도표를 통해, 하나로·데이콤·파워콤·두루넷 합병이 통신시장 경쟁체제 구축에 끼치는 긍정적 영향을 설명했다.그렇다면 LG는 청와대에 왜 이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을까. 대규모 사업구조조정을 앞둔 재벌그룹이 청와대에 그 배경과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오히려 관심을 끄는 것은 내용과 제출 시기다.첫째, LG는 외자유치가 국가적 화두로 부상한 마당에 1조원이 넘는 규모의 외자 유입을 ‘거부’한 배경에 대해 해명할 필요를 느꼈을 수 있다. 북핵 위기, 노사 문제 등으로 외자유치 성과가 미미한 가운데, 국가신인도 재고에 기여할 것이 분명한 대규모 거래를 LG가 방해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이에 대해 LG의 한 고위관계자는 “새 정부 들어 외자유치가 유난히 강조되고 있다. 진대제 정통부 장관도 외자유치에 남다른 관심이 있다는 말을 듣고 뜨끔했다”고 말했다.

    둘째, 청와대 또는 정통부의 측면 지원을 바랐을 가능성이다. LG가 들고 나온 ‘통신 3강’ 안은 양승택 전 장관 이후 정통부의 기본 정책인양 인식돼 왔다. 그런 만큼 정통부가 ‘보이지 않는 손’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을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은 LG가 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정통부가 공개적으로 “하나로통신 문제는 유상증자가 성공하건 실패하건 전적으로 LG 책임이며 정통부는 중립을 지키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LG의 한 임원은 “정통부의 태도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마지막으로, 유상증자에 성공한다 해도 정부의 전폭적 지원 없이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KT의 한 임원은 “하나로통신과 데이콤을 순조롭게 합병한다 해도 설비 투자, 두루넷 인수 등을 위해서는 2조~3조 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LG는 그만한 자금력이 없다. 외자유치 또한 데이콤 합병·경영권 유지 등을 조건으로 내건 만큼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LG가 이것저것 모아 대형사업자가 된 후, 부실화에 따른 국가경제 부담을 명분으로 정부에 과도한 정책적 지원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한편 LG측은 “SK텔레콤, 삼성전자 등의 설득을 위해서도 나름대로 노력했다. SK텔레콤에는 유·무선 번들링에서 불이익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삼성전자에는 좋은 값에 보유 주식을 살 뜻이 있음을 전달했다. 삼성의 경우 먼저 매수를 제안해 놓고 이사회에서 거부해 버렸다. 그래도 우리는 표결에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질 줄 알았다. 명분, 국익, 하나로통신의 이익에 모두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업계의 시각은 다르다. “이왕 5000억원을 투자할 작정이라면 우선 3000억원 정도를 들여 전환사채를 발행하는 식의 과감한 투자가 선행됐어야 한다. 아니면 주식시장에서 1.5~2%의 지분만 더 확보했어도 유상증자안은 무난히 통과됐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LG가 너무 싼 값에 하나로통신을 가져가려 한 것”이라는 비판이다. 한 통신사의 전직 CEO는 “LG는 ‘워스트 케이스’를 기준 삼아야 한다는 비즈니스의 기본상식을 간과했다. 삼성은 그룹 간 경쟁의식 때문에, SK텔레콤은 유무선 통합사업자 등장에 대한 경계의식 때문에 설득이 쉽지 않은 만큼 ‘경영권 프리미엄’을 지불할 각오로 뛰어들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제 LG의 하나로통신 인수전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LG는 새로이 태스크포스를 꾸리는 등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외자유치-유상증자에 이은 ‘3라운드’는 다시 외자유치 건이다. LG의 ‘반란’은 하나로통신에 외자 아닌 대안도 있을 수 있음을 공표한 점에서 유치 협상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외자유치는 하나로통신이 ‘중립’을 지키기를 바라는 SK텔레콤이나 KT의 이해에도 부합한다. 이와 관련 SK텔레콤은 AIG측에 “향후 유무선 번들링 상품을 판매함에 있어, 하나로통신이 독립경영을 유지해야만 LG뿐 아니라 SK텔레콤과의 제휴도 가능해진다”는 뜻을 전달했다 한다. 경영권 확보를 노리는 LG와는 전혀 다른 관점이다. SK텔레콤은 AIG를 비롯한 외자의 ‘1대 주주(LG) 우선매수권 불인정’에도 이해를 같이 한다. 훗날 외자가 지분을 정리하려 할 경우 LG는, 관례상 당연히 1대 주주인 자사에 우선매수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외자측은 더 높은 가격을 쳐줄 매수자를 찾기 위해, SK텔레콤은 하나로통신의 주인이 될 길을 열어두기 위해 ‘불인정’을 선호하고 있다.

    이제야말로 LG는 제대로 맥을 짚어낼 수 있을 것인가. 총수의 ‘결단’과 치밀한 전략 수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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